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이삭에 이어 야곱은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3대에 걸쳐 가나안 땅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가나안은 야곱에게 있어서 나그네의 땅입니다. 특히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편애로 인해 20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했던 인생이기 때문에, 비록 부모의 땅에 돌아와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야곱에게는 마음 편히 나눌만한 친구가 없었을 것입니다. 외롭고 힘든 나그네 생활입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막내아들 요셉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노년에 얻은 요셉은 아빠 곁에 있으면서 그의 말동무가 되었습니다. 2절에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일이 말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3절에 야곱은 그런 요셉을 사랑하였고 다른 형제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사랑을 채색 옷을 통해 보여줬습니다. 요셉이 입고 다니던 채색 옷은 아버지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의 채색 옷은 불공평한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부모의 어긋난 사랑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 또한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편애를 받았던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잘못된 사랑의 결과로 20년 동안 나그네로 살아야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볼 때 이스라엘이 보이는 요셉을 향한 편애는 자신의 부모가 보였던 모습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 이름의 뜻으로 다시 보면, ‘속이는 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 그 인생이 변화하기는 했지만 그의 과거를 통해 학습된 인간의 죄성은 여전히 그의 자녀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사랑의 DNA가 자녀 세대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삭이 야곱을 미워했듯이 11형제가 요셉을 미워해야 했습니다. 잘못된 사랑의 결과 질투와 싸움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잘못된 사랑의 동기와 그로 인한 결과는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요셉의 두 가지 꿈을 봐야합니다. 요셉의 첫 번째 꿈은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단을 향해 둘러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지요. 요셉의 두 가지 꿈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이 담겨있는 엄청난 내용입니다. 하지만 듣는 형제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 나쁜 꿈 내용입니다. 사랑의 형평성 문제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형제들에게 꿈 내용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던 잘못된 관계와 사랑의 동기는 하나님 나라의 꿈을 보지 못하고 함께 공유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동생 요셉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공동체의 비극입니다. 19절에 형제들은 요셉을 가리켜 꿈꾸는 자로 칭합니다. 그들의 감정이 섞인 말로 ‘꿈 장이’로 해석되는 굉장히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23절에 형제들은 요셉이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그리고 28절에 그들은 이스마엘 출신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깁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36절에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으로 다시 팔려 갑니다. 이리 저리 넘겨지고 넘겨받는 노예의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관계와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길 소망합니다. 요셉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꿈은 정말 소중하고 우리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이 하나님 나라의 꿈이 오늘 내 개인의 잘못된 관계 설정과 사랑의 동기로 말미암아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다면 요셉처럼 이리저리 팔려가는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함께 꾸며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꿈도 이야기할 수 있고 예배도 함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과 같은 거대 담론을 말하기 전에 오늘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의 동기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은 어차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 속에서 역사하고 후에 꿈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우리를 함께 움직여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마음의 동기, 그리고 삶의 과정입니다.
오늘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돌아보십시오. 공평한 사랑의 동기가 있는지를 돌아보고 혹여나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관계는 없는 지 살펴보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요셉의 꿈이 개인의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공유하며 기뻐할 수 있는 비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꿈을 회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기억하시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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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하심
창세기 37장부터 야곱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2절). 야곱의 이야기는 단순히 야곱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열두 아들들, 곧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열두 지파의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약의 교회임을 생각할 때, 야곱의 이야기는 곧 교회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입니다.
요셉이 17살 때 일입니다. 요셉이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느라 함께 생활을 하다가 알게 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렀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아비에 고하였다고 하는데요(2절), 여기서 ‘과실’이라고 번역된 말은 실수가 아닌 악한 일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노년에 얻은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였고, 특별하게 대했습니다.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힌 것이지요. 이런 아버지의 편애와 요셉의 정의감(?)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이유를 ‘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요.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어느날 형제들의 시기심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두 번 꿈을 꾸었는데요, 첫번째 꿈은 형제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 절하는 것이고, 두번째 꿈은 하늘의 해와 달과 11개의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석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그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요셉이 통치자가 되어 부모와 형제들이 요셉에게 복종한다는 것이지요. 이 꿈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가르쳐 주시는 계시였습니다. 요셉을 포함하여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이 꿈 때문에 형제들은 요셉을 더 시기하고 미워하였습니다. 야곱은 비록 요셉을 꾸짖었지만, 요셉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야곱이 조금 더 분별력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도 꿈을 통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가장이었던 야곱은 이 꿈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였고, 형제들의 시기도 헤아리지 못하였지요. 그것은 매우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형들이 세겜으로 가서 양떼를 칠 때, 야곱은 아들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요셉을 보냅니다. 세겜 땅은 예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살육을 행한 곳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그곳 사람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을까 염려하였던 것 같습니다. 세겜으로 간 요셉은 형들을 찾지 못해 방황합니다. 그것을 본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 형들이 도단으로 간 것을 알게 되었고, 도단을 향해 갑니다. 형들이 먼저 멀리서 오는 요셉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요셉을 죽인 후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말합니다. 요셉의 꿈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모른채, 요셉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을 발견하게 되고, 유다가 말하지요. “우리가 요셉을 죽인들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 그렇게 요셉은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세겜으로 보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봅니다. 