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땅의 유래
1.아포읍
옛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 아포가 반란을 일으켜 감문국이 군사 30명을 동원하여 토벌작전에 나섰으나 감천에 홍수가 범람하여 회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포가 신라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의 문곡. 미한. 봉명. 황소. 신촌 공쌍. 구암. 명례. 보신. 송변. 양산동 11개동과 동면의 대동. 동신. 작동. 마암. 덕계. 동촌. 남촌. 아야. 칠산. 숭산. 상송. 금계. 회성. 대증. 신기동 15개동의 2개면의 행정구역을 합하여 김천군 아포면으로 1914년에 고치고, 아포면 사무소는 문곡동(인 2리)에 있었으나. 1916년 이를 없애고 면 중앙지점인 국사동으로 옮겼다.
또한 이동을 인동. 의동. 예동. 지동. 대신. 봉산. 제석. 국사. 송천. 대성동의 10개동으로 개편하였고, 1958년 4월 16일 교통이 편리한 국사 2리 126 - 1번지로 현청사를 옮겼다. 아포가 도시 형태를 갖추게 되고 인구가 늘자(1994년 9,005명) 1995년에 읍으로 승격했다.
남서부에 있는 봉우산(340m)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구릉 야산지가 이루어지고, 동남부는 효자봉(561m)을 중심으로 제석봉(512m). 국사봉(480m)등 높은 산맥이 남쪽을 가리고, 감천이 동서쪽으로 길게 흐르면서 그 옆은 비옥한 외송. 역들. 원창. 제석. 포평의 넓은 들판이 펼쳐져 김천 제일의 농업지대로 경지율 37%, 논과 밭의 비율은 69 : 31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읍의 가운데로는 철도와 고속도로, 906번선 지방도로(김천 - 구미)가 동서로 나란히 지나고, 그 밖에 아포와 선산 사이의 도로와 아포와 감문면 사이의 도로가 동쪽과 중앙지대에서 남북으로 나란하게 지나는 농업 위주의 곡창 지대이다. 최근에는 인삼을 많이 재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이나 제반 자연환경이 좋은 고장이다.
옛날 금릉군 동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구미시 선주동, 동북쪽으로 구미시 고아읍과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은 감천을 경계로 감문면과 개령면이 접하며, 서남쪽으로 남면과 사이하고 있다.
아포의 아가 앞에서도 일렀듯이 아- 엄의 걸림을 보인다. 마침내 어무 - 엄- 아 - 금 -감이라는 대응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로 보면 아포는 감천내의 파생천으로 보인다.
2.농소면
조선시대에 신곡. 조곡. 봉현. 둔동. 노산. 호동. 응곡. 농소. 신촌. 지동. 율곡. 대방 등 14개 동을 관할하던 농소면은 개령현에 속하고 면사무소는 농소에 있었다. 또한 연명리는 신라시대 연명향으로 개령현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하면서도 김산현에 속하였다.
1906년 연명면으로 개편되어 본리. 조로. 송방. 입석 등 4개 동을 거느리고 개령현 농소면으로 이속 되었다. 한편 농소리(용시)에 있던 면사무소는 1906년 개편시 월곡 1리(밤실,율곡)로 이전되었고, 1993년 1월 12일 새 청사를 건립하였다.
김천시의 동쪽에 자리하고 동쪽으로는 남면, 남쪽으로는 성주군 초전면. 벽진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감천면, 북쪽은 시가지와 이웃하여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남쪽의 3분의 2는 산악지대이고, 북쪽의 3분의 1은 평야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남쪽에 있는 백마산(716m)이 북으로 뻗으면서 백마산과 고당산에서 발원하는 율곡천이 면의 중앙부를 북류하면서 양 기슭에 평야지를 형성하고 남면 초곡리에서 감천에 합류한다.
