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종 시인의 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반드시 광주를 거쳐야만 했다. 그 무 슨 통과의례처럼, 저 신산했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살아온 우리 문학의 현장 을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는 묵시적 풍경을 바라보면서 광주터미널에 도착했다. 여 느 곳과 다름없는 분주한 움직임과 방문객으로서의 날설음에 허둥대고 있을 때 고 재종 시인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가 직접 이번 여행의 안내자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던 터라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깡마르고 작달막한 체구의 왜소함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게 서릿발치는 듯한 눈매를 지닌 그의 모습 은 마치 옛 선비들의 단정함과 기개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유독 키가 커 보이는 아들 우석이가 함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시인에게 "결혼은 하셨어요?"라고 측은하게 물어오곤 한다는데, 우석이는 이미 아빠의 키만큼 자라 있었다. 농촌에서 계속 살고 있고, 학력이라고 해봐야 농 업고등학교 1학년 중퇴가 전부이며, 찌든 가난 속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살아 온 그의 삶의 내력을 알고서 어느 누가 결혼을 하려 했겠는가 하는 세상의 편견이 아직도 그를 노총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초기 시편들이 농촌문제 를 다루면서, '장가 밑천으로 키우던 소 팔아 읍내 다방 레지 쫓아 다니다가 배신 당한, 그래서 서른 여섯토록 짝을 못맞춘 동네 형님'([상사병])같은 농촌 총각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던 점도 이런 오해의 여지를 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첫시집을 낸 이듬해 1988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 다음해에 아들 우석이를 낳았다. 그의 아내는 오히려 굴곡 많은 시인의 삶을 사 랑했던, 시인의 애정어린 독자요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시인의 집필실을 마련해 주는 등 그의 문학 활동을 아주 적극적 으로 도와주는, 정말 둘도 없는 '시인의 아내'였다. 우리는 광주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커피숍으로 갔다. 거기에서 시와사람 편집동인이면서 시인의 절친한 동갑 친구인 서종규 시인을 기다렸 다. 고재종 시인도 나도 아직 차가 없기 때문에 서종규 시인이 이번 여행의 실질적 인 길잡이가 되어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동안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문학 얘기도 많이 나누었는데 지금 그 때의 세세한 기억은 없고, 다만 김수영의 [풀]에 대한 고재종 시인의 해석이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강 렬하게 남아 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중에서
[풀]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철저하게 민중적 관점에 서 있다. 그래서 <풀>은 민중의 상징이며 <바람>은 압제의 상징이라고 해석된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은, 어떠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먼저 일어나는 민 중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재종 시인은 이러한 경직된 시해석에 상당 한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들판에 한 번 나가보세요. 바람과 풀이 얼마나 정겹게 어우러지는지 두 눈으로 보세요. 바람이 불면 풀이 절로 흥겹게 몸부림치는 모습 을. 이러한 생명의 조화를 간과한 채 무조건 이분법적 계급의식만을 부추기는 경 직된 시각은 이제 청산되어야만 합니다. 시가 이념을 드러내는 데 급급하여 그 깊 은 서정을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시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풀]을 둘러싼 해석의 경직성에 대해 "비를 몰아오는 바람을 풀이 싫어할 리가 없다는 생물생태학적인 반론에 부딪치게 될 것"(황동규, [시의 소리])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고재종 시인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것은, 풀들이 바람을 따라 넘 실대는 저 들판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생명'을 느끼고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농촌시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첫시집 이후 대부분의 시들 이 내가 살아온 농촌의 체험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농사 꾼도 아니고 들판에서 땀흘리며 지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나를 농촌시인 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저 들판에서 하루종일 땀흘리며 사는 농부들에 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제부터 나는 생명시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 은 농촌을 소재로 한 시를 썼던 첫시집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를 지탱해온 영 감입니다. 