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자신의 모든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라반과의 대결에서 승리했고 에서와의 갈등도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무사히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었고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겪게 되는 일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거나 만족을 얻었을 때, 간절한 필요가 채워졌을 때, 오히려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나면 긴장에서 벗어나고 마음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왔던 약속이나 다짐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각오나 결심에서 벗어나기 쉬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불순종이나 실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점차 더 인생에서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도 그러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야곱은 세겜에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는 큰 상처를 입었고,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언약의 징표를 이용해서 무자비한 살인과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야곱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침묵했습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큰 실패를 경험합니다. 자신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지금도 주변의 적들이 함께 공격해올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그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아버지로서 그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세겜에서 벌어진 일은 야곱을 추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실패를 통해 우리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나 실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부족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실수할 수 있고, 계획대로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서 유혹에 넘어갈 때도 있고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실패로 인해 좌절할 때도 있고, 정말 다시 되돌리고 싶다는 자책과 죄책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깊은 웅덩이로 잡아끌며 계속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할지 몰라 그냥 손을 놓아버리기도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되어서 살아가는 기쁨과 만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 라고 질문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지? 내가 무엇을 한 건가? 늦은 후회를 합니다. 그때 세겜이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그때 디나가 세겜의 여자들을 만나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그때 침묵하는 것이 아닌데, 세겜의 일을 제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럴 때 정말 필요한 질문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해야 할 일, 가장 필요한 일을 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일은 야곱이 가나안 땅에 와서 먼저 해야 했고, 그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옛적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서원했었는데, 하나님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동안 자신은 이것을 잊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을 일깨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1)
야곱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공격을 받을까 하여 두려움 속에 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조치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선적으로 야곱이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하나님이 알려주신 해결책입니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정말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뭔가 달라집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제단을 쌓는 장소와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장소가 어디인가요?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신 장소는 벧엘입니다. 대상은 누구인가요? 제단을 쌓아 예배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 두 가지를 따라가면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벧엘은 세겜보다 해발 300미터정도 더 높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간다고 말하는데,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약속하셨던 곳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곳,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면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예배하겠다고 서원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벧엘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분, 자신을 혼자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며 인도하신 분,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다시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제단을 쌓는 대상, 하나님이 야곱에게 어떤 분이신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긴 수식어를 붙여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는 어떤 하나님입니까?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1) 3절에는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3) 야곱과 함께 하셔서 그를 지키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제단을 쌓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너를 지킬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제단을 쌓아라. 다른 것은 내가 해결해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현재 상황을 공감해주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을 설명해주고, 야곱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다리며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먼저 나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다. 지금까지 네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냐?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느냐?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이냐? 너는 왜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느냐? 너는 나를 기억하고 신뢰하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나를 예배하여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벧엘의 하나님이 지금까지 야곱과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지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앞으로도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야곱이 실패를 경험했고, 낙심할 수 있지만, 생명의 위협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러할지라도 지금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던 적, 하나님이 정말 약속에 신실하시구나! 나의 삶에 함께 하시는 구나! 경험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야곱이 벧엘을 경험했던 것과 같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비록 매일매일 벧엘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특별한 벧엘에서의 경험, 그 한 번의 경험이 다른 모든 날을 벧엘처럼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벧엘을 기억하며 또 다른 벧엘을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거하는 곳이 어디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경험하는 벧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날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5)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야곱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야곱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 번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대상이 야곱임을 다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1)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능치 못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 우리가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따르는 하나님이 전능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야곱이 제단을 쌓기 전에 무엇을 먼저 했습니까? 그가 한 일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을 모아두고 말합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2) 야곱은 세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 둘째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첫째, 야곱은 집안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버리도록 했습니다.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의 집안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야곱은 먼저 이것을 모두 없애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둘째와 셋째는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합당한 자세를 갖추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따로 목욕을 하거나 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께 예배드리고 그분을 높이는 일에는 그에 합당한 자세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여러분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이 되는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거짓 우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땅에 묻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 다른 예배의 대상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예배할 때 우상을 제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가는 우상을 버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죄에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 삶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어떤 어려움,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그 일은 내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벧엘의 하나님,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뜻에 합당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던 기억, 그 때의 감격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내 삶에 이루신 역사를 기억하십시오. 그 벧엘의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옛 추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지금도 벧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십시오. 지금 있는 곳이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십시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모든 삶 가운데 역사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능력의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자비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내 삶에 합당치 않은 것들을 버리고, 내 마음에 있는 죄악을 떨쳐버리고, 회개함으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겜에 있든지, 아니면 세겜과 벧엘 사이 어딘가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세겜에서 엄청난 비극을 경험했든지, 아님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든지 관계없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집, 벧엘입니다. 일어나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벧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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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라.