한편 백마산과 동쪽에 있는 산대봉(465.8M) 사이에는 연명천이 북으로 흐르며, 대체로 구릉지대를 이루어 과수원예가 발달하였다. 율곡천을 중심으로 월곡. 입석. 용암. 신촌의 대평야를 이루고, 김천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및 4호선 국도가 동서로 가로 지르고 있다. 특히 월곡. 신촌 평야의 농경지 정리를 196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준공식을 가져 농촌 근대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남 면
조선시대에는 개령현에 속한 옥산. 봉천. 오봉. 초곡. 운남. 용전 마을을 거느리는 적현면과 송곡. 운곡. 월명. 부상 마을을 거느리는 남면의 2개 면이었는데,1914년에 통합하여 남면이라 하고 10개동을 관할하였다. 1916년 운남동 종상에 있던 적현면 사무소를 폐쇄하고 옥산에 남면 사무소를 신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천시 동쪽에 자리하면서 금오산이 막아서서 그 동쪽은 칠곡군과, 서쪽은 평야지에서 농소면, 남쪽은 비백산과 백마산, 성주군 초전면과 경계를 이룬다. 서원동이 송곳같이 뻗어 그 끝이 감천에 이르고 그 건너편은 개령면과 이웃한다.
중앙부에 운남산(376.8m)과 절골산(380.4m)이 나란히 솟고, 남쪽에는 선대봉(465.8m)과 사모실산(260.4m)이 나란히 솟는 사이에 오리내가 북으로 흐르면서 봉천동에 평야지를 이루고 오봉저수지가 만들어져 땅을 기름지게 하고 있다. 동쪽은 금오산이 높게 솟아 구미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 농소면과의 사이에는 송곡천과 율곡천으로 평야지가 발달하였다. 대체로 남면은 평야지대로 곡창을 이루고 있다.
4.개령면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이 이곳에 있었으며, 서기 231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557년에 감문주를설치하여 기종을 군주로 파견했으며, 687년에는 사벌주 밑에 개령군을 두고 그 밑에 감물현(어모현). 지품천현(지례현). 무산현(무풍현). 김산현을 두었다.
조선시대(1416년)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면서 개령현으로 격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동부동 일대에는 왜군의 후방 사령부가 설치되어 영남지방의 행정에까지 손을 뻗쳤다 한다. 1598년에는 길운절(吉云節)이 제주도에서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그가 살던 개령현이 폐현되었다가 1609년에 유림의 상소로 복현되었다. 1869년 전국에 13도를 두면서 개령은 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개령군에 속한 부곡면(7동)과 서면(11동)을 통합하여 개령면이라 하고 18동리를 9동으로 개편했다. 1983년에는 대광동이 어모면 응명동과 합하여 대응동이 되어 김천시에 편입 되었다. 김천시의 동북쪽에 감천을 따라 장방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김 천시내에서 면 소재지까지 8km 떨어져 있다.
동쪽은 감천을 경계로 아포읍, 서쪽은 어모면, 북쪽은 감문면, 남쪽은 김천 시가지와 접하고 있다. 김천 시가지 동북에 인접하고 동북으로 흐르는 감천을 따라 길게 뻗으면서 감천 연변의 넓은 평야를 안고 있는 지대이다.
옛날 감문국이 자리한 곳으로 유적지가 비교적 많고 910번 지방도로가 남. 동북으로 뻗었으며 산지보다 평야가 더 많은 편이다.
5.감문면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문무리에 문무국이 있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으나, 고증할 길이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개령현에 속한 곡송면(곡송, 신풍, 태성, 완동, 장기, 대오, 월류, 소재)과 김산군에 속한 위량면(나가, 금보, 구야, 고도, 상여, 송문, 성북, 상군, 하군, 적하, 부곡, 본리, 남곡) 및 개령현에 속한 북면(삼봉, 오성, 가척, 성촌, 광동, 명천, 상보, 하보, 대양) 등 3개면이 있었는데, 1914년 북면을 곡송면에 합하고, 1934년 4월 위량면과 곡송면을 통합하여 감문면이라 하였다.
1983년 2월 15일 봉남동과 소재동이 선산군(선산읍)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또한 위량면 사무소는 금라동에 있었으며, 곡송면 사무소는 북면과 합치기 전에는 광덕동(탄동)에 있었다. 1919∼1930년까지는 면사무소가 덕남동에 있었다. 1931년 태촌동으로 옮겼다가, 1934년 위량. 곡송면이 합면된 후 감문면으로 변경되어 면사무소는 두 면의 중간지점인 보광리 351번지에 세워 써오다가 1992년 3월 6일 북동쪽 500m 지점에 오늘날의 청사를 새로 짓고 옮기었다. 김천시 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구미시 선산읍과 무을면, 북쪽으로 상주시 공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어모면, 남쪽은 개령면과 감천을 경계로 아포읍과 접경하고 있다.
