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개역) 1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수 있나이까 10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1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 3:1-21 본문 연구에 대한 당위성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거듭남에 대한 상징에 대해 말하지만, 이 개념이 아주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여러 다른 종교들과 한 시대 안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독교적인 거듭남에 대한 사상을 바르게 정립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그리고 선교적으로 요긴하다. 왜냐하면 거듭남에 대한 이해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요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 역사가 짧지만 우리 교회는 많은 위기를 겪어 왔다. 이러한 위기 때마다 거듭남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그릇된 가르침을 가지고 이단과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 교회를 내부적으로 어렵게 만들어 왔다. 이러한 시대상을 바라보면서 성경은 과연 거듭남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거듭남에 대한 사상은 인간 이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사람에게서 구원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거듭남 사상은 기독론과 성령론 등과도 밀접한 관계 속에서 토론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의 거듭남’은 요한복음에서 신학의 한 중심적인 주제를 이룬다. 이 주제는 요한복음 3장에서 주석적으로-신학적으로 그 중심에 서 있고, 이 거듭남 사상에 대한 논쟁은 종교사적으로 그리고 전승사적으로 오래 지속되었는데, 요한복음 3장은 그 논쟁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그러면 본문을 연구하기에 앞서 문문에서 중심 주제로 떠오르는 “거듭남”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거듭남이 무엇인가? 독일의 종교사학자들은 기독교의 거듭남에 대한 신약 사상을 미드라 제의와 밀의종교와 만다교의 제의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일군의 학자들은 기독교의 거듭남에 대한 사상을 헬라적인 환경에서, 즉 죽음을 육체적인 사슬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고 있는 헬라철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찾고 있다. 정말 신약의 거듭남에 대한 사상이 밀의종교의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는가? 튀빙엔대학 신약학 교수인 리히텐베르거(H. Lichtenberger)는 밀의종교의 제의에 나타나는 거듭남의 개념에 대한 대부분의 증거물들이 신약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성경 본문들보다 시간적으로 더 늦게―부분적으로는 100년은 더 늦게― 쓰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밀의종교로부터 거듭남의 개념을 받아들여 짧은 기간 내에 중요한 기독교 교리로 만들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 보이고, 반대로 신약의 거듭남의 개념이 밀의종교의 거듭남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신약성서적인 거듭남의 개념은 구약에서 찾을 수 있는 ‘씻음’과 ‘새롭게 됨’의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겔 36:25-27). 이러한 구약의 배경 위에서 거듭남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주제는 구약의 새창조사상이다. 구약의 새 창조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일어나는 우주적이고 인간론적인 차원에서 규정되는 전체 우주의 종말론적인 새 창조를 의미한다. 이 새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의해 성취된다. 그런데 신약에서 새 창조가 인간의 새로움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후 5:17). 이러한 새 창조 사상은 하나님께서 씻어주시는 청결을 통해 일어나고(참조, 겔 36:25-27; 비교, 1QS 4:20-26), ‘새 창조'의 중심개념으로 이해되는 깨끗하게 씻음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영의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비교, 시 51:12-16; 겔 36:25- 28) 이러한 사상은 신약의 중생사상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신약의 거듭남의 사상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에 의해 일어나고, 이 사상을 통해 인간의 질적인 새로운 형성이 이해되고 있다. 거듭남이란 언어로 표현되는 태어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된 구원에 의해 기초되어지고 종말론적인 존재로의 변화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현재에 경험되어진다.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참조, 요 2:18-22; 3:13-18; 7:37-39; 딛 3:6). 그런데 이 구원 사건은 요한복음 3장 1-21절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나타나는 니고데모의 오해와 그의 거듭되는 질문과 예수의 대답들 속에서 보면 “태어남”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데(아울러 1장 13절을 보라), 요한복음 3장 3,5,7절과 디도서 3장 5절에 따르면 거듭남은 성령에 의해 일어난다. 이 거듭남은 땅에서 이루어 지지만 하나님의 일이다(비교, 요 3:12). 요한복음에서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탄생’ 혹은 ‘새로운 탄생’(요 3:3,7), ‘성령으로부터의 탄생’(요 3:5f,8), ‘하나님으로부터의 탄생’(요 1:13; 요일 2:29; 3:9; 4:7; 5:1,4,18)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거듭남을 통해 가지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관련하여 거듭난 자는 “종말론적인 존재”로 파악되고(비교, 벧전 1:23), 거듭남은 종말론과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이제 본문으로 눈을 돌려보자.
