삼국유사 [三國遺事]
고려 충렬왕 때의 고승 일연(一然)이 엮은 사서(史書). 일연은 고려 후기 무신의 난 이후 원(元)나라의 억압에 의한 문화적 위기의식에서 당시의 기록과 역사의 정리를 꾀하여 단군의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는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세웠다. 《삼국유사》의 체재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9편은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 및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불상에 관한 31항목이 들어 있고,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마지막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저자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며, 1310년대에 제자 무극(無極)이 간행하였으나,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는 고판본의 인본(印本)인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남아 있다. 석남본은 왕력과 제 1 권만 남은 잔본이며, 송은본은 권3·4·5만 있으며, 이 가운데서도 권 3 의 첫 6장과 권 5 의 끝 4장이 누락되어 있는데 보물 제4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도 한다. 이 본의 책끝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이계복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으며, 중종임신본을 인행(印行)한 몇 종의 간행본이 국내외에 전한다. 최근 이 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면서 간행과 유통이 활발해졌다. 일제강점기에 원형의 크기로 영인한 고전간행회본과 조선사학회본, 도쿄[東京]제국대학 문과대학 사법총서본, 계명구락부간본 외에 광복 후의 삼중당 발행본이 있으며 번역본도 몇 가지 있다. 이 책은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古記)를 원형대로 모아 기록한 데 특색이 있으며, 이 밖에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사지(寺誌)·비갈(碑碣)·안첩(按牒) 등의 고문적(古文籍)에 이르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었다. 또한 차자표기(借字表記)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吏讀)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균여전(均如傳)》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전적에는 전하지 않는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 국문학연구에 필수적인 귀중한 자료이다. 5권 2책. 규장각도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비교
삼국유사 : 일연
살아가면서 가끔은 남과 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남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갖고 자랑하고 싶을 때도 있다.특히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우리’라는 집단에 관한 문제가 되면 더욱 그렇다.일찍부터 자본주의 길을 걸어온 서구 사회의 상업주의 문화 앞에서 어쩐지 위축되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우리도 장구한 역사와 화려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마음만은 풍족하게 살아온 민족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그러나 막상 무엇이 우리 것인가라고 말할라치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국가간의 교류가 활발한 시대에서는 문화의 고유성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서양과도 확실히 다르고 중국과도 다른 우리의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역사의 어디까지 올라가야 순수한 우리만의 숨결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나가는 길에서 처음 만나야 하는 책이 바로 삼국유사다.
○ 역사·문학·철학 집대성
삼국유사 속에는 우리 민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책을 읽다보면 언젠가 할머니에게서 한번쯤 들었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들은 적은 없지만 구절구절이 낯설지가 않다.그래서 삼국유사는 겨울 삭풍이 문풍지를 세차게 울리는 한밤중에 읽는 것이 좋다.온돌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흙벽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삼국유사가 주는 신비감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우리 민족이 먼 옛날 도읍을 정하고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녀 왔던 심성과 습속(習俗)이 행간마다 배어 있다.그래서 나는 삼국유사를 삼국사기와 비교하여 야사(野史)쯤으로 취급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단순히 그 이전 시대를 기록한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1145년)가 편찬되고 난 1백40년 뒤에 또 다시 단지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30여년이나 넘게 집필에 몰두했을 리 만무하며,이 다섯 권의 책에서 인용한 고서들이 삼국사기 50권의 그것보다 더 많은 점,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고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단순한 역사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다양한 측면의 접근이 가능한 복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책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신비주의적 상징을 고려한다면 서사 문학에 가깝고,문화와 사회질서가 한데 어우러져 있고 등장인물도 귀족으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각 편의 주제도 국가의 탄생 신화로부터 개인의 효행에 이르기까지 두루 걸쳐 있는 것으로 보면 계몽서로서의 성격도 강하다.
○ 신비와 상징속의 메시지
이 책을 겉만 훑고 지나가면 허무맹랑하고 비과학적이며,비현실적인 옛날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당시 한 나라의 국사(國師)에 까지 오른 일연(一然)이 재미있는 이야기 책을 만들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이에 몰두했을 성 싶지는 않다.사실 이 책이 전반적으로 신성하고 기이한 이야기들로 포장을 씌운 것은 치밀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고증이나 세상사의 숭고한 가치들을 흥미있는 이야기로 녹여내면서도 그 속에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힘들고 괴로울 때 자연스럽게 초월적인 힘을 갈구하게 되는데,삼국유사가 전편에 걸쳐 이러한 신비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암울한 사회 현실을 고려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인간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묶을 수 있는 방법은 동일한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판이나 토론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를 생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자발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강렬한 동기를 부여한다.종교가 믿음의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요,관습이나 도덕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기원을 단군이라고 하는 신화적 존재로 묘사하여 중국의 시조인 요(堯)와 대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으며,이는 삼국의 건국 신화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역시 천우신조 때문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자연스러운 믿음의 체계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신비적인 신념만으로 존재하도록 두지 않고,이를 자연스럽게 불교와 연결지었다.보다 체계화된 신념이라야 황폐화된 민중의 마음을 붙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고,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불교적 신앙만이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역사 기술을 통해 얻은 신비적 자긍심을 자연스럽게 불교에 연결시키면 이를 종교로서가 아니고 생활로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리라.그래서 행하라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초월적인 세계를 연결지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신비적인 믿음을 현실화하고자 한 것이다.