북쪽에 있는 백운산(일명 속문산 618.8m)은 남쪽으로 뻗고 있으며, 남쪽의 대양산(312.6m)은 개령면 남전과 경계를 이루며, 백운산에서 발원한 감문천은 면 서쪽으로 흘러 개령면 서부리에서 감천과 합류하고, 외현천은 면 중앙부의 북남으로 관류하여 태촌(배시내)에서 감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대체로 북부는 산간지대, 남부는 평야지로서 1980년부터 미곡을 탈피한 특수작물로 참외, 토마토, 포도등을 재배하여 주민소득이 높은 곳이다.
6.어모면
삼한시대 이전은 미상이나 구전으로는 어모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에는 금물현이었고 통일신라시대(경덕왕 16년)에 어모현으로 개칭하여 개령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경산부(성주)에 일시 예속되었던 적도 있었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정종의 태를 봉안하였다 하여, 1416년 어모 김산을 합하여 김산군이라 칭하였고, 이 지방은 천상면. 천하면. 구소요면이 되었다.
1914년 김산을 김천군이라 개명하였고, 1920년 천상면. 천하면을 합하여 아천면이라 하였으며,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합하여 어모면이라 칭하고 그 관하에 13개동을 두었다. 1949년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이라 하였고, 1971년 행정 23개동으로 정하고, 1983년 김천시 확정으로 응명동이 시로 편입되어 법정 12개동에, 행정 21개 동이 되었다. 1988년에 동이 리로 바뀌었다.
김천시 북쪽 끝에 자리하며 동쪽은 감문면과 개령면에 인접해 있고 남쪽은 김천 시가지에 접경하였다. 서쪽은 봉산면과 충북 영동군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으로는 상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어모면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대부분 산악지대에 걸쳐 있다. 난함산과 용문산의 발원인 어모천이 면 중앙부로 남쪽으로 흐르고 있고 또 3번 국도와 경북선 철도가 남북으로 중심부를 지나며 어모천 하류 연안에는 평야를 이루고 있다. 지명 변경의 과정을 보아 어모 - 감천 - 음달 - 금물이 같은 이름임을 볼 때 감 - 검 - 어모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상정할 수가 있다.
어모는 어머니임을 앞에서도 풀이하였는 바 물과 땅신 곧 지모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기원적으로는 능치 혹은 능점의 곰마을에서 비롯한 것이 뒤로 오면서 거북이와 접합되어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7.봉산면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지금의 봉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김산현에 속한 고장으로서 직지사에 봉납하는 산물을 생산하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김산군 파며면 또는 파미면으로 상리. 중리. 상지리. 하지 리. 입석. 천포. 신립 등 7개 마을을 관할하였다. 1914년에 충북 황간군 남면의 신계. 도산. 남전. 복산. 상마전. 하마전. 태평. 봉산. 사점. 하리. 하중리. 상리. 상중리. 금화. 신기. 신촌. 고도암. 가성을 편입하여 봉산면이라 하고 17동을 관장했다.
1973년에는 복전동을 대항면에 편출하였다. 군수 정유번의 차자 형승이 살 던 곳은 고월천리, 노비 전순기의 효자 정려문이 있는 곳이 효자동이라 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시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으로 김천 시내와 어모면, 서로 충북 영동군 매곡면, 남으로 대향면, 북으로 영동군 추풍령면과 인접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 고속도로, 국도가 면의 중앙으로 지나가고 김천 시내에서부터 7km지점에 위치하여 벼와 포도 재배의 적지로서 403ha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충북 접경 지점에 추풍령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육로 교통이 집중되어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다. 산지가 전체 면적의63%이며, 산세는 비교적 험준하여 700m 이상의 준령이 3개소나 되며 낙동강 지류인 직지천이 감천으로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평야를 이루고 있다.
8.대항면
옛날 김산군 서쪽 끝 지역인 대항 12 방의 중심지는 면사무소가 있는 터목이었다. 한자로는 대항으로 표기하고 본리라 했으며, 뒤에 대항으로 고치고 20동을 거느렸다. 1906년 황간군 황남면의 6개동(지천, 묘내, 광암, 방하상, 세송, 돌모응)과 봉산면의 하지리의 일부를 김산군에 편입하여 관내를 삼았다.