1.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 만족감에 빠지거나 정상에 왔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영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가 쉽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에 무사히 돌아와서, 그렇게 두려워하던 에서와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성공한 자로서 세겜에 정착하였습니다.
2. 그러나 그가 잊어버린 것은 없을까요? 그는 하나님과의 맹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단을 쌓을 것(예배)이라고 서원했었습니다(28:20~22). 하나님께서는 바로 앞 장에 있었던 디나 사건을 통해서 야곱에게 그 맹세를 다시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3. 그리고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1). 벧엘로 가서 단을 쌓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맹세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디나 사건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집안들이 이방 풍습에 깊이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풍습이 그들의 믿음과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깊이 침투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우상(여기에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훔친 드라빔도 있었을 것이다)을 제거하여 스스로 정결하게 하였고, 또한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을 암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모아서 야곱은 세겜 땅에 묻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모든 것, 거짓되고 헛된 모든 것을 제거하여 이방 풍습을 끊은 다음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참된 믿음을 회복하여, 이제 벧엘로 올라가 항상 야곱과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새 삶을 시작하자고 명령한 것입니다.
4.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을 다시 야곱에게 새롭게 갱신하여 주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올라온 야곱에게 그 일을 다시 상기시켜 주신 것 같습니다. 야곱은 자기와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다시 그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부어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이로써 야곱은 오래전 하나님께 드렸던 맹세를 완성하였습니다.
5. 이들의 잘못된 믿음의 자세를 고치고 그곳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 일행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변 모든 성읍들에게 두려움을 임하게 하셨고, 저들이 감히 야곱의 아들들의 뒤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악한 일을 행한 야곱의 가문을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섭리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6. 이제 한 세대는 가고 다음 세대가 시작됨을 성경은 알려줍니다. 라헬의 오래전 기도대로(30:24)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이 벧엘을 떠나 에브랏으로 향할 때 라헬에게 또 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들 베냐민은 이제 이스라엘 12 지파의 완성을 표시하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헬의 생명을 취하여 가셨습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위로받기를 거절했음을 가르쳐줍니다.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베냐민이라고 고쳐주었습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얻은 자유와 안전한 귀환을 통한 부족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7. 그러나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를 간통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22). 아마 이것은 우발적이기보다는 의도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르우벤은 자기 아버지의 첩을 차지함으로써 아버지의 자리를 잇는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라서 행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서는 사건만 기록되고 침묵하지만 이후 르우벤은 이 일로 인하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고 맙니다(49:3~4). 비록 야곱의 가족 공동체 안에는 이런 비열한 죄악들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은 함께 보여줍니다. 또한 르우벤의 모습을 통해 행한 죄가 금방 드러나고 책임을 묻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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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기 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31:13). 하나님의 말씀대로 외삼촌 집에서의 타향살이를 마감하게 된 야곱의 우선순위는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에 자기가 살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해 우릿간을 지었다고 증거합니다(33:17).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한 야곱에게 딸의 강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히위 족속 하몰에 의해 야곱의 딸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피의 복수를 이행했습니다(34:26). 야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음으로 경험하게 된 딸의 강간 사건과 아들들의 피의 복수극이 마쳐진 후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시금 벧엘로 부르셨습니다.
(1-7절)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야곱에게 사인을 보내셨지만 야곱은 그 사인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절망적인 현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을 명하십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치던 때에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것을 상기시키시면서 다시금 그곳에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결국 정신을 차린 야곱은 가솔들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괴롭고 외로웠을 때 하나님의 손길을 강하게 체험했던 장소인 벧엘로 올라가자고 선포합니다. 벧엘은 야곱이 가장 진실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했던 서원의 장소입니다. 야곱이 가솔들에게 선포한 내용을 2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자신은 물론 가솔 모두가 선행해야 할 일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 이방 신상을 버리고,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고,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선언합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는 것은 낯선 신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입니다. 형상화된 신상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배척하는 모든 세력과 사상까지도 끊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자기 부친의 드라빔을 몰래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디나 일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을 노략했을 때에 이방 신상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것을 결심한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지니고 있든, 자신도 모르게 지니고 있든 모든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알게 또는 모르게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재물, 명예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건강이나 미모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 내게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우상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가솔들에게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정결해야 함을 야곱이 강조합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는 것은 출애굽 직후에 모세에게도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영적, 도덕적 정결 상태를 외형으로도 나타내라는 의미로, 회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의복은 사람의 신분과 삶의 양태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의복을 바꾸라는 것은 곧 현실의 삶과 신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으로 전진하자는 것입니다.