○ 배달민족 후예와의 만남
그래서 이 상징으로 가득찬 포장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곳에는 순박하고 지혜롭고 헌신적이면서도 불굴의 용기로 가득한 배달 민족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다.
웅녀는 우직함과 끈기로 국조 단군을 탄생시켰으며,주몽은 그 용맹으로 광대한 영토의 개척자로서 말을 타고 우리를 향해 달려 온다.볼모로 일본에 간 김제상은 끝까지 지조를 지키다 죽어가고,그의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며 날마다 치술령 고개에 올라가 통곡하다가 죽는 비장한 숭고함도 살아 있다.
사랑으로 사라진 해와 달도 다시 찾은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며,미래에 대한 혜안을 가진 선덕여왕,아랫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인간애를 보여준 죽지랑의 이야기는 노래로 칭송되어 오늘까지 전해 온다.
경덕왕은 충담에게 백성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달라고 하여 경천애민이 중국으로 들어온 군주의 덕목이 아님을 보여주고,하얀 피를 뿌려가며 죽어간 이차돈의 순교는 고귀한 희생 정신의 원형을 재연해 주고 있다.처용의 달관적 자세는 훗날 도래할 유교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으며,구도자의 자세를 포기하면서까지 처녀를 도운 노힐부득의 이야기는 종교 이전에 휴머니즘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몽고군의 침략 앞에서 낙산사 보주(寶珠)를 지킨 절의 노비인 걸승의 이야기와 군중의 목소리로 수로부인을 구한 일화 등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평민들의 활약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민중에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호랑이를 감복시킨 김현의 보은 정신과 전생의 부모와 이승의 부모에게 효도한 대성의 이야기,부모를 위해 자식을 묻으려한 손순의 효성은 삶이 지향해야 할 기본적 질서를 명시해 준다.
5권9편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내용을 이 짧은 글 속에 어찌 다 옮길 수 있으랴마는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가 아닌 우리 미래의 희망을 읽어낼 수 있으며,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온 우리들 가슴 속 저 심연의 따뜻한 마음들을 불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 김부식
민족 반역의 역사가, 김부식
고려 중기 예종, 인종 때의 정치가, 문신, 학자였다. 12세기 초엽의 대륙의 정세는 거란을 멸망시킨 탕구 만주의 금나라(1114∼1234년)가 송의 수도 변경(邊京=북송의 서울. 현재의 하 남성 개봉)을 위협하면서 고려에 대하여 사대(事大)를 요구하는 시대상황이었고, 국내 정세 는 반역자 이자겸 일당을 물리치는 데 공이 있는 서경파 정지상(鄭知常) 등이 세력을 얻게 되어 서경을 중심으로 고려의 정치세력 판도를 바꾸어보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을 때였다.
이른바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와 사대주의에 대응한 자주국으로서의 칭제건원(稱帝建元)으로 금(金)나라나 송(宋)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펼 때 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이론은 당시 전통사상을 대표하는 유학자들과 금나라에 대한 사대관 계를 기정사실로 인정하려는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인 유학파 김부식(金富軾)의 반대로 좌 절을 겪게 되고 결국 묘청의 반란으로 이어져 1135년(인종13년) 묘청은 평양을 근거지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로 하는 독립정부를 세워 개경세력과 일전을 겨루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개경파의 거두인 사대주의 학자 김부식은 이때 평서원수(平西元帥)로서 난을 진압, 개경유학 파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처럼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자주적 의식을 표현했 던 혁신운동은 실패하게 되고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 등 사대주의 관료는 전제정치를 강화하 는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1138년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한 김부식은 집현전 태 학사(集賢殿太學士) 태자대사(太子大師)의 직을 겸했으나 1142년에 벼슬을 물러나자 동덕찬 화공신(同德贊化功臣)이 되었다.
1145년(인종23년) 현존하는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책 50권의 편찬을 끝냈으며, 1146년에 의종이 즉위하자 좥인종실록(仁宗實錄)좦의 편찬을 주재했다. 사대주의 자로서 1126년(인종4년) 송나라가 금나라의 협공을 요청했을 때와 그뒤 1129년 묘청의 칭제 건원을 반대하였다.