본문의 상황과 배경 요한복음 3장 1-21절의 상황과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위치해 있는 앞뒤의 문맥과 연관해서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21절의 경계 설정은 장소와 인물의 변화에 의해 분명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 3장 1-21절을 연구하는 데는 2장 23절-3장 36절을 함께 보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 요한복음 2장 23절-3장 36절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a)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대한 전제(2:23-25), b)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3:1-21), c) 세례 요한의 예수에 관한 마지막 증언(3:22-30) 그리고 d)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대한 회상(3:31-36).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의 전제로 보이는 2장 23-25절은 성전청결 사건 뒤에 위치해 있으면서 그 앞에서 이루어진 가나혼인잔치 집에서 일어난 표적(2:13-22)과 함께하여 이러한 예수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예수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이 2장 23-25절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반응의 한 단면과 연관 속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의 도입부(3:1-2a)가 시작되고 있다. 요한복음 2장 24-25절에 예수의 지식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예수의 이 지식은 이사야 11장 1-2절에 따르면 “지혜의 영”과 “지식의 영”에 기초되고 있다(참조, 요 1:32-33; 예수 위에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장면). 요한복음 3장 22-30절은 세례 요한의 예수에 관한 마지막 증언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예수와 세례 요한 사이의 대조를 그들의 세례에 대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3장 22-30절에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가 그림 언어로 아주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3장 29절에는 세례 요한은 “단지 예수에 대한 증거자”로 그리고 신랑과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로 나타난다. 예수와 세례 요한 사이에서 보이는 이러한 분명하고 날카로운 대조는 기독론적인 면에서 관심을 끈다:“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장 31-36절의 연결은 논의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슐라터(A. Schlatter)는 3장 31-36절을 예수에 대한 세례자의 증언에 대한 부분(3:22-30)뒤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그는 31-36절도 22-30절과 아울러 세례 요한의 증언 부분으로 본다. 불트만(R. Bultmann)은 3장 22-30절을 3장 36절뒤에 놓고 있다. 3장 21절 바로 뒤에 3장 31-36절을 놓으면서 3장 1-21절과 3장 31-36절을 “세상의 크리시스(심판자)로서의 계시자의 오심”이란 제목으로 함께 묶어두고 있다. 필자의 시각에는 요한이 기술한 복음서의 배열이 3장 21절뒤에 3장 22-30절이 오고 3장 31-36절이 그 뒤를 따라 배열되어 있다. 불트만이 3장 1-21절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3장 22-30절과 3장 31-36절이 3장 1-21절과 관련을 가지는 비중을 놓치므로써 실수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슐라터의 의견과는 달리 요한복음 3장 31-36절은 언어적으로 사상적으로 3장 1-21절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바로 앞의 3장 22-30절에 나타나는 예수와 세례 요한의 대조를 3장 31-36절에서 더욱 엄격하게 구별짓고 있다. 3장 1-21절과 3장 31-36절 사이에 놓여진 3장 22-30절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의 대조시키면서 더 날카롭게 양자가 대조되는 3장 31-36절을 준비하고 있다. 3장 31a절에서 예수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 3장 31c절에서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 3장 31b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땅에서 난 자”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3장 31-36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3:31a)와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3:31c)라는 말을 통해 예수의 신적인 기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요한복음 3장 31-36절은 거듭남에 대해 말한 3장 1-21절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기록한 신학적인 진술로 거듭남 (아노텐 게네테나이)의 의미를 단순히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로부터 태어난다,” 또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를 밝혀 주는 중요한 부분으로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신 예수만이 거듭남, 즉 “위로부터 태어남”을 가능케 하는 것을 뒤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논제가 본문 속에서 토론되고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본문의 구조를 통해 본문이 가지는 개괄적인 모습을 보도록 하자.
본문의 구조와 내용 위에서 본문이 앞뒤 문맥과 가지는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제는 3장 1-21절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세워 본문을 전체적으로 개관해 보고자 한다.
