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7월 23일
그레이스
✿ 1995년 유조선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국내 최대의 해양 오염사고 ‘시프린스호’ 유류오염사고가 1995년 7월 23일 발생했다.
해경은 오후 2시5분경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북동쪽1.5km 해상에서 태풍‘페이’를 만나 침몰한 호유해운 소속 씨프린스호가 이날 오후 4시경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난 뒤 기관실쪽 선체가 파손되면서 기름이 유출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고로 유조선 연료인 벙커시유 1천4백㎘와 탱크에 실려있던 원유61만배럴(9만7천kl)중 2만9천㎘가 흘러나와 광양만 일대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지역까지 해상을 시커멓게 뒤덮는 참사를 빚었다.
흘러나온 기름은 남서풍과 조류를 타고 남해안 일대에 급속히 퍼져 여천, 남해, 사천, 거제 등지의 가두리-새고막 양식장 수만ha가 피해를 입었다.
유조선에 타고 있던 선원 20명중 19명은 배를 탈출해 소리도로 대피했으나 기관장은 실종됐다.
이 사고는 씨프린스호가 태풍을 피하기 위해 22일 오후6시께 광양항에서 서해안쪽으로 출항했으나 기관실에 구멍이 뚫려 기관고장을 일으키면서 사고 당일 태풍을 만나 소리도 근해까지 파도에 떠밀리다 불이 나면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시프린스호는 좌초 1백25일만인 11월26일 선박구난전문회사에 의해 좌초지점에서 빠져나왔다.
▶2018년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인. 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수감되었다. 이후로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독과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 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노회찬 (1956년~)이 투신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2015년 ‘두 개의 한국’ 저자
돈 오버도퍼 별세
▶2015년.6·25 영웅 노병(老兵) 4명에
태극무공훈장
▶2011년 중국의 원저우 시 근처에서
고속열차 둥처의 객차 4량이 고가 아래
로 추락하여 35명이 사망(만간단체
300여명 사상 추정)하고 210여명이
부상했다.
▶2009년 7월 23일 폴크스바겐,
포르쉐 인수
독일 스포츠카 포르쉐의 벤델린 비데킹
전 최고경영자(CEO).
▶2002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
시티 공습(15명 사망·150명 부상)
▶2001년 대한변호사협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법치주의에서 후퇴했다”
는 결의문 채택
▶2001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직 정지
▶2001년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에 취임
▶1999년 주가 사상 최대
71.70포인트 폭락
▶1985년 미국-중국간 핵협력협정 승인
▶19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
(판문점)에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
▶1984년 관보 제1호 발행
▶1983년 바이타브락
제2봉 세계최초 등반 성공
▶1982년 일본정부,
방위력증강 5개년계획(83-87) 확정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1978년 서울 시내버스 한강대교서
추락 33명 사망, 13명 부상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7년 만에 민정복귀
▶1972년 미국, 최초의 실험용 지구
자원탐사위성 랜드새트 1호 발사
▶1971년 오늘,
#실미도 특수 부대원 난동 : 1968년 4월에 창설됐다고 붙여진 이름 684부대
▶1967년 터키에 연 2일
대지진 사상자 수천명 발생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1962년 미국 텔스타통신 위성통해
첫 TV 우주중계
▶1961년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1956년 바둑인 조치훈 출생
▶1952년 이집트서 쿠데타 발생,
나기브준장 실권장악
▶1951년 기록영화의 선구자
로버트 플라어티 사망
▶1951년 페탱, 옥중 사망
▶1942년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명령
▶1938년 총독부,
교원-관공리에게 제복 착용 지시
▶1936년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홍도야 우지마라`를 공연한 청춘좌 일동
아래는 1938년 동양극장의 연극 신문광고
아래는 1939년 동명 영화"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같은 홍도역으로 출연한 차홍녀
/ 1940년 22세의 나이로 사망
▶1931년 소파 방정환 별세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선구자였던
소파 방정환 선생.
