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복교회
1878년 4월 일치교회(一致敎會) 중회(中會)에서 ‘조선전도에 부쳐’ 건의안이 제출된 지 25년 지난 1903년에 일본기독교회의 조선전도가 개시되었다. 이듬해인 1904년 2월 25일 전도국의 파견 지시를 받은 아키야마 시게오(秋山茂雄) 목사가 부산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새로 부설된 경부철도로 대이동을 진행하는 와중에 시작됐다.
러일전쟁으로 부산을 거쳐 인천항에 보급품을 운반할 때였다. 그런 시국에 아키야마는 이치약재상(一藥種店) 2층을 빌어 부산전도를 했다. 오오에 겐카(大江玄嘉) 장로가 집회를 열던 곳이다. 구도자나 침례교 신자도 있었다. 서동(西町)에 가옥을 빌려 이전하고 ‘기독교강의소’ 간판을 걸었다. 오전에 열, 저녁에 열댓 명이 참가했다.
몇 달 만에 예배자가 증가하고 찬양과 기도가 잘 됐는데, 오오에가 군 복무를 마치자 귀국하고 초대 담임목사 아키모토 시게오(秋元茂雄)도 사고로 사임했다. 교회가 잠깐 허전해졌다. 이시하라 야스타로(石原保太郞) 이사가 담당하다 2대 와다 호우코우(和田方行) 목사가 부임했다. 성탄절 예배에 첫 세례식이 거행됐고 오후엔 홍도관(弘道館)에서 성공회와 연합예배를 드렸다.
이백 명 가까이 참석했는데 서양인 두세 명과 한국인 다섯 명도 있었다. 와다 목사는 이듬해 마산과 대구에 전도 계획을 세웠다. 일본인 거주자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이때 장티푸스가 유행해서 신도들에게 전염됐는데도 2·30명씩 예배에 나왔다. 다시 처소를 서산하정(西山下町) 8번지로 옮겼다.
1907년 초에 평양 대부흥이 일고 한국교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국민신문에 ‘외국인 선교사가 통감에 반항하여 한국인을 선동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을 지지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이다. 한국기독교도들을 일본기독교가 동화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1908년 여름에 3대 우에다 요시오(上田義雄) 목사가 왔다. 4년이 지났으나 교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듬해 봄 외곽 달동네 마을에서 설교했다. 운집한 사람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다. 그 기부금으로 셋방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감동이었다. 노방전도와 마산, 대구로의 출장 전도도 활발했다.
가을에 큰 사건이 터졌다. 안중근의 통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이다. 일본 지배에 반발한 한국인의 한(恨) 표현이다. 1910년 봄 나가테도오리(長手通) 오오이케본점(大池本店) 앞으로 교회당을 다시 이전했다. 입지가 좋아서 모든 집회는 호황이었다. 토무라 요시로(外村義郞) 목사를 강사로 불러 전도회를 열었다. 밖에서 하다가 처음으로 안에서 했다.
8월 말 한일합방이 공포되고 경성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모두가 일본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가을에 우에다가 사임하고 강단을 비웠다. 이듬해 봄 4대 아키모토 시게오(秋元茂雄) 목사가 다시 돌아왔다. 회당 이전을 위해 변천정(弁天町) 오오이케(大池) 여관 뒷골목에 집 한 채를 빌려서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1911년 6월 4일에 회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40명이 참석했다. 1913년 12월에 회당이 준성되어 성탄절 예배를 올렸다. 이듬해 1월에 감리교회와 연합기도회를 열었다. 4월 부활절 저녁 예배에 어른 17명 어린이 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9월엔 전도국에서 독립하여 부산교회 설립식이 거행되었다.
동경 중회 회원과 경성교회 이구치(井口) 목사, 용산교회 이토(伊藤) 목사를 맞이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설립과 더불어 장로 다섯 명과 집사 두 사람을 선출하여 안수례도 행해졌다. 10년 만에 교회설립이 이뤄진 것이다. 다음 해 여름 경성교회와 군산교회, 부산교회 세 교회의 조선중회가 결성되었다.
1915년 8월 15일 복음신보에 신의주교회가 세워지고 이어 목포, 대구, 용산에도 일인 교회가 생겼다. 조선중회 총회원 수는 7백여 명이고 현주배찬자수(現住陪餐者數)는 4백여 명, 주일예배 평균 출석자는 2백여 명이다. 다음 해 경성의 봉익동교회(鳳翼洞敎會)가 중회에 가입했다. 일본교회에 조선인 이원경(李源競) 목사가 취임한 것은 처음이다.
아키모토 목사가 사임하고 무목 상태가 되었다. 마침 만주를 순회하던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가 들러 설교를 이어 영적 갈증을 풀어줬다. 5대 나카자와 토미베에(中澤富兵衛) 목사가 설교했다. 교회에 활력이 생겼다. 감리교회와 협동전도를 가졌다. 전도회 전날 9월 1일에 교인들이 장대 끝에 매단 커다란 초롱불을 앞세우고 작은 등불도 들었다.
찬송가를 합창하며 도로를 따라 천천히 돌았다. 쯔유무(露無)와 미야자키(宮岐) 목사가 전도했다. 수세자 8명에다 구도자가 30명이나 나왔다. 중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부산교회 나카자와 목사는 결의안 찬성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1918년 12월에 사임하자 또 목사 없는 교회가 됐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어 1년 이상 계속되었다. 218개 중 211개 군에서 2백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사상자가 5만 명이 넘었다. 피검자도 5만 명으로 조선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4월 말경 6대 스즈키 타카시(鈴木高志)목사가 발령됐다. 콜레라가 창궐하여 7만 인구 부산에 비상이 걸렸다. 방역으로 전쟁터와 같았다.