다만 요즘 평론가들의 유식한 말처럼 생태니 녹색이니 하는 거창한 개 념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죠." 그의 생명의식은 활자 속에 갇힌 관념도 실천주의자의 구호도 아니었다. 그저 나고 자라고 끊임없이 바라본 저 들판에서 우러나온 체험의 깊이에 다름 아니었 다. 고재종 시인의 생명사랑에 심취해 있는 동안 서종규 시인이 합석을 했고, 우리 들은 담양을 향해 출발했다. 우선 고재종 시인의 고향인 담양군 수북면 궁산리로 가기로 했다. 그의 고향 마을은 담양읍을 빠져 나와 영산강 줄기를 가로지르는 가 로수길 너머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워낙 가난해서 궁산리(弓山里)의 활 궁 자 대신에 가난할 궁자를 써서 궁산리(窮山里)라고 자조적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데, 지금은 90여 가구에 꽤 반듯하게 정돈된 마을이었다. 그의 집은 마을 입구 오른편으로 난 샛길 끝자락에 있었는데, 9남매를 비롯한 가족들의 신산한 고통을 온전히 함께 하신 그의 어머니는 안 계시고 빈집만이 덩 그러니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시에서처럼 <마당 가득 지푸라기만 바람에 흩어지 고> <이따금 솔바람에 자물쇠는 덜컹대는>([빈집·1]) 빈집의 스산함이 느껴졌 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두 채의 집이 있었는데, 마당 오른편은 개량을 하여 반듯 하게 지은 집이었고, 왼편의 집은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으로 이어진 퇴락한 시골 농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시인은 몇 해 전까지 이곳에서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의 시가 쓰여진 방의 모습이 보고 싶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곳에서의 어두웠던 지난날 을 끝끝내 지워버리고 싶어 아직도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고재종 시인이 몇 해 전까지 시를 쓰고 책을 읽었던 집 앞에서 서종규 시인 (오른쪽)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 집은 <지옥의 집>이 었지만, 지금까지 그의 시가 아련하게 묻어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고재종 시인이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찢어지 는 가난 때문에 아버지는 언제나 술주정으로 깊은 절망의 날들을 달래고 있었고, 어머니는 막내를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하여 잠시 제 정신을 잃기도 했으며, 작은 누나는 실연의 고통으로 넋이 나가버리는 너무도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설상가 상의 나날 속에서 그는 하루 세 끼를 꼬박 굶으면서도 학교에 대한 애착을 잃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모범생이요 우등생이었고, 교내 글짓기대회, 표어짓 기와 독서대회 등에서 줄곧 우승을 했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지옥의 집>에 들어 가기 싫어 매번 점심도 거른 채 학교도서관에 남아 {전우치전}, {임경업전}, {소년 삼국지} 등의 책들을 읽으면서 보내기도 했다. 또한 1971년 청소년의 달에 실시된 군경찰서 표어짓기대회에서 '청소년 선도하여 유신과업 성취하자'라는, 지금 들으 면 너무나도 진부한 표어를 지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이어서 호남예술제에서 [새마을길]이란 작문을 지어 최우수상을 받아 신문에 얼굴이 나기도 했다. 이 때 부터 그는 글을 쓰며 사는 삶의 운명을 조금씩 짊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꿈을 하루아침에 변 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그가 최우수상을 받은 것을 축하해 준다는 친구의 말 에 그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인은 운명처럼 한 여자와 만나게 된 것이다. 친구의 누나인 그녀는 그에게 "재종인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짓고 나중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라니 참 좋겠다"라고 말했는데, 그 때부터 그는 소설가가 되 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는 전혀 볼 수 없는 더없이 순수한 마음의 기억이 아닐까? 그 후 누나의 배려로 중 2 실력으론 꽤 어려운 {적과 흙}, {죄와 벌}, {전원교향악} 등 세계의 명작들을 닥 치는 대로 읽었다. 교회에 나오라는 누나의 말 한마디에 교회에 열중하기도 했는 데, 그는 그 때의 기억을 이렇게 글로 옮겨 놓았다.