요셉이 방황할 때 한 사람을 통해 도단으로 인도하시고, 요셉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을 통해 애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도 비극적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갈 것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창 15장),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하여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요셉이 애굽으로 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야곱 가족의 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간섭하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용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고, 하나님도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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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에서 서로의 소유가 많아지자, 에서는 스스로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대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는 장자인 에서가 가나안에 거하여야 할 것인데, 그는 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갔고, 타국을 떠돌아다니던 야곱은 결국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곳을 떠나지 않은 것은 가나안이 살기 좋은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약속의 땅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 에서는 제 욕심대로 갔고, 야곱은 탕자였으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지만 그것을 떠나서도, 스스로 자신의 복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37장에 넘어오는 이제서야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죽고, 에서가 세일 산으로 떠나가고, 명실공히 그의 시대가 되어 그가 상속자가 되고, 지배자가 되며, 그의 시대가 시작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야곱의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오늘 본문 2절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글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야곱의 족보를 말하면서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후의 일이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지만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요셉의 모든 행적을 야곱의 역사로 취급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이룬 모든 역사 가운데 그의 아버지 야곱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50장까지에는 네 명의 족장이야기로 이루어졌지만 족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보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고백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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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인 37장부터 마지막 장인 50장까지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집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이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과 17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의 꿈을 이야기한 것 때문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고 결국에는 애굽으로 팔려 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자녀들보다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히는 등 편애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한 것은 그 형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결국 이러한 요셉의 행위와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요셉을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미움은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요셉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요셉의 언사를 불편해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하여 다른 형제들의 곡식 단들이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을 꾼 요셉은 그것을 가족들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눈치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제들에게 질투의 대상인데 자신이 형들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고 하니 그 형들이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습니까?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주신 계시였지만, 지혜롭지 못해서 이 꿈으로 인해 오히려 형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불러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보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 도착한 요셉은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다가 형들이 도단으로 목초지를 옮긴 것을 알고 그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도착한 도단에는 요셉을 해하기 위한 형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를 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는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도착하기 전에 형제들이 꾸민 잔인한 음모는 제일 맏형인 르우벤에 의해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르우벤은 그래도 한 핏줄인데 어떻게 죽일 수 있냐면서 다른 형제들에게 죽이지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질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는 요셉이 밉기도 했지만 제일 맏형으로서 또한 동생 요셉을 보호해야하는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붙들어 채색 옷을 벗기고 들에 있는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때마침 도단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은 20개에 팔았습니다.
당시 노예의 평균값은 은 30개 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러한 평균적인 값도 못 받고 팔려갔단 것은 실제로 그가 아직 소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 평균값에도 못 팔려 간자가 결국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자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은 동생 요셉의 생명을 구원할 마음은 있었지만 요셉이 팔려 갈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간 후에 돌아온 르우벤은 요셉이 없어진 것을 몹시 괴로워하면서 옷을 찢고 울부짖었습니다.
르우벤의 이러한 울부짖음에는 장자로서 동생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슬픔을 생각하며 큰 죄책감을 느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 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야곱에게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야곱은 옷을 찢고 굵은베로 허리를 묶고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요셉이 죽은 것으로 믿게 하려는 아들들의 계략에 속아 고통당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그가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챘을 때 에서가 슬퍼하며 울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그 죗값으로 그의 일생을 통해 속임을 당하는 자로 살아갔습니다.
외삼촌에게 당했고 이제는 그 자식들에게 당합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이삭의 편애로 자신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아픔이 있었음에도 그는 또 다른 편애하는 아버지가 되어 그 가정을 깨어지게 만들고 십수년간 또 아픔과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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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에서 창세기 마지막 부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요셉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우거하던 땅에 그대로 살았습니다(1). 요셉은 꿈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되지만, 이것은 아버지의 책망과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됩니다. 야곱 자신이 아버지 이삭의 편애로부터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는 자기가 정말 사랑했던 여인 라헬을 통해서 노년에 얻은 아들 요셉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4). 세겜에서 형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 그들의 상황을 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 간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다시 이 야곱의 가정에 거짓과 속임수가 등장합니다. 형들은 염소의 피에 요셉의 옷을 적셔 아버지 야곱에게 보내고 야곱은 크게 통곡합니다. 염소를 잡아서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이 이제 자식들에게 염소의 피로 인하여 속임 당한 것은 기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과정 가운데서 요셉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애굽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 가정의 사람들 속에 나타납니다.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 더 나아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과 이후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모든 악함과 분노, 미움과 다툼이 나타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와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흔들림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이며, 혹여 그 손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변함없이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많은 경우 시기와 미움과 질투를 받게 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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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6장 7절에 보면 에서와 야곱은 서로 가축과 재물이 풍부하여 서로 함께 할 수 없어 에서는 세일 산에 거주하게 되었고, 야곱과 그 자녀들은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는 배경으로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요셉과 형제들(1-11절)
(1-2)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야곱의 가족은 재물이 풍부하였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족보를 설명하는데, 나이 순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먼저 나오고, 형들에 대해서는 그저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야곱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지만 유독 요셉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요셉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도 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라엘에게서 낳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편향적인 사랑은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힌 것으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채색옷은 소매가 있고 발까지 가려지는 긴 옷으로 평상복이 아닌, 예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유목사회 인데 채색옷은 목동 일을 하는 사람이 입고 다닐 수 없는 옷입니다. 이러한 편애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그를 미워하였고, 요셉은 어릴 때부터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에 미움을 더욱 많이 받아 결국 본문 4절처럼 형들은 요셉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습니다.