1. 본문의 구조
가. 대화의 도입부(3:1-2a) 나. 니고데모와 나눈 예수의 대화(3:2b-21) A. 대화부분(3:2b-12) i. 첫 번째 대화(3:2b-3) (1) 니고데모의 암시적인 질문(3:2b.c) (2) 예수의 대답/“위에서 난 생명”(3:3) ii. 두 번째 대화(3:4-8) (1) 니고데모의 질문(3:4) (2) 예수의 대답(3:5-8) iii. 세 번째 대화(3:9-12) (1) 니고데모의 질문(3:9) (2) 예수의 대답(3:10-12) B. 독백부분(3:13-21) i. 인자의 높여짐을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남 (3:13-15) (1)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3:13) (2) 인자의 높여짐(3:14-15) a)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인자의 높여짐 (3:14) b) 인자의 높여짐의 목적(3:15) ii. 영원한 생명(3:16) iii.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구원과 심판(3:17-19) iv. 빛을 받아들임과 거부함(3:20-21)
2. 본문의 내용 요한복음 3장 1-21절(특히 1-8절)은 신약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자료이다. 예수의 니고테모와의 대화의 도입부가 3장 1-2a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믿음은 비교적 “인간적인 동기”에서 보인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위의 구조에서 보다시피 세 번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예수의 표적에 그 초점이 놓여있는데 반해 예수의 대답은 “거듭남”이란 상징언어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 예수는 이 관점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니고데모에 의해 시작된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 요한복음은 거듭남의 사상을 밝힌다. 3절에 나오는 헬라어 ‘아노텐 게네테나이’는 원래 이중의 의미, 즉 1. ‘위로부터 태어남’ 또는 ‘새롭게 태어남’ 그리고 2.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3,7절에서 ‘아노텐 게네테나이’(3:3,7)는 단순히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아노텐 게네테나이’의 의미는 요한복음 1장 13절에 나오는 동의어인 ‘에크 테우 게네테나이’(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다)[비교, 요일 2:29; 3:9; 4:7; 5:1,4,18]와 비교해야 하고 3장 31a절의 ‘호 아노텐 에르코메노스’(위에서 오신 분), 31c절의 ‘호 에크 투 우라누 에르코메노스’(하늘에서 오신 분)과 비교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두 표현은 서로 동의어를 이루면서 ‘아노텐 게네테나이’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노텐 게네테나이’의 의미가 1장 13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3장 31절에 나오는 ‘아노텐’이란 말과의 연관에서 볼 때는 “위에서부터 태어남”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대화(3:4-8)에서 니고데모는 인간의 한계 속에 노출되어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니고데모의 질문에 의해 나온 예수의 두 번째 대답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부터 태어남”이 필연적인 것을 밝힌다(3:5). 5절에서 3절의 “아노텐 게네테나이”가 “게네테나이 에크 투 휴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물과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말로 바뀐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물”은 기독교의 세례와 관련되어 있다. “성령”은 거듭남을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건이 사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간다. 디도서 3장 5절은 거듭남의 씻음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말하고 있다. 세례는 여기서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거듭남의 씻음으로 이해되고 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도 세례는 성령과 함께 거듭남을 발생시킨다. 세례에서 거듭남이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성령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를 통해 사람은 새로운 존재로 변하게 된다. 이것과 비슷한 도식이 에스겔 36장 25-27절과 쿰란문서의 공동체 규칙 4장 21절에 나오고 있다:“그(하나님)는 그(이스라엘)의 위에 정결케 하는 물과 같은 진리의 성령을 뿌린다”(1QS 4:21). 거듭남이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므로 “아노텐 게네테나이”(3:3,7)는 “게네테나이 에크 투 휴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요 3:5)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거듭남은 성령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성령으로부터의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의 성령 사상은 거듭남에 대한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3:5-8). 그 세 번째 대화(3:9-12)에서 거듭남에 대해 “인간적인 불가능성”을 강조한 니고데모와 종말론적인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예수의 “독백”(3:13-21)이다. 13-15에는 요한복음에서의 “인자” 표상이 나타난다. 14절의 ‘예수의 높임’의 구원사적 의미는 민수기 21장 4-9절과 유형론적인 관계에서 이해된다. 인자, 즉 예수는, 십자가 위로의 높아짐을 통해 인간들의 구원을 이룬다(요 3:14). 이 구원은 십자가의 고난에 기초가 놓여진다(요 7:37-39에 고난과 성령전이가 함께 직접적인 관련 속에 놓여진다). 예수의 영광 받음을 통해, 즉 그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믿는 자들이 성령을 선물 받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령을 지닌 자”와 “성령을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한다. 