일요일엔 나무를 하러 간다 해놓고 교회엘 갔고 수요일이나 토요일 밤이면 숙제를 핑계대고 곧장 교회로 달려갔다. 그건 순전히 백합 같던 누나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를 다녀오는 방천둑엔 아카시아가 줄줄이 심어졌었는데, 매년 늦은 오월 이나 유월이면 그 새하얀 꽃무더리가 달빛에 훤히 드러났고 그 진한 꽃향기는 삽 상한 바람을 타고 폐부까지 후비었다. 그 길을 예배 끝나고 누나와 함께 돌아오는 밤이면 어찌 그리 황홀하던지. 그 길은 그래서 천국의 길이었다. (중략) 하지만 천 국의 길이 끝나면 내겐 항시 지옥의 집이 있었다. 나는 그 지옥의 집을 구원해 달 라고 무수히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너무도 부족하여 별 효험이 없었다. 나는 그 때 지옥과 천국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고 그 누나에 대한 환상에 시달려 잠을 종내 이루지 못했다. ― [그리움의 저편]({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 중에서
그에게 누나는 절대적 존재였다. 다시 말해 누나로 인해 결심한 문학의 길은 피 할 수 없는 운명의 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집은 언제나 <지옥>이었고, 문학은 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천국>이었다. 지금도 그가 "내 인생에 있어 서 유소년기는 지워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면 그의 지난 삶이 얼마나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지를 실감하고 남을 만하다. 그의 삶의 이력을 여기서 일일이 다 옮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 글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이미 그가 직접 발표한 몇 편의 글들을 통해 충분히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문학이 지독스럽게 가난했던 궁산리의 절망 속에서 피 어난 작은 희망이었음을,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2 시가 흐르는 마을, 궁산리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왼편으로 대밭이 있었다. '죽음 같은 생존만으로 허덕여 야 했던 고향, 멀리도 아닌 뒤꼍에서 대숲 쓸리는 소리'만 들으며 자랐던 시인의 어린 시절이 깊숙한 대밭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이곳으로부터 얼마 떨 어지지 않은 곳에 {대꽃}의 시인 최두석의 고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담양 을 고향으로 하는 시인들에게 대나무는 질기게 따라 다니는 삶의 흔적인가보다. 하지만 고재종 시인은 대나무와의 질긴 인연을 몸서리쳐 하는 것 같았다. 담양 읍 내에 들어섰을 때 나는 죽물시장과 죽물박물관을 가보고 싶었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 와서 그곳을 둘러보지 않고서는 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 의 마음 속에는 대바구니를 엮으며 손바닥이 거북 등짝이 되도록 살아온 삶의 여 정이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통의 기억일 뿐이었던지, 때마침 죽물시장을 둘러보자는 서종규 시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저기 바람부는 대 로 쓸리는 대숲소리에 그의 상처가 온전히 묻어나는 듯 했다.
예로부터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한 고장이다. 어디를 가도 대숲 쓸리는 소리 가 들리는 곳이 바로 담양이다. 매달 2일과 7일 아침에 담양 읍내에는 죽물시장이 열리고, 그곳에는 1981년 개관한 세계 유일의 죽물박물관이 있기도 하다.
대밭이 운다. 하루종일 시퍼러히 대밭이 운다. 서걱서걱 서걱이는 댓니파리가 울고 마디마디 부르터버린 댓매듭이 울고 더욱 도저하게는 땅밑 댓뿌리까지 울어 급기야는 댕기 뚝뚝 듣는 대밭 일대
대밭이 운다. 하루종일 시퍼러히 대밭이 운다. 그 아래 돌담 밑의 헌 가마니쪽이 울고 그 아래 생댓가지 타는 모닥불이 울고 그 아래 댓살 물어뜯는 날렵한 대칼이 울고 급기야는 눈빛 날 서버린 저 검푸른 얼굴들
차운 바람 속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댓침에 찔린 생살 한 땀이 대밭 전체로 흐느낀다는 것이다 지금 대밭 전체로 뒤채인다는 것이다 지금. ― [죽세공 풍경] 전문
시인에게 있어서 <대밭>은 울고 울고 또 우는 아픔의 자리일 뿐이다. 그는 지 금 <대나무가 죽창이 되지 않고/ 대피리가 되는 세상>([죽창을 들고])을 꿈꾸고 있다. 김수영의 [풀]에 대한 경직된 해석처럼 대나무의 상징에 갇혀 언제나 민중 의 죽창이 되기보다는 가난한 삶의 눈물을 함께 하는 저 푸른 대밭의 생명을 간절 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만 댓침에 찔린 생살 한 땀이/ 대밭 전체로 흐느낀다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나누는 고통의 합일을 진정으로 나누고 싶을 따 름이다. 멀리 삼인산(三人山)이 바라다보이는 마을을 따라 흐르는 샛강은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고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에서 물꼬를 막고 집을 지어 물길을 돌리는 바람에 전혀 흐르지 않는 강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조선일보≫에서 '샛강을 살리자'는 캠페인을 잠시 하 더니 이제 그 소리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다. 강이 강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들이 들 의 모습을 잃어버리면, 이제 우리는 어디에 가서 지난 추억의 아름다움을 되새길 것인가? 그저 그리움의 흔적 속에서 가슴으로만 목말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멀리서 보면 사람 인(人)자 세 개가 보인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삼인산(三人 山) 아래에 그의 마을이 있다. 그 앞을 샛강이 흐르는데, 지금은 위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지 않아 숭어가 튀어오르던 옛 기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토록 흐르고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중략)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 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 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중에서
