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我朝古道不復
李 珥
손님이 말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고, 당대(當代)의 일을 말해 달라.”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손님이 말하기를, “지금 성상(聖上)이 왕위에 오르시고 여러 현인(賢人)이 조정에 포진하고 있어 백성들이 흔연히 태평성대를 바란 지가 벌써 3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민생(民生)의 곤궁하고 고달픔과 풍속의 야박하고 모진 것과 기강(紀綱)이 부진(不振)한 것과 선비들의 버릇이 바르지 못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아 홍수와 가뭄이 때를 가리지 않고 일식(日蝕)과 월식(月蝕)도 나타나며 성수(星宿)가 변괴를 부리고 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주인이 한참 동안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가,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손님이 말하기를 “그래도 시험 삼아 말해 보시오.”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모두 말하겠다. 우리 태조(太祖)는 왕씨(王氏)의 쇠함을 이어 신무(神武)로서 국운을 받으신 임금이시고, 통서(統緖)를 이은 임금 중에 세종(世宗)이 있다.
세종 같은 성인은 전조(前朝)에 없으셨다. 나라를 안정시켜 비가 오고 개는 것이 때에 알맞았고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겨 인재를 양육하였고, 예악(禮樂)을 제정하여 후손(後孫)들에게 법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여기에서 융성하여 오늘에까지 뻗이르러 유택(遺澤)이 민멸(泯滅)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 만년의 복은 세종에서 처음 기틀이 잡힌 것이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위에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있었으나 밑에 직(稷)과 설(契) 같은 신하가 없었다는 것이다. 허조(許稠)와 황희(黃喜) 같은 이는 유속(流俗)에서 좀 뛰어난 자이고, 한 사람도 선왕(先王)의 도를 밝히어 임금을 보좌한 이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의 살림이 조금 넉넉해지고 인구가 많아지는 데에 그쳤고,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는 끝내 상(商)ㆍ주(周)에 부끄럽게 되었으니, 뜻있는 선비의 탄식(歎息)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종은 일찍 돌아가시어 은택을 베푸는 데 끝을 보지도 못하였고, 왕위가 전해져 성종(成宗)에 이르러서는 영특하고 슬기로운 자질은 천고(千古)에 뛰어나시어 참으로 우리나라의 성스러운 임금이었으나 당시 대신들이 용렬하고 무식하여 경연(經筵)에서 강론할 때 ‘성정무심(性情無心)’과 같은 말을 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 당시는 태평한지 오래되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니, 대소 신료들이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고 실컷 노는 데만 뜻을 두어 자유분방한 것을 좋아하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며, 홀로 맞서는 것을 미워하고 뇌동(雷同)하기를 좋아하였으니, 비록 큰일을 할 만한 임금을 만났으나 치화(治化)의 융성함을 볼 수 없어 그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의 폐(弊)가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뜻있는 사람들의 개탄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중종(中宗)은 연산군(燕山君)의 잔악한 정치의 뒤를 이어받아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는 데 힘써 성의(誠意)를 다해 현인을 구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14) 간에 조광조(趙光祖) 같은 이가 있어 성리학으로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자기 몸을 버려 나라에 바쳤으며, 널리 인재를 불러들여 임금의 총명을 열어 넓히고, 개연히 세도를 만회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자취를 따를 뜻이 있었다. 유림(儒林)들이 진동하고 백성들은 우러러서 모든 일이 제대로 거행되는 공적과 집집마다 표창할 사람이 있는 시대를 머지않아 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강조(趙光祖)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충현(忠賢)도 많았으나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자도 섞여 있어서,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기본으로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으니, 간사한 무리 들이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神武門)이 밤중에 열려 현인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몹시 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인심은 본래 선(善)한 것이요, 공론(公論)은 없어지기 어려운 것으로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기세가 사라지자마자 사류(士類)의 청의(淸議)가 기묘(己卯)년간의 어진 이를 다시 높이게 되었다.