분명 야곱은 믿음의 가정이지만 문제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 34장에서 디나가 세겜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 야곱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결정으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어 있었다면 대화로 모든 일을 풀어갈 수 있었을 텐데 대화의 단절은 결국 그들의 갈등을 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35장에서는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성적 타락을 보여줍니다. 이것 역시 당시 야곱 가정이 겉으로는 물질의 복을 받았을 수는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대화의 단절과 올바르지 않은 가족관계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이렇게 불편한 기운이 흘러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은 자신이 어머니의 편애로 인해 고통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로 인해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고, 형 에서를 피해다니며 불안해 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문제를 또 반복하였고 결론적으로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지만 결국 이 일로 인해 요셉을 멀리 떠나보내게 되었고, 나이가 들어 추후에 만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사실 어느 부모라고 할지라도 다수의 자녀를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숙한 부모라면 특정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나게 하거나 차별하는 모습을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이러한 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이로 인해 다른 아들들과의 관계는 더욱 나빠져만 갔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가정은 겉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족관의 소통이 원활해야 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물질의 복이 그 가정의 행복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성도님들의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야곱의 가정처럼 서로 소통이 없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어느 날 요셉은 자신이 꾸었던 꿈을 형들에게 말을 하게 됩니다. 고대 근동 종교와 문화에서 꿈은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통상 꿈이란 신들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달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종종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고, 왜 형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는지 본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6-8)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의 첫째 꿈에서는 형들의 단이 요셉의 단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것은 형들이 후에 요셉에게 모두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의 꿈이었습니다. 형들도 이 꿈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에게 화를 내며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하며 더욱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두 번째 꿈으로 이어집니다.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두 번째 꿈에서 해와 달 그리고 별 열한 개가 그에게 절했습니다. 이번 꿈에서는 형제들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해와 달까지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형들을 넘어 온 집안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형들과 아버지가 요셉을 꾸짖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내심 억울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꿈을 꾼대로 말했을 뿐인데 형들과 아버지가 자신을 꾸짖은 것입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0-11)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형들은 요셉의 말에 시기하였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나무라면서도 그 말을 간직하였습니다. 간직하다라는 말은 단지 그 말을 흘려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 역시 창세기 28장에서 잠들었을 때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 경험이 있었기에 요셉의 꿈을 마음에 간직했을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있는 감정이 커져가는 가운데 어느 날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로 보냅니다.
형을 찾아 떠나는 요셉(12-17절)
(12-13)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야곱의 가족이 거주하던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까지는 팔십 킬로미터 정도 거리입니다. 십칠 세의 소년이 홀로 가기에는 3일에서 4일은 가야 하는 거리이기에 부담스러운 거리입니다. 형들이 이렇게 멀리까지 길을 떠난 것은 당시 주변에 기근이 심해 짐승들을 먹이기 어려워 먼곳까지 양떼를 먹이기 위해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 보고 돌아와서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먼 길을 걸어 세겜에 도착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형들도 양떼를 먹인 후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형들을 만나지 못해 방황하는 요셉에게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5-17)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방황하는 요셉에게 어떤 사람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고, 요셉은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형들이 이곳에서 도단이라는 곳으로 떠났다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도단은 세겜에세 약 21킬로미터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며,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하루는 족히 걸어야 할 거리였습니다. 이미 몇 일을 걸어와서 지쳤을 요셉이지만 형들을 찾아 도단으로 가서 드디어 만나게 되며 오늘 본문은 마무리가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은 형들에게 있어서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불편한 존재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행동했던 적이 없습니다. 먼 길을 가서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왔지만 형들은 이후에 보호해야 할 자신들의 동생을 오히려 생명을 해하려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형들을 사랑하지 않고, 보해야해 할 때 보호하지 않았던 것처럼 형들도 요셉을 보호하지 않은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이들에게 물질의 복은 있었을 수 있으나 사랑과 신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형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고,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발견하면 이해하고 덮어주기보다 아버지에게 전달하였으며, 형들도 요셉을 시기하며 미워했습니다. 이 가족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섬겼다면 이들에게 사랑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꿈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신뢰하였다면 모두가 그 꿈을 믿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미움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이 가정 안에는 사랑이 아닌 시기와 질투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각자의 가정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가정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서로 소통하지 않고 사랑이 없는 가정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다시 말씀 앞에 올바로 서서 각자의 가정을 먼저 믿음으로 올바로 세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을 깊이 나누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 가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바로 실행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한 공동체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각자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겠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분노한 형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런 과거가 있기에 자신이 부모가 되어서는 편애의 악순환을 끊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을 편애하므로 어머니의 길을 따라갑니다. 그가 요셉에게 입힌 채색옷은 다른 아들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아들들의 시기와 질투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다른 아들들이 양을 치고 있는 세겜으로 요셉을 보냅니다.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찾을 수 없었는데, 세겜 들판에서 만난 사람의 도움으로 형들이 도단에 간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이 있는 도단으로 향합니다.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18-24)
(18-19)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먼발치에서 요셉이 오고 있는 것을 본 형들은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비아냥거리며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형들을 보기 위해 100km가 넘는 거리를 찾아온 동생이 반가울 만도 한데 형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꿈 꾸는 자’로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꿈들의 주인’이라는 뜻이며, 이 말은 형들의 상한 감정을 잘 드러내 줍니다. 형들은 요셉이 아버지에게 자신들을 고자질한 것(창 37:2)과 자신들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창 37:4)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셉의 꿈(창 37: 6-10) 이야기 때문에 많이 화가 났습니다. 요셉을 ‘고자질하는 자’나 ‘편애받는 자’라고 부르지 않고, ‘꿈 꾸는 자’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형들은 어떻게 멀리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당연히 요셉이 입고 있는 채색옷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옷은 먼발치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특이했습니다.