1914년에 26개동을 향천. 덕전. 대룡. 운수. 주례. 대성의 6개동으로 통합하였고, 1973년에는 봉산면의 복전동을 대항면으로 들게 하여 7개동이 되었다. 이에 앞서 1971년에는 다시 복전 2, 대룡 2, 덕전 4, 대성 2, 주례 2, 운수 3, 향천 4개동 등 19개동으로 나누었다.
충북 영동군과의 도(군)계를 이루고, 서남쪽으로 구성면, 동북쪽으로 봉산면과 경계하며, 김천시가지와는 동쪽에서 인접하고 있다. 동쪽 2개동(대룡, 덕전)을 제외하고는 서남쪽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에 속하고 동서를 지나는 경부선 철도, 4번 국도가 서쪽 산악지를 피해 북쪽으로 굽어서 니은자 형으로 지난다.
면의 서쪽에 천덕산. 황악산(1,111m). 바람재. 삼성산 등의 높은 산이 이어져 경계를 이루며, 남서쪽에 호초당산(894m), 남동부에 덕대산(811m)과 같은 험준한 산지로 되어 있어 면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경작지가 적어 경지률이 15.6%밖에 되지 않는다. 면의 북동부의 들을 중심으로 한 경지정리가 이루어져 중요한 농업지대를 이루며 포도 생산의 중심이 되고 있다.
관내에 신라 사찰인 직지사가 있고, 절의 진입도로가 직지천의 양쪽으로 개설되어 관광객의 내왕이 편리하다. 오늘날에도 터목이 있음을 보면 그에 상응하는 한자 대항으로 씀이 옳을 것으로 본다.
9.감천면
조선시대에는 성주목에 속한 신곡면(엽실방) 무안동(외안, 기산, 무릉, 신안, 통정, 대동, 삼거리). 용호동(복룡, 매화, 입암, 복호, 하평, 상평). 도평동(소룡, 후평, 평산, 도촌). 광기동(기동, 잡화, 광암, 등당, 내동, 사촌)을 관할하였고, 1906년에 신곡면이 김산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총독령에 의하여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고가대면의 양천동, 금송동(속곡, 상송, 하송, 원동, 대방, 이화). 전동은 광기동으로, 지좌동(군내면 마좌산리)과 조마남면의 신평리 등을 개편 통합하여 감천면을 신설하고 그 관내에 편입했다.
1928년에 감천면 지좌동은 김천특별면에 편입했고, 1983년에는 양천동이 김천시에 편입됨으로써 5개 법정동이 되었다. 이에 앞서 1949년에 행정 구역 개편시 2, 3동으로 분동되어 13개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김천 지역의 중앙 지점 동쪽에 위치하고 김천 시가지 남쪽에 접하며 김천시내에서 면 소재지까지는 8km 떨어져 있다
동으로는 농소면과 접하고 남으로는 조마면 일부(신왕리)와 접하며, 서쪽은 북류하는 남천과 감천을 경계로 조마면(삼산리, 장암리, 신안리)과 양천동과 접하며 북으로 지좌동과 접한다.
시내에서 가장 작은 면으로 남으로는 조마면 일부와 경계를 이룬 고당산(579m)과 동으로는 고당산 줄기의 산 정상을 경계로 농소면과 접하면서 산악지대와 구릉지대를 형성했고, 서쪽은 감천유역에 발달한 평야 곧 금송평야. 도평평야. 언고개들. 남천유역에 진만리들. 개양지들 등이 곡창을 이루고 구릉지대를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어 경작하고 있어 매우 부유한 편이다.
김천의 젖줄이라고 할 감천을 고장의 이름으로 할 정도이고 보면 그 역사가 자못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천은 중앙천이요, 기원적으로는 거북신 곧 물신과 땅신을 섬기는 믿음에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김천 지역 농업생산의 주도적인 구실을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997번 지방도로가 남북으로 뻗고 325번 순환도로가 동서로 뻗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 하다.
10.조마면
기원전 82∼57년에는 변한시대의 12국가 중 주조마국 또는 졸마라 일컬었다가 742∼756년에 신라시대는 상주목 개령군에 속한 조마부곡으로 들어 앉고 1781년에 와서 금릉지에는 김산군 조마남면으로 적혔다.