이 시는 그의 생명의식이 온전히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참담한 삶 속에서 생명의 기미를 찾는 시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이 시는, 풍요롭게 굽이치며 흐르던 강이 하상의 갈대잎만 시퍼렇게 남기고 실낱 같은 줄기로 야위어버린 모습을 보여 준다. 아침 햇살에 튀어오르던 숭어도 보이지 않고 갈대잎만 무어라고 아우성치며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며 야위어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시인은 강과 우리가 생명의 교감을 이루던 그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 >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그러나 강은 더 이상 충만한 시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 지 못하고 점점 야위어 가는 생명의 그늘을 보여줄 뿐이다. 결국 지금의 현실은 상 실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결코 시인은 절망만을 노래하지 않고 <그토록 흐 르고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는 희망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표층적 언술의 이면에는 현재의 부정적 상황이 생 명의 공간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굳은 결의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시가 지닌 커다란 미덕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힘과 아름다움이 우주 적 교감을 이루는 세계가 고재종 시의 궁극적 지향점인 것이다. (이숭원, [면면하 고 환한 생명의 자리]) 시인은 마을 여기저기를 떠돌며 시심을 달구었다. 중산리 사람들에 대한 애정 은 각별했고,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도 예사롭지 않았다. [분통리], [작은댁 비닐하우스], [영농후계자 홍보씨의 근황], [밤세상을 낮세상으로 살며] 등은 모두 마을의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농촌의 현실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려 놓은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시가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것보다 자 연의 상실과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그래서 결국 자연이 자연의 모습 을 되찾는 세상을 희구하는 것으로 나아갈 때 더욱 감동적인 울림을 준다고 생각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 [綿綿함에 대하여]는 너무도 아름다운 서정시편이 아 닐 수 없다.
그의 마을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집 뒷켠에 있 고 또 하나는 뒷산으로 올라가는 중간쯤에 아담한 정자와 함께 있었다. 그의 시에 서처럼 <온몸 상처투성이>로 서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푸르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 [綿綿함에 대하여] 전문
이 시 역시 <온 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예사롭지 않은 시선에서 그의 생명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앞들에서 모를 내다/허 리 펴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는 상처뿐인 현실을 이겨내는 상징적 존재로 우뚝 서 있다. 실제로 그의 마을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느 티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그의 집 뒤켠에 있었고, 또 한 그루는 뒷산으로 오 르는 길 중간쯤에 정자나무로서의 아늑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정말로 삭풍에 한 쪽이 완전히 부러진 반쪽의 모습이었다.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 는 마을>을 향해 <소리 죽여 흐느끼는> <푸르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난 겨울의 상처를 꿋꿋이 이겨내고 새롭게 초록의 광휘를 눈부시게 펼쳐내는 느 티나무의 의연함은, 척박한 농촌의 힘겨움을 끝끝내 이겨내며 지금까지 텃밭을 지 켜온 궁산리 사람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마을 뒷편으로 잘 정리된 들판이 그 푸르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들판의 푸르 른 내음을 맡으며 조금 올랐을까 그의 시에서처럼 [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 가 펼쳐졌다. 마을 뒷편 골짜기에 이런 호수가 펼쳐져 있다니 정말 신비스러웠다. 그의 시가 이런 정경을 놓칠 수는 없었으리라. 그의 싯귀처럼 <이제 시인은 숲으 로 가지 못한다>는 말은 저 호수 속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의 마음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 아직도 숲속 골짜기에는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이다. 마을 뒷산 속에 있는 그 중 하나를 나는 황혼 무렵이면 찾는데 늘 산영이 잠겨 푸르게 물들어버린 호수 위로 우선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들 편대 지어 날아오르고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만 열릴 것 같은 깊고 그윽하고 투명한 숲 속의 호수는 물 위에서 제 몸을 잽싸게 튀기는 소금쟁이로도 잔물결 가득하다. ― [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 중에서
여름 호수의 푸르름에 한참이나 취해 있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지만 그 속엔 우리가 채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가득 차 있음을 새삼스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보여지는 부분만을 생각하고 그것이 전 부라고 판단하며 살고 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보여진 현실 저편 어딘가에 그 순 수함과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여행을 떠 나면 우리는 언제나 정해진 길을 따라서만 간다. 그러나 이미 그 길은 수많은 사람 들의 흔적 속에서 점점 그 모습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궁산리 뒷산으로 오르는 길에 그의 시 [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가 있었 다. 푸르른 나무들을 둘러싼 호수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멱을 감는 모습 속에서 비로소 잔잔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길 아닌 곳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의 눈을 되찾아야 할 때다. 그렇 다고 해서 또다시 그곳을 향해 길을 만드는 도시인의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 다. 그저 <호수 위로 우선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들/편대 지어 날아오르고> <소금 쟁이로도 잔물결 가득 일으키는> 그 맑고 깨끗한 풍경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돌아 와야 자연은 자연대로 우리에게 그윽한 마음의 손짓을 보내지 않을까?