고려시대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중국 중심의 事大的 사고 방식이 지배적인데, 예를 들면<삼국사기>권5 진덕여왕 5년조에서 신라가 중국에 대해 사대 를 하는 나라로서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며
"논하여 가로되 하,은,주에서 정삭을 고치고 후세에 연호를 쓰는 것은 통일을 크게 하고, 백성의 눈귀를 새롭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러므로 때를 틈타 함께 일어나서 천하를 다툰다든지 또는 간웅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천자의 지위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면,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서 속한 편방 소국이 속으로 중국을 섬길 뜻이 있었던 듯하여 공물도 올리고 그 도를 구하였는 데도 법흥왕은 스스로 연호를 사용했으니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 후에도 그 잘못되고 그릇됨을 되풀이 하여 여러 해를 지냈었다. 당태종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서야 비로소 당의 연호를 받들어 쓰게 되니 이것이 비록 부득이 한 데서 나왔다 할지라도 문득 허물이 있어 능히 고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라고 사대 망민족적인 주석을 달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고구려의 멸망은 수, 당에 대한 불순한 태도 때문 이라고 하였다. 또한 백제도 선린우호를 하지 않고 전쟁을 일삼 아 대국에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지었다고 논하였다 이른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정사(正史)라고 알려진 사서(史 書)에 나오는 내용이 그러한 것들이다.
물론 삼국사기가, 사대모화를 표상으로 삼고 중요정책으로 자 리 잡았던 조선시대에 나온 사서들에 비하면 자주성이 뛰어난 글 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다.
고려가 세워질때,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하며 옛땅을 되찾고자하는 북진정책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자주적인 국가였다. 허나 세월이 흐르며, 나태해진 문벌귀족들에 의해 고려가 썩어 가기 시작하였고, 그중 민족자존을 부르짖던 묘청일파는 그들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당시 사대주의에 대표격인 김부식 일파에 의해 묘청 의 난은 진압이 되었다.
이때부터 고려는 위상을 잃어버린체, 사대적인 국가로 변모해 갔고, 조선에 이르며 모화사대 사상은 극에 이르르게 되어 모화 사대에 반하는 발언을 할 경우 참형을 당하는 경우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치며 모화사대에, 식민지 사관까지. 우리는 구백여년 가까이, 우리 민족의 위상을 잊어버리고 살아왔 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환국(桓國), 배달국(培達國), 왕검조선(王儉朝鮮)에 관한 내용이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湜)님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올리는 글에서 ".....고기(古記)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서투르며 사적(史蹟)이 빠지고 없어지고 한지라......" 라는 문구로 보아 해동고기(海東古記) 119권을 분명히 보았을 것인데도 우리민족의 역사를 적음에 있어 고기의 글이 거칠다는 등의 이유로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역사는 짓지 않고,삼국시대 역사만 지었다.
삼국의 역사를 지음에 있어서도 고구려는 고주몽(高朱蒙) 이후 고구려 역사만 적었다. 즉 고구려는 B.C 239년에 해모수(解慕漱)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역사 6대 200여 년이 빠지고 고주몽 재위 때인 B.C 37년부터 적혀 있다. 그리고 백제는 구태 백제와 왜가 동일세력이었다는 이유로 구태백제가 해외로 진출한 역사 즉 구태백제가 대마도, 일본열도, 만주남부지방, 중국의 동부.중부지방으로 진출한 역사는 백제본기에서 누락시키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구태백제 역사는 온조백제 역사인 것처럼 적어 온조백제 위주로 적었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만 읽은 사람들은 고구려(高九黎) 4세 고두막(高豆莫) 단제 일명 동명왕(東明王)과 (고주몽)고구려 시조(始祖) 고주몽(高朱蒙) 일명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였고, 전한서(前漢書) 등 중국의 사서에 고구려가 B.C 37년 이전에 왜 나오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 송서(宋書), 남제서(男濟書) 등 중국의 사서에서 요서(遼西)와 중국의 동부 중부 지방에서 백제의 군(郡)이 왜 나오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김부식님이 삼국시대 이전 우리민족의 역사와 고주몽 이전 고구려의 역사를 적지 않은 것은, 고기(古記)에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왕검조선(王儉朝鮮), 고구려(高九黎)가 모두 만주(滿洲)를 근거지로 한 나라로 적혀 있었고, 한반도(韓半島)는 만주(滿州)를 근거지로 한 나라의 비왕(裨王)이 다스리는 지역 또는 변방(邊方) 지역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를 지은 고려 때는 만주에 근거지를 둔 강국(强國) 금(金)나라가 단군(檀君)의 후예(後裔)임을 자칭[단군의 후예라서 탄군스,탄구스,탕구스라고 불림]하며 백두산을 금(金)나라가 발상한 영산(靈山)으로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에 근거지를 둔 고려왕조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수도(首都)를 둔 신라, 백제, (고주몽)고구려의 역사만 적었다.
만약 김부식이 금(金)나라의 사서 검열에도 불구하고 만주를 주 근거지로 한 환국(桓國), 배달국(培達國), 왕검조선(王儉朝鮮), 고구려(高九黎:일명 북부여)의 역사를 적었다가는 금(金)나라의 노여움을 싸서 전란(戰亂)에 휩싸였을 것이다.
