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은 에서와 그의 후손에 대한 기록입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죽음 후, 야곱과 함께 동거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재산이 풍부해져서 결국 야곱을 떠나 세일로 가게 되었습니다(6~7). 에서는 세 아내로부터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호리 족속을 점령하고 세일에서 에돔 족속을 이루게 되었고 그 왕국의 발전까지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에서 가문은 야곱 가문에 비교하면 훨씬 더 빠른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세속적 성공은 영적 위대함보다 훨씬 더 급속하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에게 약속된 영적 축복은 믿음의 인내를 크게 요구하기도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불신자들의 형통과 자신의 형편을 비교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시 49, 73편). 비록 축복의 약속의 계승자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지만, 그 약속은 어쩌면 인간의 관점에서는 매우 더디게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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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두라의 소생과 이스마엘의 족보가 소개된 것처럼(창 25:1-18), 오늘 본문은 야곱의 시대가 끝나고 요셉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에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9절에는 세일 산에 거주한 에서의 후손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20-30절에는 호리 족속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1-43절 부분에는 고대 왕국 시대에 통치한 에서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처럼 이방 족속의 계보를 기록한 이유는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임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에서가 세일 땅에 정착한 후 번성하여 한 민족을 이룬 사실이 족보의 형태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25:23에서 말씀하신 대로 리브가의 태중에 '두 민족'이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성취되어 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야곱의 후손도 중요했지만, 더 넓은 의미로 에서의 후손 역시 두 민족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2-5절까지를 살펴보면 에서는 세명의 아내에게서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만큼은 못한 수였지만 후일 그들 후손의 수는 야곱의 후손의 수와 거의 비슷해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후손의 수가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제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부터 성경 속의 주요 인물, 역사 사건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실 때 야곱같은 사람도 선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생애를 살펴볼 때 결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로마서 9:13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에서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어려서부터 믿음이 없었고 그의 생활자체가 당연히 선택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창세기 본문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살펴보면
1) 25:34에 자신의 장자권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고
2) 26:34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은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게다가 그들을 하나님의 신앙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에 젖어 삶으로써 부모를 근심하게 한 불효를 행했습니다.
3) 36:6에 더욱이 물질이 많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갔던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도 그 행위가 선했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에서를 버리신 것도 그 행위가 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억울하게 버리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 원칙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도 나의 공로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선한 사람을 버리신 억울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신앙의 사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은커녕 자손 대대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가문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손들에게 내리신 축복은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 기록된 에서의 족보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자손을 번성케 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이스마엘의 경우도 비록 서자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번성케 하셨던 것처럼 에서의 자손도 크게 번성케 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물질적으로도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이삭을 모시는 동안 에서와도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야곱의 육축만 많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거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더 나아가 왕국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거쳐 오랜 후에 가나안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지만 에서의 자손은 오늘 본문 31절에 보시면 일찍이 왕국을 이루었고 그것은 마침내 에돔이라는 강대국으로 이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난날, 에서에게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당연히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에서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행스럽게만 일생을 보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그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에 동참하게 하신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배금주의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보다 육신의 삶에 있어서 에서의 가문처럼 잘살게도 번성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때로 많은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73편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찌하든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고 더 큰 믿음위에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절에 야곱과 에서는 그들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모든 가족들과 재물과 짐승들을 이끌고 세일 산에 거했습니다.
이곳의 현 위치는 예루살렘의 서쪽 약 14km 지점으로 가나안을 벗어난 사해 남쪽의 아라바 산악 지대입니다.
이후부터 세일은 하나님 백성들의 성인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이방 땅의 성으로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에서는 세일 산에 정착하고 그의 후손들 대대로 삶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31절에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에 이미 에돔 땅에는 왕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에돔 족속은 독립된 나라를 이루면서 정치 경제 모든 부분에서 이스라엘보다 발전된 상태에 있었고 외형적인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32절 이하에 나오는 왕들은 에돔의 기틀을 닦은 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에돔왕국을 훌륭히 발전시킨 왕들 입니다.