1914년 김산군 조마남면 21개동을 4개동으로, 김산군 남천면 10개동을 3개동으로 통합하고 2개면을 합면하여 김천군 조마면으로 개칭하였다. 조마면은 강곡동. 장암동. 신안동. 신곡동. 삼산동. 대방동. 신왕동이 되었다. 1948년 8월 13일에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으로 개칭하였다.
1962년 3월 26일 행정구역 7개동을 18개동으로 나누었으며, 다시 1971년 7월 1일에 행정구역 18개동을 19개동으로 나누었다. 1988년에 이르면 각 동을 모두 리로 개칭하였다.
김천의 남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감천면과 성주군 벽진면, 남쪽으로는 지례면과 성주군 금수면, 서쪽으로는 구성면, 북쪽으로는 김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마면의 북부 지방에는 감천 중류에 발달한 도암돌. 장암들. 신안들 등 넓은 들이 많지만 남부는 산악지대로 농경지가 적으며, 남쪽 끝에는 염속산(870m)이 우뚝 솟아 산의 좌측에는 산지맥이 동북으로 북주하면서 염속산과 글씨산(540m). 고당산 등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산의 우측으로는 산지맥이 서북쪽으로 북주하면서 연석봉(594m). 동대산. 신달이산. 불두산(470m) 등의 산 봉우리를 틀면서 뻗어 가다가 감천 냇물에 가로 막힌다.
염속산을 발원으로 남천이 북으로 흐르면서 감천에 합류한다. 조마면의 입구인 신안. 장암. 도암은 구성면 대덕산(811m) 동쪽 나직한 산자락을 등지고 앞으로 감천을 끼면서 면 최대의 비옥한 들을 형성하고 있다. 감천을 이두식으로 읽으면 감내가 된다. 지명의 분포로 보아 감내는 중앙천의 뜻으로 보아 온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감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터전이요, 삶의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11.구성면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남쪽끝인 하곡. 강성. 신기. 관동. 황각. 죽방. 대방. 수동. 송평. 궁장 등 10개 마을로 이루어지는 과곡외면과, 금곡. 두곡. 상기. 중기. 하기. 래방. 배평. 광천 등 24개 마을로 이루어지는 과곡내면이라 하였다. 지례현 북단인 임평. 무릉. 임천. 월평. 임규. 단수. 마산 등 14개 마을은 상북면에, 구미. 작내. 복호. 와룡. 상거. 명덕. 대림. 미평 등 24개 마을은 하북면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곡외. 과곡내양면을 과곡면으로 통합하고 상북. 하북면과 대항면의 백어를 합하여 석현면으로 하였다가 김천군에 편입되었다. 1933년 홍수로 석현면 청사가 유실되자 과곡. 석현면을 통합하여 구성면이라 하고, 1934년 상좌원에 청사를 신축하였다.
구성이라 함은 지례현의 옛 별호를 따온 것이고 광복 후 1949년 김천읍이 김천시로 승격 되어 분리됨에 따라 금릉군으로 예속하였다. 1988년 조선시대 금릉군 관내에 있던 동을 리로 바꾸었다. 김천시에서 남으로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김천시 양천동과 경계를 이룬다.
동쪽은 지례면, 서쪽은 부항면, 서북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충북 영동군과 접한 산간 지대이다. 북쪽은 덕대산(811.6m)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국사봉(570m)과 삼악산(454m)을 이룬다. 남동쪽으로는 가제산(682.7m)이 위치하며, 삼도봉과 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이 면 중앙부의 남북으로 관류하며 그 유역이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다.
질매재에서 발원한 무릉천(5.25km)은 구미에서 감천내와 합류하고, 대항 주례에서 흘러내리는 하원천(9.25km)은 상좌원에서 감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덕대산 남동 기슭의 끝부분인 석현(돌고개)은 조선시대 김산군. 지례현의 접경을 이루었다. 구성의 구는 감천의 속성을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인 이름이다.