강대국(强大國)의 비위를 거슬릴 염려가 있는 부분은 본기(本紀)에 적지 않거나 은유법(隱喩法)으로 적었다. 즉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와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를 복속(服屬)시키고 중국의 동부(東部) 지방과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한 사실 및 백제가 요서(遼西)와 중국의 동부(東部) 지방으로 진출한 사실과 대마도와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와 가야(加耶) 일부 지역을 복속(服屬)시킨 사실은 본기(本紀)에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신라보다 몇 배나 활동이 왕성(旺盛)했던 백제의 본기가 신라본기의 약 35%, 고구려의 본기가 신라본기의 약 60% 밖에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최치원편을 보면, 孤雲 崔致遠은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던 신라 47대 헌강왕 원년에 출생하였다. 羅末麗初라는 불안한 시대적 상황의 이 시기에 활동한 고운은 신라말 최대의 학자이며 문장가로서 높이 추앙되고 있다. 그의 생애중 활동기는 대부분 관직에서 지냈으므로 주요 활동무대는 정치적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詩文, 讚.記.表 등의 수많은 작품들은 문학.역사.철학.종교 등의 다방면에 걸쳐 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상 속에는 동양의 전통적 삼교인 유.불.선의 사상이 원융무애하게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김부식이 {三國史記}를 쓰면서 최치원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김부식 개인이 당시의 事大派의 거장으로서 그의 내면을 흐르는 사상인 모화사상 내지는 중화사상과 그의 사관이 중국 사상에 심취한 최치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추론을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천문 관측 기록을 수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에 첨성대에 관한 한 마디의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러한 의심을 증폭시킨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유학자 김부식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첨성대가 유학과는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다른 사상 체계의 상징물이었기 때문이 누락시켰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첨성대의 모습이 불교의 이상형을 그려낸 수미산의 모습과 유사하고 유학자였던 김부식이 불교의 조형물인 첨성대를 곱게 보지 않았던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첨성대 자체가 불교에 심취했던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된 건물이어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렇게 하여 첨성대를 두고, "별을 바라다보는 건축물"이라는 주장과 직접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다기보다는 도리어 불교의 영향 아래, 하늘에 제사지내는 종교 제단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는 크게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실질적인 기능을 담당했는가의 여부가 가장 큰 것이라고 할수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인가 아니면 종교적 제단인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선덕여왕 2년(633)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고 조선말기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선덕여왕 16년(647)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구체적인 연도까지 기록하고 있지만 이들 책들이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 연도를 표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도 첨성대가 구조면에서 약간 의심되는 면이 있다고 의문을 표시하였으면서도, 그것이 천문대라고 보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셉니담(J.Needham)이 펴낸 [중국과학기술사](1953)라는 책에서 경주의 첨성대를 당나라 천문대의 구조를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첨성대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그 사실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70터 일부 학자들이 첨성대가 구조 면에서 천문대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시 시작했다. 즉 첨성대 중간에 있는 창문이 과연 천문을 관측하는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출입구로 적당한가가 주된 의문점이었다
사실 위 문제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의견을 보고 있지 못하는 미해결의 문제이다.
어느 나라나 시절이든 어려운 때가 있는 법이다. 더러는 흥망의 기로에 서기도 하고,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19C를 거쳐 20C에 접어들면서 조선이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근대화된 강한 조국을 꿈꾸면서 온몸을 던져 노력했던 개척자적인 삶을 살다간 이도 적지 않다. 단재 신채호(1880 - 1936)는 이러한 시절을 살면서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영광의 우리 과거와 그를 통한 미래에의 가능성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선가의 인물을 찾아내는 한편 선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세우고자 했다.
그는 1897년 성균관에 입학하면서부터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개화파로 불린 선가들과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 함께 활동하는 한편 독서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사상과 학문도 흡수했다. 25살이 되는 해에는 보다 적극적인 현실에의 참여이자 실천의 방편으로 언론인의 길을 선택했고 언론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를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한편「신민회」등의 이론적 토대도 마련했다. 신화시대-조선-부여-고구려에서 고려에 이르는 역사를 한민족의 관점에서, 한민족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려나가는 한편 특히 을지문덕-이순신 등 선가의 인물 및 승리와 영광의 역사를 중히 했다.
또한 광개토대제비-고려진(高麗鎭. 북경 안정문 30㎞ 밖에 있음) 등 한민족의 옛 유적을 직접 답사하여 사실성을 한층 높인 생생한 기록을 남기는데도 남달랐다. '집안현 현지를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그의 말은 진정한 실증학자의 자세이기도 하다. 한때 현실참여에 몰두했고 사회운동가-혁명가로서의 면모를 보인 적도 있으나 1928년이후 그는 본래의 사학자로써의 본분에 더욱 전념했다. 특히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등을 저술하거나 연재하여 스스로 한치의 양심에도 벗어나지 않는 진실과 기록에 바탕하는 한민족의 모습을 남겼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물론 언론인-혁명가-민족주의자 등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역사」라는 도구를 통해 한민족을 깨우친 '사학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 스스로는 몰랐지만 - 선가의 한 사람이다.
