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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은 흥미로운 문학 장르이다. 같은 텍스트인데 배우나 연출가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수없는 재해석이 가능한 점이 엄청나게 매력적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희곡의 경우, 재해석본에서도 옛날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옛날 대사들을 현대적으로 새로 연출한 극과 어떻게 어우러지게 하는가를 보는 것이 큰 감상 포인트다.
이번에 국립극장에서 상연한 톰 모리슨/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의 <한여름 밤의 꿈>은 여러 측면에서 굉장히 재미있고 인상깊었다.
1. 퍽과 바텀의 새로운 연출
비일상과 판타지, 정령과 마법이 중요한 키워드인 <한여름 밤의 꿈>에서 퍽과 바텀은 그야말로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존재감과 위치를 차지한 캐릭터이다. 퍽은 요정왕 오베론의 일등 수하로 이리저리 날래게 돌아다니며 사건을 꼬이게 만드는 주범이다. 장난을 좋아하고 몸이 날랜 요정이라 보통은 작고 마른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책 버전에서는 꼬마 사티로스였고, 영화판에서는 익살스럽게 머리가 벗겨진 작은 노인, 그리고 작년에 글로브 극장에서 봤던 연극에서는 마른 소년이 연기했다.
하지만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에서는 퍽 캐릭터를 무려 세 명이 동시에 연기한다. 스탭 목록에 퍽을 연기하는 사람이 셋이나 있길래 돌아가면서 하는 건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물뿌리개, 바구니, 톱, 국자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품들이 모여 퍽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말로 하면 설명이 좀 어려운데, 배우 셋이 머리 몸통 발을 따로 조종하며 자유자재로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퍽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극단은 장난꾸러기 요정 퍽을 강아지, 부엉이, 사람 등으로 시시때때로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며 공기 중으로 흩어져 날아다니는 등 그야말로 굉장히 정령스러운 캐릭터로 표현해냈다. 담당하는 배우가 셋이라 목소리를 내는 방식도 인상깊었다. 배우 여럿이 동시에 말하기도, 한 명이 혼자 말하기도 했는데 이게 상상 이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할 수 없는 트릭스터로서의 모습을 훌륭하게 재해석했다고 생각한다.
바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테네 일꾼패의 감초에서 순식간에 당나귀 머리를 뒤집어쓴 괴물로 변하는 바텀은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제목에 가장 걸맞는 사건을 겪는 간판 캐릭터이다. 바텀도 보통은 그냥 사람 배우가 당나귀 모양 탈을 쓰거나 분장을 하는 정도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이 극단의 경우... 뭐라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충격적인 비주얼의 연출을 보여주었다. 보는 순간 엄청난 충격에 진짜 소리지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발상이었다. (퍽도 그렇고 바텀도 그렇고 이 연출이 중요한 부분인지 사진을 찾을 수가 없다) 굳이 묘사하자면 대충 말 모양을 한 틀 위에 배우가 엎드려 연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발이 당나귀 귀, 정강이 부분이 당나귀 콧잔등, 무릎이 코.. 하는 식이다. '바텀(엉덩이)'이라는 이름을 일부러 부각시키려는 연출인지 맨 엉덩이를 까고 가끔씩 들썩(...)거려 주는 애드립도........
세상에 이런 생각을 대체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 퍽의 대사 중에서 '당나귀 머리를 씌워 주었다'는 대목 때문에 보통은 당나귀 머리 인간 정도로만 묘사되는 캐릭터인데.... 듣도보도 못한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래서 최고로 기발하고 최고로 망측했지만 최고로 유쾌했다!!
2. 나무판자를 사용한 배경의 묘사와 전환
옛날에야 연극이 거의 유일한 즐길거리였겠지만, 화려한 CG로 무장한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이 범람하는 현대에서 연극의 활로는 독창적인 연출을 통한 관객의 상상력 자극이다. '보여주는 것'은 이미 CG가 지분을 다 가져갔으니, 블록버스터 연극이나 뮤지컬이 아니고서는 굳이 많은 무대장치나 소품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한여름 밤의 꿈>의 이야기는 크게 두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신비로운 마법의 기운이 만연한 숲, 그리고 인간 주인공들의 무대가 있는 아테네인데 중요한 부분은 바로 숲이다. 숲은 젊은 연인들이 사랑의 도피를 하러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자 요정왕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어둡고 우거진 숲은 인간들이 길을 잃고 헤맬 정도로 복잡하고, 특히 후반부 퍽의 마법으로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는 이 모든 연출을 나무판자 10여 개로 다 해결해낸다. 해당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 배우들이 각자 판자를 하나씩 들고 배경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판자들이 때로는 인물들을 둘러싼 덤불이 되고 때로는 요정여왕의 늘어뜨린 베일(혹은 날개)이 되고 하는 식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연출이 유동적이다 보니 살아 움직이는 숲의 모습이 더 부각된다. 인간 주인공들 사이의 갈등이 최고점을 찍는 허미아와 헬레나의 언쟁, 그리고 라이샌더와 드미트리우스의 숲속 추격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덤으로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을 알리는 부분도 멋졌다!!)
