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의 마음, 생각과 제자들의 마음,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라고 하심. ‘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있음)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십니다.(32절)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가시자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따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을 피할 수 없음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열두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다시 자신이 앞으로 당하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33-34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고난 받을 장소.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심)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고난 받는 순서가 언급됨)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내용)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 번째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미 8장 31절과 9장 31절에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본문과 앞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실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가실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고 온갖 고난과 능욕을 당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속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예언한 대로(사 49장 1-6절. 사 53장)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길을 걸어가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어쩌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뜻을 위하여 길을 가시는데 있어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비록 그 길이 능욕을 당하고 챔 뱉음, 채찍질을 당하는 길이요, 심지어 죽음까지 받는 길이지만 그 길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길을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제자들의 고난의 삶의 의미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9장 34절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로 서로 쟁론한 바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교훈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35절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20절에는 그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절하고 구했다고 합니다. 35절에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고 말씀드리고는 37절에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그 원하는 내용을 얘기합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있을 것을 알았지만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답하신 말씀이 3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너희는 지금 너희가 구하는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구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 곧 십자가의 잔,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받는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에 참여함이 없이는 영광스러움에도 참여할 수 없음을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할 수 있다.’(39절)고 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9-40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세례임)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땅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같은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 곧 하나님의 상속자”의 길을 말씀하시는데, 그와 함께 받을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삶(골 1장 24절)입니다. 복음의 일꾼, 교회의 일꾼은 이런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위하여 세상이 주는 영광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섬김의 삶
다른 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대화를 하는 소리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41절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그들은 분노를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 두 제자와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윗자리에 앉고 싶어 했던 제자들의 열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불러다가 예수님께서 교훈을 하십니다. 42-44절입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곁에 부르심. 예수님께서 중요한 교훈을 하실 때 사용하는 표현. 3장 23절. 7장 14절. 8장 34절. 12장 43절)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을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세우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권세’ 즉 ‘힘’이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그 힘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권세를 부리려고 하지 말고 더 힘이 있을수록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군림’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들을 부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치관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달라야 합니다.
섬기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45절에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알란 콜은 ‘대속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대속물’은 신약 성경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값을 지불해 줌으로써 노예나 투옥,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다시 사온다는 의미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친히 이 땅에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주(主)’이시지만 또한 ‘종’이십니다. 이사야 53장에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유보다 크신 분이 고난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희생적 섬김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섬김은 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안다면 오히려 주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알았느냐 하는 것은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는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있습니다. ‘섬김’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이 섬기는 삶을 찾아 나아가십시오. 거기에 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