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정일남(시인)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을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나는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위의 시는 1934년 4월 <文學>지 3호에 발표된 작품이며 1935년에 펴낸 시집 영랑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이 수록된 <文學>지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14행의 시로써 그가 즐겨 쓰던 영랑 시의 모법을 보여준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한과 이별의 슬픔을 묘사하면서 한국인의 마음속에 한의 정서를 심어주었다면 김영랑은 <모란>을 봄의 상징물로 보면서 삶의 기대와 실망을 묘사했다고 볼 수 있겠다. 희망이 상실된 뒤의 절망을 느끼게 하면서도 ‘슬픔의 봄’을 다시 기다리게 하는 시인의 기대가 절망을 절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진달래와는 달리 모란은 화사한 꽃이다. 일명 목단牧丹이라고도 한다. 화투에도 목단꽃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설레는 봄을 기다렸으나 모란이 오래가지 못하고 지게 되면 봄을 떠나보낸 설움에 잠기는 심정은 우리가 겪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란이 지고나면 다시 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봄은 찬란하지만 슬픈 봄이 된다. 조선 말 개화기 때 이해조가 쓴 신소설 목단병牧丹屛은 갑오개혁 이후의 조선사회가 와해되어가는 과정을 여주인공인 금선의 고난을 통하여 보여주는 소설이다. 모란의 꽃말은 부귀영화를 말한다.
봄이 오면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게 된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지구가 공전주기를 거쳐야 피게 된다. 365일이 소요된다. 모란이 피기를 바라던 기다림이 너무 컸지만 꽃은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모란이 뚝뚝 떨어지면 서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 모란이 지고 만 것은 한 해가 다 가고 만 것이고 이런 섭섭함을 인간은 경험했다.
그러나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찬란한 오월을 기다려야 한다. 지구가 공전으로 한 바퀴 돌아올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견디어야 한다. 기다림이 있기에 봄은 오는 것이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봄이 와도 모란의 찬란함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다. 김영랑은 모란을 통해서 찬란한 봄과 슬픔의 봄을 느낀다. 꽃이 화무십일홍이듯이 인간의 삶도 그렇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지면 기다림으로 이어진다. 이 모란의 시는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릴 번 했다. 1930년대 어느 초봄, 시 창작대회에서 영랑은 모란을 보고 시를 썼지만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공개하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춘원 이광수가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다시 주워 낭독해 큰 박수를 받고 살아났다고 전한다.
모란에 관한 하나의 일화가 있다. 모란은 향기가 없다고 알려졌다. 신라 선덕여왕이 모란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한 얘기다. 모란의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지지 않은 것을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다’고 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다. 신라 진평왕 때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 자줏빛, 흰빛의 모란꽃 그림과 꽃씨 석 되를 선물로 보내왔다고 한다. 진평왕이 내전에서 모란꽃을 보고 있을 때 만덕공주가 말했다.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만덕공주의 말에 진평왕은 의아해서 만덕공주에게 그걸 어찌 아느냐고 물었다. <이 꽃을 보면 벌도 나비도 없습니다. 대체로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모이는 법입니다. 이 꽃 그림은 아름다우나 벌과 나비가 없는 걸 보아서 향기가 없는 게 분명합니다.> 진평왕은 신하에게 꽃씨를 주며 뜰에 심도록 했다. 그 후 꽃이 피었으나 꽃에 향기가 나지 않았다. 이 만덕공주가 후에 신라 27대 선덕여왕이다. 모란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쓴 이야기 한 토막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속삭이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른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은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전문
위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은 1930년 <시문학> 제2호에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로 발표되었으나 1935년 간행된 영랑시집에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로 제목이 고쳐졌다. 김영랑의 위의 시를 보듯이 그의 한국적 정서의 아름다움은 가히 으뜸이라고 하겠다. 돌담의 햇살과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과 같은 표현은 김영랑이 아니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다. 그의 정서와 가락은 음악의 가사를 염두에 두고 쓴 듯한 감이 없지 않다. 새악시 볼의 부끄러움이나 시의 가슴에 젖는 물결 같은 표현이 그렇다. ‘실비단 하늘’도 영랑만의 것이다. 음악을 전공하려고 일본으로 갔던 영랑이었다. 비록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을 전공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시에 흐르는 음악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이 김영랑 시의 장점으로 보인다. 위의 시는 곡이 붙어 노래가 되었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군 남성리 221번지에서 500석 지주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강진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유학하여 휘문의숙을 나왔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그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완고한 아버지가 음악을 하면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해 일본 도쿄 청산학원 중학부 영문과를 택했다. 그리고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진학을 했다.