39절의 바알하난과 하달 시대에 와서야 이스라엘에 첫 번째 왕인 사울이 등극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40절 이하에는 에돔의 왕들에 이어 족장들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업적이나 신상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인물들이 족장이었는가에 대한 소개만이 나올 뿐입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시작되는 야곱의 후손들을 중심한 구속사의 전개를 위해 한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후예에 대해서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마지막 이방 족보로서 장차 일어날 이방 민족들의 침략에 대한 그 배경적인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모든 부분에서 야곱보다 나은 조건을 타고 났지만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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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에서 이삭이 죽음을 맞은 이후 36장에는 에서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37장 야곱의 족보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배열 방식은 창세기를 기술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즉 한 세대가 마치면 그 직후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후손의 족보가 등장하는 식입니다. 롯이 그러했고, 이스마엘이 그러했으며, 이제 에서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분량이 상당합니다. 창세기 50장 중 1장, 총 43절에 해당하는 이 에서의 족보가 별 뜻 없이 들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서의 족보: 세 아내와 다섯 아들(1-8)
(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1절부터 8절까지는 에서의 세 아내와 다섯 아들을 밝히고, 그들이 에돔으로 이주한 과정을 그립니다. 그런데 에서를 에돔이라 칭합니다. 앞장에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에서는 에돔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붉다’ 또는 ‘털이 많다’는 뜻인데, 에돔 역시 ‘붉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돔은 현재 요르단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유명한 페트라가 있습니다. 페트라는 ‘반석’이라는 뜻으로 사암(砂巖)으로 이루어져 붉은색을 발하는 바위산에 건설된 고대 도시입니다. 또 와디럼이라는 붉은 사막 역시 이 지역의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에서는 붉은 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에돔이라는 명칭은 여러모로 잘 어울립니다.
본문은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도트, 즉 10개의 족보로 구성되는데 그중 에돔의 족보는 특별히 1절과 9절에 나오는 에서의 톨레도트 두 개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 창세기 끝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족보인 야곱의 톨레도트가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약속의 자손인 직계 톨레도트 외에 방계 톨레도트가 세 개 있습니다. 즉 셈, 함, 아벳의 톨레도트(창 10:1-9), 이스마엘의 톨레도트(창 25:12-18), 에서의 톨레도트가(창 36:1-8, 36:9-37:1)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그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인물의 족보 앞에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계승자에서 멀어지며 이후에는 다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두 족보를 비교하는 식으로 두시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선택과 배제라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역사 구성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셈, 함, 아벳 중에서는 셈이 선택되었고,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는 이삭이 선택되었으며, 야곱과 에서 중에서는 야곱이 선택됩니다. 선택과 배제라고 하면 배제된 이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여기서 선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계통에 집중한다는 의미이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자동적으로 멸망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이 언약 백성은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미래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말라기 1장 2절과 3절, 그리고 로마서 9장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야곱과 에서의 삶을 살펴봤지만, 야곱이 에서보다 성품에 큰 우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둘 다 결함이 있었고 부족했습니다. 장자의 권리를 소홀히 여기고 이방 여인을 맞이한 일이 아버지를 속이는 일에 비해 큰 흠인가 싶기도 합니다. 20년 동안 외삼촌 아래서 고생한 야곱도 안타까운 면이 있지만, 복수심에 사로잡혀 아우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에서도 가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말씀을 접할 때 그 이유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에서를 그렇게 만드셨습니까?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스펄전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째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고 하셨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게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일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우리의 개입이 전혀 들어갈 틈새 하나 없이 하나님께서 답이 되어 주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만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모를 만큼 모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룰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는 두 가지로 왜 나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왜 하필 저입니까? 왜 하필 제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까? 라는 원망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묻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저일 수 있습니까? 왜 나에게 이렇게 선한 일을 행하십니까? 라는 감사의 질문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삶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하나님이 왜 허락하셨는지 모르겠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때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래 하나님은 없어. 내 뜻대로 하겠어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하시겠습니까. 똑같이 중한 질병에 걸려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실 수 없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반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2-5)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에서는 야곱에 비해 훨씬 일찍 장가를 들었습니다. 