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그놈
박종훈(사남초)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사랑하는 데 무슨 계절이 중요하겠냐마는 맑은 날씨와 푸른 하늘, 주위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단풍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든 거닐고 싶게 만든다. 마냥 걷기만 해도 기분 좋은 계절,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사랑은 오랜 시간, 온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의 관심사다. 기록으로 얼마 전하지 않는 고대 가요부터 지금까지 사랑 노래는 시대를 초월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내가 겪고 있거나, 아님 예전에 겪었던 일, 앞으로 내게 다가올 운명 같은 순간들.
사랑과 관련된 노래를 찾아보면 사랑의 기쁨이나 환희보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경우가 훨씬 많다. 사랑할 땐 둘이 충분히 행복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내 슬픔과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 헤어진 그 사람에게 하소연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서 어딘가 쏟아내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다. 그래서 자연히 말이 많아지고 어떻게든 표현을 하고 싶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묘한 위로를 받는다.
이별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 이별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거나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들 때는 아픈 마음에 분노까지 스며든다. 갑작스런 이별은 아이들에게도 당혹스러움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안경
이원희(김해 영운초 6년)
안경을 새로 맞췄다.
안경을 쓰니 세상이 너무나
밝아 보인다.
친구들에게 새 안경을 샀다고
자랑을 했다.
학교 마치고
내려오는 길
저 멀리서
내 친구와 내 남자친구가
손을 잡는 걸 봤다.
안경 사지 말 걸.
(2009. 4. 29.)
*이지호 엮음, 《숙제 다 했니?》, 상상의 힘, 2015년.
제목도 ‘안경’이고, 안경을 새로 맞춰서 행복한 내용이 3연에 걸쳐 있지만 글쓴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바로 4연이다. 글쓴이의 기쁜 마음에 동행하며 읽어가던 독자들은 생각 못한 반전에 놀란다. 한껏 즐거워하던 모습 뒤에 맞이하게 된 상황이라 글쓴이가 더욱 안타깝다.
‘내 친구와 내 남자친구가 손을 잡았다.’는 좋아하는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물론 뒤에 다른 정보가 없으므로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의 장면을 보고 시간이 조금 지나 이 시를 썼다고 봤을 때, 5연에서 안경 산 것을 후회한 걸 보면 둘 사이의 관계가 어긋났음을 알 수 있다.
글쓴이는 안경을 새로 맞춰서 매우 기분이 좋다. 안경을 써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뭔가 침침한 듯 잘 보이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안경을 못 바꾸고 있다 새로 안경을 맞추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선명한 세상. 그 밝은 세상을 글쓴이는 만끽하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한다. 안경테도 자기 마음에 쏙 드는 멋진 디자인으로 고른 모양이다. 그렇게 자랑을 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오는데, 아뿔사 너무나 밝은(?) 안경 탓에 안 봐도 될 장면을 보고 만다. 내 남자친구와 내 친구가 손을 잡는 걸 말이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상황에 갑자기 비극적인 순간을 맞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새 안경을 쓰고 룰루랄라 기쁘게 내려오다 못 볼 광경을 보고 안경을 새로 산 걸 후회한다.
어떤 사람들은 초등학생이 무슨 사랑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에 대해 관심도 많으며 진지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이성 친구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이 부쩍 많아지며, 실제 이성 친구가 있는 경우도 많다. 반에서 둘이 사귀는 경우는 대개 다른 친구들이 담임에게 비밀이라고 강조를 하면서도 그들의 연애사 전반을 다 훑어준다.
아이들은 저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마냥 좋아서 바라보면 싱긋 웃기도 하고, 그 애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고, 문자 메시지도 길게 한다. 단체 채팅 방에서 그 애의 말에 은근히 동조하다가도 다른 친구들이 놀릴 때는 동참하지 않는다. 특별한 날을 챙겨주고 같이 어울려 놀거나 숙제도 같이 하고 선물도 주고받는다. 현장학습이나 수학여행 가서 어울리지 않는 큰 인형을 들고 다니는 여학생은 100퍼센트 남자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쉽게 사귀고 헤어지고 심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성친구와 헤어지면 기운이 없고, 수업 시간에도 멍하게 앉아 있는다. 안 쓰던 일기를 쓰기도 하고, 카카오톡 프로필이 사라지거나 의미심장한 문구로 바뀐다.
헤어진 것도 서러운데 그 이유가 다른 이성친구가 생긴 거라면, 그것도 내가 아는 아이라면 충격은 더해진다. 둘 다 보기에 내가 너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사랑이 떠난 뒤 아픔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글쓴이는 4연과 5연 사이에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겠지만 전혀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한테 화를 냈을 수도 있고, 먼발치서 모른 척하면서 혼자 끙끙 속앓이를 했을 수도 있다.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동안 둘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구구절절하게 이야기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1~3연의 내용보다 몇 배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압축하고 생략해 버린다. 그로 인해 시는 간결하게 할 말은 하면서도 여운을 남기고 그 빠진 부분을 독자가 생각하게 만든다. 글쓴이의 안타까운 상황에 동조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경험에 비추어 그 상황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사연이 너무 많아 찢어버린 편지처럼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입을 닫은 건지도 모른다.
글쓴이는 지금 새로 안경 산 일을 후회한다. 저 멀리까지 잘 보이는 새 안경만 아니었더라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새 안경으로 그 순간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나와 내 남자친구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어날 상황을 조금 일찍 보고 늦게 보고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안경 탓이 아니지만 안경 탓으로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우리 옛 시조에도 이렇게 아픈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며 위안을 삼는 경우가 있다.
<청구영언>
개를 열 마리 넘게 기르지만 이 개처럼 얄미운 놈이 있을까.
미운 님이 오면 꼬리를 홰홰 치면서 뛰어 올랐다 내리 뛰었다 하면서 반겨 맞이하고, 사랑하는 님이 오면 뒷발을 버둥거리면서 물러섰다가 나아갔다가 캉캉 짖어 돌아가게 한다.
쉰밥이 그릇그릇 아무리 많이 남을지라도 너 먹일 줄 있으랴?
출처:blog.naver.com/othugi/70155917867
시적 화자는 자신이 기르는 개가 미운 임은 반겨 맞고 고운 임은 짖어서 쫓아 버린다고 원망하고 있는데, 실제로 개가 그럴 리는 없다. 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을 직접적으로 원망하지 않고, 그것을 죄 없는 개한테로 옮겨서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시의 시적 상황이나 상대방에 태도에 차이가 있어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 하긴 어렵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슬픔을 ‘안경’과 ‘개’의 탓을 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상황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 만약 이 시의 5연에서 ‘안경 사지 말 걸’ 대신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식의 직접적인 감정을 표출했다면 시의 맛과 긴장감은 훨씬 덜 했으리라.
글쓴이는 안경을 새로 맞추고 겪은 일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시로 표현했다. 흔한 일상에서 자신만의 경험을 잘 잡아 군더더기 없는 형식으로 담아냈다. 기쁜 순간에 겪은 당황스런 상황에 할 말이 많을 법하지만 다 생략하고 짧게 한 마디로 정리했다. 글쓴이가 더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사랑(이별)에 조금 더 시선을 두고 살펴보았다. 글쓴이가 이 시를 쓴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성인이 된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사랑을 만났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