3 가사 유적지를 돌아보며
궁산리를 떠나 가사문학의 유적지인 정자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잘 알다시피 담양은 정자문화의 산실이다. 조선시대의 수많은 인물들이 담양에 칩거하며 이 정 자들에서 가사와 시조를 지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의 무대가 되었던 식영정 과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은 송강정, 송순이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알려진 면앙정, 그리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민간 정원으 로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은 한국 정원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곳으로 유 명하다. 우선 식영정으로 향했다. '그림자도 쉬는 곳'이라는, 그 이름조차도 너무나 아름 다운 식영정(息影亭)은 명종 15년인 1560년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광주호를 사이에 두고 광주와 담양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식영정은 정자문화의 산실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으로 도 유명한 이곳의 건너편 환벽당은 어린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꿔 놓은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으로 지금도 옛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 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은 식영정 사선이라 불리는데, 이들은 각 20수씩 80수 의 식영정 이십영을 짓기도 했다. 대체로 가사문학하면 송강 정철만이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서 종규 시인이 말했다. 이 말에는 송순에 대한 평가가 다소 뒤처지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담겨 있었다. 가사문학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지지 못한 필자로서는 그것 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우리의 문학사가 그러하듯 역사의 뒤안길에 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회적 이해관계 때문에 송순의 가사문학이 틀림없이 평가절 하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앙정은 너무도 아름다운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오례천과 넓은 들을 남향으 로 응시하고 있는 면앙정의 모습은 절로 시 한 수가 흘러나올 것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담양 들판의 정경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푸르른 향기로 남아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면앙정은 담양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담양 들판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정시가 아닐 수 없었다.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당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죽녹정을 중수하여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집필했던 송강정을 둘러보고 소쇄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이 곳을 몇 차례 다녔는데, 그 때마다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어느 곳 하나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전국에 있는 우리 문화의 유적들마다 입장료 를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되는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고 사 람들의 발길을 막는 관치행정의 발상이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아마 그 속에는 환 경보호비(?)라는 너무도 아이러니한 명목도 있으리라. 그런데 송강정을 나오는 길 왼편으로 한창 진행중인 건축 현장이 있었다. 무엇을 짓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가 사문학관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선조들의 문화유산인 가사를 잘 보존하 고 정리하려는 담양군의 의도가 물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또다시 자연스런 가 사문학의 풍광을 건물 속에 가두어 놓은 채 입장료나 받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 을까 걱정이 먼저 앞섰다. 소쇄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무성한 대밭이 그 오랜 생명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조선 중종때의 학자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제월당, 오곡 문, 광풍각, 애양단 등을 지어 생활했던 소쇄원은, 평면으로 들여다보면 광주호의 물길이 흐르는 가운데 사다리꼴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또한 흙으로 메워진 기와 지붕의 돌담이나 제월각, 광풍각 등의 정자는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소쇄원을 나와 조선시대 또 하나의 대표적 정원인 명옥헌도 둘러보았다. 다른 곳과는 달리 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따라 마을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 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한 폭의 그림같은 정원이었다. 작은 호수의 뒷편으 로 자리잡은 명옥헌의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명옥헌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자연 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다만 황지우 시인이 자신의 조각 작 업실로 쓰기 위해 그 호숫가에 잠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말에 절로 눈시울이 찌푸 려졌다. 아직도 커다란 유리창에 블라인드가 쳐진 그 집은 이곳의 자연미와는 좀 처럼 어울리지 않는 호사스런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아하게 자리잡은 소쇄원의 정면 모습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진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말이 절로 느껴지는 듯하다.
