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는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일본 엔카(えんか) 가수가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
▶요즘 한국 대중가요 트로트(Trot)계에서는 일본의 엔카(演歌えんか) 가요 가수(歌手)들이 한일 양국을 방문하면서 노래 교환을 하는 것이 온 TV 화면을 점령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느낀 바를 쓰고자 한다.
▶1936년 당시 조선 총독이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목포(木浦)를 시배지(始培地)라 알리는 비석을 세웠다. ※시배지(始培地)-식물 따위를 처음으로 심어 가꾼 곳. 곧 목화(木花)를 말한다.
비석 자리는 지금 무화과 밭이다. 밭주인 농부 김남석(84)이 말했다. 아버지 때부터 목화를 했다. 일본이 강제로 목화 재배하라는 얘기는 없었다. (2017.03.22. 조선일보 박종인 땅의 역사에서)
▶1897년 대한제국은 스스로 목포(木浦)를 개항(開港)했다. 대한 제국은 목포 신시가지 땅을 강대국 러시아 일본등 열강(列强)에게 팔았다 유달산 남쪽 너른 신시가지를 일본이 매입했다.
이순신 장군이 거대한 볏짚(나락)으로 위장해 왜군을 도망가게 했다는 노적봉(露積峯) 아래다. ※노적봉(露積峯)이름은 목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필자 자료에 있는 것만도 전국에 약 20여개 노적봉(露積峯) 이름이 있다. 이처럼 노적봉(露積峯)은 시적(詩的)으로 산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한제국은 13년 뒤 망했다. 조선(朝鮮)과 목포(木浦)는 일본 땅이 됐다. 일본인들은 “저놈의 바윗덩이(유달산 노적봉)에 속아서 조선을 일본 땅 만드는데 300년이 걸렸다”고 하면서 을사늑약(乙巳勒約)후 축배(祝杯)를 들었다고 한다. 분통이 터질 말이다.
▶목포 유달산(鍮達山)은 산신 신앙의 대상이며 목포의 자존심이다.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까지 등산로는 1928년 완공됐다. 등산길도 일본풍(日本風)으로 만들었다.
목포(木浦)를 일본어 지명으로 “후쿠오카현인(福岡縣人) 목포부(木浦府)” 글자도 남아있다. 노적봉(露積峯)에서 유달산(鍮達山)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 바위에 조각한 마애석불(磨崖石佛) 88불(佛) 불상(弗像)이 있었다.
이 땅에 영원토록 살 줄 알았던 일본인들이 조각한 석불(石佛)이다. 광복 후 불상(佛像)들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민가에서 가져갔다. 지금도 2개가 있다.(필자가 광주에 있던 1976년경)
▶쌀장사와 목화(木花)사업으로 호남 제일 갑부가 된 일본인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는 목포에 있는 일본 신시가지(新市街地) 호화로운 대 저택((大邸宅)에 살았다.
일본강점후 목포는 “일본 시가지(市街地)”와 “조선 시가지(市街地)”의 국경(國境)으로 나누어졌다.
이 목포시가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목포 사람들은 시(詩)를 썼고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조선일보 공모전에 시인 문일석((文一石)이 이 당선된 시(詩)다. “목포의 눈물”시(詩)에 손목인(孫牧人)이 곡(曲)을 쓰고 이난영((李蘭影)이 노래를 불렀다. 모두 목포(木浦)출신 사람들이다. 이난영((李蘭影)은 진주(晉州)가수 남인수(南仁樹)의 연인(戀人)이다.
▶목포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모충각(慕忠閣)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목화를 심었던밭이 나온다. 이 목화밭 한가운데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棉發祥之地)”라 새겨져 있다. “조선 땅에 목화를 처음 심은 곳”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기념비다. 비석 뒤에 이름 다섯 자가 나온다.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1869~1953). 1904년 조선 땅에 신품종 목화(木花)를 들여온 일본 사람이다.
▶일본의 엔카(演歌えんか)는 일본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서양음악을 수용하면서 만들어진 갈래(genre)라고 음악 전문가들은 말한다. ※갈래(genre)-하나에서 둘 이상으로 갈라져 나간 낱낱의 가닥. 이처럼 일본은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서구에 개방(開放)을 하였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오페라(Opera) 나비부인(Madam Butterfly)등의 이름은 동남아에서는 생소했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1904년에 일본에서 처음공연 되었다.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개방된 일본은 아세아에서는 처음으로 오페라 공연을 하였다. 동남아에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만 읽었지 푸치니(Puccini) 이름도 생소하였다. 그만큼 일본은 일찍 개방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Era Meiji1868-1912)와 다이쇼 시대(大正時代たいしょうじだい1912-1926)를 거치면서 엔카(演歌えんか)는 유행가(流行歌)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시기에 조선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이나 삼일천하(三日天下)등 개혁운동은 전부 실패하고 대원군(大院君)에서 고종(高宗)으로 민비왕후(王侯閔妃)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 개혁은 캄캄한 밤중이었다.