작은 물결을 일으킨, 소파 방정환
대한민국의 어린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는 날이 5월 5일 어린이날일 것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하게 여기고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 국가기념일이라는 것이 근대 국가 성립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어린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게 된 것은 소파 방정환의 공이 크다. 1921년 어린이라는 단어를 공식화하며 1923년 5월 1일 한국 최초의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그는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한국 사회에 가르친 한국 어린이들의 영원한 대부이다.
서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음력 10월 7일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방경수와 손성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으로 조부는 야주개 시장거리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이다. 방정환이 태어났을 무렵,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던 그의 집안은 야주개에서 나름 큰 상인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병약하여 늘 누워 지내고 있었지만,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은 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5세부터 7세까지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의 지도로 천자문을 배웠다. 집에서 한문을 익힌 그였지만, 두 살 위의 삼촌이 교복을 입고 신식소학교에 다니는 것을 늘 부러워했다. 7세 소년 시절 방정환은 삼촌이 다니던 보성소학교에 따라갔다가 우연히 김중환 교장의 눈에 띄어 전교생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당시 신식학교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야 했다. 머리를 깎고 입학하는 것을 조부는 반대했지만, 가족들은 그의 뜻을 따라줬다.
방정환이 다닌 보성소학교는 한말 친러파의 거두이자 고종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내장원경 이용익이 1905년에 세운 사립학교다. 한미한 출신이었던 이용익은 보부상으로 또 금광꾼으로 변신하며 재력을 쌓았고, 세도가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서당교육이 선호되던 시기에 보성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이 개방적인 상인 집안인데다가 경제적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에서 개구쟁이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잠시, 1907년을 기점으로 그의 집안은 갑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 이후 명성황후의 시해와, 아관파천 등 국내외 정세는 늘 불안정했고, 왕실을 상대로 사업을 했던 그의 집안은 거듭되는 부친의 사업실패와 함께 하루아침에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이후 어린 방정환은 배고픔과 싸우며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냈다.
환등기를 가지고 놀던 소년, 문학가의 꿈을 키우다
1908년 10세가 되던 해 방정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가진 소년으로 성장하게 되는 행운을 만났다. 총명한 그의 재질을 눈여겨보던 어느 미술가가 그에게 환등기 한 대를 선물한 것이다. 그때부터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환등기를 비춰 보이면서 무성 영화의 변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 환등기는 어린 방정환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환등기를 획득(?)한 방정환은 이 신기하고 재밌는 놀잇거리를 통해 연극과 활동사진 제작에 대한 감을 익혔다. 환등기는 어린 시절에 당했던 불행과 슬픔에서 그를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었던 치유제였고, 환등기에서 나오는 빛은 낯설지만 새롭고 신기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는 마술 같은 불빛이었다.
환등기를 가지고 놀던 10살의 소년 방정환은 대한문 맞은 편에 있던 친구 집에서 어린이 토론 연설 모임인 ‘소년입지회’ 활동을 했다. 소년입지회는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 핵심인물이었던 권병덕(權秉悳, 1867~1944)이 조직한 모임이다. 방정환이 천도교와 연관을 맺게 된 것은 사업 실패를 거듭한 부친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천도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의 영향으로 천도교인이 된 방정환은 소년입지회에서 동화구연과 토론회 등을 하며 정신세계를 가다듬어 나갔다.
방정환은 1909년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에 미동보통학교(집안의 이사로 전학함)를 졸업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상업 공부를 하여 가문의 전통을 이어 가기를 원했던 부친의 뜻을 따라 선린상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환등기를 가지고 놀며 열띤 토론을 하던 문학 소년에게 상업학교가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결국, 졸업을 1년 앞두고 조선은행 서기로 취직시켜 주겠다는 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중퇴하였다.
1915년 17세에 장남으로서 집안 형편에 보탬을 주고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사자생(寫字生) 생활을 하며 독학하였다. 앞날이 안 보이는 하루하루였지만, 꿈을 잃지는 않았다. 훗날 방정환이 재능있는 청년들이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긴 것도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이었다.