<천부경>은 우주 본체의 원리를 설한 경이고, <삼일신고>는 심신 수련 방법을 설한 경인데, 아득한 상고 시대부터 내려오던 선법(仙法), 즉 '선도(仙道)'는 고구려 시대의 조의선인(早衣仙人), 신라 시대의 화랑도(花郞徒), 고려 시대의 재가화상(在家和尙) 제도로서 전해 내려오다가 고려 인종 때 몽고 병란과 묘청의 난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유학파이자 사대주의자인 김부식 일파에게 '선도'와 불교파인 묘청에게 승리한 김부식은 선도 세력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각종 선서(仙書)를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오늘날 일부 사학자들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왜곡 저술하여 민족혼과 정기를 말살시켰으며, 사대주의 사상을 개척하는 데 일등 고신(?) 역할을 했다." 라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과언은 아닌 듯싶다.
선도가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했던 부분을 역사적으로 좀더 고찰해 보자. <한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편에는 "삼일신고 (三一神誥) (삼일신고는 본래 신시 개천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삼일신고의 내용 중 '선도'와 관련 있는 핵심적인 단어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감·조식·금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구분 : 목판본
저자 : 이행, 홍언필
시대 : 조선 중기(1530)
목판본. 55권 25책. 조선은 건국 후 통치상의 필요에서 지리지 편찬의 중요성을 통감, 세종의 명에 따라 맹사성(孟思誠) ·신색(申檣) 등이 1432년(세종 14)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였다. 그 후 명나라에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들어오자, 양성지(梁誠之)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등이 성종의 명으로 이 체제를 본따고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1481년(성종 12)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완성하였다. 이를 다시 1486년에 증산(增刪) ·수정하여 《동국여지승람》 35권을 간행하고, 1499년(연산군 5)의 개수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의 증보에 의해 이 책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내용은 권1∼2는 경도(京都), 권3은 한성(漢城), 권4∼5는 개성(開城),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로 되어 있다. 책머리에 그 도의 전도(全圖)를 싣고 이어 연혁(沿革) ·풍속(風俗) ·묘사(廟社) ·능침(陵寢) ·궁궐 ·관부(官府) ·학교 ·토산(土産) ·효자 ·열녀 ·성곽 ·산천 ·누정(樓亭) ·사사(寺社) ·역원(驛院) ·교량 ·명현(名賢)의 사적, 시인의 제영(題詠) 등을 실었다. 이어서 이행 등의 진전문(進箋文), 서거정 등의 서문이 있으며, 책끝에 김종직(金宗直) 등의 발문이 있다. 역대 지리지 중 가장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서 정치사 ·제도사의 연구는 물론, 특히 향토사 연구에도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06년(광무 10) 일본인 후치카미[淵上貞助]가 서울에서 활판본으로 간행한 데 이어, 12년에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역시 활판으로 간행하였고, 1958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다.
대장경 [大藏經]
불교경전(經典)의 총서(叢書).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藏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약칭한다. 대승(大乘) ·소승(小乘)의 삼장(三藏), 곧 석가의 설법을 기록한 경장(經藏), 교단(敎團)의 계율 및 그것을 해설한 율장(律藏), 경(經)의 주석문헌(注釋文獻)인 논장(論藏)을 집대성한 불교의 대경전이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석가뿐만 아니라 그 제자를 비롯하여 인도 ·중국 등지의 제조사(諸祖師) ·고승(高僧)들이 남긴 저서 ·문헌들도 이에 포함하게 되었다.
‘장(藏)’이란 산스크리트[梵語] 피타카(pitaka:광주리)에서 연유하여 문서 ·교의(敎義)를 담는다는 뜻이며, ‘경(經)’은 수트라(stra)에서 연유하여 날실[經絲]을 의미한다. 불교경전의 결집(結集)은 석가 입멸(入滅) 후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결집되었다. 따라서 이를 분류할 때는 9분교(九分敎) ·12부경(十二部經) ·사아함(四阿含) ·5니카야[部] 등의 분류술어(術語)를 사용한다.
언어별 종류로는 산스크리트 ·팔리어[巴利語] ·한역(漢譯) ·티베트[西藏] 장경 외에 한역서와 서장 장경을 번역한 몽골 ·만주장경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완비되고 양으로나 질로 우수한 것은 한역장경이다. 또한 한국에서 개판(開版:印刷)한 대장경에는 1011년(현종 2)의 초판 고본(初版古本)과 1091년(선종 8) 이후 간행된 《속대장경(續大藏經)》이 있다. 이들 제1차 간행 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1236년(고종 23)에 시작하여 1251년(고종 38)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고려본 대장경인데, 장판(藏版) 8만 1258장 가운데 6,589권이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다.
