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션 주입..리산이 긁어다 알게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전시 보러 가기전에 알고가세요^^
아르누보의 태동기부터 쇠퇴기까지 수많은 작품과 디자인을 선보인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 화가이다.
무하의 어머니 아말리에 말라는 독신주의자였다. 그리하여 30대까지 비혼을 고수해왔는데,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길 부탁하는 꿈을 꾼다. 때마침 그녀의 친척에게 편지가 왔는데, 마지막으로 중매를 권하는 편지였다. 그녀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미 아이 셋 딸린 홀아비였던 법원 직원 온드레이 무하와 결혼하여 아들 알폰스와 딸 아델라, 안나를 낳는다. 무하의 어머니는 첫번째 자식인 알폰스 무하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며 키웠다. 어릴 적 어머니는 무하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살던 곳은 시골이라 방편으로 연필이 달린 목걸이를 만들어 선물한다.
그렇게 알폰스 무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으며,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다. 성가대로 뽑혀 브르노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빈으로 상경해 무대 배경을 그리는 등의 일을 하다[3] 모라비아로 귀향해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카를 쿠헨 백작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으로 프랑스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 다니게 해주었지만 2년 후, 그는 보수적인 교육에 싫증을 느껴 줄리앙 아카데미를 나가고 콜라로시에 아카데미에 다니게 된다.
쿠헨 백작은 무하가 1년 넘게 그림을 내주지 않아 지원은 더 이상 해주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자유주의 사상에 매료된 합스부르크 제1 왕자였던 루돌프 왕자가 불행한 결혼을 비관해 자살로 인한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체코 민족주의자인 무하는 그가 왕위를 즉위 하면 제국 내에서의 슬라브 민족에 대한 위치가 조금은 나아질 것을 기대 했지만 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려 큰 충격을 받은 듯 하다.
무하는 파리로 가서 잡지와 광고에 삽화를 그리며 생활했다.
3. 지스몬다 광고 포스터[편집]
만 34세이던 1894년 크리스마스에 무하는 휴가를 떠난 친구의 부탁을 받아 인쇄소에서 교정 보는 일을 대신 하고 있었다. 이 인쇄소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연극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4]가 감독하고 출연한 연극 '지스몬다' 광고 포스터 제작을 맡았는데 연휴인 크리스마스까지 베르나르에게 OK를 받지 못했다. 인쇄소 운영자는 연극 개막일이 1월 4일이라 마음은 급한데 직원들이 다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인쇄소에 와있던 무하에게 광고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무하는 석판화 일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극장으로 가 리허설 중인 연극 무대를 보며 스케치한 후 인쇄소 운영자도 휴가를 떠난 사이 석판화를 만들어 12월 30일에 완성했다. 이것은 당시 포스터라고 하면 생각하던 크기가 아니라 사람을 실물 사이즈로 그린 대형 그림이었다.
이 광고 포스터는 1895년 1월 1일 파리 광고탑에 붙자마자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삽화가 제롬 두세는 잡지 '레뷰 일뤼스트레'에 "이 포스터는 하룻밤 사이에 파리의 모든 시민이 무하의 이름에 친숙해지게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무하는 당대 최고의 스타 베르나르와 6년 계약을 맺는다. 지스몬다 상연 당시 사라 베르나르는 50대 초반이었으나 무하는 일부러 그녀의 신비함과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는 젊은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사라 베르나르는 지스몬다 포스터를 4,000장 추가 주문했으며, 의상과 무대 디자인까지 무하에게 일임했다. 알폰스 무하는 하루 아침에 무명의 신예에서 파리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상업 화가가 되었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하 작품 상당수가 이 지스몬다 작업 직후부터 1900년 사이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후 각종 포스터와 사계 등의 작품을 제작했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난 이후로는 조각도 제작하였다. 이때 무하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무하가 디자인한 무대 의상을 현실에서도 입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 당시 파리 패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컨셉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 까지 출판할 정도였다. 본인은 "밑천 다 퍼줄 테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태도였지만 이를 통해 무하의 디자인이 더 알려지는 역효과를 초래해 더욱 요구가 쇄도했다고 한다. 무하의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의욕이 왕성했음에도 도저히 밀려드는 주문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후 1900년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벽화 담당, 만국 박람회 포스터 및 디스플레이와 식당 메뉴 디자인을 맡는다.