결국 야곱이 특별한 애정의 표현으로 요셉에게 만들어 준 채색옷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만약 요셉의 정체가 먼발치에서 발각되지 않았다면 형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밀 겨를이 없어 그를 내버려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채색옷은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사랑을 담아서 지어 입힌 채색옷이 결과적으로 요셉의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우리도 혹시 야곱처럼 누군가를 편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 중에 어느 한 분, 혹은 자녀 중에 어느 한 명에게만 치우쳐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편애하는 대상에게 지어 입힌 채색옷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형들의 음모는 이러했습니다. 요셉을 죽여서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에게는 험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여서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보자고 말합니다. 요셉이 꾼 꿈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형들이 요셉을 죽여서라도 방해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요셉의 꿈입니다.
요셉의 꿈은 형들을 포함한 온 집안의 사람이 요셉을 섬길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레아 혹은 첩의 아들이기에 라헬의 아들인 요셉과 달리 아버지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형들은 훗날에도 동생인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요셉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면 그가 꾼 꿈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죽이기로 합니다.
만약 요셉의 꿈이 자신의 욕망이나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형들의 계획은 결국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이 하나님이 꾸게 하신 거라면 형들의 계획은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의 꿈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은 나의 욕망이나 야망에서 비롯된 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입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21-22)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다행히 맏형 르우벤은 요셉을 생각하여 그를 구하고자 합니다. 요셉을 살려 아버지 야곱에게 보낼 계획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 말고 산 채로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안합니다. 요셉이 산 채로 구덩이에 들어가도 체온 저하나 굶주림, 혹은 탈수 증세 등으로 스스로 죽을 수 있음을 믿게 하는 전략입니다.
르우벤 입장에서는 요셉을 탈출시킬 시간을 벌면서, 동시에 형제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좋은 전략이었습니다. 또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목초지를 말합니다. 요셉이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내도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곳이기에 형제들에게 더욱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한편 그러한 곳이기에 형제들의 눈을 피해 요셉을 빼돌리기에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구덩이’는 우기에 빗물을 모았다가 건기에 사람과 짐승이 마실 수 있게 하는 물 저장 탱크를 말합니다. 석회석을 파낸 웅덩이 혹은 땅을 파내고 물이 새지 않도록 안쪽에 석회나 진흙을 바르는 형태입니다. 작은 것은 깊이가 2미터, 큰 것은 깊이가 8미터에 달했습니다. 물이 없을 때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완전히 마르지 않은 깊은 웅덩이는 진흙 수렁으로 인해 갇혀 있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습니다(렘 38:6).
요셉이 목초지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진다면 자기 힘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자리를 뜨면 은밀히 구덩이로 돌아와서 요셉을 끌어올려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려고 계획합니다.
맏형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이자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인 빌하와 동침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이 문제 이후 그는 야곱의 눈 밖에 났음은 물론 형제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는 맏형으로써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만약 르우벤의 계획이 성공하여 요셉을 야곱에게 돌려보냈다면 형제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르우벤이 형제들의 계획을 망치고 그들의 악행을 좌절시킨다면, 요셉을 미워하는 것만큼 르우벤을 미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르우벤 역시 형제들에게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기 위해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합니다.
군중심리 속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평정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관에 경도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오늘 르우벤의 모습입니다.
(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형제들은 맏형 르우벤의 제안을 따르기로 하고, 요셉이 오자 그의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눈꼴 사나웠던 요셉의 채색옷을 드디어 벗겨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채색옷이 벗겨진 상태로 구덩이에 던져졌기에 체온 저하, 굶주림, 탈수 증세로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 구덩이가 비어 있었고, 그 속에 물이 없었다고 설명하므로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진흙 수렁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한편 구덩이에 물이 없었다는 것은 위에서 물을 내려 주지 않으면 탈수 증세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물이 없어서 살았지만, 또 물이 없어서 죽게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물 없는 구덩이에 홀로 갇힘으로써 최고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당장 형들의 손에 죽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어떤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오랜 시간에 거쳐 매우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팔았더라(25-36)
(25-28)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요셉을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던져 놓고, 형들은 태연히 앉아서 음식을 먹습니다. 형들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요셉에게 한 행동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형들의 식사 자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다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의 행렬을 봅니다. 상인들은 길르앗에서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느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자고 제안합니다. 그는 요셉은 우리의 동생이고 혈육이기에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자신들의 동생이고 혈육이니 죽이는 것은 안 되지만, 상인들에게 노예로 파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가 막힙니다. 그저 한 가지 악이 다른 악을 대체했을 뿐입니다. 유다가 조금이라도 요셉을 자신의 동생이자 혈육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제안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유다의 제안을 따르기로 하였고, 요셉을 ‘은 이십’에 상인들에게 팝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근동의 자료를 보면, ‘은 이십’은 당시 남자 노예의 평균 가격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던 요셉이 졸지에 상인들의 노예가 되어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한편 성경 기자는 요셉을 노예로 산 상인들을 이스마엘 사람이라고 했다가 또 미디안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이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상인의 무리에는 이들이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30)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르우벤이 구덩이가 빈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는 것은 상인들과 형제들의 거래가 있을 때 그가 그 자리에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르우벤은 형제들 몰래 요셉을 살려주려고 했는데, 요셉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구덩이에 요셉이 없는 것을 보고, 르우벤은 옷을 찢으며 괴로워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고통을 참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는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라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은 ‘어디로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의미입니다. 르우벤은 이 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합니다(창 42:22).