청년시절의 문화운동
방정환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은 1917년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1862~1922)의 딸과 결혼하면서부터이다. 방정환이 손병희를 알게 된 것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병덕에 의해서였다. 소년입지회 활동을 시작으로 어린 방정환을 평소 눈여겨보던 권병덕은 그를 의암 손병희에게 소개했다.
손병희의 사위가 된 방정환은 토지조사국 사자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방정환의 활동은 마치 적토마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유광렬, 이중각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고, 1919년에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경성청년구락부는 민족운동에 뜻을 둔 18, 19세의 소년들로 이루어진 비밀클럽이었다. 이후로 방정환은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번역가 생활을 했고 습작을 하며 자신의 재능과 꿈을 키워나갔다.
1918년 12월 봉래동 소의소학교에서 개최된 ‘경성청년구락부’의 송년회에서 방정환은 첫 자작 각본인 소인극 [동원령]을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어린시절 연극과 영화,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어린 방정환이 어느덧 성장하여 직접 극본을 쓰고 소인극 활동을 한 것이다. 그는 어린시절 꿈을 한 걸음씩 이뤄 나갔다. 천도교의 정신적·물질적·조직적 뒷받침을 받으면서 청년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수많은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고, 남달리 문예에 관심이 많아 소설과 수필, 시 등을 발표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방정환은 3월 1일 자를 마지막으로 못 나오게 된 <조선독립신문>을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박아 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그해 12월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綠星)>을 발행하였다.
<신청년>과 <녹성> 발간 경험을 토대로 방정환은 <신여자>의 편집 고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의 활동은 그가 1920년대에 본격적인 언론·출판인으로서의 활동을 펴나가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20년 당시 방정환은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잡지인 <개벽>의 도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고,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창립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특별청강생으로 다니며, 철학과 아동문학, 아동심리학과 문화학 등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장으로서 청년을 선동하여 저항운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종로구치소에 구속되었다. 며칠 만에 풀려나자 다시 일본으로 떠나 세계 명작 10편을 번역하여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어린이날을 기념하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방정환, ‘어린이 동무들에게’ 중에서, <어린이> 1924, 12)
1923년은 방정환에게 특별한 해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가 본격적인 아동문학과 문화운동을 전면에서 전개했다. 1923년 3월 16일 도쿄 하숙집에서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 창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고, 도쿄에서 편집한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개벽사에서 3월 20일 창간하였다. 색동회는 3월 30일 창립되었고, 5월 1일 서울 시내 소년단체들의 연합조직인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은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5월 1일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이 선창 되었고, 1923년 5월 1일 색동회 발대식과 함께 어린이날 기념식이 최초로 열렸다. 어린이날은 이후 천도교 중심의 민족주의 소년운동과 오월회 중심의 무산소년운동으로 통합되고 분열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의 날짜가 변경된 것은 1928년이다.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메이데이 날과 공교롭게 겹치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해마다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린이날 행사가 매년 지속되었지만,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에 금지됨과 동시에 소년단체도 강제 해산을 당했다.
어린이날은 해방 이후 1946년 5월 5일로 공식 제정되면서 부활하였다. 5월 첫 일요일이었던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바뀌게 된 것은 1946년 해의 첫 일요일이 마침 5월 5일이고,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5월 5일로 날짜를 고정시킨 것이다. 해방 이후 첫 어린이날 기념행사는 휘문중학교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75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될 때까지 방정환이 만든 색동회를 중심으로 어린이날 행사가 꾸준히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작은 물결을 일으킨, 소파 방정환
어린이날과 함께 국내 최초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만든 방정환은 언론인이자 출판인, 운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이 가져온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7월 23일에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직전까지도 동화집필과 구연동화에 몰두했던 어린이들의 대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이 국민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와서이다. 이때부터 어린이날은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고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어린이를 위해 한국 최초의 동화집을 펴내고 어린이날을 만들어 준 분으로서 칭송받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은 불꽃처럼 짧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방정환의 호인 ‘소파(小波)’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아동문학자인 이와야 사자나미(嚴谷小波)의 호를 본떠서 지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전개한 김기전의 호인 ‘소춘(小春)’과 연관지어 천도교 사상을 담아낸 것으로 해석한 설이다. 어느 날 방정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김기전과 함께 호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김기전은 소춘으로 자신은 작은 물결이라는 뜻인 소파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30년 이탈리아, 나폴리서 대지진.