4. 화풍[편집]
그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여성[5]과 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로 구성되며, 소위 말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화풍의 시작이자 끝이다. 또한 배경과 장식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는 화풍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상업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석판화가 많다.[6] 이러한 특징은 초기의 연극 포스터부터 말기의 작품들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초기 아르누보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무하의 감각적인 화풍은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는 지나치게 민족적인 구형 예술이라며 프라하 미술계에서 무시당하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이후에는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부터 무하의 작품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 현대에서 명성을 되찾았다. 도리어 현대에는 일반인에게는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추상, 행위예술 등)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좋다. 특히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의 형태는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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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체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
프라하의 프라하 성 내부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좌측면에 그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그의 독특한 화풍 덕에 보통 스테인드글라스와는 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4.1. 자포네스크, 아르누보, 무하, 그리고 망가[편집]
자포네스크와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아르누보의 거장 무하의 화풍은 후에 일본의 망가 화풍, 특히 미소녀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과거 뿐만 아니라 현대의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도 무하 특유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오마주하는 경우가 많다.[7] 덕분에 아르누보의 유행기간은 짧았지만,[8] 현재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이에선 여전히 이 아르누보가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아담 휴즈, 야마다 아키히로, 아소 미코토, 이즈부치 유타카 등이 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CLAMP나 로도스도 전기,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 일러스트, 일본 애니 전영소녀 오프닝과 비디오 자켓 그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꽃과 도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과 옷자락에 둘러싸인 미소녀 캐릭터의 일러스트와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비교하면 유사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순정만화에도 영향을 많이 끼쳐서, 주로 인물이 꽃이나 화려한 장식 배경과 함께 나오는 장면을 잘 보면, 무하의 장식미를 강조하던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즈부치 유타카는 한국 강연 중에 "아르누보와 무하에 영향받은 나의 일러스트는 파쿠리"라는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이런 관계는 현대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구는 일본의 망가 화풍을 받아들인 만화, 반대로 일본은 서구의 카툰 화풍을 받아들인 만화가 제작되기도 한다.[9]
해당 작품이 연소자 관람 불가인데다 너무 오래 된 작품이라 국내에 알려져 있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조인 데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에서 내놓은 1970년대 초 극장판 애니 시리즈인 아니메라마 3편도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다.
2016년 12월에 국내 전시회 오프닝 데이에 손자인 존 무하[10]와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이즈부치 유타카 특강이 있었다. 그리고 해당 전시회에서 알폰스 무하의 영향을 받은 작가의 작품도 전시했으며, 임주연, 고야성, 추혜연[11], CLAMP, 이즈부치 유타카가 참가했다.
5. 평가[편집]
현대미술에 끼친 지대한 영향 탓에, 현대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로 여겨진다. [12]
19~20세기를 거쳐간 유명 화가 중 굉장히 무난하고 평탄한 인생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부모가 곁에 있었고, 30대 중반에 사라 베르나르의 전담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유명세가 치솟았기에 가난으로 고생한 기간이 짧다. 40살이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명성을 퍼뜨린 상태였다. 또한 예술의 소재로서 여성을 좋아한 것과는 별개로 성적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여자관계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않았던 당대의 많은 남성 화가와 달리, 무하는 그다지 편력을 보이지 않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해로했다. 말년에 민족 예술가로 활동하다 나치에 찍힌 시기를 빼면 풍족한 삶을 영위했으며, 20세기 유럽 남성 수명을 한참 넘긴 79세에 사망했다.
요약하면 재능이 탁월하며 금전운이 따르고, 인간관계도 원만했으며,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삶을 살았던 셈. 상업예술과 민족예술이라는 2가지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6. 비화[편집]
당대 유행의 첨단을 달린 초/중반기의 활동과는 대조적으로, 후반기에는 체코를 대표하는 애국자,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이 강조되었다. 체코 독립에 있어 열정적이었으며, 독립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우표, 화폐 디자인을 손수 하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슬라브 서사시>라는 이름의 연작을 제작했다.[13]
이로 인해 1939년 프라하가 독일에 점령된 이후 불온인물로 찍혀 자주 검문받았고, 79세나 되는 고령임에도 게슈타포는 그를 비밀리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했다. 결국 게슈타포가 건강상의 문제로 무하를 풀어주긴 하였으나, 기존에 악화되고 있었던 폐렴과 겹쳐서 며칠만에 사망하였다. 나치는 무하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그럼에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무하가 이렇게 고생하다 죽은 뒤에도 체코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오히려 무하를 저평가하다가, 1990년대가 되어서야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를 재평가했고, 그의 역작이었다가 한동안 잊혀진 슬라브 서사시 역시 다시 재발굴되었다.
체코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였던 이반 렌들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엄청난 양으로 수집하기로 유명했고, 이를 가지고 종종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마이아트뮤지엄에서 2020년 3월 1일까지 전시할 예정이다.
7. 기타[편집]
첫댓글 아는만큼 보인다
전시 보기전 도슨트 설명을 듣듯ᆢ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알프스트레킹
자유님 축하드려요^^
2012년 체코여행중 어느 미술관에 전시중이던 무하의 작품을보고 무작정 이끌려 화보집을 사왔던 기억이 나네요
몽환적이기도 한듯한그림에 매료되여 한참 기억이 남았는데 요즘 자주 회자되고 있어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