(31-32)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 준 채색옷은 요셉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만 있는 도단까지 채색옷을 입고 간 것은 성난 황소 앞에서 붉은 기를 흔드는 것과 같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숫염소를 죽이고, 그 피로 채색옷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그 옷을 아버지 야곱에게 보내며, ‘아버지 아들의 옷’인지 확인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들의 옷’이라는 말에는 요셉을 자신들의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 형들의 마음이 잘 녹아 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의 죽음을 직접 통보하기보다 야곱에게 물증을 보여주고, 야곱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남을 속이는 일에 능숙하였던 야곱이 이제는 무력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아들들이 오래전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일 때 사용했던 염소를 사용하여 그를 속입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고,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꾀가 많고 눈치가 빨라서 누구에게도 속지 않을 것 같았던 그도 삼촌 라반에게 속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속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속고 속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노예가 되어 타인을 속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에게 배운 것이 성경 말씀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속고 속이는 악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 삼아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이정표가 되고, 진리의 길잡이가 됩니다.
(33-35)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야곱은 요셉의 채색옷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요셉이 험악한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옷을 찢으며 애통했습니다. 사실 험악한 짐승이 아니라 험악한 형들이 꾸며낸 일임을 야곱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요셉을 위하여 애통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난 보낸 아버지의 깊은 슬픔이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고 아버지를 속인 후, 자신들의 기쁨을 숨기고, 거짓으로 아버지를 위로하려 합니다. 자신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속은 아버지 앞에서 슬퍼하는 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뻔뻔하고 악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든 자녀의 위로를 거부합니다. 대신에 그는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라고 선언합니다. ‘스올’은 당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지하 세계로 생각했던 곳입니다. ‘스올’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는 곳이 본문인데, 이것은 요셉의 죽음이 야곱에게는 삶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애통하는 동안 미디안 사람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그를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팝니다. 성경 기자는 보디발의 신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앞으로 요셉의 삶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본문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뿐 아니라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결국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과정 어디에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대로 요셉을 버리신 것일까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필코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형들은 그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의 손에 노예로 팔므로, 온 집안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요셉의 꿈이 헛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또 치밀한 전략으로 아버지 야곱까지 완벽하게 속였을 때는, 자신들의 계획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의 꿈을 막으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훗날 요셉의 간증이 이 사실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입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며, 원수들의 악한 행동을 선한 결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아무리 커다란 어려움이 닥쳐와도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미소로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런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드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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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6-8절에서는 에서가 야곱을 떠나 세일산으로 가서 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 현실과 풍요의 문제 앞에서 에서는 야곱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역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하나님과 맺은 약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창세기 37장은 야곱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며 시작합니다. ‘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a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 야곱은 비록 나그네를 뜻하는 ‘거류자’로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거했던 약속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본문은 일반적인 족보의 형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거나,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갑자기 야곱 가정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설명합니다.
믿음의 가정으로 보이던 야곱의 가정은 사실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3절은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 라고 말합니다. 가장인 야곱이 요셉을 ‘편애’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야곱만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야곱 또한 아버지 이삭은 형인 에서를, 어머니 리브가는 자신을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평생을 비교하고 경쟁하며 흉내 내고 도망치며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는데, 어느새 자신도 한 아들을 편애하고 있습니다.
모두 내 자녀인데 사랑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어렵습니다.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주는 아이가 있고, 잔소리를 해도 들은 척도 안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성향이 잘 맞는 아이가 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처럼 부모가 좋아하는 아이가 다른 경우도 있기에, 우리 사랑의 기준이 꼭 객관적이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야곱이 이해됩니다. 야곱에게 요셉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제일 행복했던 시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비슷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막내 베냐민을 출산하면서 라헬이 죽었기 때문에, 베냐민을 볼 때마다는 상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요셉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13절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요셉을 위험한 곳에 있는 다른 아들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울어진 사랑이 티가 너무 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채색옷은 소매가 있고 발까지 가려지는 긴 옷으로 평상복이 아닌, 예복이었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입고 다닐 수 없는 옷입니다. 우리가 이 가정을 손가락질만 할 수는 없는 이유는, 교회를 다니고 믿음을 고백하며 사는 우리도 가정에서 누군가를 편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랑의 문제이기 쉽지만, 자녀가 부모를 향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랑의 문제일 때도 있습니다.
