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느끼는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영혼 삶의 법칙
누구나 삶을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서 밖으로 드러나는 문제말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힘든 문제가 무엇인가가 질문이다. 왜냐하면 밖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보이므로 해결이 되면 문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취직, 시험 등등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게 문제를 인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겪게된다. 어떤 문제가 그런가? 당연히 보이지 않는 문제는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의 문제는 마음의 속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 속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매번 같은 문제로 힘들고 만다.
마음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속성은 내 마음은 우주법칙에 따르는데, 내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그냥 가만히 두면 여여하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대상과의 상황에서 내 마음이라고 움켜지면 바로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되지 않을려면 상대에게 내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은 내가 준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고, 또 언제 갔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그냥 당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상황이다. 이런 관점에서 옛날 선인들의 수행은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다른 사람하고 만나서 조금씩 친해지면 마음의 문이 -저절로- 열린다. 이는 내 마음이 그 사람에게 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그 사람에게 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낼만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화를 고스란히 받는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만 화에서 놓여날 때까지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지나는 것이 보통이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화를 낸 것은 내 잘못이 아닌데, 내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은 분명 나와 다르므로, 화를 내는 그 사람이 문제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상처를 받아서는 안된다. 사실 상처를 받으면서 안타까웠기 때문에 고민을 한 것이다,
왜 그럴까하고 생각해 보니, 그 사람에게 준 마음만큼 내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그 사람에게 준 마음만큼 나는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 즉 그 사람과 나는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 사람, 즉 나이다. 내가 상처를 주니, 나는 그 상처를 그대로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주므로 나는 그 상처를 이기기는 거의 어렵다. 그리하여 ;아! 내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구나' 하고 재빨리 돌아와도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시간이 흘러가서야 그 상처에서 벗어난다.
그 이유는 영혼의 속성에 기인한다. 영혼의 속성은 현재 상황에 매몰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으므로 나는 그 사람과 하나이다. 그리고 상처, 그 사람의 감정, 예컨대 화를 내는 감정을 그대로 영혼이 받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 사람, 아니 나의 감정을 그대로 받는다. 받는 순간 나의 마음이 그사람의 마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감정을 안 받을 수는 있다. 히지만 마음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감정에 나의 영혼이 매몰된다는 사실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냥 그 감정에 매몰되어서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그 감정이 빠져나갈 때까지 휘둘리며 사는 것이 통상이다. 생각,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시간이 흘러서 영혼이 이 상처(감정)에서 벗어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주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되풀이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깨닫지 못하면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것 또한 마음의 속성이다.
마음은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간다. 그러므로 상처받지 않을려면 그 사람에게 가는 이 마음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같은 상처를 입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상처를 받아서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야 -영혼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혼 삶의 법칙을 파악해야 현실 삶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을 지킬 수도 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을 집중하게 할 수가 있다. 더불어 현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본질(?)을 파악한다. 여담이지만 지난 역사에서 가슴아픈 것은 여러가지가 많이 있지만, 특히 남북이 갈라진 것이다. 그 당시 어떤 관계에 속해 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민족의 어려움은 보지 못한 자들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때문이다-. 현실의 본질은 자신의 마음이 파악하는데, 결론은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관계를 맺어서 힘을 연대한 결과,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리 민족이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해야 되풀이 되지 않는데, 요즈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역사의 책임으로 우리 세대 혹은 다음 세대가 짊어지기 때문에 걱정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도 모른다는 데에 있기는 하다.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면 그 본질은 모든 본질과 같아서 시대가 흘러가야 하는 흐름, 시대의 소명도 파악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민족의 어려움이라고 생각되는, 또는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를 답습하는, 연대를 지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할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발달단계를 고려해서 인간이 온전한 성인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단계는 인간의 내부가 발달하는 단계이다. 이를 무시하고 외부로만 문을 열게하는 현재의 교육과 사회의식, 궁극적으로는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인류가 이렇게 나아가는데 개인이 어떻게 하기는 거의 어려울 듯 하지만, 인류가 이렇게 나아가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나아가는 방향은 인간의 의식의 발달에 따른 방향이다.
인간의 의식은 처음, 아주 과거에는 인간의 의식이 육체에 수육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육체에 인간의 의식이 수욕되었고, 이 의식이 진화하여 꿈꾸는 의식에서 현재의 깨어있는 의식으로 진화하였다. 그러므로 현재의 깨어있는 의식상태의 인간이 우주에 닿는 우주 의식으로의 진화가 다음 단계이다. -슈타이의 주장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 삶의 법칙을 파악하는 것이다. 현재가 의식혼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의식혼 시대는 서기 4000년 초기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인류는 그동안 자신의 마음, 본질이 우주에 닿아있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이 길은 누구라도 예외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혼자서 가야 한다. 그 방법은 앞에서 예시한 마음의 법칙을 찾는 것이다. '왜 그럴까'하고 질문을 하면 본질자아가 답을 들려준다. 그것은 자신이 우주에 닿아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므로 누구라도 가능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도 -자신에게- 간절한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의 답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고, 이렇게 살아가야 삶이 행복하다. 답이 본질이므로 본질을 꿰뚫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부 외부의 물질인 듯 보이지만, 그 핵심은 본질에 있음을 알 수도 있다.
현실 삶에서 본질을 파악하는 정도는 외부가 얼마만큼 내부와 소통을 하는지에 달렸다. 따라서 내부에서 응해줘야 외부의 문제가 해결된다. 현 인류가 모든 부문의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하도록 구안했지만, 다만 그것은 포장이다. 포장을 뜯고 열어서 본질은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되풀이 하지만 나를 형성하는 힘이 우주에서 오며, 모든 삼라만상이 그 힘에 의해서 생명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영혼 삶의 법칙이다-. 그 힘이 본질이고, 거기에서 인간 삶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필자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 영혼이 받아들여야 재미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감동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본질도 우주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믕악가들 역시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영혼이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까하고 생각해 보니 영혼이 악보를 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혼은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받아들이는 상으로 제시해 줘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영혼이 받아들이는 상이다. 그럴려면 내부가 깨어있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흥미, 재미가 있어야 한다.
영혼이 받아들이면 즉 영혼은 우주에 닿아있으므로 우주 음악이 나온다. 그러므로 영혼이 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또한 아이들이 자랄 때 내부를 닫지않아야, 내부가 발달해야 가능하다. 여기에서 세계적인 수준이 나온다. 문제는 영혼이 받아들이는 상으로 제시하는가. 또는 영혼이 받아들이는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