온달 [溫達, ? ~ 590]
고구려의 장군.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에 따르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얼굴이 우습게 생겨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은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하여 놀리느라고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겠다’고 항상 말하였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할 수 없다’고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
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 되면 왕이 신하 및 병사들과 더불어 사냥을 하였는데 온달의 말타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잡는 짐승도 많아서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묻고 놀랐다. 그 때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니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 590년(영양왕 1)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회복하겠다고 출정을 자원하여 신라군과 아차산성(阿且山城: 서울 광나루 북쪽 峨嵯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명심보감 [明心寶鑑]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秋適)이 금언(金言), 명구(名句)를 모아 놓은 책.
구분 : 필사본, 규장각도서
저자 : 추적(秋適)
시대 : 고려(충렬왕)
소장 :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도서
1권 1책. 필사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장각도서. 원래 19편으로 되어 있다. 후에 어떤 학자가 증보(增補), 팔반가(八反歌), 효행(孝行), 염의(廉義), 권학(勸學) 등 5편을 더하였다. 각 편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금언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제1편은 계선편(繼善篇)이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공자의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천명(天命), 순명(順命), 효행, 정기(正己), 안분(安分), 존심(存心), 계성(戒性), 근학(勤學), 훈자(訓子),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 안의(安義), 준례(遵禮), 언어(言語), 교우(交友), 부행편(婦行篇)이 있다. 이 책은 하늘의 밝은 섭리를 설명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인간 본연의 양심을 보존함으로써 숭고한 인격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서언과 내용
◆ 차례
1. 선악구별과 선행을 하게 한 계선편(繼善篇) …………………………10장
2. 하늘의 명을 따르는 천명편(天命篇)…………………………………… 7장
3. 타고난 운명에 순종하는 순명편(順命篇)……………………………… 5장
4.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효행편(孝行編)……………………………………6장
5. 자기자신의 행실을 바로잡는 정기편(正己篇)……………………… 26장
6. 주어진 분수를 지키는 안분편(安分篇)………………………………… 7장
7. 바른 마음을 가지는 존심편(存心篇)……………………………………20장
8. 성품을 경계하는 계성편(戒性篇)……………………………………… 10장
9. 학문을 권고하는 근학편(勤學篇)……………………………………… 8장
10. 자녀를 가르치는 훈자편(訓子篇)……………………………………… 11장
11. 마음가짐을 반성하는 성심편상(省心篇上)-1 …………………………27장
마음가짐을 반성하는 성심편상(省心篇上)-2 …………………………28장
12. 마음가짐을 반성하는 성심편(省心篇下) ………………………………35장
13. 가정교육의 법도를 세우는 입교편(立敎篇)……………………………13장
14. 나라의 정사를 다스리는 치정편(治政篇)……………………………… 8장
15. 가정을 다스리는 치가편(治家篇)…………………………………………8편
16. 의리를 지키는 안의편(安義篇)………………………………………… 3장
17. 예절을 지키는 준례편(遵禮篇)………………………………………… 7장
18. 말을 삼가는 언어편(言語篇)………………………………………………7장
19. 좋은 벗을 사귀는 교우편(交友篇)……………………………………… 8장
20. 부녀의 행실을 바로잡는 부행편(婦行篇)……………………………… 5장
소계 20편 ……………………………… …………………………… 259장
21. 누군가가 덧붙인 증보편(增補篇)…………………………………………7장
22. 여덟가지 반성하는 노래인 팔반가(八反歌) ……………………………5장
23. 효도하는 사실을 적은 속효행편(續孝行篇) ……………………………3장
24. 청렴한 행실을 적은 염의편(廉義篇) ……………………………………3장
총계 24편 ………………………………………………………………277장
▼명심보감(明心寶鑑)
1. 서언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동양의 여러 고전 중에서도, 특히 고금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폭넓게 읽혀진 책의 하나이다.
명심보감이 담고 있는, 수천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자연과 인생에 대한 격조높은 생활철학은 어느 것 하나 동양정신의 향기로운 진수를 간직하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 앞에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돌라보고 아픈 반성과 자기 성찰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가치부재의 혼돈에서 벗어나 참된 삶의 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명심보감은 말 그대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추어 주는 보배로운 거울과 같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 거울에 대체 어떤 것들이 비추어져 있고 또 비추어볼 수 있는 것일까? 명심보감은 인생의 수신서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도 생활적인 지침에서부터 올바른 처세를 위한 여러 경구들, 행동의 좌우명, 그밖에 인생의 지혜가 될 만한 말씀들을 다양하게 수록해 놓고 있다. 그 경구나 일화가 수록된 인물과 서책도 다채로와서 오히려 어떤 일정한 체계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유교사상과 도교사상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2. 내용
명심보감의 초약본은 고려 시대의 문신(文臣) 추적 (秋適)선생이 동몽(童蒙)들을 위하여 고전에서 귀감이 될 만한 문구들을 발췌 편집된 책이다. 명심보감은 도덕적으로 사람의 심신 수양에 알맞는 말과 행실을 성현들이 남긴 책 곧 경사자집(經史字集)에 서 뽑아 엮은 것이다. 그 내용은 위의 차례와 같다.