4절은 기울어진 사랑이 증오를 불렀다고 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고(4절) ’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평화를 뜻하는 단어 ‘샬롬’이 서로에게 있기를 빌었는데, 형들이 요셉을 꼴도 보기 싫어했기에 그런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절의 미움은 5절에서 ‘더욱 미움’ 으로 커지고 8절에서 ‘더욱 미움’으로 11절에서 ‘시기’로 농도가 짙어집니다. 형들에게 미움이 있었다면 요셉에게는 우쭐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2절에서 윗사람의 잘못을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도록 돕기 보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했다고 합니다. 또한 미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두 번이나 꿈 이야기를 합니다. 거침없습니다.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점은 ‘편애’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는 가정의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믿음의 족보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합니다. 기울어진 마음을 균형 잡으려 하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속내는 채색옷을 입힌 것처럼 티가 납니다. 아이들은 눈길만 봐도 부모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평등하게 거리를 유지하겠다며 거리를 둘 수도 없습니다. 내가 아니면 사랑 받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부족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포기하고 문제를 묵히고 키워가기 일쑤입니다. 악취에 익숙해집니다. 한 아이가 꿈을 이야기했는데 ‘증오’와 ‘시기’로 덮어 버리는 가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기와 경쟁의 핏자국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변명합니다.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공평하게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바꿀 수도 없고, 위장할 수도 없습니다. 거리를 둘 수도 없고, 시간이 해결해주지도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이긴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님을 정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24시간 1초도 흐트러짐 없이 아이에게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이 하나님인 것 마냥 절대적인 사랑을 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하나님을 가리는 우상이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힘듭니다. 아이들이 사랑 받기 위해 비교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그릇에 부모의 사랑을 눈물과 땀으로 채워봤자 티도 안 납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니 시기합니다.
내가 줄 수 없다면, 줄 수 있는 곳을 찾아가 사랑을 부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밥이 없다면 구걸이라도 해서 먹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구하고 맡기라는 하나님의 요청은 무시합니다. 우리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공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연약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가족을 위해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하심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삶을 에덴동산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성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아이들에게 참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마음속에 들어가 언제 어디든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아이들을 돌봐주실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라는 그릇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아이들의 인생에 폭포수처럼 부어지는 사랑이 차고 넘쳐흐르길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녀를 사랑하던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 아이를 의탁하는 삶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우연한 계기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습니다. 야곱이 이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 요셉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가정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회개가 필요합니다. 세겜은 34장 30절에서 디나가 강간당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무자비하게 보복했던 곳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위험한 곳에 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샬롬’이라 인사하지도 않았는데, 요셉에게 ‘샬롬’한지 알아보라고 하는 비정상적 행동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4절, 14절). 이것은 문제는 해결해주지도 않고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순종한 아들 요셉은 15절에서 방황합니다. 부모 말을 들었는데도 아이들이 방황합니다. 방황이란 단어 ‘토에’는 지속적 의미를 담고 있는 분사형으로, 요셉이 이리저리 다니며 형들을 계속 찾고 있었음을 알립니다. 그렇게 조금씩 17절에 나오는 ‘도단’을 향합니다. ‘도단’이라는 지역 명칭은 ‘두 개의 구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불안이 고조되는 중입니다.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서도 이러한 불안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면, 본문을 경고 삼아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서로를 죽이려고 하고 팔아 넘기는 균열을 막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이라는 껍데기 안에 ‘사랑’이 ‘증오’가 동거하는 곳이 우리 가정이라면, 지금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손에 아이들을 내어드려야만 합니다. 자격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키울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하며 겸손히 기도의 자리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시고자 할 때에, 먼저 어려움을 만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흔히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높여주시겠다는 꿈을 주셨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눈앞의 현실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해 구덩이에 던져져서 인생 밑바닥으로 곤두박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을 만나러 온 요셉을 죽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생명을 르우벤을 통해서 구하시는 것입니다. 21절과 22절을 보면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고 합니다.
