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내 탓이오. / 서영숙
1. 나는 사람을 잘 믿는다. 그러다 보니 믿는 도끼에 발이 자주 찍힌다. 내 딴엔 제법 잘 살핀다고 생각하는데 알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2. 속이는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속아 넘어가니 나는 바보인가. 마음도 약하고 거절도 하지 못하는 귀로에서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되니 창피해서 누구에게 말도 꺼내지 못한다. 어떨 때는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당할 때가 있다. 후회했을 때는 이미 지난 일이다. 대부분 금전 부분과 연관된 일이니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는가.
3. 작정하고 사기 치는 사람한테는 어쩔 수 없이 당하더라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 문제다. 상대가 힘들어하면 여유가 없는데도 대출을 내서 빌려준다. 끝까지 받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자선 사업가도 아니면서 어렵다고 하면 나서려는 마음이 앞선다. 순간만 참으면 되는데 참지 못하는 때가 있다. 큰 욕심은 없는데 끈질기게 권유하면 투자에 기대를 걸어 메꾸려다가 오히려 바가지를 쓸 때도 있다. 이런저런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되는 이유가 뭘까.
4. 어느 날, 차를 운전해 골목길을 가고 있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이었다. 분명히 사람이 없었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웬 남자가 내 차 백미러에 부딪혔다. 놀라서 내려보니 그 남자의 손에 쥐고 있던 폴더형 휴대전화가 땅에 떨어져 두 동강이가 났다. 남자는 서류봉투를 옆에 끼고 지금 바쁘게 일이 있어 가는 길인데 어떻게 할 거냐고 난감해했다. 연신 시계를 보며 빨리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 같이 행동했다. 나도 덩달아 어쩌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하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5.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우고 그 남자가 따라오라고 해서 가보니 휴대폰 가게였다. 폰을 보이며 요즘 이런 물건 얼마면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살펴보더니 최신형이라 백만 원 정도 한다고 했다. 가게를 나와 남자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하는 가게에 가면 오십만 원에 살 수 있으니 그 금액을 달라고 했다. 갑자기 오십만 원이라니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지 않는 본인 잘못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6. 옥신각신 말이 오가다가 내가 그럼 경찰서 가자고 했다. 남자는 짜증스럽게 “여자들은 잘 해 줄라고 해도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다.”라고 하면서 연신 바쁜 척을 했다. 차 운전 속도는 30km 미만이었는데 부딪힐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부딪혀도 휴대폰이 망가질 만큼 세게는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니 그래도 경찰서 가는 것보다 합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오십에서 좁혀 이십 만 원까지 내려갔다. 현금이 없다고 하니 각 은행 위치를 알려주면서 찾아오라고 했다. 은행 위치와 휴대폰 가게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7. 현금을 찾아서 건네주니 바람같이 사라져 가버렸다. 오십만 원이 아니라서 다행으로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모임에서 내 얘기를 듣더니 젊은 사람이 “언니 사기당했네” 하며 웃었다. 순간적으로 띵하며 멍해졌다. 바쁘다고 핑계 대며 빨리 처리해 주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본다고 초조해하던 그 모든 것이 연기였다니. 이상하다고 뒤늦게 생각이 드는 것은 돈을 받는 즉시 힐끗힐끗 돌아보며 인파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던 모습이었다.
8.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주말 오후 지하철 입구 노점상에 여러 사람이 둘러 모여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호기심에 무얼까 싶어 들여다보았다. 할머니 한 분이 무슨 약초를 놓고 팔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가져온 정말 귀한 약초인데 전에 한 번 먹어보고 너무 좋아서 더 사려고 했으나 없어서 못 샀는데 이번에 어렵게 겨우 구해 왔다고 했다.
9. 골다공증을 비롯해 관절에 특효약이라고 하며 요즘 광고 나오는 비싼 약도 이것으로 만든다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요즘 들어 관절이 조금씩 아파 걱정하던 중이었다. 조금 보다가 약속 시간이 다가와 그냥 돌아서 오는데 할머니 두 분이 옆에서 같이 걸으며 “너무 비싸지요” 하며 말을 걸어왔다. 작년에 자기 딸이 이것 먹고 효험을 많이 봤다며 꼭 좀 구해달라고 하더란다. 같이 가서 많이 살 것이니 좀 깎아 달라 해보자고 했다. 옆에 있던 여자도 “나도 사고 싶은데 작년보다 비싸다”라며 셋이 같이 싸면 좀 싸게 해 준다며 많이 사서 똑같이 나누자고 했다.
10. 우리가 많이 사겠다고 하니 이것은 예약한 사람이 있어 많이는 못 판다고 하며 숨기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그 사람은 다음에 주고 우리한테 팔아라”라며 빼앗다시피 샀다. 먹는 법도 알려주었다. 나는 현금이 없다고 하니 옆에 농협 있으니 찾아서 달라고 하며 따라왔다. 괜한 짓을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돈을 받은 두 사람은 이미 사라졌다.
11. 다음날 건강원에 가서 시키는 대로 즙을 내어달라 하니 “어허 또 당했네” 하며 웃었다. 물가에서 자라는 쓸모없는 풀이라고 했다. 나를 따라오며 완벽한 연기를 하던 바람잡이 할머니들이 스쳐 지나갔다. 알고 보니 봉고차에 바람잡이 할머니 여러 명과 주인 행세하는 할머니를 태우고 장소를 옮겨가며 사기를 치는 일당이었다.
12. 다는 나열 할 수 없다. 누구의 잘못일까 남을 원망해 본들 무슨 소용 있으랴. 모두가 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