인용된 글귀들 역시 기원전의 까마득한 책에서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물론 후대에 더 첨가되어 조선시대의 글까지 있지만) 시기적으로도 다양하며, 내용도 또한 유가(儒家)에만 국한하지 않고 유불선(儒佛仙)의 복합된 사상까지 망라되어 있어 동양인의 정신 세계를 느낄 수 있는 훌륭한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의 교양서로서 한번쯤은 반드시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본다. 이 책은 하늘의 밝은 섭리를 설명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인간 본연의 양심을 보존함으로써 숭고한 인격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계선편(繼善篇)
계선편은 선(善)에 관한 여러 경구들로 구성되어 있는 일종의 선행록이다. 계선(繼善)이란 쉽게 풀이하면 끊이지 않고 선을 이어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악을 행하기는 쉬워도 끊임없이 선을 행하려면 노력이 필요한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명심보감의 편자도 이 계선편을 첫장에 놓음으로써 행하기 힘든 선에의 의지를 독려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은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다.
1
자왈, 위선자 천보지이복 위불선자 천보지이화
原文: 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福)으로 갚고, 불선(不善)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禍)로서 갚느니라.
字義: ○子는 남자에 대한 통칭(通稱)이다. 특히 子라고만 할 때는 주지하다시피 공자(孔子)를 지칭한 다. ○報는 갚을 보. 報恩(보은), 報復(보복), 報答(보답)
2
한소열 장종 칙후주왈 물이악소이위지 물이선소이불위
原文: 漢昭烈이 將終에 勅後主曰 勿以惡小而爲之하고 勿以善小而不爲하라.
해석: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가 장차 죽음에 이르러, 후주(後主)를 조칙(操勅)하여 이르셨다. 악(惡)이 적다고 하여 해서는 안되며, 선(善)이 적다고 하여 안해서는 안되느니라.
字義: ○昭烈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황제가 된 후의 칭호이다. ○將은 "장차 장"으로 미래 시제. 將次(장차), 將來(장래). ○終은 "마칠 종"으로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臨終(임종). ○勅(칙)은 "조칙(操勅)하다"는 의미로, 당부하다, 경계하여 타이른다는 뜻이다. ○後主는 "다음 임금" . ○칙(勅):조칙(詔勅). 임금이 내리는 글.
3
장자왈, 일일불념선 제악 개자기
原文: 莊子曰, 一日不念善이면 諸惡이 皆自起일지니라
해석: 장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루라도 선(善)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모든 악(惡)이 스스로 다 일어나느니라.
字義: ○장자(莊子):기원전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도학자. 이름은 주(周), 송나라 사람으로 萬物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제악(諸惡):온갖 악. ○기(起):일어나다. 생겨나다.
4
태공 왈, 견선여갈 문악여롱 우왈 선사 수탐 악사 막락
原文: 太公이 曰, 見善如渴하고 聞惡如聾하라 又曰 善事란 須貪하고 惡事란 莫樂하 라.
해석: 태공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이 주저하지 말며, 악한 것을 듣거든 귀머거리같이 하라" 또 "착한 일이란 모름지기 탐내야 하며, 악한 일이란 즐겨하지 말라."고 하셨다.
字義: ○태공(太公):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속칭 강태공(姜太公).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 ○여갈(如渴):목마른 것과 같이 하다. 여가기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급히 서둔다'의 뜻.
5
마원 왈, 종신행선 선유부족 일일행악 악자유여
原文: 馬援이 曰, 終身行善이라도 善猶不足이요 一日行惡이라도 惡自有餘니라
해석: 마원이 말하였다. 종신토록 선을 행해도 선은 오히려 부족하고, 하루만 악을 행해도 악은 절로 남음이 있느니라.
字義 ○마원(馬援)은 후한(後漢)때 사람. ○終身(종신)은 "몸을 마친다. 죽는다"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관용구이다. 終身刑(종신형), 終身雇用(종신고용). ○猶는 오히려 유 ○餘는 남을 여. 餘暇(여가), 餘力(여력).
6
사마온공 왈, 적금이유자손 미필자손 능진수 적서이유자손
原文: 司馬溫公이 曰, 積金以遺子孫이라도 未必子孫이 能盡守요 積書以遺子孫이라도
미필자손 능진독 불여적음덕어명명지중 이위자손계야
未必子孫이 能盡讀이요 不如積陰德於冥冥之中하여 以爲子孫計也니라
해석: 사마온공이 말씀하셨다. 금을 쌓아서(以) 자손에게 물려줘도 자손이 반드시 능히 다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요, 책을 쌓아서(以) 자손에게 물려줘도 반드시 자손이 능히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남모르는 곳에 음덕(陰德)을 쌓음으로써(以), 자손의 계책으로(본보기로) 삼는(爲) 것만 못하느니라.