자신은 물론 가솔들을 정비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갈 것을 선포합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날에 친히 응답하시고, 온갖 괴로움 속에 있던 자신과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약속드렸던 제단을 쌓으러 올라가자고 선포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벌인 피의 복수극으로 인해 두려움 속에 처해 있었으나 그가 신앙을 회복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고 5절 하반절에서 증거합니다.
마침내 야곱의 일행은 벧엘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그곳을 이름하기를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현존과 만났고,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하시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홀로 외로이 벧엘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은 20년이 지난 오늘 다시 가솔들과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8절) 벧엘로 회귀하는 야곱 이야기 중간에 리브가의 유모인 드보라의 죽음 소식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가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어쩌면 이 구절은 없어도 무방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드보라의 죽음 소식을 전하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죽음을 기억하실 정도로 드보라의 삶이 아름다웠음을 알게 해 줍니다. 유모 드보라는 밧단아람에서부터 시집가는 리브가를 따라 헤브론 이삭의 집으로 왔던 사람입니다. 어떤 이유로 드보라가 야곱과 줄곧 함께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모를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습니다. 알론바굿은 상수리나무를 의미하는 단어와 눈물을 흘리다는 의미의 단어가 합쳐진 말로 눈물의 상수리나무,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은 야곱에게 의미가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불효자였던 자신을 평생 그리워하던 어머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이어 주던 마지막 고리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이 든 유모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묻어나오던 야곱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장사하는 의미였기에 야곱에게는 의미 있는 장례 일정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가 족장이든, 유모이든 어떤 신분이었느냐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의 마지막이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질 수 있도록 가꾸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드보라의 죽음을 통해 교훈 얻게 됩니다.
(9-15절) 야곱이 다시금 하나님을 의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이스라엘임을 강조하시면서 약속의 상속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10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야곱을 먼저 만나주시고, 브니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벧엘에서 야곱의 이름을 재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야곱도 응답으로 돌기둥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15절). 같은 장소에서 하나님과 두 번의 만남을 경험한 야곱이 고백하기에 적합한 고백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전능의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번성의 복을 야곱에게 동일하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인생길에 언제나 동행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야곱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금 믿음의 후손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야곱이 드렸던 것과 같은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던 언약의 장소가 있으십니까? 어느 인생길에 서 있을 때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하는 때는 우리가 행복하고, 평안한 때이기보다 야곱처럼 쓰라린 고난의 시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하든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가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의 고백도 야곱의 고백처럼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만약 주님과의 관계에 회복이 필요하다면 야곱처럼 주님과 만났던 언약의 장소를 다시 기억해 내시길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와 친밀히 만나기를 원하고 계신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브람은 99세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언약해주신 자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89세의 아내 사래는 폐경이 되었기에 그들은 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습니다. 아브람 부부가 이처럼 상심하고 있는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해주셨고, 두 사람의 이름을 개명시켜주셨습니다. ‘높은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을 ‘큰 무리의 아버지’라는 의미인 아브라함으로 사래(나의 공주)를 사라(열국의 어머니)로 개명시켜주심으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으로 천명하셨습니다.