창세기 26장 34절을 보면 에서는 40세에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 기록에는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또 28장 9절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이자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 이름과 출신이 36장에서 기술하는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지 사실상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결혼 전의 이름과 결혼 후의 이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당시 사람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지녔다고 보기도 합니다만 이해가 어려운 지점입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에서가 야곱과 리브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여성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고, 이후에는 부모님의 마음에 들고 싶다고 자기 뜻대로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26장 35절에는 그들이 야곱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기록하며, 창세기 27장 46절에는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큰 고부갈등이 있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발생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입장은 묻지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해놓고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그것을 원하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생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자기 뜻대로 해버리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했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았느냐고 우기는 일은 없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뜻을 강요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6-8)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에서는 가나안에서 났고, 가나안에서 자랐으며, 가나안인 아내를 구하여 가나안에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 기약 없는 삶을 살아갈 때, 에서는 이미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고 야곱만 제거한다면 약속의 땅을 누릴 적자가 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가나안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3절을 보면 이미 에서는 세일 땀 에돔 들에 있었다고 말하고, 32장 16절에서는 에서가 세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서는 에돔에서 어느 정도 정착을 했었고, 야곱이 돌아왔을 때부터 함께 아버지 곁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에서는 야곱을 떠나갑니다. 특히 본문은 에서가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쌓은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지고 떠났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에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제 야곱에게 선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롯이 그러했듯이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롯과 마찬가지로 동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언약의 장본인인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에서는 자연스럽게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이방의 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일이 평화롭게 이루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고생할 때에 에서가 너를 용서하고 가나안 땅을 양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또 에서에게 네가 결국 이삭을 용서하고 가나안 땅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전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른 지금 이곳을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이것은 내 소유이며 내가 계획했던 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서는 야곱이 도망간 후 그를 언젠가 죽여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려고 군사력을 키웠지만 결국 그 땅에서 물러나고 맙니다. 또 야곱은 반대로 약속과 전혀 상관없는 땅에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삶의 엇갈림을 경험합니다. 저는 5-6년 전쯤에 우연히 우리 교회 교역자 청빙 공고를 봤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지원하는 기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습니다만, 우리 교회에서 사역한다는 게 언감생심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당시 제게 100주년기념교회에 갈 수도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했으면 말도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족하지만 어엿하게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께서 왔으며,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치달았던 두 형제의 엇갈림은 하나님의 신비하고도 오묘한 일하심을 일깨워 줍니다.
에서의 족보: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9-19)
(9-14)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1절에서는 에돔의 족보라고 하였는데 9절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그 땅에 존재했던 세일의 자손을 흡수하여 자신의 족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에서는 대단한 수완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과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돔은 이스라엘 역사에 걸쳐 형제에게 도움이 아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 23장 7절을 보면 모세는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고도 했지만, 그들은 우호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출애굽 당시 모세가 에돔 땅을 통과하고자 했을 때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 시대에는 에돔 지역을 정복하지만, 분열 왕국 시대에 에돔은 계속해서 유다를 배신하고 괴롭혔습니다. 특히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할 때는 바벨론과 한통속이 되어 유다를 침공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오바댜는 이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리고 에돔 사람인 헤롯 대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에서의 후예는 결국 언약에서 벗어난 자로서 언약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15-19)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15절에서 19절은 에서 자손 중에 족장이 된 자들을 기록합니다. 9-14절의 목록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엘리바스의 자손에서 고라 족장이 추가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의 자손 중에 족장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볼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에서는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언약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처럼 보이는 에돔 자손 중에서도 그나스 족장이 있다는 점입니다. 민수기 32장 12절을 보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다고 합니다. 보통 이 두 그나스를 같은 인물로 보는데, 그렇다면 갈렙은 비록 에돔의 후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인물이 되었고, 그 후예들도 그러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에게서 난 아말렉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해를 입혔고, 그에 따라 출애굽기 17장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다윗은 그들을 쳤고, 히스기야 왕 시절에는 세일 산에 피하여 남아있던 아말렉 족속을 거의 전멸시켰으며, 에스더 때는 아말렉 후손인 하만과 그 일가를 처형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에돔 족속 안에서도 두 가지 갈래가 나뉘는 것을 봅니다.
