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시인 | 최서린 |
깨진 유리, 부서진 희망 외 2편
순간, 유리잔을 놓친다
황급히 뻗은 손을 할퀴고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손바닥 어딘가에서 슬픈 핏방울이 떨어진다
놓쳐 버린 것은 다시 잡으려 애쓰지 말라고
아려 오는 손바닥이 속삭인다
깨진 조각이 네게 박혀 피를 낸다
흐르는 피를 닦으며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웃으며 말하는 너의 눈은 다른 말을 한다
흰 옷자락에 물들까 흠칫 손을 치우지만
모르는 척 빠르게 번져 가는 시뻘건 아픔의 색
목적 없이 어질러져 흩뿌려진 유리 조각을 치우려고
무릎 꿇은 내 머리 위로 시간의 무게가 떨어진다
‘예외는 없다, 거스르지 마라!’
커다란 벽시계가 차갑게 내뱉는다
부풀었던 희망은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네가 떠난 날
닿을 곳 없는 이름을 숨죽여 부르다
내 안에 침묵으로 가둬 버리는 날,
단 한 번도 배부른 적 없었던 사랑은
그런 날을 남기고 떠나간다
날 선 시간 위를 맨발로 달렸지만
잡는다고 잡힐 리가 없음을 알기에
눈으로 뒤를 쫓아 그리움 한 톨까지 얹어 보내는
그런 날을 남기고 사라진다
서서히 닫히는 문 뒤에 숨어 버린 지난날
차마 불러 볼 희망까지 거두어 사라지는 그림자를 보며
다시는 그 문을 열지 않으리라 마음먹는
오늘은 그런 날이다
시 간
꽃처럼 부풀어 오른 희망이 날 선 절망에 터져 버린다
짙푸르게 파아란 하늘 아래 희미한 무지개가 보일 듯 말 듯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같은 시간을 살면서 다른 속도로 걸어간다
시간은 같은 이름이면서
여러 가지 얼굴로
너에게
나에게
늘 거짓말을 한다
| 당선 소감 |
몇 십 년을 살아온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를 향하는 여정의 시작은 휴가 여행처럼 가볍고 설레기까지 했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것들에 대한 하소연을 들어줄 친구도,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조언과 지지를 아끼지 않을 가족도 곁에 없었다. 그때마다 글을 쓰는 작업은 나에게 숨 쉴 틈을 열어 주었다. 캐나다에서 보내는 많은 밤,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스크린에 대고 풀어냈다. 날것의 감정으로 채워진 글은 나에게 깊은 위로를 건네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날에는 날 선 감정의 모서리를 깎아 내고, 색을 입혀 가며 글을 다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감정은 글 깊숙이 숨어 버리고 또 다른 느낌의 글로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내 글에 담긴 계절, 온도, 습도, 바람 냄새와 빗물자국까지 모두 찾아낼 수 있다.
언제까지고 나만의 대나무 숲일 줄 알았던 글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퍼즐 같은 글 안에서 독자들은 나와는 또 다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새로운 퍼즐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
| 심사평 |
시적 사유와 자기 인식의 치열성
최서린의 「시간」 「네가 떠난 날」 「깨진 유리, 부서진 희망」을 추천한다. 서린은 이미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주관 신춘문예에서 입상하고, 현재 캐나다 한인문인협회(KCWA)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번 응모작들은 특히 시간에 대한 자아 인식과 사유가 삶 속에서 잘 녹아들어 있다.
「시간」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시간과 기억은/ 지름길로 오지 않고/ 빛과 바람 타고 온다”라는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란 “같은 시간을 살면서”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다. “같은 이름이면서” “여러 가지 얼굴로” 살아가는 존재의 내밀함은 아마도 화자가 이민자로서 겪은 어떤 본능의 자연스러운 발로로 보인다. 이 화자의 본능은 이어 「네가 떠난 날」과 「깨진 유리, 부서진 희망」에서 구체화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네가 떠난 날」은 인간성을 위협하고 생의 본질을 잃어 가는 현실에서 “닿을 곳 없는 이름”인 “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날 선 시간 위를 맨발로” 달릴 만큼 절실했지만 “단 한 번도 배부른 적 없었던” “너”에 대한 사랑은 이제 “서서히 닫히는 문 뒤에” 숨어 버리고 “차마 불러 볼 희망까지 거두어 사라지는 그림자”에서도 한사코 절망과 아픔에 빠져들지 않는, 그래서 “다시는 그 문을 열지 않으리라 마음먹는” 시적 정신이 좋다.
「깨진 유리, 부서진 희망」은 순간적으로 놓친 유리잔으로부터 치열한 자기 인식을 전개하는 힘이 좋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유리잔이 “황급히 뻗은 손을 할퀴고” 이어 “손바닥 어딘가에서 슬픈 핏방울이 떨어진다.” 동시에 또 하나의 자아인 “네게” “깨진 조각이” “박혀 피를 낸다.” 손바닥이 아려 온다. 그리고 그 손바닥이 “놓쳐 버린 것은 다시 잡으려 애쓰지 말라”고 속삭인다. 이어 “흩뿌려진 유리조각을 치우려”는 화자에게 “예외는 없다. 거스르지 마라!”는 존 홀 휠록이 주장하는, “무의식적인 예지의 순간에, 모든 자아를 포함하는 현명한 어떤 자아가 시인을 통해서 말하는 네 번째 음성”이 들려온다.
멀리 캐나다에서 이제 『문예바다』로 당당하게 시인으로 살아갈 서린 시인에게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는 또 다른 시적 세계를 탐험하고 체험하면서 긍정적 사유와 따뜻한 시선으로 개성 있는 사유의 깊이를 보여 주길 바란다.
허형만(시인・목포대 명예교수)
계간 『문예바다』 (2023년 가을호)
최서린 시인
2016년 캐나다 이주
2021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제12회 국내 및 해외 한국어 교육자 체험수기 공모전 입상
2023년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신춘문예 입상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시・수필분과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