어제 살펴보았던 35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앞서 32장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이름을 개명시켜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재차 개명시켜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두려움 속에서 밤새 하나님께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의 뜻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하나님까지도 악착같이 겨루어 이길 정도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곱의 삶을 다 내려놓고, 앞으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께서 너를 주도하는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딸 디나가 추장 세겜에게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야곱은 잠잠했습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통혼을 제의해왔어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기탱천한 야곱의 아들들이 묘략으로 하몰 족속을 진멸하자, 가나안 족속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아들들을 꾸짖었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로 살지 못하고,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셨던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갈 것을 결단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의 신앙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헬의 죽음과 장남의 탈선에 직면한 이스라엘 (16-20)
(16-20)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벧엘을 떠나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난산이었고 해산한 후에 라헬을 사망하게 됩니다. 첫 아들 요셉 이후 임신하지 못하다가 십수년 만에 둘째를 임신한 그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남편의 고향으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둘째가 해산 한 후에 바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녀가 막내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을 뜻하는 베노니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대가 점령당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비탄과 슬픔을 라헬의 마음을 빌어 표현했으며(예레미야 31:15), 마태도 헤롯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살해할 때의 비통함을 라헬의 슬픔을 빌어 표현했습니다(마 2:18).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은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녀를 베들레헴 길에서 장사지내고 묘비를 세웠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특별히 기념할 만한 사건과 장소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주변의 돌로 비석을 세우곤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건이 있는 장소에 비석을 세운 기록이 많이 있지만, 사람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은 라헬의 묘비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는 야곱의 라헬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잘 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낸 슬픔 앞에서도 야곱은 라헬의 둘째 아들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른손의 아들’을 뜻하는 ‘베냐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서 오른손은 능력과 힘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어머니 없이 자라야 할 막내아들이 힘 있고 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야곱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자녀들이 힘 있고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당연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상적으로 힘 있는 사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막내아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같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21절의 표현 때문입니다.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주어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벧엘에서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극심한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애통하다’로 해석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보통의 슬픔이 아니라 야곱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뜻합니다. ‘복’으로 해석된 원어(마카리호이)는 ‘행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원어 순서대로 해석하면 ‘행복하여라 애통하는 사람은‘입니다. 왜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한지를 주님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곡을 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이별로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추상적이고 막연한 말로만 그치는 위로가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벽의 일부였던 이 벽 앞에서 와서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함락을 슬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지만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원하며 통곡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늘의 위로를 기대하며, 슬픔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세기에 걸쳐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가 다시 복원된 나라는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은 가슴이 찢어지는 사별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위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장남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했습니다. 르우벤은 왜 이같은 패륜 행위를 했을까요? 사무엘하 3장에는 사울의 조카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과 동침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역시 사무엘하 16장에는 쿠데타에 성공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과 동침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권력의 후계자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본문을 보면 르우벤이 서모와 동침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과 권한을 요구한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즉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패륜 행위 앞에서 야곱이 느꼈을 배반감과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온갖 음모와 묘략을 동원해서 에서의 장자권을 강탈했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장남의 패륜적인 행동 속에서 투영됨에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벧엘에서 새로 거듭난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 통회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재산권의 분배를 요구한 탕자를 끝까지 품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던 르우벤은 결국 장자권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됩니다.(창세기 49, 역대상 5:1-2).
야곱의 12 아들들 (23-26)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변화된 삶을 산 결과가 22절의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입니다. 23절~26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12명의 아들의 명단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12지파를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치르는 두 형제 (27-29)
드디어 야곱은 아버지가 있는 고향 헤브론에 돌아왔습니다(27). 잠시 떠나 피해있으면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소 20년 지난 시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삭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로 맺는 본문 속에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두 사람의 슬픔 속에서도 형제간의 시기와 질투, 암투와 죽음의 어두움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와 신뢰 그리고 사랑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냈던 형제가 이렇게 변모하게 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개명해주신 이스라엘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않습니다. 혹독한 폭풍우도 몰아치고, 칠흑 같이 어두운 순간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다른 점은 삶의 순간 특히 역경의 순간,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주님의 위로를 통해 슬픔이 희망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산상 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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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장은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서 그 땅의 추장 세겜으로부터 당했던 강간 사건과 그로 인한 디나의 동복남매인 시므온과 레위가 주축이 된 야곱의 아들들의 보복사건 이후 큰 곤경에 빠진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고생하며 살면서 아내들과 자식들을 얻었고 그 이후 어렵게 외삼촌 집을 떠나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돌아오자마자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떠나기 전에 거주했던 곳은 브엘세바). 세겜 사건 이전에 형 에서와의 재회를 큰 탈 없이 넘겼던 야곱은 이제는 평안히 고향에서 살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 디나가 그 땅 추장으로부터 강간을 당했습니다. 