영랑은 1919년 3.1 운동 때 휘문의숙에 재학했는데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 밑에 몰래 감추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독립선언문이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김영랑은 강진에서 김현구, 차부진, 김길수 등과 같이 <청구>라는 문학동인지를 발간했고 그 후에는 박용철과 동인지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다.
해방이 되고 1948년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으며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여 단장 역임했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영랑은 서울 성동구 신당동으로 이사를 해 살면서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지내기도 했다.
김영랑은 14세에 조혼하여 강진읍 도원리에 사는 김 검사의 16세딸 김은하와 결혼했다. 영랑은 서울 유학 중에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진 생가로 갔지만 아내는 이미 이승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지 1년이 지나서 아내와 사별했다.
그 후 18세의 영랑은 이화여전을 나와 그의 집에서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인 마재경과 열애에 빠졌지만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자 끝이 났다고 한다. 또한 김영랑은 숙명여학교 2학년의 최승희와 1년여 간 사랑에 빠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후에 한국 무용계의 여왕이 된 그녀는 좌파 문인인 안막과 결혼해 월북했다. 최승희는 북한에서 교수를 지내며 최고의 유명세를 떨치다가 56세 때 남로당사건으로 숙청되었으며 2년 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랑은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사로 근무하던 김귀련과 재혼하게 된다.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의 주례로 개성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은 7남 3녀를 두었다 한다.
영랑은 김소월 이후 우리말 구사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박용철과 같이 <시문학>을 주도해 카프 중심의 비문학적 정치색을 배격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확산된 순수시의 세계를 지향했다. 영랑은 일체의 이념적이고 사회적 관심을 배격하고 오직 섬세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추구하는 시를 썼다. 이는 개인의 내면세계에 빠져 시대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소월과 함께 언어의 미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적 정서를 중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애수적인 시 경향은 일찍 아내와 사별한 원인도 있었다고 보인다. 영랑은 음악을 선호했으므로 그의 시는 음률을 중시했고 고향인 남도의 정서가 물씬 배어있어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란 것을 증명했다. 영랑은 강진 집의 사랑채에서 임방울, 이화중선, 이중선 등 당대 최고의 소리꾼을 불러 소리 듣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자연에 대한 애정,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시에 반복되며 마음의 내부로 향한 정감의 세계를 이룩했다.
여기 김영랑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산문 「백의白衣」 일부를 올린다.