에돔 족속이었기 때문에 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롯이 갈라졌고, 이스마엘이 갈라졌고, 에서가 갈라져 나갔지만, 이제 야곱의 열두 아들은 갈라지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두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야곱의 길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신뢰했던 에서의 길이 있습니다. 심지어 에돔과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도 망하는 이가 있었지만, 에돔 자손 중에서도 흥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손 내미시고 함께 가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기원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각각의 인물을 소개하기 전에 족보를 먼저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을 소개하기에 앞서 셈의 족보와 데라의 족보를 소개하였고 야곱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소개하였습니다. 창세기 37장부터 등장하는 요셉을 소개하기에 앞서 창세기 36장은 긴 분량을 할애하여 에서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에서는 에돔 족속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비록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 장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지만 크고 강성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창세기 36장 20-43절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로, 호리족 세일의 아들들과 족장들이 20-30절까지 나열되며 둘째로, 에돔의 왕들이 31-39절까지 나열 됩니다. 셋째로, 에서 가문의 족장들이 40-43절까지 나열됩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서의 족보를 소개할 때 개인의 업적을 생략하고 이름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기술하였지만,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히 기록함으로 에서의 가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역사적 진실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은 단순히 생활방식이나 거주지의 차이가 아니라 인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빚어낸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20-30)
(20-21) 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요
‘호리’는 ‘동굴에 거하는 자’란 뜻으로 호리 족속이 사암이나 석회암 동굴에 살았음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에돔 족속이 세일 땅에 정착하기 전부터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20-21절에 나열된 세일의 일곱 아들은 곧 호리 족속의 일곱 족장들을 의미합니다. 호리 족속에 대한 최초의 성경 기록은 창세기 14장 6절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 연합군에 의해 호리 족속이 세일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밀려났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창세기 36장 8절에서 ‘세일’이 지명으로 기록되었지만 20절에서는 인명으로 소개되었고 이는 사람 이름이 지명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C. 1200-1500년경에 에돔은 모압과 암몬 등과 연합하여 세일 지역에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22-30) 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과 로단의 누이 딤나요 소발의 자녀는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아나의 자녀는 디손과 오홀리바마니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며 디손의 자녀는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에셀의 자녀는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디산의 자녀는 우스와 아란이니 호리 족속의 족장들은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세일 땅에 있는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었더라
로단의 아들 호리의 이름이 세일 땅의 원주민을 대표하는 부족명이 된 것은 그가 세일의 원주민을 통솔했던 지도자였음을 의미합니다. 20-30절은 족장을 중심으로 호리 족속을 소개하는 중에 22절에서 로단의 누이 딤나를 언급한 것은 그녀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를 통해 아말렉 족속의 시조인 아말렉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언약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방 여인과 결혼하며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에서의 후손들 또한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가문 전체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찾지 않고 800km나 떨어진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감내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였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이상형을 찾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에 아브라함의 종의 험난한 여정은 거룩을 이루는 인내의 걸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삭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리브가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첫째 아들인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것은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습니다(창26:35). 에서는 에돔의 시조가 되었고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는 아말렉의 시조인 아말렉을 낳았다는 기록을 통해 에서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크고 강성한 가문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의 왕들(31-39)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1-39절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일의 원주민이었던 호리 족속을 흡수하여 왕정을 이루었고 이스라엘이 왕정을 수립하기 이전에 이미 벨라로부터 하달까지 에돔을 다스렸던 8명의 왕이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 보다 먼저 왕정을 시작했다는 것은 에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 보다 먼저 국가의 형태를 이루었고 발전된 정치 제도를 이루었음을 나타냅니다. 흥미로운 것은 32절부터 나열되는 에돔의 여덟 왕들이 혈통에 의한 계승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32-39)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을 때 딘하바가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닷의 아들 하닷이 왕이 되었을 때는 아윗이 도성이었고 하달이 왕이 되었을 때는 바우가 도성이었습니다. 에돔에서 여덟 명의 왕들이 통치하는 동안 도성이 두 번이나 변경된 것은 전쟁을 대비하는 전략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한편 에돔에서는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아니라 힘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되었고 자연스레 왕이 바뀌면서 중심 도시가 변경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에돔은 당대에 왕이 죽으면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의 새로운 왕이 등장하였습니다. 에돔의 여덟 왕 모두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던 것은 에돔은 혈통 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나라였음을 의미합니다. 에돔의 일곱 번째 왕의 이름인 바알하난에 바알이라는 가나안의 신 이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에돔이 이미 바알 신앙에 익숙한 나라였음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에 거센 유혹을 받았던 것은 바알이 비와 풍요의 신으로서 풍족한 생활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바알 신앙은 우상 숭배의 본질을 잘 나타냅니다. 인간의 욕망이 우상을 만들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신은 종교 의식을 통해 인간에 의해 다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움직이려는 모든 우상 숭배적 행위를 물리쳐야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에돔이 숭배하는 것은 곧 힘이었습니다. 강력한 힘과 풍요로운 생활을 욕망하는 것은 바알 신앙으로 자연스레 이어졌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는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 달랐기에 두 사람의 인생은 서로 다른 두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에돔에서는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였고 백성들은 그 힘 앞에 굴복하는 방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에돔에서 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은 곧 힘에 대한 충성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대조를 이룹니다. 31절에서 에돔의 왕들을 소개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일반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던 상태였음을 발견합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에돔이 왕정을 이룬 것과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모래알 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연합과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친히 모으시고 인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힘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들은 에서의 족보를 통해 세속 논리와 대조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치관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에돔와 아말렉이 강성한 나라를 이룬 것처럼 보였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세속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창세기의 1차 독자들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마주하였던 도전을 동일하게 직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헤롯 왕이 바로 에돔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던 반면에 에돔 출신의 헤롯은 유대인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눈앞의 현실이 커 보일 수록 하나님의 언약은 희미하게 보였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의 시험을 이기는 힘은 눈앞의 상황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40-43)