3. 히폴리타와 티타니아의 연관성
아테네의 군주 테세우스와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히폴리타는 사실 원작 텍스트에서는 그다지 비중이 없다. 처음과 끝 부분에 테세우스랑 함께 잠깐 얼굴만 비추는 정도이다. 재작년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을 때 히폴리타-테세우스와 티타니아-오베론 두 쌍의 관계가 꽤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아마존의 여왕이었다가 테세우스에게 무력으로 패배해 결혼 상대가 된 히폴리타와 인도 소년을 '요정 왕국 전체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완고하게 저항하다 오베론의 마법 앞에 굴복해 결국 그를 내주는 티타니아는 둘 다 남성의 권력에 무릎꿇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핸드스트링 퍼펫 컴퍼니판에서는 아예 이런 노선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히폴리타와 티타니아를 대놓고 연관시키는 연출이 있었고, 티타니아와 오베론의 가면을 조각한 것도 히폴리타라는 배경을 추가했다. 아테네 장면과 요정왕국 장면, 그러니까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졌다. 더욱이 2막 1장 시작의 숲 장면에서 퍽이 처음 등장할 때 그와 대화하며 정체를 설명하는 티타니아의 심복 요정이 여기서는 아예 히폴리타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2막이라는 큰 장면 전환 없이 히폴리타의 작업실에서 그대로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업실의 도구가 변해 나타난 요정 퍽을 보고 놀라던 히폴리타가 선반 위의 인형을 집어들고는 곧바로 티타니아로 변해 장면을 이어나간다. (히폴리타와 티타니아, 테세우스와 오베론은 각각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게다가 괴물로 변한 바텀에 푹 빠지는 장면부터 마법에서 깨어나는 장면까지의 티타니아는 요정 인형을 쓰고 있지 않다. 왜 티타니아를 나타내는 장면인데 요정 인형을 뺐는지, 이게 히폴리타와의 연관성을 더하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인형이랑 같이 연기하기에는 힘든 장면이라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히폴리타와 티타니아라는 캐릭터 자체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했다. 공부가 부족해 이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연출한 다른 작품들이 있는지, 또 이 극단 버전에서의 이런 연출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하다. 한번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이 공연이 마지막이라....
4. 그냥, 재미있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제아무리 문학사적으로, 연극사적으로 의미있는 작품이라도 결국 희곡은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희극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번 <한여름 밤의 꿈>은 아주 재미있었다. 도입부분 약간을 빼고는 훌륭한 연출과 능청스러운 연기로 내내 웃음을 주었다. 세 시간이 넘는 상연 시간 내내 소수의 배우들이 쉴새없이 풀어내는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특히 네 인간 주인공이 말다툼하고 엉키며 싸우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괴물이 된 바텀과 사랑에 빠진 티타니아의 모습이나 아테네 일꾼들의 극중극 장면은 말할 것도 없다. 글로브극장 버전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 끅끅거리면서 봤던 것 같다. 정말 재미있었다!! 완전 또 보고 싶다!!!
+
느낀 점
- 역시 희곡은 텍스트 공부도 재미있지만 실제 연극하는 걸 봐야 한다. 다른 것들도 보고 싶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 생각하는 건 비슷한 것 같다. 숲속에서 라이샌더가 수작거는 장면은 언제 봐도 대박.
- 그 옛날에 쓴 작품이 지금도 이렇게 재밌는 걸 봐서 셰익스피어는 진짜 천재인 것 같다. 사랑해요 셰익스피어
- 다음달에 하는 <폭풍우>도 봐야지!
- 큰일이다, 연극같은 고급 취미에 맛들이면 안되는데...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 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첫댓글 여기다 써도 되려나요? 어쨌든 텍스트적으로 본 감상문이라 여기 올렸는데. 게시판 추천해 주세요~
잠시잠깐 기자가 쓴 소개글인줄 알았네요. 이 극단이 하는 연극이라면 일단 믿고 보게 될듯.
20여년만에 보는 연극이라 보기 전부터 보고 나서도 여운이 장난아니네요. 자주 보리라 마음먹었어요.
보러 갑시다, 까이꺼.
나도 이 극단 연극은 무조건 본다.
이렇게 훌륭하게 정리해준 알이에게 박수를!
한여름밤의꿈을 멋진 연극으로 만들어준 이들에게 박수를!
희곡을 쓴 셰익스피어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