“백의민족이란 말이 어느 때부터 쓰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요새 와서는 많이 쓰여지지 않으려니와 또 누가 써본다 하더라도 그리 신통한 맛을 볼 수 없다. 우리 민족 표현 용어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기미독립 직후에 그 말이 유행되었고 또 그 말에서 부자연함을 느끼지도 않은 것은 아마 그 시대감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자연히 절차만 있고 수천 년을 살아왔으니 백의白衣에 관한 애착이 생겼을 법도 하다.(중략) 어느 날 S생과 서울에서 번화한 명동 지대에서 하필 소복에 눈이 부딪히고는 약속이나 한 듯 발을 멈추고 말았으니 그 옷감이며 맵시며 얼굴의 표정이며 어머니를 여의고도 벌써 몇 달이나 났을법한 스무 살은 넘었을 자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귀밑머리칼 흰 동정에서 시작되는 흰 저고리의 청초한 곡선, 그 아래 흰 버선, 흰 고무신, 구슬 손에 흔들리는 핸드백까지 한 점 흐림 없는 늦은 가을볕에 오직 한 쌍의 이 소복은 청승맞다 할지는 모르되 참으로 매력 있는 소복이었다. 내 눈에는 시골 산비탈 꼬부랑길이 아른아른 떠오르고 소복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선하게 보인다. 어쩌면 우리 산수山水와 같이 소복은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것인가. 하늘이 맑고 산천이 아름답고 원색原色인 소복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이하 생략)
- 1949년 2월 22일 <연합신문>
김영랑의 위의 백의白衣에 대한 수상隨想을 보면 우리 선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백의白衣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소복한 여인들의 자태, 흰 저고리의 옷 선과 흰 버선에 흰 고무신을 신고 가는 여인의 모습에서 한국 여인들의 맵시를 표현한 글이 시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백의민족을 거부할 수 없는 애착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영랑은 서구사상에 빠진 시인들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김소월과 일맥상통하는 한국 정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산문 「白衣」는 한국인이 선호했던 흰옷에 대한 아름다움과 멋과 맵시를 잘 표현한 글이고 또한 시적 정감이 흐르는 글로 짜여있다고 하겠다.
영랑은 이상화나 이육사, 그리고 심훈처럼 직설적인 저항시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위의 시인들 못지않게 저항정신이 투철했다. 만해와 윤동주처럼 부드러운 언어로 시를 썼으면서도 시의 내부에 흐르는 정서는 부드러움 속에 강한 의식의 강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움 속에 강직함이 있었다.
강진의 김영랑 생가는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까지 45년 간 살았던 집이다. 생가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모란과 우물,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안채 오른쪽에 있는 우물은 <마당 앞 맑은 샘물>이라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 은행나무도 있고 돌담에는 담쟁이넝쿨이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수필 「두견과 종다리」에서 영랑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오! 친구야, 현실은 무섭고 괴롭도다. 이 세태에 태어난 불쌍한 천재들이 허덕이다 못해 모조리 변통하지 않았더냐. 사람으로 살려면 오로지 떳떳해야 하고, 그러려니 현실이 아프고 그대 우리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가는 게지…>라고 탄식했다. 이 글은 일일이 거명하지는 못하지만 일제시대에 많은 문인들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것에 대한 영랑의 탄식이다. 변절한 자들은 좋은 적산가옥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잘살았던 것이다. 위의 글에서 영랑의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올해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영랑에게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김영랑의 막내딸 김애란(75세)과 손녀 김혜경이 김영랑이 돌아간 지 68년 만에 항일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전남 강진군과 영랑기념사업회는 김영랑의 시정신과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28일에서 29일까지 영랑 생가 일원에서 영랑문학제 및 세계모란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영랑문학제 및 세계모란페스티벌은 목포에서 활동 중인 영랑관련 총체극으로 막을 올린다. 영랑문학상 시상식에 이어 전남도립국악단의 창극 <모란이 피기까지는> 청자 전시 판매 모란 화분 전시 및 판매, 차와 시의 어울림, 아나바다, 영랑시집 기념품 등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한다. 첫날 28일 오후 4시에 세계모란공원 개장식이 세계모란공원 현장에서 열린다. 영랑 생가 앞에서는 영랑문학상 시상식이 열린다. 이와 함께 극단 <갯돌>이 영랑의 시 세계를 몸짓으로 표현한 1930년대 총체극으로 선보인다. 오후 5시, 영랑문학제 개막식엔 전남도립공연단의 창극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뮤지컬 소프라노 정수경의 노래로 영랑생가를 감성으로 물들게 한다. 29일은 전국영랑백일장과 전국시낭송대회가 영랑생가 일원에서 진행된다. 이렇게 강진 군민들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행사가 진행된다.
김영랑은 1950년 6.25 때 피난길에 올랐으나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울에서 숨어 살았다. 수복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9월 29일 48세로 작고했다. 유해는 남산 기슭에 가매장했다가 1954년 11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