(40-43)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에서에게서 나온 열 한 명의 족장들을 나열하며 그들이 소유한 독립된 영역과 영향력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에돔의 통치 체제는 중앙에 왕이 있고 지역별로 족장들이 함께 통치하는 지방 분권적인 형태였음을 발견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서와 에돔에 관한 기록을 마치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는 표현을 통해 창세기 36장 1절과 마지막 절이 쌍을 이루어 중간의 내용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나타내었습니다. 이어지는 37장은 야곱의 가정을 소개하며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중심으로 어떻게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갔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큰 민족이 되어 왕정을 이룬 에서의 가문과 비교하면 창세기를 마칠 때까지 야곱의 가족은 작고 연약한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이사야 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우리는 당장 눈앞의 유혹에 흔들리고 두 눈을 사로잡는 세속적 힘과 매력에 그만 두 눈이 다 뽑힌 채 힘을 잃은 삼손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세상 속에서 굴욕적인 인생을 살고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께서는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며 우리를 부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이기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의 능력이 되심을 깨우쳐주십니다.
족보로 번역된 히브리어 톨레도트는 ‘계보’, ‘후손’, ‘역사’, ‘내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톨레도트를 단순히 족보로 번역하기 아쉬운 것은 톨레도트가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서로 다른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에돔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속적인 나라를 대표합니다. 야곱의 가족은 상대적으로 작고 연약한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을 통해 역사하신 것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돔 출신의 헤롯과 야곱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화려한 왕궁과 사형 틀이 세워진 골고다 언덕이 보여주는 대조만큼 선명하게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만 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친히 돌보시며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다른 집 자녀와 비교할 이유가 없고 우리 가정의 경제 규모를 다른 가정과 비교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 남들이 다 가지려고 하는 것을 좇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톨레도트를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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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에는 에서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에서의 족보가 이처럼 자세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에서의 후손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민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족속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선택받은 족속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끈질기게 괴롭힌 이방인의 족보가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거의 다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에 관한 것들입니다. 먼저 창세기에 10개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마엘의 족보와 에서의 족보를 빼고는 모두 선택받은 백성에 관한 족보입니다. 또한 역대기의 족보, 룻기의 족보, 에스라와 느헤미아에 기록된 족보, 신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모두 선택받은 백성에 관한 것들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책이 성경이라면, 창세기 25장의 이스마엘의 족보와 오늘 본문의 에서의 족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승자와 패자가 있듯이, 이 땅에는 처음부터 선택받은 백성과 선택받지 못한 백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선택받은 백성만이 아니라, 선택받지 못한 백성, 즉 이방인들까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에서의 족보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이며,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선택받지 못한 백성, 즉 에서의 후손들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4명의 헤롯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헤롯 가문은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2000년 전,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이 온누리에 선포되었을 때, 그 사실을 알고 기뻐 경배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히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왕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두메인이었는데, 이두메는 <에돔사람의 땅>이란 뜻이고,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땅에 살았기에 이두메인은 에돔땅에 사는 에서의 후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헤롯 가문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에서의 후손을 포함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후손인 헤롯왕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2번째 헤롯은 분봉왕 헤롯입니다. 그는 이복형제인 동생의 아내를 힘으로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며 헤롯을 책망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결국 자기 딸 살로메가 춤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자 그대로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다고 했는데, 헤롯은 그 위대한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번째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 결과 벌레에 먹혀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4번째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사도바울을 잡아 감옥에 가둔 벨릭스 총독과 절친한 사이로 사도바울로부터 직접 간증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말씀을 거부하여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헤롯 아그립바 2세를 끝으로 에서의 후손이었던 헤롯 가문은 완전히 멸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헤롯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서의 후손을 너무도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선지자들을 보내셨으며, 세례 요한과 사도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겨 선택받은 백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태초부터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의 선택이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루어진 사실임을 성경을 통해서 주장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때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된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말씀들을 근거로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받은 백성과 선택받지 못한 백성이 정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야곱과 에서의 각 개인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두 민족 가운데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이지, 특정 개인이 구원받을 것인지 멸망받을 것인지를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일어날 일도 아십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베드로가 어떤 노력을 해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운명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를 향해서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면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만에 빠져있던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도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에 결국엔 주님의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가롯유다도 마찬가지고,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날때부터 가롯유다는 주님을 은30에 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고, 빌라도는 십자가에 주님을 내주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정해져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에서의 족보를 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되는 구원받을 사람의 이름은 태초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은 에서의 후손에게 노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구원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에서의 후손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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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삶의 비결