르우벤이 요셉을 살려 보내려고 했던 것은 당시에는 모든 형제들이 밖에 나가 있을 때 맏형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서 나머지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잘못되면 맏형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것입니다. 23절과 24절을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고 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갔지만, 그 형들은 요셉을 잡아서 채색옷부터 벗기고 광야의 구덩이에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인해 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굶겨 죽임을 당해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시편 40편 2절을 보면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기가 막힐 정도로 버림을 받거나 배신을 당해본 분들은 사람의 인간성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말할 수가 있는 분들입니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아서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면,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아예 하지 않기에 더 이상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고,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도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생의 구덩이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손이 구덩이 같은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그 구덩이에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그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시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인생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시고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일어서게 됨을 깨닫게 하시며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면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고 합니다. 유다는 지나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을 보고 요셉을 노예로 파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구덩이에서 굶겨 죽이면 어쨌든지 자기들이 요셉을 죽인 꼴이 되니, 차라리 대신에 노예로 팔아 넘기면 돈도 생기고, 굶겨 죽였다는 죄책감도 없고 손에 피도 안 묻히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을 보면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렸고, 요셉은 노예 상인들의 손에 붙잡혀 애굽으로 끌려갔지만, 그 형들의 손과 노예 상인들의 손은 사실 하나님의 손을 대신하는 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 보내시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맏형인 르우벤의 계획은 다른 동생들 몰래 요셉을 구덩이에서 빼내 아버지께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유다를 통해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 올려 애굽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인 36절을 보면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고 합니다. 요셉은 노예상인에게 팔려서 애굽까지 끌려가는데 뜨거운 사막을 맨발로 걸어가 노예시장에서 팔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을 노예로 사간 사람은 바로 애굽왕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이 보디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왕 바로에게 갈수 있도록 예비하신 징검다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소망의 미래로 인도하는 징검다리를 반드시 남겨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꿈을 현실 속에서 풀어가는 출발점으로 요셉이 보디발의 노예살이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셨습니다. 요셉의 노예살이가 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은혜의 모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아버지 야곱이 있는 집이 아니라 애굽으로 가게 하시는 것처럼,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내가 원하지 않는 나의 애굽으로 가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지 않는 곳, 가기 싫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더 깊으신 뜻과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훗날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워 기근에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을 살리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이 시대의 바울로 세우시고, 우리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교회와 세상을 살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더 깊으신 생각과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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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과 밀접한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일개 가족공동체에 불과했던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셉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물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발표한 1776년 이후 232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1862년 이후 146년 만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대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을 살펴보면, 그는 애굽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히브리 족속에, 애굽으로 팔려온 노예의 신분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안주인을 범하려했던 성추행범으로 감옥에 복역한 죄수의 신분을 지닌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당시 최대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을 다스렸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요셉이라는 그늘이 있었기에 그 그늘에 이스라엘이 거할 수 있었고,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창세기가 끝날 때까지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인데, 요셉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삶이 형통한 삶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형통한 삶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내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형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17살의 청소년인 요셉은 매일 매일 너무 행복합니다. 막내로 태어난 요셉은 아버지 야곱, 즉 이스라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그에게만은 아끼지 않고, 그 비싼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요셉은 형들이 잘못한 것을 고자질하고 그러면 아버지는 더욱 더 사랑해주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밭에 있던 자기 단이 일어서자 형들의 단들이 절하는 내용의 꿈을 꾸었습니다. 또 어느 날인가는 자기에게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동네방네 다니면서 내가 오늘은 이런 꿈을 꾸었고, 저런 꿈도 꾸었다고 자랑했습니다. 매일 매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요셉의 행복에 대해 그의 형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행복해하는 동생을 향한 형들의 반응을 본문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4)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5)
“...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8) ...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11) ...”
야곱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던 그였습니다. 오늘 날로 보자면 신실한 목사 또는 장로 또는 신앙심이 깊은 성도였고, 이 집안은 당연히 믿음의 집안입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 집안은 믿음의 집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아버지의 편애와 이로 인한 형제간의 미움과 갈등이 첨예해 있고, 가족 간 성적인 문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콩가루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콩가루 집안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아니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열을 보자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의 목적이 세상적이라면, 아무리 신실한 신앙인의 자녀일지라도 그는 세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랍니다. 어쩌면 부모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자녀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의 실체를 낱낱이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가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는 교회 성도, 심지어 교역자에게는 철저하게 감출 수 있다 할지라도, 자녀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간의 미움, 반목, 집안의 성적인 문제는 아버지 야곱의 잘못된 삶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집안에도 형제간에 다툼이 있지만, 오늘 본문과 같은 미움과 시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또한 부모가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자녀가 방황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자녀의 방황이 부모의 잘못된 신앙의 결과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개인과의 일대일 관계이기 때문에, 방황은 누구나 한번은 앓아야 할 홍역과도 같습니다. 크게 앓느냐 아니면 앓는지 모를 정도로 가볍게 스쳐 지나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방황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부모의 사랑 속에 성장한 자녀들은 그 방황을 통해 더 성숙해집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일평생 하나님을 등지는 삶을 살게 되기도 합니다.
요셉의 일대기에서 하나님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그가 애굽의 보디발 친위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이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바꾸어 말하면, 요셉이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채색옷을 입으며 행복하게 살았던 그 시기에 그는 한 번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믿음의 집안에서 자란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야곱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야곱의 입에서 하나님을 처음 언급했던 때는 43장에서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두 번째로 보내기 전, 자기 옆에 두고 있던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보내면서 혹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면서입니다(43:14).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늘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요셉이 형통한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있을 때가 아니라 비록 노예 신분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후 여정은 형통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마님을 강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번에 걸친 요셉의 꿈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적인 최고의 자리를 삶의 목표로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가 하루아침에 노예신분이 되었을 때 견디지 못했을 것이고, 더 더욱 누명을 쓰고 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좌절해서 자신이 인생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개의 꿈 이야기는 하나님의 요셉을 향한 섭리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섭리하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 섭리하심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는 삶을 사느냐에 따라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요셉은 세상적으로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그 상황을 형통한 삶의 자리로 바꾸었습니다. 노예 신분이었을 때도, 죄수 신분이었을 때도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 때, 좌절의 순간을 형통의 순간으로 승화시켰던 것이고, 결국 이러한 삶의 여정이 축적되었을 때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그를 최고의 자리로 올려주셨습니다. 교우님들 중에는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고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의 꾼 꿈은 바로 나의 꿈이기도 합니다. 즉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요셉이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이루어 진 것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 역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다할지라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정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힘든 상황에 있다고 낙담하기 보다는 지금 내 곁에서 나를 향하신 섭리하심을 갖고 계신 주님과 함께 하시는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요셉의 형제는 12명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간을 일하며 라헬 뿐만 아니라 몸종인 빌하와 실바까지 얻었고 여인들의 질투와 시기심으로 인해 그 아들의 숫자가 결국 12명이 되었습니다. 첫째 아내 레아가 낳은 아들이 여섯 명에 딸 디나를 낳았고 그의 몸종인 실바가 두 명을 라헬의 몸종인 빌하에게 두 명, 라헬에게서 두 명을 낳았습니다.