딸이 당한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야곱은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인데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악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세겜 땅 추장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이 우리 누이 디나와 결혼하려면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안은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을 죽이려는 계략이었으며 아버지 야곱과는 상의하지 않고 저지른 성급하고도 잔인한 악행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이 세겜 성읍의 남자들을 다 죽인 후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쳤다'라고 했습니다(창34:30). 비록 야곱의 아들들이 젊어서 인생경험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누이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저지른 일치고는 너무나 큰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겜 성읍의 남자 무리들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만 알았지 그 잔인하고 교묘한 피의 보복이 그 주변에 있는 족속들에게 민감하게 자극하는 행동이 될 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너무나도 잘 파악한 야곱은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연이은 어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어려움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 전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과연 야곱과 그의 집이 야곱이 걱정하는 대로 멸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야곱과 야곱의 집은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체결된 언약, 즉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창12장)과 가나안 땅을 네 후손에게 줄 것(창15장)을 상고해 본다면 결코 멸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에게만 언약의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과거에 야곱의 아버지, 이삭에게도 그리고 야곱에게도 아브라함과 체결한 언약의 내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단지 야곱이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제단을 쌓으라는 것 이면에는 약 20년 전 고향을 떠나갈 때 만났던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 20년 전에 야곱에게 하셨던 말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8장 13-15절입니다.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약 20년 전 이 말씀을 들었던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인 벧엘로 명명하였습니다. 야곱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첫째는 누워 있는 땅, 즉 벧엘을 포함한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둘째는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5장에서의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단지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 20년 전에 야곱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여 용기를 얻으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큰 어려움에 직면하여 낙심해 있다면 바로 옆에서 용기를 주고자 하시는 짧지 않은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새롭게 주시는 응답차원의 말씀이기 보다는 대개는 예전에 주셨던 말씀을 상기하라는 차원으로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어떻습니까?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위로받고 응답이 되었던 것을 단지 내가 기억하지 못해 낙심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낙심이 될 때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이전에 과거에 응답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말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과거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곳인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은 후 깊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 무언가를 깨닫고 결단하여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이 시점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으로 말미암아 고난의 삶 가운데에서도 아내들과 자식들을 얻었었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었습니다. 좋은 일들만 있으면 좋았겠지만 딸로 인해 당한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이 때에 했던 야곱의 신앙고백처럼 "내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고백이 또한 우리 각자의 고백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환난을 당할 때에 외면당한 적이 있었습니까? 비록 문제의 해결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야곱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야곱은 고백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돈독히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단을 쌓기 전에 정결의 필요성을 알고 그것을 실행합니다. 2절을 보면,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게 하고 몸을 정결하게 하고 심지어 의복까지 바꾸어 입으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서 몸만 가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자기 부인의 삶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의 삶의 방식을 버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요구했습니다. 과거 약 20년동안 하란의 밧단아람에서 야곱의 가족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비록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옛 땅에서의 옛 습관과 옛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야곱의 가족에게 하나님께서는 세겜의 사건을 통해서 환난 중에 짧지 않은 손으로 도와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깨닫도록 이끄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현실 너머에 짧지 않은 손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계심을 아는 것이 야곱의 가족에게 필요했습니다.
믿음은 현실 너머에 계시는 짧지 않은 하나님의 손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 너머에 계시는 짧지 않은 하나님의 손을 본 후 그 분의 손에 잡힌바 되어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결단하고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선하신 손으로 도와주십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벧엘로 갔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5절입니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걱정했던 목숨에 대한 위협이 하나님께서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으로 야곱은 무사히 벧엘까지 갔습니다. 벧엘은 세겜보다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약 45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입니다. 약 20년 전에는 야곱이 벧엘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브엘세바를 떠나 북쪽방향인 외삼촌 집으로 가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었지만, 이번에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세겜에 머물렀다가 더 남쪽인 벧엘로 갔던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번에는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벧엘은 엘이 하나님을 의미하므로 벧엘의 하나님으로 번역됩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니 다 풀어보면,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약 20년 전 하나님을 만난 곳을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만났기에 하나님께서 거주하는 집이라고 불렀으리라 봅니다. 약 20년 후에 야곱은 또다시 같은 장소에서는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좀 더 실존적으로 경험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과거에 비해 더 잘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엘벧엘이라 불렀으리라 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벧엘이 될 수 있습니다. 벧엘을 넘어 나에게 실존적인 하나님을 경험하는 엘벧엘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내가 실존의 엘벨엘을 만남으로 옛 것을 모두 버리고 새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벨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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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갓난아기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 단어 한 단어 모두 부모를 통해서 습득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영어를 쓰는 사람이면 아이는 영어를 쓰고, 부모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면 당연히 아이는 한국어를 씁니다. 모두가 다 부모로부터 배운 말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생각 하나 하나와 가치관까지 부모를 통해서 아이는 배웁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을 대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이것은 시계라고 가르쳐 주면 그것은 시계가 되고, 사과라고 가르쳐주면 아이는 사과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가르쳐 주는 대로 배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신약이후의 시대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사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알 자가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창 35장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 '네가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 이란 말은 바로 창 31:13절에서 말씀하신 " 벧엘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치다가 꿈을 꾸었던 장소, 벧엘의 하나님이라 스스로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입니다.