구성산성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연못 가운데 거북이 바위 전설이 있어 거북이와의 인연이 깊은 고장이라 할 수 있다. 거북이를 사투리말로 거무 혹은 거미라고도 이르는바 모음이 바뀌면 거미(거무) - 가미(가메, 가매)의 대응됨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물을 중하게 여기는 물신숭배의 믿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굼뜸이라 하여 거북이 구멍같이 생긴 고장에서 마을 형성이 비롯하였음을 일깨워 주는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다.
12.지례면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한 지역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상주(사벌주)에 속했으며 지품천현이라 불렀다.
신라 경덕왕 35년(757년) 개령군에 속하였고 지례현이라 고쳤으며, 고려조에 와서 현종 9 년에 경산부에 속하였는데 공양왕 때에 감무를 두었다. 지례현의 하현면이라 하여 교촌, 부평. 상부. 하부. 대율. 고념. 거물. 반목. 동산. 현장촌. 동장촌과 상현면에 속한 도곡. 송천. 신평. 관덕. 구수. 고석. 여배 마을이 있었다. 조선조 태종 10년(1410)에 상주에 진영을 둔 독립현으로 현감을 두었다.
조선 고종(1896년)때 관제 개혁으로 지례군으로 바뀌었고, 1906년 성주군 증산면을 지례면에 편입시켜 상현면. 하현면. 상남면. 하남면. 외남면. 서면. 하서면. 상북면. 하북면. 외증산면의 열개 면을 관하에 두었다. 1914년 일제 시절에 행정구역 개편 당시 성주목 외증산면 일부였던 상신평. 하신평. 삼곡. 외고. 내고. 울곡. 이전. 해평을 합하여 김천군 지례면이라 불렀으며, 광복 후 금릉군 관할 지역이 되었다.
1994년 1월 법정리로 교리. 상부. 대율. 거물. 도곡. 관덕. 신평. 이전. 울곡. 여배의 10개 이동으로 이루어지며, 행정리로는 교 1리. 교 2리. 상부 1리. 상부 2리. 대율. 거물. 도곡 1리. 도곡 2리. 도곡 3리. 관덕. 신평 1리. 신평 2리. 이전. 울곡. 여배 1리. 여배 2리로 16개 리로 이루어진다.
김천의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김천시에서 남쪽으로 20km 지점의 산간 지방이다.
면의 서쪽은 부항면을 접하고, 남으로 대덕면과 만나고, 동남으로 증산면, 성주군 금수면 과 경계를 이루고, 동북으로 조마와 어깨를 맞대이고 북쪽으로 구성면과 연결된다. 전답은 대체로 좁게 형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이루고, 감천변을 따라 삼천포 ∼초산선 국도 3번선이 남북을 가르고 있다.
교리와 상부리를 중심으로 면소재지가 이루어졌고, 구 금릉 군내에서는 가장 큰 시가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5일마다 서는 장이 아직 남아 있다. 또한 김천. 거창. 영동. 울곡. 조마. 상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 침략군 제 6진 1만 5천명을 인솔한 고바야가와가 전쟁에 패하여 퇴각하던 중 지례에서 왜적 1,500여명이 소탕된 격전지역이었으며, 1907년 11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1년간 의병과 일본경찰의 교전지로 한말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기도 한다.
지품천현의 지품이라 함은 깊다 - 짚다에서 비롯한 형태이다. 골이 깊고 물웅덩이의 굼뜸이 깊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13.부항면
부항면은 지례현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면이라 했는데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상서면, 하서면으로 분할했다. 상서면은 단산·사동·구룡·학동·어전·부항·지시·서장· 상대·하대·해인·대야 등 13개 동이며, 하서면은 죽전·파천·임곡·안간·대평·두산 (갈계)·말미·교현·외희·죽동·용촌·유촌·동산·가물·상지· 하지·옥소·신소·신촌 등 21개 동리를 관할했다.
1914년에는 군면의 통합에 따라 상서·하서 두 면을 합하여 부항면이라 하고 관내 34동을 사등·월곡·어전·하대·해인·대야·파천·안간·두산·희곡·유촌·지좌·신옥의 13동으로 개편했다.
부항면 사무소는 유촌리에 있었는데 1959년 말에 사등리 516-2번지로 이전하자 전 하서면 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1960년 7월 12일에 유촌리 505-10번지에 출장소를 설치했다가 1998년에 폐쇄했다. 1963년에는 13개 법정 리동을 19개 행정동리로 분할했다.