한 집안에 어머니가 네 명인데다가 배 다른 자식이 12명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치열한 경쟁과 밥그릇 싸움은 직접 보지 않았어도 눈에 훤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압니다. 더 냉정하고 더 살벌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압니다. 양보한다거나 져준다고 해서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 냉혹한 세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자주 들어온 말이 “너 그렇게 해서는 세상 살기 힘들다”입니다.
이 말이 뭡니까? 이 세상은 살벌하고 냉정하다, 어떻게든 이기고 어떻게든 자기 것을 챙기고 밟고 일어서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요셉의 형들이 죽이기를 꾀하였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말입니까? 아무리 배다른 형들이고 요셉을 미워하였다 하나 한 아버지 아래서의 형제들인데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세상은 상대를 제압하고 죽여야만 자기가 산다고 믿는 곳입니다. 살인이란 뭡니까? 상대를 죽여서라도 내 자리를 확보하고 내 미래를 담보 받으려는 인간의 처절한 행위 아닙니까? 인간 실존의 어쩔 수 없는 한계와 절망을 상대를 없애버리고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절규 아니냐 이겁니다. 동생 요셉을 죽여야만 영혼이 놓임을 받는 존재들, 누군가를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히고 학대를 해야만 마음의 자유를 얻는 존재의 가난함. 바로 우리들의 실존입니다.
막9:38-41을 보겠습니다. (신약 70쪽)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나를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적입니다. 상대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반대하지 않으면 나의 편이다. 우리를 위하는 우리의 아군이다. 이렇게 넓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적대하고 경쟁하고 배 아파하고 째려봅니다. 나보다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우리의 본성입니다. 적대적이지 않고 경쟁적이지 않고 밥그릇 싸움으로 보지 않습니다. 상대가 잘되면 박수 쳐 주고 슬프면 함께 울어주고 기쁘면 함께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41절에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이라는 표현은 아주 작은 대접을 말합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대접을 말합니다. 대접이란 상대를 가치가 있는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이기려 하고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는 경쟁의 정신으로는 결단코 물 한 모금이라도 대접할 수 없습니다.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도저히 물 한 모금이라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죽여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은 곧 우리를 예수님의 생명과 같은 가치가 있는 존재로 대우해 주신 것입니다. 적이 아니라 자녀이며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충분합니다. 초조하거나 조급하거나 도태된다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주께서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이미 받아주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받아들이고 충족하게 살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충분히 용납받았고 누구를 이겨 인정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 긴장의 속박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억압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하는 넉넉함과 자유와 포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는 자가 아니면 결코 이 생각의 속박에서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요셉의 그 꿈 때문에 요셉이 얼마나 곤경에 빠졌는가를 보십시오. 그 꿈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그가 죽음의 위험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그가 꿈, 그러니까 비전을 소유한 자,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자라고 합니다.
꿈을 향한 그 인내와 꿋꿋함을 배우자고 합니다. 자기가 꾼 꿈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래를 알았다면 누가 그 꿈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미움 받을 것이 뻔하고 시기를 받을 것이 뻔한데 누가 말하겠느냐는 겁니다.
요셉이 이 꿈의 의미를 알아 정말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인내하고 달려가는 사람의 대명사라면 이 꿈을 숨기고 아주 주도면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꿈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가 이 꿈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개꿈이거나 희한한 꿈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뭐 이런 꿈이 다 있지? 재밌네” 이런 것이죠. 이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고 죽음의 위협을 받고 또한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특별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던 요셉의 인생은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요셉의 인생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105:17-19절입니다.(구약 87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기서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라고 하는 표현의 원어적 의미는 ‘그의 영혼의 코뚜레를 쇠사슬로 뚫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사슬로 뚫은 것처럼 정신없이 끌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슨 총리가 되리라는 목적의식으로 분명히 성공하리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참아낸 것이 아니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하나님이 그 영혼을 쇠사슬에 묶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 다니다보니 거기까지 갔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합니다.
실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끄시는 방식과 그 길을 한 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영혼의 코뚜레를 꿰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시듯이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혹독한 고난도 있고 절망스런 시간도 있고 참아내기 어려운 실패도 있습니다. 미래나 내일의 소망이라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암흑이고 무기력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손해가 아닙니다. 무관심도 아니고 무능력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손해 입히지 않습니다. 잠시 아프기도 하고 어려울 수도 있지만 결단코 그 자녀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요셉답게 하십니다.
거기엔 고난이 동원되고 난관이 앞에 서고 깊은 절망이 막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일을 잘 버텨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막막한 인생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항상 뜨겁거나 항상 모범적이거나 항상 열정적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힘들면 좀 쉬고 막막하면 좀 앉아있고 슬프면 좀 울어도 됩니다. 주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요셉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도 만들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