창세기 36장 전체는 에서의 족보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매우 번성하였고 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자손들과 족장들, 왕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에서와 그의 후손들이 이렇게 번성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 더 나아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신자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성공과 번영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에서와 야곱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에서는 가나안 땅을 떠나 세일 산에 거하였고(36:8),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살던 땅에 있습니다(37:1). 35장 27절에 보면, 야곱은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갑니다. 얼마 후 이삭이 죽게 되었고, 에서와 야곱이 함께 이삭을 장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가 살던 헤브론 땅에 함께 거주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에서가 세일 산으로 떠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서 더이상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던 것처럼, 에서가 야곱을 떠납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복을 주셨는데,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남았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두 나라가 네 태중에 있다고 하시면서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크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서와 에서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은 가나안 땅에서 야곱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결국 가나안 땅을 떠납니다. 가나안 땅을 떠난 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망해버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복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세일 땅에 거주하던 오리 족속을 몰아내고 에돔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보다 훨씬 앞서서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에돔은 자기의 번영과 위대함이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선물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지요. 오뱌댜서는 에돔의 심판을 말하면서, 에돔의 죄는, 형제인 이스라엘이 침략을 당할 때, 그들에게 동참하였고, 방관하였고, 기뻐하였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과 능력을 자신의 것인냥 자랑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을,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참된 복을 받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이유들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세상의 누구도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자신이 이룬 것인냥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성공에 주목하기 보다 그러한 성공과 복을 주실 있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나라들도 그렇게 강하고 번성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든지 더 크고 좋은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복, 가장 위대한 복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원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세상의 번영과 성공보다 더 크고 위대한 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을 복된 삶이라 생각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이 거하라 하신 곳에서 순종하는 것이 복된 삶의 비결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가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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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의 족보
창세기 36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창36:1)
야곱의 형인 에서의 족보에 관하여, ‘에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한 족속의 족보에 대해 나열합니다. 우리는 족보가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족보는 한 족속의 혈통이 어떻게 구성되어졌는지, 어떤 역사의 줄기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어찌하여 장남인 에서는 약속의 자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둘째,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에서와 함께 하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에서의 길
먼저 첫 번째 질문을 찾기 위해 본문 36장 2-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이 말씀을 보면 에서가 맞이한 여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하였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결혼은 혈통과 가족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둘다 자신의 아들들이 데라 자손의 혈통과 결혼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상들의 전통이며 약속의 유업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이미 살펴본 창세기 27장 46절에서 리브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사람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라고 전합니다. 즉, 에서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통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인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 가족의 뿌리를 떠난 것입니다. 또한 에서는 약속의 땅을 떠납니다. 자기 동생과 함께 살 수 없다고 결정하고 떠납니다. 성경은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였기 때문(7)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3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나안은 야곱과 다른 사람이 함께 거주할 만큼 넓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땅을 떠납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창25:23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큰 자는 어린 자를 섬리리라” 창1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긴 삶의 결국이었던 것입니다.
에서를 버리셨는가?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족도 떠나고, 그 땅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유효한 것이 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그의 삶과 함께하고 그의 삶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는 한 가족에서 족속을 이루어 번성하였습니다. 그의 족보를 들여다 보면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시고, 복을 내려주셨구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에서는 약속을 벗어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서와 함께 하셨습니다.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떠난 자녀를 족보에서 지우지 않고, 그 자식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참 부모이듯이, 하나님은 에서를 돌보셨습니다. 마치,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고,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씨로 여기시고, 돌보셨듯이 에서의 삶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에서가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섬기는 것을 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길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나는 어떤 길에 있는가?’를 상고해 보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업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가? 아니면 곁길로 나와 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떠난 백성들이 주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믿음을 떠난 지체들, 하나님을 모르는 지체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