중종(中宗) 말년에는 학문하는 선비들이 조정에 많이 모였다. 그 때에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에서 덕을 기르신다는 아름다운 소문이 일찍부터 퍼져서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보기를 구름 보듯이 하였고 하루아침에 즉위(卽位)하자 사방이 메아리처럼 응하였고 거상(居喪)에 미음만 마시고 얼굴이 새까맣게 말라 버려 호령을 내지 않아도 몸소 행한 덕화가 벌써 온 나라 안에 덮여졌다. 여러 현인들이 현명한 임금을 믿고 삼대(三代)의 치화(治化)가 머지않아 회복되리라고 여겼으니, 어찌 하늘이 무심하여 우리 임금을 빼앗아 가리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시세를 이용하여 선량한 신하를 베어 죽이고 반역이란 이름으로 함정을 만드니, 당시의 식자치고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을사(乙巳)의 화(禍)는 그것만으로도 넉넉히 나라를 망칠 수 있었으나 국운(國運)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실로 조종(祖宗)이 덕을 쌓은 덕택 때문이었으니, 뜻있는 사람들의 개탄이 여기에서 극(極)에 달하였다.
명종(明宗)은 영달(英達)하고 숙성하여 실덕(失德)한 것이 조금도 없었으나,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총명을 가리고 막아서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그르치니 충신이 입을 다물고 길 가는 사람들이 눈으로만 뜻을 표한 지가 20년이 되었다.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이끌어 주시어 시비(是非)를 판별하게 되자 원형(元衡)이 죄를 받고 사림(士林)이 일어나니, 엄동 뒤에 따뜻한 봄이 돌아올 듯하였다. 그런데 사직(社稷)이 불행하여 명종이 돌아가시니 백성은 아버지를 잃고 백신(百神)은 주인이 없게 되었다. 우리 금상(今上)께서 선왕의 유교(遺敎)를 받들어, 익실(翼室 별전(別殿))에서 거상(居喪) 중에 열성(列聖)이 맡긴 중임(重任)을 받아 신인(神人)의 기대를 맞추시니 성덕(聖德)이 날로 밝아지고 임금의 직무에 결함이 없으시니, 정말로 뜻있는 사람들이 일을 해 볼 수 있는 때이다.
지금 나라의 형세(形勢)는 마치 기절(氣絶)한 사람이 겨우 소생은 하였으나, 아직 모든 맥(脈)이 안정되지 않고 원기도 회복되지 못한 것과 같다. 서둘러 약을 주면 살아날 수 있는데, 혹은 약을 쓰지 말고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자 하고, 혹은 좋은 약을 써야 한다고 하면서 무슨 약을 사용해야 할지 몰라서 팔짱 끼고 보고만 있으며, 한 가지 계획도 세우지 않으면, 큰 병을 앓고 난 뒤에는 풍사(風邪)가 들기 쉬운 것이니, 머지않아 살려내지 못할 위증(危症)이 생기어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다. 나라의 형세가 이처럼 위태로우니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구원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일을 행(行)하는데 귀한 것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현명한 인사를 등용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그 구폐(舊弊)를 없애고 새로운 혜택을 베풀어서 민생(民生)을 구원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나라를 그르친 남곤(南袞)ㆍ김안로(金安老)ㆍ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이 나라를 그르친 폐단을 다 씻어지지 못하였고, 백성을 괴롭히던 가혹한 법률을 아직 개혁되지 못하였는데, 그래도 안일(安逸)함만 찾고 일하기를 싫어하여 건의하여 밝힘이 없는 것이 마치 조참(曹參)이 소하(蕭何)의 뒤를 이은 것 같으니, 이는 온 나라를 망각의 구역(區域)에 내던져 둔 격이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차이가 한 치도 안 되니, 백성의 곤궁함과 하늘의 노여움이 무엇이 괴이한 일이겠는가.” 하였다.<栗谷全書 卷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