수많은 정자들로 둘러싸인 담양을 둘러보면서, 마치 고풍스런 집을 짓고 시조 나 한시, 그리고 가사를 읊조리던 옛선비들의 그림자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듯 했다. 담양의 정자문화에 심취해 있는 동안 고재종의 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목적을 잠시 잃어버린 나는, 이내 '고재종 시인 또한 이러한 가사문학의 영향을 받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웬걸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단호 하게 말했다. 그의 말 대로라면 가사문학은 정말 할 일 없는 선비들의 강호한정류 의 호사스러움에 비견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시는 전혀 유흥이 될 수 없는 생 활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자연을 바라만 보면서 노래하는 것이 아 니라 자연 속에 들어가 흙을 만지고 강물에 발담구는 진정한 합일을 이루어야만 온전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시인의 문학관을 분명히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현실의 관찰과 사색, 그에 따른 발견의 의미를 중시한 조선후 기 가사문학의 전통이 지닌 시적 태도와 맥을 전혀 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사문 학 양식이야말로 시적 주체가 처한 현실적 상황과 그에 대한 주체적 대응을 산문 적 발언 형태로 언어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성 있는 전통문학 양식이 다. 따라서 고재종의 시가 철저하게 현실에 붙박고 있는 점은 충분히 가사문학의 정신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윤우, [농민의 숨결, 그 현실적 상상 력의 威儀])
4 섬진강을 따라서
담양을 빠져 나와 현재 그의 집이 있는, 정확히 말해 그의 아내가 사는 ―고재 종 시인은 현재 구례 유곡 나루터에 있는 집필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구례 옥과 로 향했다. 아침 일찍 부산을 떠나서 오랜 시간 차 속에서만 있었더니 저절로 잠이 쏟아졌다. 무엇보다도 낯선 곳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마음이 말끔히 사라 져 내 집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눈을 떴 을 때는 이미 그의 집 앞이었다. 아래 층에 철물점이 있는 2층 건물이었는데, 2층 에 있는 그의 집은 사무실로 쓰던 것을 개조한 듯했다. 고재종 시인이 왜 이 집을 떠나 유곡 나루에 집필실을 마련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시인의 마음이 자리 잡기엔 다소 답답한, 그래서 좀처럼 시가 쓰여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시인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저녁을 먹고 우리는 구례를 지나 곡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1회 섬진강 여름문학학교가 열리는데, 잠시 들렀다가 그의 집 필실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농촌의 이농현상을 실감할 만큼 그곳에는 폐교가 너무도 많았다. 우리가 도착한 예성 학생의 집 역시 폐교를 개조하여 청소 년 수련장으로 만든 곳이었다. 섬진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한 학교에는 이미 많 은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부산에서 신문의 단신을 통해 이미 행사의 소식 을 접했던 터라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고재종 시인의 시를 찾아 떠나는 여 행이 이곳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곳에는 조태일, 임동확, 김호균, 이수행 등 광주전남의 많은 문학인들이 있었고, 강연을 위해 대구의 이동순 교수, 소설가 이 순원씨, 시인 나희덕, 함민복 씨도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 뒷편 그곳 마을 이장집 마루에 앉아 모기장을 쳐 놓고 잠시 서로를 소개하며 인사를 나누고는 고재종 시 인의 집필실로 갔다. 너무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필실 위치가 어디쯤인 지 주변의 경관이 어떠한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수행 시인이 함께 한 그의 집에 서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문단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먼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의 말다툼 소리에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 9시 가 넘었을 때였다. 그가 사는 유곡 나루가 어떤 곳인지 둘러보기 위해 밖을 나섰 다. 간밤부터 쏟아지던 빗줄기가 아직도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운동장에 풀만 무성한 또 하나의 폐교가 있었다. 시인이 사는 이곳은 바로 그 학교 의 사택이었다. 