일본의 엔카(演歌えんか)는 대중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으면서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한때 한국 트로트(Trot)는 일본 엔카(演歌えんか)를 모방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 한국의 트로트(Trot)는 대한민국의 당당한 한 음악의 장르(genre)다.
한국의 트로트(Trot) 특징은 한국민요(民謠)의 영향을 받은 “떠는 창법(唱法)”이 특징이다 (트로트 음악계에서는 이 떠는 창법(唱法)을 “꺾기”라고 표현한다) 트로트(Trot)이름은 미국의 춤곡인 폭스트롯(Foxtrot) 어원을 참고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내용은 필자가 20세 무렵에 고향 관공서에 사무를 도와주는 아르바이트(Arbeit)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공무원들은 대부분 일본 식민시 시대에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때 엔카(演歌えんか)라는 말과 일본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당시 일본 남자 최고의 가수는 하시유키오(はしゆきお橋幸夫) 일본 여자 최고 가수는 한국 이미자급의 미소라 히바리(みそらひばり美空ひば)였다. 필자도 이때 배운 엔카(演歌えんか)를 서너곡 지금도 알고 있다. (당시 공무원들이 일본 문화이야기를 많이한 내용을 이글에 참고한 것이다.)
▶이난영의 히트작으로 기록되고 있는 “목포의 눈물”은 전체적으로 한 여인이 임을 그리워하고 임에 대한 절개를 맹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임”은 만해 한용운의 “임의 침묵”처럼 조국 조선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 손목인의 증언을 통해서 “목포의 눈물”이 크게 유행하면서 일본 고등계 형사에서는 오케 회사와 이 노래의 관련자들을 소환하였다.
일본 치하에서 “목포의 눈물”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래 가사중 2절에 있는 “삼백 년 원한(怨恨) 품은 노적봉(露積峯) 밑에” 가사였다. 일본이 “원한(怨恨)”가사를 문제를 삼은 것이다.
노래를 짓고 노래를 부른 관련자들은 변명하기를 “삼백년(三百年) 원한(怨恨) 품은 노적봉(露積峯)밑에”가 아니라 “삼백연(三栢淵)과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露積峯) 밑에”라고 변명을 하였다.
그러나 “삼백연(三栢淵)과 원안풍(願安風)”은 노래 전체의 가사를 볼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변명은 통할 수 없었다.
이처럼 “목포의 눈물”은 상징(象徵)을 통해서 조국을 강탈한 일본에 대한 원한(怨恨)을 드러낸 노래이다. 그 때문에 일본 치하에서 조선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불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다. “목포의 눈물”은 목포(木浦)만의 노래가 아니다.
필자가 광주에 있으면서 목포에 신용이 좋은 거래처가 있었다. 회(膾)가 먹고 싶으면 마케팅 핑계로 목포를 자주 찾았다. 목포. 함평. 다시면. 무안군. 나주. 영산포등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알고 있는 목포(木浦)의 이야기는 매우 많다. 목포 이야기를 여기서는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목포 유달산에 볼만한 것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붓글씨 “유선각(儒仙閣)” 현판이다. 한국역사에서 대통령 급으로 최고의 명필은 단연 이승만. 신익희 선생의 글씨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유선각(儒仙閣) 현판도 참 잘쓴 글씨다. 그 현판 글씨 보려고 일부러 목포를 몇회 찾았다.
이처럼 역사 속에 사연 많은 목포를 상징하는 “목포의 눈물”을 일본가수가 한국말로 불렀다.
한국 트로트의 특징인 “꺾기”를 구사하지 않고 마치 한편의 시(詩)를 읽는 듯한 창법으로 불렀다. 필자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필자 생각이지만 “목포의 눈물”은 기교를 부리면 그 노래 본질의 의미(참맛)를 잃게된다고 생각한다.
일본 가수가 상당히 잘 부른 노래고 설득력 있는 음색(音色)이라 생각한다. 일본 가수는 “목포의 눈물”역사를 아는지 어떤 감정으로 불렀는지 모르지만--
이제 한국과 일본은 “임진왜란 일본 36년 식민지” 역사를 마치 예루살렘 성벽(城壁)에 쓰여 있다는 “Forgive but don't forget”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말과 같이 새로운 차원으로 일본을 상대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