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마 엘리쉬(Enu ma Elish) |
에아(Ea)에 시중드는 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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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저 높은 곳에서는 신들의 싸움이 있었다. 우주에 아무 것도 없던 시절, 혼돈을 상징하는 두 신이 태어난다. 바로 단물의 신, ‘압수’(Apsu)와 쓴물의 신 ‘티아마트’이다. 이들은 서로 혼인하여 많은 어린 신들을 생산해 낸다. 허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아이들은 언제나 시끄럽기 마련.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 제치며 일상의 평온을 깨치는 어린 신들에게 분노한 아버지 압수가 마침내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이 생산한 어린 신들을 모두 잡아먹으려 한다. 하지만 이를 먼저 알아차린 ‘에아’(Ea-지혜와 마술과 또 담수(깨끗한 물)의 신)가 압수를 먼저 처치하고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신들의 왕이된 에아는 ‘담키나’(Damkina)와 한 몸을 이루어 마르둑을 낳는다. 매우 강력한 부모를 둔 마르둑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그의 풍채와 힘은 다른 신들과는 빗댈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뛰어났다. 어린 마르둑의 장난에 어른 신들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그의 힘은 막강했다. 이런 마르둑의 강함은 신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되어 결국 그는 지하방에 감금되는 신세로 된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그는 너무 위험했다. 그만큼 마르둑의 힘과 덩치는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빗댈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신들의 세계에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긴다. 에아의 강력한 통치에 후방으로 내앉은 신들이 작당을 하여 티아마트를 꼬드긴다. 권력의 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결국 티아마트는 자신의 사령관으로서 ‘킹구’(Kinggu)를 앞세우고, 또 거대한 괴물들을 만들어 에아와 그를 따르는 신들을 압박해 온다. 싸움의 모양세가 티아마트 쪽으로 기울게 되자 신들은 위험한 아이 마르둑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마르둑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면 자신을 신들의 왕으로 모시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고 마르둑은 드디어 전쟁에 임한다. 그는 자신의 증조모가 되는 티아마트와의 심리전 끝에 강력한 화살공세로 승리를 따낸다. 할머니와 손주의 피를 보는 싸움이라!. 싸움에서 이긴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갈라 하늘과 땅을 만든다. 그리고 킹구의 피와 흙을 섞어 신들에게 봉사할 인간을 만들고, 하늘을 구분지어 각 층별로 다스리는 신들을 임명하고 자신은 신들의 왕으로 올라선다는 것이 이 신화의 대강이다.
얼핏 보면 이 이야기는 장엄한 창조의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좀 더 이 부분을 세밀히 살펴보면 마르둑 신화는 단지 창조의 이야기만을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화를 통해서 시대와 문화적 배경을 읽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벨론은 도시의 수호신이던 마르둑을 통해 바벨론의 정통성을 합리화시키고 한 도시의 수호신이 신들의 왕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이 신화에는 고대 근동지역의 다양한 신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들의 지위와 순번이 마르둑을 중심으로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지를 이 이야기는 아주 분명하게 그려주고 있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바벨론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얼마나 위대하고, 또 자신들의 우월적 지배권이 얼마나 정통성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그 색깔에서 철저히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바벨론 신화와는 달리 자신들의 창조이야기에서 신화적 요소들을 철저히 떼어내고 있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신‘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한’ 분만이 창조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신의 이름과 모습도 뚜렷이 등장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창조이야기는 신화적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내용은 신화적이지 않다는 묘한 특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창조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사람들은 창조하면 물질의 시작을 떠올린다. 그래서 창세기의 이야기도 물질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천체 물리학 책으로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성서기자들의 고백은 물질의 시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부여한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에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구태여 많은 신들이 필요치가 않다. 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신들의 이름도 등장할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들은 단지 혼돈이었을 뿐이다. 질서와 순서, 그리고 차례가 필요한 곳에 그 순서를 세우신 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그들의 창조이야기는 목적하는 바를 충실히 완수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 근동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의 그것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 진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목적이 적잖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비과학적이거나 반과학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그 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관한 책인 것이다.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제대로 읽혀질 수 있는 책인 것이다.
Ⅳ. 묵상
- 어떤 사람이 속도위반으로 경찰에 단속되어 차를 세웠으나 달아났다. 경찰이 오토바이로 금방 따라와서 딱지를 떼고 훈계까지 들었다. 화가난 그 사람은 작심하고 시속 300Km를 낼수 있는 외제 스포츠카를 샀다. 정속으로 달리고 있는데 경찰 오토바이가 따라 붙으며 ‘서라’는 지시를 했으나 그는 속력을 내어 오토바이를 떼어놓았다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또 경찰 오토바이가 따라 오면 속력을 내어 달아났다가 쳐지는 것을 보면 속도를 줄이기를 계속해서 경찰의 약을 올렸다. 그렇게 몇 번하니 경찰도 화가 났는지 속도를 엄청나게 내면서 따라붙었다. 그러나 외제스포츠카인지라 또 속력을 높여 따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약올라 하는 경찰의 모습이 백밀러에서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어 차를 돌려 오토바이를 찾아나섰는데 길옆 도랑에 처박힌 오토바이에서 경찰이 기어 나오면서 말했다. ‘아, 막 따라 붙었는데 글쎄 내 오토바이가 당신 차 뒤에 정지되어 있는 줄 알고 오토바이에서 내리지 않았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비교 개념속에서 살다 보니까 자신의 속도감각을 잊어버리고 넘어질 때는 큰 문제를 일으킨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말은 인생에서 무책임한 태도이며 그 보조에 맞추면 스포츠카와 오토바이의 속도가 같아 착각을 하고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것과 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과 비교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남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욥에 대하여 언제나 비교우위 개념으로 접급하였기에 그를 만족시키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만을 볼 수 있도록 해보십시오.
- 흔히 금을 분류할 때 14K, 18K, 24K라고 부릅니다. 이 때 K는 순금 함유도를 나타내는 캐럿(Karat)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숫자가 높은 순금에 가깝습니다. 24K는 순금을 말합니다. 순금은 이론적으로 100%의 금을 함유하고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99.99% 이상인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18K는 어떤 금일까요? 24분의 18, 즉 3/4인 75%가 금이고 나머지 24분의 6, 즉 1/4은 은과 구리 등 다른 금속이 함유됐다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14K는 24분의 14, 즉 58.33%의 금이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금이라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의 돌 잔치 같은 귀한 일에는 순금을 선물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과 같이 살아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순금고 같은 영혼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기다려주시는 이유는 100%가 되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풀무를 거치고 그러한 단련을 이기기는 어렵지만 분명 거룩하게 쓰여질 순금같이 나올것입니다. 레위기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분류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눕니다. 정한 것은 깨끗한 것이고 부정한 것은 더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께 쓰여질 물건 일까요? 하나님은 정한 것도 더군다나 부정한 것은 더더욱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을 쓰십니다. 그 거룩한 것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바로 시험이고 고난인 것입니다. 욥과 같이 하나님께 쓰여질 거룩한 순금과 같은 성도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루를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감사하며 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