마을로 들어선 입구를 따라 다시 내려갔을 때 시골 어디나 그렇듯 이 커다란 정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맑고 잔잔한 섬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빗물에 씻겨 내려오는 섬진강의 물소리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싯귀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절로 시 한 수쯤은 나올 것만 같은 강물 소리의 맑고 순수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섬진강하면 김용택 시인을 떠올리 는 일은 얼마 있으면 바뀌어야 할 것 같았다. 고재종 시인이 이 아름다운 섬진강의 물소리를 모르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이제부터 이 섬진강을 따라 펼 쳐질 것임에 틀림없다.
가늘게 비가 내리는 섬진강의 잔잔한 물소리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두꺼비 나루>라는 이름과는 사뭇 다른 고요하고 맑은 물길 속에 <생명>이 흐르고 있었 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그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구 례읍으로 갔다. 그는 전통 한식집에서 반찬이 한 상 가득 오르는 점심을 사 주었 다. 전라도의 인심과 음식맛이 한데 어우러진 풍요로운 맛과 내음이 절로 느껴졌 다. 점심을 먹고 김호균 시인을 만나 구례 화엄사로 향했다. 절 입구에 반듯하게 나무로 지은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너무도 따뜻하게 날 맞이해 준 고재종 시인의 마음이 차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향기처럼 다가왔다. 함께 지내는 이틀 동안 그와 함께 문학과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금 내게 그의 모습은 때로는 편안한, 그리고 때로는 엄격한 큰형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는 아 무리 생각해봐도 시인일 수밖에 없다. 들판을 바라보고, 호수를 바라보면서, 때로 는 섬진강 깊숙이 멱을 감으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비로소 나는 생명을 느 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머리 속에 갑갑하게 갇혀 있는 <생명>이라는 단 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생명 그 자체>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삶이 너무도 부 러웠다. 다시 구례 터미널로 와서 부산으로 가기 위해 순천행 버스를 탔다. 다음에 부산 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광주에서 담양을 거쳐 곡성에서 구례로 이어진, 고재종 시인과 함께 하는 시의 여행이 끝이 났다. 겨우 1박 2일의 시간이었지만 꽤 오랜 여름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내 손에는 올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 은 고은주의 소설 {아름다운 여름}이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여름을 맞이했던 것 같다. 생명의 교감이 흐르는 시의 길을 걸으면서.
■ 시인 연보
1957년 담양에서 9남매의 넷째로 태어남. 1965년 담양 수북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담양농업고등학교 1학년 중퇴로 제도 교육을 마감함. 1984년 실천문학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 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함. 1985년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이후 9년간 계속하며 농민운동에도 헌신함. 1987년 첫시집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실천문학사)를 간행함. 1988년 아내 김용숙(현재 초등학교 교사)과 결혼해 이듬해 아들 우석을 낳음. 1989년 두번째 시집 {새벽들}(창작과비평사)을 간행함. 1991년 첫산문집 {쌀밥의 힘}(푸른나무)을 간행함. 1992년 세번째 시집 {사람의 등불}(실천문학사)을 감행함. 1993년 제1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수상함. 1995년 네번째 시집 {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을 간행함. 1996년 두번째 산문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문학동네)를 간행함. 1996년 계간 ≪시와사람≫ 편집주간을 맡아 이후 3년 동안 계속함. 1997년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를 맡아 지금까지 계속함. 1997년 다섯번째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문학동네)을 간행함. 1997년 제2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함. 1999년 ≪시와사람≫ 편집위원 맡음. 1999년 현재 담양을 떠나 구례 유곡마을로 집필실 옮김.