1)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과거의 지명에 속한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긴박하고 위험했던 순간, 아무도 의지 할 곳이 없었던 야곱이 만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의지했던 그 모든 것에서부터 실망과 좌절을 경험케 된 그곳, 그곳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벧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벧엘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장소, 시간으로의 회복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한 번씩은 그런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걸아갈 힘이 없는 막다른 골목,
내가 기대고 있던 그 모든 벽들이 허물어져 버리고 이제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지친 나의 어깨를 보듬어주셨던 하나님. 그 분이 바로 벧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어느덧 나는 즐길 것이 많아졌고, 기댈말한 언덕이 생겨났습니다. 불러주는 사람이 생기고, 어느덧 명성과 지위도, 힘과 권력도 생겼습니다. 이젠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품어주셨던 그 넓은 가슴을 벌리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던 그 때로의 회복을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벧엘의 하나님'에 담겨져 있습니다.
2)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셨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치던 야곱을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길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도, 겁탈당한 디나의 복수로 세겜족속을 다 죽인 상황속에서, 자칫하다가는 주위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족속에 전멸당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이 야곱과 말씀하시는 대화의 장소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말씀하시고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과 깊이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야곱과 그 가족은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고 벧엘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을 부르신 하나님이 오늘 이 세대가운데서 당신의 자녀들을 벧엘로 부르십니다. 그곳에서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당신의 자녀들에게 친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낡은 의복을 벗어던지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벧엘로 올라가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외삼촌 라반의 추격을 뒤로하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였던 야곱은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형 에서와의 감격적인 해후를 맞이하였지만 야곱은 형과 함께 가지 않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가나안 땅 세겜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은 다시 복수를 불러일으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의 가족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멸족을 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위기의 한 복판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려만 갔던 신앙, 아래로만 치닫던 삶의 모습, 주저앉아 만 있던 영적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모아 놓고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자신의 인생길에 함께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온 집안에 스며있었던 이방의 우상숭배문화를 깨끗하게 하는 정결운동을 단행하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는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이름부르며 다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발걸음을 내어 딛습니다.
이렇게 '엘벧엘'의 사건은 다시 한 번 야곱이 이스라엘로 재탄생하는 출발점이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생육하며 번성할 것이라고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복을 확인해 주십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이러한 새로운 출발은 이 후 그의 인생 후반이 어떻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인가를 기대하게하는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엘벧엘'로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삶의 후반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벧엘에서 '엘벧엘'의 제단을 쌓은 야곱은 얼마 후 아버지 이삭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16). 일행이 에브랏 즉 베들레헴에 다 달았을 때에 라헬의 출산이 시작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산고의 고통은 너무나 컸고, 결국 라헬은 아들을 낳고 죽고 맙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핏덩이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에브랏 차디찬 모래땅에 묻고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21). 하지만 이어서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동침하는 처절한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의 행위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22). 이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맏아들을 가슴속에 묻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아버지가 있는 집, 헤브론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응답과 은혜를 경험하면 그 이후의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기대합니다. 또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엘벧엘'의 놀라운 은혜의 경험과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야곱에게 있어서 그러한 기대는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끌어 안으려 달려온 것은 슬픔과 고통, 고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야곱의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은 다름아니라 야곱의 '길을 떠남'의 의연함입니다. 이전 같았으면 그는 절대 절명의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든 잔꾀를 내고, 자신의 생각대로 방법을 찾아 묘수를 두려고 분주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서의 그는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다시 일어나 자신 앞에 놓인 길을 묵묵히 떠납니다. 세상의 가치와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의 삶은 버림받은 삶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엘벧엘' 이후 야곱의 발걸음은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그분을 중심에 두는 어떤 풍파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진중한 무게를 가진 발걸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집중된 삶이었고, 하나님으로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의지했던 장자를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삶, 그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던 풍파를 겪어야만 했던 삶, 그 모든 것을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심은 세상의 허명과 인생의 욕망이 아니라 야곱의 영혼에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새기려는, 그래서 생명길 걷는 존재로, 천성길 걷는 '영원한 본향찾는 존재'로 세워 가시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숨어있는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길을 떠나...(16)', '다시 길을 떠나...(21)'는 야곱처럼 비록 눈물골짜기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 일 지라도 그것이 버림받음이 아니요,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세상 허명의 때를 벗기고 천성을 향해 생명길을 다시 떠나는 사람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숨어계시는 은총임을 알아,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기도의 길', '찬송의 길', '말씀의 길', '생명길'을 따르기로 마음을 다잡는 이 아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