1923년 6월에 야마무로 군페이(山實軍平)를 설교자로 일본기독교와 감리고 구세군의 합동예배를 실시했다. 1926년 2월에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교세 보고에서 배찬자 82명, 수세자 12명, 아침 예배 36명, 저녁 예배 23명 주일학교 83명이었다. 재정은 수출입이 3천 엔이며 회당부지 매입 부채 1천 엔을 상환하고 250엔으로 인근 대지를 또 사들여 회당 신축을 결의했다.
다음 해 3월에 청년회 주체로 상업회의소에 에비나 단죠(海老名彈正) 동지사대 총장을 초빙하여 전도 집회를 열었다. 4백 명이나 참석했다. 스즈키 목사는 부인의 병구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재임 초입에 스페인 독감으로 두 자녀를 잃은 것도 아직 아픔으로 남았다. 그래선가 저녁 예배에 요한복음 말씀으로 감동을 주었다. 전도 집회를 할 때마다 부산의 다른 세 교회인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과 합동으로 했다.
순조롭게 교세를 확장해갔으나 1929년 여름 스즈키 목사의 건강이 나빠져 동경에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호전되자 가을에 추계 특별전도회를 계획했다. 1932년 회당건축을 결정하고 총공사비 2만5천 엔을 들여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보리즈 미국 건축가의 설계이다. 1층은 일요학교 교실 11개, 2층은 예배당 280석, 사무실, 사교실, 부인회실, 도서실이다.
3층은 다다미 8조 넓이의 전망실이 만들어졌다. 12월 4일 이전했다. 크리스마스를 새 회당에서 드렸다. 650명이나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성도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누렸다. 다음 해 2월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아카이 요네키치(赤井米吉)와 고바야시(小林), 군산교회 타카키 목사 등을 초빙 강연회를 열었다.
성탄절 예배에는 700명이나 모여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부산교회 최고의 부흥기를 맞았다. 전도를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1934년 2월에 스즈키 목사 부인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뒤 병으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10년 동안 발행하던 생명수(生命の水)를 폐간했다.
부산전도 30주년 기념 축하식이 4월 3일 거행되었다. 부산교회 장로들의 사식(司式)과 성서낭독, 기도, 교회 역사, 축전, 축사 대독을 맡았다. 설교는 아키즈키(秋月) 목사, 축사는 오오시마(大島) 부산 부윤, 조선인 교회 대표 이약신(李約信) 목사가 했다. 마지막 스즈키 목사의 답사로 끝을 맺었다.
스즈키 목사의 건강악화로 치료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복음신보에 ‘한 해의 절반을 병원에서 지냈다. 병세가 중태여서 장로와 집사들이 강단을 지키려 애썼다. 교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럴 때 총독부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교회가 점점 어려워져 갔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부산은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군대 중계지의 역할을 감당했다. 근위내각이 국민정신총동원을 개시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 거국일치(擧國一致), 견인지구(堅引持久)를 내걸며 국민을 옥죄었다. 조선교회에서도 기미가요 제창, 궁성요배(宮城遙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신사참배(神社參拜) 등이 강요됐다.
거부하자 구속되거나 폐교되는 학교가 속출했다. 1938년 4월에 경남노회가 신사참배장려를 결의하고 9월에 조선감리교회도 참배 용인을 통보했다. 이어 조선예수교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결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스즈키는 1939년 4월 20년간의 목회를 했던 부산교회를 사임하고 고향인 마츠야마(松山)로 떠났다.
5월 말경 마지막 7대 카라우지 타다시(唐牛正) 목사가 전주교회에서 부산교회로 전임해 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학도전시총동원체제(學徒出陣)와 총동원법,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폈다. 또 가미다나(神棚) 설치와 히노마루(日の丸) 게양을 강권하다가 1945년 8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므로 15일 패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9일에 소련군이 참전해서 이내 평양으로 들이닥쳤다. 만주나 조선 북부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남하했다. 미군이 부산에 진주한 것은 그달 말경이다. 세화회(世話會)를 통해 귀국길에 올랐다. 카라우지 목사가 미군 통역을 맡았다. 교회는 예배와 일요학교를 이어가다가 가을에 회당을 경남도청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11월 25일 부산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광복교회로 바뀌고 인계되었다. 교회 인근 경남도청 학무국장이던 초대목사 윤인구(尹仁駒)는 카라우지와 명치학원대학 신학부 동기동창이다. 이듬해 초 부산교회 신도들의 철수가 거의 끝날 무렵 카라우지 목사와 가족들도 부인의 고향인 가고시마(鹿兒島)로 돌아갔다.
세월이 지나 1970년 광복교회에서 가고시마 카라우지 목사를 찾아가 25주년 기념품과 감사패를 드렸다. 1972년 옆 공장의 화재가 번져 40년 동안 예배드리던 정든 교회당이 안타깝게도 소실되고 말았다. 이듬해 고우다 하츠타로(合田初太郞) 장로가 부산교회 신도회를 만들고 회보 활천(活泉)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우에키 츠네하루(植木恒治) 주선으로 신도들이 새로 지은 그리운 광복교회를 다녀갔다.
1998년 카라우지 목사의 장남 카라우지 쇼이치 (唐牛正一 ) 부부가 찾아와 부모가 건사하던 회당에 며칠 머물다 갔다. 또 일본선교 100년째 되던 2004년 여름에 59년 전 교회를 떠났던 신도 수십 명이 방문하여 함께 주일예배를 드렸다. 경주 유적지와 산업 현장, 국제시장, 맛집을 돌고 토산품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41년간 찬양하고 기도하며 섬긴 부산교회 후손 신도들을 따뜻이 보듬어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