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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꿈
김 미 희
화려한도시를 그리며 찾아 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스물셋에 상경했다. 말 그대로 시골소녀 상경기이다. 나름 멋을 냈지만 타인에겐 촌닭의 모습일 테고 끝만 올리면 서울말인줄 알고 강원도래요의 사투리를 애써 감추었다. 화려한 도시, 선남선녀의 도시, 문화의 도시-나에겐 서울이 그러했다. 대관령을 넘고 싶은 욕망이 컸다. 중학교 때 노처녀 선생님은 한 달에 한번정도 개봉관을 찾아 서울나들이를 하셨다. 어린나이인지라 우리 동네 보영극장이 전부인 나에게 선생님의 영화관나들이는 이해불가였다. 몇 달만 기다리면 여기서도 볼 수 있는데 굳이 먼 길을 시간 내서 돈쓰며 다녀오시는 게 이상했다. 서울아이들은 문법에만 너무 치중해서 제대로 된 감성이 없다며 바다가 보고 싶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며 개똥철학을 설파하시는 국어선생님에게 빠져서 서울이나 묵호나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동해의 푸른바다를 보며 큰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끔 서울서온 서울내기들을 보면 개네들은 때깔부터 다른듯했다. 서울서 온 교수님도 세련되어보였다. 손석희씨의 누나인 손영민교수가 교육학강사였는데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래서 모든 서울사람들은 저 정도는 되나보다 생각했다. 방학 때 대학로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본 후로 서울 애들은 좋겠다 언제든지 맘대로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으니 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서울은 점점 더 꿈의 도시가 되어갔다.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다. 20년 이상을 산 작고 답답한 동네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에게 서울은 신세계였다. 꼭 서울엘 가고 싶었다.
서울 사는 유일한 혈육인 큰언니에게 부탁했다. 아무 일자리라도 좋으니 서울로 가게해달라고.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오게 되었다. 처음 일 년은 신길동 언니 집에서 지냈는데 직장이 대치동이라 멀기도 하고 언니는 월세를 살고 있었는데 고만고만한 조카4명에 언니형부 나까지 7명이 방2칸에서 지냈다. 고향에서는 작지만 내방이 있었는데 같이 지내자니 불편해서 독립을 하고 싶었다.
서울은 거대한 공룡 같은 도시였다. 많은 나라를 가본 건 아니지만 서울처럼 집값이 비싼 곳도 드물었다. 타워팰리스와 달동네가 공존하고, 모든 면에서 최고와 최하가 극심하게 보여 지는 곳이다. 처음 서울 살이 할 때는 가치관의 혼동과 자괴감에 빠졌다. 62-1번 버스를 타면 영등포에서 대치동을 갈수 있었는데 흑석동 국립묘지를 지나면서부터 고급승용차들이 늘었다. 당시엔 여성운전자들이 드물었는데 강남엔 여성운전자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다가 여기는 여자운전수가 많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도시락까지 싸서 냄새나는 가방을 꼭 여미며 자리 날까 맘 졸이는 아니 가방이나 좀 받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문에 낀 오징어 같은 나와는 반대로 창밖에는 까만 고급승용차에서 여유롭게 책을 보며 또는 음악을 들으며 가는 승용차안의 사람들은 분명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62-1버스가 나에게 준 선물이 있었으니 석양이었다. 내 고향 묵호는 일출이 멋졌지만 서울은 일몰이 일품이었다. 그날그날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석양은 바다에 뜨는 태양과는 다르지만 빌딩숲으로 옮겨가며 해 그림자를 만들고 지고 나서도 한동안 붉은 노을을 선사했다.