2534명 사망, 4264명 부상
(6000여 사상)
▶1926년 항일투사 박열의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옥중 자살
(의문사)
▶1925년 일제,
한국서의 좌익운동자 대량 검거
▶1916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1907년 도쿄 유학생팀과 기독교
청년회원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공식경기 훈련원에서 열려
▶1906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제3회 범미(汎美)회의 열림
▶1904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사망
▶1903년 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110년 전, 헨리 포드를 살린 1320달러 짜리 '모델 A'
자본금 10만 달러와 12명의 직원으로 1903년 '포드'를 설립한 청년 헨리 포드. 하지만 그 해 7월, 헨리 포드는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고 만다.
회사 잔고는 단 250달러 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더 이상 자금을 대겠다는 투자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포드를 구한 것이 있다.
1903년형 모델A 3대가 1320달러에 팔리면서 자금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이후 헨리 포드는 자동차 왕으로 그리고 포드는 오늘날 전 세계자동차 산업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가장 전통있는 메이커로 성장을 했다.
이날 모델 A 3대가 한 꺼번에 팔려나가지 않았다면 오늘 날 포드는 역사속으로 사라졌거나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비약하자면 자동차가 인류 문명의 발전에 미친 영향이 줄었거나 늦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이전까지 수공업 형태로 제조하던 생산 방식을 버리고 1913년 조립 라인 방식인 '포드시스템'을 만들어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하면서 본격적인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늘 날 포드의 존재가 가능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903년형 모델 A는 그러나 전 세계에 단 한 대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포드의 소유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헨리 포드의 증손자이자 현 포드의 회장인 빌 포드는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포드의 역사를 이어 줄 수 있는 상징적 존재인 1903년형 모델 A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전 세계에 단 한 대 밖에 남아있지 않은 1903년형 모델 A는 지난 10월 옥션 경매에서 누군가에게 팔려 나갔다. 정확한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수 백억원대의 가치를 가진 모델A를 낙찰 받은 이는 바로 빌 포드였다.
모델 A는 1927년 다시 생산되기 시작해 이후 수 백 만대가 판매됐고 모델 T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포드 신화의 토대가 됐다. 1927년 이후 생산된 모델 A는 국내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빌 포드가 사들인 모델 A는 포드 역사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차량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모델 A를 손에 쥔 빌 포드는 "모델 A는 우리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줬고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그의 신념인 모든 사람들이 탈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 수 있도록 연구가 계속될 수 있도록 한 차"라며 감격해 했다.
포드의 역사를 담고 있는 모델 A는 2013년 7월 30일, 헨리 포드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가족과 직원들의 파티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빌 포드는 이 역사적인 날에 기념비적인 모델 A를 복원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포드는 2012년 12일 이 역사적인 차, 모델 A를 이미지로 먼저 공개했다. 포드에게 더 없이 소중한 모델 A가 자동차 왕 헨리포드의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공개 될지 벌써부터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894년 대원군, 입각해서 국정참여
▶1885년 미국 남북전쟁 말기(1864-65)에 북군 총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장군,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사망
▶1875년 오늘,
미국 발명가. #이삭_메리트_싱거 (Isaac Merit Singer)영국 페인턴에서 사망.
(1811년10월27일 미국 뉴욕 주 피츠타운 에서 출생~ )
「싱 거」재봉침은 그의 이름대로! 처음엔 기계공이었는데, #재봉침을 발명, 특허를 얻고 1851년 뉴욕에 공장을 설립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다.
https://m.blog.naver.com/ydc0923/221520405447
싱거 미싱의 역사
미국 보스톤 시에 이삭 메리트 싱거(Issac Merrit Singer)라는 사람이 있었다. 도시 빈민이었던 그는 어...
▶1856년 인도의 사회운동가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918년 왕건, 고려 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