이때 ‘거듭남'이 이루어진다. “예수의 높아짐”이란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그의 “고난과 영광”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3장 13-14절에서 예수의 십자가로 높아짐을 통해 이루는 구원은 거듭남과 관련을 가진다(1:29; 3:14.16; 12:32; 비교, 딤전 2:5-6; 딛 2:14; 8:32; 히 2:17-18; 5:1-3; 9:12.15). 요한복음 3장 15절에서 보면 예수가 높임을 받는 것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비교, 단 12:2f.). ‘예수의 높아짐’은 구원을, 즉 영생을 야기 시킨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시간이 없는’ 혹은 ‘시간이 무한대로 연장된’이란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신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그래서 “영생”은 종말론적인 선물이다. 요한의 영생개념은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 개념과 비교되어진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요 11:25) 요한복음에서 영생과 생명개념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으로 나타난다(3:16-18,36). 이처럼 요한의 생명개념에는 구원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3장 16절-18장 36절에 따르면 믿음에 따라 영생과 심판이 결정되어진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사랑한다. 그의 손에 모든 것을 주셨다(3:35). 요한서신에서 세상이 하나님의 적대 세력으로 부정적인 면에서 나타나는데 반해 요한복음에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서 자리 매김되고 있다. 요한복음 4장 42절에 보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이다. 세상개념에 대해 인간학적-신학적, 기독론적, 그리고 역사적인 탐구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구원사적인 의미”와 함께 나타난다. 세상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일어나고 예수의 세상에로의 파송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3장 17-19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구원과 심판”이 나타난다. ‘불신앙자’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 그들은 빛 대신에 어두움을 위해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3장 20,21절도 “빛을 거절함과 빛을 받아들임”이 아들을 통한 구원과 심판에 대한 요한의 더 확대된 의미로 보인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는 아들파송이 세상을 위한 종말론적인 심판의 의미로 나타난다. 초기 유대전승이나 공관복음 전승에서 심판은 인자의 중심적인 직무이다. 이 심판사상은 공관복음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다:“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나무는 찍혀서 불에 내던져질 것이다”(마 3:10). 요한도 예수의 세상으로의 파송을 심판사상으로 이끈다. 요한복음 9장 39절은 예수가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을 말한다.
결론:설교 구성을 위한 제안 신약의 거듭남의 사상은 성령에 의해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임을 알린다. 이것과 관련하여 이 거듭남은 “위에서 난 생명”임을 밝혀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21절에서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탄생,” 그리고 “새로운 탄생”의 의미로 나타난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탄생”(요 1:13)과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부터의 탄생”(3:5)과 같은 말이다. 이처럼 요한은 “거듭난다”란 말을 통해 신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보여 준다. 요한복음에서 거듭남은 성령 사상을 통해 강조되는데, 성령은 기적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거듭남을 이룬다. 요한복음 3장 5절은 거듭남을 밝히기 위해 성령과 함께 세례를 말하는데 이 세례를 회개와 죄 씻음에 대한 예표로만 아니라, 기독교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는 전제 아래서 이해해야 한다. 거듭남은 성령을 통해, 성령에 의해 규정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예수는 인자로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가지고 온다(3:15,16; 6:40). 예수는 영생 자체이다(5:26; 11:25; 14:6; 요일 5:20). 인자는 유일하고 참된 중보자로서 그의 고난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했다(요 7:39). 요한복음 3장 13-14절에서 보면 그의 높아짐은 민수기 21장 4-9절과의 유비 속에서 구원론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세상으로의 파송이 구원과 심판의 시금석이 된다(요 3:17). 믿지 않는 자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 대신에 어두움을 위해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빛을 거절하고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3:20,21)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난 자들인 예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른 선택과 응답을 통해 “위에서 난자의 삶인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 대한 책임있는 종말론적인 존재로서 살아가야할 것임을 밝힌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