■ 자료 목록
1. 기본자료 1) 시집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실천문학사, 1987) {새벽들}(창작과비평사, 1989) {사람의 등불}(실천문학사, 1992) {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 1995)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문학동네, 1997) 2) 산문집 {쌀밥의 힘}(푸른나무, 1991)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문학동네, 1996) 3) 기타 [그리움의 저편], {아픔을 먹고 자라는 나무}(고재종 외, 푸른나무, 1988) [문학적 자전], ≪시와시학≫, 1997년 겨울 [시인의 말], ≪시와생명≫, 1999년 여름
2. 평론/산문 고형진, [대지의 평화, 생명의 축제], ≪시와시학≫, 1997년 겨울 곽재구, [결코 쓰러지지 않을 궁산리의 이야기], {날랜 사랑} 해설(창작과비 평사, 1995) 구모룡, [탈근대성 양식으로서의 농촌시에 대한 몇가지 생각], ≪현대시≫, 1993년 5월 김동원, [지상에 붙박힌 자의 길찾기], ≪현대시≫, 1998년 5월 김수이, [새어나감과 일렁임,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법], ≪문학동네≫, 1998 년 봄 김영옥, [견딤의 세 시학적 양상], ≪실천문학≫, 1995년 가을 남송우, [생명시학을 위하여], ≪시와사람≫, 1996년 가을 박윤우, [농민의 숨결, 그 현실적 상상력의 위의], ≪시와시학≫, 1997년 겨울 박주택, [생명의 대지와 대지정신], ≪문학평론≫, 1998년 봄 박혜경, [체험의 형상화로서의 농민시], {비평 속에서의 꿈꾸기}(문학과지성 사, 1991) 복효근, [고재종 시인을 찾아서], ≪시와시학≫, 1997년 겨울 성민엽, [문학공간:1998년 봄], ≪문학과사회≫, 1998년 봄 송희복, [생명시의 향방과 의미], ≪시와사상≫, 1997년 봄 신경림, [오늘의 농촌현실의 풍물시],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해설 (실천문학사, 1987) 신덕룡, [내가 만난 고재종], ≪시와시학≫, 1997년 겨울 오세영, [완결된 비유의 몇가지 예], {변혁기의 한국 현대시}(새미, 1996) 오형엽, [고통의 언어, 시쓰기의 괴로움], ≪현대시≫, 1995년 6월 윤재철, [자기 육성으로서의 농민시], {새벽들} 해설(창작과비평사, 1989) 윤지관, [농촌비가를 넘어서], {민족현실과 문학비평}(실천문학사, 1990) 이병훈, [90년대 시의 새로운 모색과 가능성], ≪실천문학≫, 1993년 봄 이숭원, [고재종 시의 생명의식], ≪시와생명≫, 1999년 여름 이숭원, [면면하고 환한 생명의 자리],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해설(문학 동네, 1997) 이숭원, [생태학적 상상력과 우리 시의 방향], ≪실천문학≫, 1996년 가을 이지엽,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 ≪현대시학≫, 1997년 6월 정효구, [고재종 시의 자연], {한국 현대시와 자연탐구}(새미, 1998) 정효구, [그리움의 힘으로 살아가는 두 시인], ≪21세기 문학≫, 1998년 봄· 여름 정효구, [흙, 생명, 밥, 노동], {몽상의 시학}(민음사, 1998) 죽비소리, [고재종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현대문학≫, 1998년 2월 최두석, [농민시와 리얼리즘의 성취], {사람의 등불} 해설(실천문학사, 1992) 한영옥, [격앙감의 시], ≪현대시학≫, 1995년 7월 허 정, [자연의 엄정함, 삶의 엄정함], ≪현대시≫, 1997년 10월 홍흥구, [농촌현실과 농민삶의 시적 육화], ≪오늘의문예비평≫, 1991년 가을 황치복, [살냄새에 대한 그리움], ≪현대시학≫, 1998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