字義: ○司馬溫은 북송(北宋)의 명신(名臣)이다. ○公은 존칭. ○遺는 끼칠 유, 줄 유, 남길 유. ○未必은 부분 부정으로 "반드시 ~하는 것은 아니다"의 뜻. ○盡은 다할 진 ○마지막 문장의 "以爲子孫之計"에서 위의 해석과는 달리 "以爲"를 한 단어로 보아도 된다. 즉, 以爲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굳어져서 "~으로 여기다, ~으로 생각하다, ~으로 삼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7
경행록 왈, 은의 광시 인생하처 불상봉 수원 막결
原文: 景行錄에 曰, 恩義를 廣施하라. 人生何處에 不相逢이리오. 讐怨을 莫結하라.
노봉협처 난회피
路逢狹處면 難回避니라.
해석: 경행록에 이르기를, 은의(恩義)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디에 산들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원수와 원망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려우니라.
字義: ○廣(광)은 부사로 쓰였다. 넓을 광. ○生은 "~에 살다" ○何가 붙는 말은 모두 의문문으로 해석한다. 무엇 하. 어찌 하. ○讐는 원수 수. ○狹은 좁을 협. ○難+술어~ : ~하기 어렵다. ○避는 피할 피.
8
장자왈, 어아선자 아역선지 어아악자 아역선지 아기어인 무악
原文:莊子曰, 於我善者도 我亦善之하고 於我惡者도 我亦善之하고 我旣於人에 無惡이 인능어아 무악재
人能於我에 無惡哉인저.
해석: 장자가 말하기를, "나에게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도 내, 또한 착하게 하고 나에게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도 내, 또한 착하게 할 것이다. 내가 이미 남에게 악하게 아니하였으면 남도 나에게 악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字義: ○어아(於我): 나에게. ○선자(善者): 선을 행하는 사람. ○아역(我亦): 나 또한. 나 역시. ○선지(善之): 그에게 착하게 하다. ○재(哉): 감탄의 어조사. 없을 것이다. 또는 있으리오 등의 뜻임.
9
동악성제수훈 왈, 일일행선 복수미지 화자원의 일일행악
原文: 東岳聖帝垂訓에 曰, 一日行善이면 福雖未至라도 禍自遠矣요 一日行惡이면
화수미지 복자원의 행선지인 여춘원지초 불견기장 일
禍雖未至라도 福自遠矣니라. 行善之人은 如春園之草하여 不見其長이나 日
유소증 행악지인 여마도지석 불견기손 일유소휴
有所增이요 行惡之人은 如磨刀之石하여 不見其損이나 日有所虧니라.
해석: 동악성제가 훈계를 내려 이르셨다. 하루 선(善)을 행해도 복(福)은 비록 아직 당장 이르지는 아니하나 화(禍)는 저절로 멀어지고, 하루 악을 행해도 화는 비록 아직 당장 이르지는 아니하나 복은 저절로 멀어지느니라. 선을 행하는 사람은 봄동산의 풀과 같아서 그 풀이 자라는 것을 보지는 못해도 날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바가 있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돌과 같아서 그것이 닳아 없어짐을 보지는 못해도 날마다 조금씩 이지러지는 바가 있느니라.
字義: ○東岳聖帝는 도가(道家)의 사람이다. ○垂는 (위에서 아래로) 드리울 수. ○雖는 비록 수. ○日은 부사로 쓰였다. "날마다"의 뜻. ○磨는 갈 마. ○損은 덜 손 ○虧는 이지러질 휴.
10
자왈, 견선여불급 견불선여탐탕
原文: 子曰, 見善如不及하고 見不善如探湯하라.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한일을 행하기를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고 선하지 않은 일을 행하기를 끓는 물을 더듬는 것과 같이하라.
字義: ○及은 미칠급. ○探은 찾을탐. ○湯은 끓을 탕
삼강오륜 [三綱五倫]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십계명 [Ten Commandments, 十誡命]
하느님이 시나이산(山)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열가지 계명.
'모세의 십계(十誡)' 또는 '십계'로도 불리는데, 원래 두 개의 돌판에 새겨졌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거의 비슷한 형태로 쓰여 있다. 이 계명은 후대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된 것으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농경문화를 이루고 있던 가나안의 토착민들과의 대결에서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사회의식 ·종교의식 ·윤리의식 등의 고유 전통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 왕국시대는 물론, 초대교회 이후 오늘날까지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생활규범이 되고 있다. 이 십계명이 새겨진 원래의 돌비는 후에 ‘언약의 궤(법궤)’에 담아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간직되었다.
십계명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 우상을 섬기지 말라. ③ 하느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부르지 말라. ④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둑질하지 말라. ⑨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