직장근처에 집을 구하다보니 대치동에 살게 되었다. 전전세라고 전세든 사람이 방 하나를 또 전세 주는 형식 이였는데 부엌과 화장실은 같이 썼다. 오래전이라 강남이 뜨기 전이였는데 동네가 깨끗하고 고급식당들이 많았다. 주위에 아파트도 개나리 진달래 같은 정겨운 이름이었다. 그 동네가 맘에 들었다. 친구들도 사귀고 살기도 편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곳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과외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외금지령이 내렸을 때도 암암리에 했는데 학생엄마는 누가 물으면 이모라고 해달라고 부탁했고 경비아저씨가 물으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경비아저씨는 다 아는 눈치였다. 나 말고도 다들 그렇게 과외를 했던 것 같다. 삼풍아파트에 살던 학생은 대원외고 학생 이였는데 내가보기엔 별로 가르칠게 없었다. 과외 초보 일 때라 수업준비를 몇 시간이고 해서 가면 학생은 순식간에 이해하고 진도를 나가는 통에 매번 수업 준비하느라고 바빴다. 그 정도 되면 과외가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오히려 공부 잘하고 욕심이 있는 학생은 더 불안감을 느끼는 거 같았다. 학생은 평일엔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과외는 주말에만 했는데 영어뿐 아니라 다른 과목도 하니 쉬는 날이 없는 듯 했다. 일주일 내내 공부만 하는 학생이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수업보다 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빈부의 차였다. 이학생의 경우 과외를 영어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수학 또 간간이 국어 과학도 하는데 그 과외비만 해도 엄청났다. 또한 옷과 신발등 모든 것이 브랜드제품이니 한 아이에 드는 비용이 웬만한 집 생활비를 훨씬 웃도는데 그 학생은 형제가 3명이였다. 어느 날은 내가 그 학생집의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계산 하고 있었다. 한심했다. 내 자신이.
언니집의 조카들은 형편이 어려워 여상을 다녔는데 학비를 제때내지 못해서 쩔쩔 맬 때가 있었다. 처음으로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살아야 되나하는 의구심이 생기고 신이 있다면 이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IMF가 터지자 집값이 많이 떨어졌다. 당시 다세대 원룸에 살고 있던 나는 근처 오피스텔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값이 많이 떨어져서 살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주택에 비해 관리비가 든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는데 나중에 그건물 바로 옆에 타워펠리스가 생겼다. 재산증식의 유일한 기회를 그렇게 놓쳤다.
서울은 사건 사고가 많았다.
도곡동에서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학부모가 갑자기 백화점이 붕괴됐다며 tv를 보라고 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이다. 동네 주민들이 사고현장에 갔다가 명품백이이며 고가의 물건들 수표 현금 등을 주워 횡재를 했다고했고 어느 날은 수도 없이 건너다닌 다리가 무너졌는데, 성수대교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88올림픽 때는 직장이 암사동이라 종합운동장을 지나서 출퇴근했는데 그 많은 외국인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만국기에 다양한 인종들과 들뜬분위기, 9월의 잠실은 가로수 풍경도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서울은 한강과 잠실 선착장 테헤란로 그리고 88도로이다.
테헤란로는 왕복10차선이지만 삼성역근처는 편도6차선으로 그 당시 왕복12차선이여서 상당히 넓은 도로이고 양옆으로 높은 빌딩들도 많아 화려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눈 오는 날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테헤란로는 정말 멋졌다. 100년만의 폭설이라며 큰 눈이 왔을 때의 테헤란로를 잊을 수 없다. 내가 처음 살 때는 코엑스 뿐 이였는데 나중에 현대백화점 인터컨티넨탈 호텔등이 들어섰다. 횡한 삼성역에 내리기가 무서워 종합운동장에서 내리곤 했는데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 되는 풍경이다.
고향이 묵호라 집에 내려갈 때 중부고속도로로 가다가 영동고속도로로 바꿔 탔는데 서울에 있다가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도착하면 죽은 도시 같았다. 사람그림자 하나 볼 수 없고 불빛도 희미한 게 느낌상으로는 암흑의 도시였다. 왜 사람과 불빛이 없었겠는가 만은 서울에 비해서 그렇게 느껴졌다. 서울은 새벽2시가 넘어도 수많은 가로등과 자동차의 불빛과 행렬로 분위기가 천지차이다. 한강과 강 건너 워커힐이 보이면 드디어 서울에 돌아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한강이 좋았다. 런던의 템즈강이나 파리의 세느강은 우리 한강에 비하면 또랑 수준이라며 한강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시시때때로 다른 빛을 내던 동해바다만큼은 아니였지만 바다를 그리워하는 나에게 한강은 큰 위안이 되었다.
봄이 오기 시작할 무렵의 88도로도 잊을 수 없다.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지만 멀리서 늘어선 가로수를 보면 버드나무의 연한 연두 빛이 느껴졌다. 그러다 곧 연두새싹이 나오고 며칠 후면 초록의 이파리가 무성해졌다. 또 어느 날 부터는 갈색이 되어 낙엽이 지고 그렇게 88도로와 함께 한해를 보냈다. 그러나 교통체증도 어마어마 했다. 중간에 막혀버리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 채 도로에서 몇 시간을 보낸 적도 많다.
그리고 잠실선착장. 누에나루는 나의 연애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만난 모든 남자와 함께한 곳이 였으니... 첨엔 누에나루가 무엇인지 몰랐다. 뽕밭이던 잠실강나루라는 뜻 이였다. 언제부턴가 어두운 영화관에서 데이트하기보다는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선착장이 좋았다. 분위기내고 싶으면 유람선을 타면 되고 돈이 없으면 김밥과 자판기커피 한잔이면 그만이었다. 버스식당에서 팔던 우동도 무척 맛있었다. 우리집에 오는 친구들은 무조건 선착장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라 답답한 집에 있는 거 보다 돗자리 하나 들고 나가서 상쾌한 강바람에 커피한잔이면 스카이라운지가 부럽지 않았다. 한여름엔 특히 좋았다. 에어컨도 없이 푹푹 찌는 집에 있느니 시원한 강바람에 모기도 없고 해서 틈만 나면 나가 놀았다. 여유가 있을땐 유람선 타고 여의도나 동호대교까지 한 바퀴 돌고나면 그날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다. 신길동에 살면서 선착장이 그리워 가끔 여의도선착장으로 나갔는데 방향이 바뀌여서 인지 결혼을 해서 그런지 예전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암튼 누에나루는 나의 아지트였다. 강 건너 보이는 고층건물과 아파트의 불빛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서울의 야경은 남산보다 오히려 한강둔치나 88도로가 더 좋았다. 윤수일의 아파트도 이런연유로 만들어졌지 싶다.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는 혼자라는 외로움도 크게 느끼게 했다. 그럴 때 마다 한강을 찾았다. 한강은 친구이자 엄마이자 나를 품어주는 따뜻한 자연이었다.
십년을 그렇게 지냈다. 서울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시골에선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정도로 니 것 내 것 없이 가깝게 지내지만 서울서는 옆집 사는 사람도 이사 갈 때까지 몇 마디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편했다. 시골사람의 정 많고 간섭 많은 것보다 서로 무심히 무관심으로 일관 하는 게 편했다. 또 서울사람들은 예의가 바른 편이였다. 때 되면 숟가락 하나 언져 서 같이 먹던 시골과는 달리 여기 사람들은 때 되면 어머니 기다리신다며 퇴장했다. 난 그게 좋았다. 안 그래도 음식 솜씨 없어서 먹여주고 욕먹을까 걱정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런 서울이 좋았다.
신길동 아파트가 완성되었다. 재개발로 철거 된지 4년만이다. 12월 말부터 입주시작이라고 한다. 예전에 살던 동네엄마들이 언제 들어 올 거냐며 물어오지만 난 입주할 마음이 없다. 서울을 떠나 올 때는 집이 지어지면 다시 들어가 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시집식구들은 40년을 살아온 동네라 정든 곳이기도 했고 시어머니는 당연히 돌아 갈 것을 기대하고 일산으로 오셨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을 떠나 올 때만 해도 한번 서울을 나가면 들어오기 힘들다며 걱정하던 주위의 우려가 이유는 다르지만 현실이 되었다. 물론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은 아니겠지만 내가 좋아했던 서울은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 같다. 가끔 서울을 나가면 숨이 막힌다. 교통체증에 공기오염 수많은 인파, 각종 소음 한땐 활기차고 생명력 있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정신이 없다. 내가 그리던 화려한 도시는 사라지고 살기 불편함만 눈에 띈다. 교통이 좋고 여의도 강남이 가깝고 하는 소리들이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서울을 동경한 강원도 소녀는 젊은 날을 서울에서 보내면서 도시의 편리함과 문화적인 혜택을 맛보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바쁜 도시 생활보다는 여유로운 느긋한 일상이 좋아졌다. 슬로우 시티, 느림, 힐링 이런 단어들에 끌리고 있다. 나의 젊음과 함께 서울의 꿈도 사라진 것인지... 그러나 조용필의 ‘꿈’을 들으면 나의 젊은 시절과 함께 했던 서울이 내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 용필이 오빠와 한마음이 되어 소리내어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 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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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긴 글을 쓰셨네요
젊은날의 서울 추억이 지나온 세월과 함께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동안 메마른 감성으로 살아온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묘사가 다정다감하게 다가옵니다.
철수님도 서울내기신가요?
반가워요 담주송년회 나오시나요 그때뵐께요
@보리 아니요. 시골내기입니다. 부산입니다. 송년회 나갑니다.
지난 세월과 현재를 아름다움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은 문학적 상상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