김천시 남쪽 서편에 위치한 부항면은 시청에서 32km 떨어지고 면의 서쪽은 삼도봉을 중심으로 북은 황악산, 남으로는 대덕산이 이어지는 준령으로 대체로 지대가 높고 동쪽으로는 평평한 지대이다. 서쪽으로는 어전·해인·대야·안간의 여러 골짜기 물이 동으로 흘러 동쪽 끝에서 합류하면서 논이며 작은 들을 이루는 바 기름지다.
부항천의 수위는 변함이 적고 차가워서 모내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이루어진다.
김천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지례면, 남으로는 대덕면, 북으로는 구성면과 접하고, 서로는 삼도봉을 기점으로 삼도가 접하는데, 북은 충청북도 영동군, 남은 전라북도 무주군, 동은 경상북도 김천시이다.
14.대덕면
신라시대에는 지품천현에 속하였다가 757년에 개령군 지례현에 귀속되고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성주 경산부 지례현에 이속되었다. 조선시대는 지례현 남면이라고 불려졌다가 1895년에 상남·하남·외남의 3개면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에 3개 면을 통합하여 대덕산의 이름을 따서 대덕면이라 칭하여 김천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32개 동을 화전·문의·대리·연화·덕산·내감·외감·가례·조룡·중산·추량· 관기의 12리로 통합 개편했다. 1949년에 김천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금릉군 관내가 되었다. 1960년에 12개 리를 21개 리로 분할 개편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김천의 남쪽 끝에 자리를 잡아 경북·경남·전북의 삼도 접경 지대에 위치하여 김천시청에서 면소재지까지는 32km이다. 서로는 전북 무주군, 남으로는 경남 거창군과 접경하고, 북으로는 지례면과 부항면, 동으로는 증산면과 인접하고 있다.
소백산맥의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주위에 수도산(1,317m)·월매산(1,023m)·국사봉(875m) ·대덕산(1,290m)·고드름산 등의 높은 산과 우두령과 주치령의 높은 고개가 있는 산간지대로 산이 전면적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수도산에서 발원한 화전천과 대덕산에서 비롯된 덕산천·감주천이 합하여 북으로 흐르면서 황성계곡과 조룡 2리에서 시작된 추량천과 조룡천을 받아들여 감천 상류를 형성한다.
이들 냇가에 들이 있다. 김천∼거창간을 연결하는 3번 국도와 무주∼대구간을 이어주는 30번 국도가 대덕면의 동서와 남북으로 지나가고 2개의 지방도가 개통되고 있어 개화기가 5일 정도 늦고, 홍수와 한발 등 천재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
15.증산면
조선시대는 성주목(군)에 속해 있었으며 관내에 있는 시루봉(증봉)의 이름을 따서 증산면이라 칭하였고 37개동을 관할하였다. 1895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주군 외증산면과 성주군 내증산면으로 나누어졌다.
그 뒤 1906년에 내증산면은 지례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에 다시 외증산면도 지례면에 병합 되었다. 한편 내증산면은 증산면이라 개칭하여 김천군에 편입됨과 동시에 29개동을 부항· 동안·황정·평촌·유성·금곡·황정·수도·장전·황점의 10개동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1949년에 김천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금릉군 관내에 들었다. 1973년 유성동을 1, 2동으로 분할하여 11개동이 되었다.
김천시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경남의 도계를 이루며 김천시청에서 면 소재지인 옥동까지는 32km거리이다. 동은 성주군, 서는 대덕면, 남은 경남 거창군, 북은 지례면과 접경하고 있다. 면 주위가 수도산(1,317m)·단지봉(1321m)·목통령·형제봉(1022m)·삼방산 등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산의 면적이 전체 넓이의 86.5%를 차지하는 김천시 제일의 산간오지 이다. 북의 황항 및 부항리에서 발원된 남암천과 서의 수도산에서 발원한 대가천, 그리고 남의 황점 및 장전리에서 비롯된 목통천이 흘러 면 소재지 아래에서 합수하여 옥류천을 이루어 성주군 방면 동쪽으로 흐르고 이들 가천 양안에 좁은 들이 이루어져 있다.
무주∼대구간을 연결하는 30번 국도가 면을 동서로 지나고, 지례면 속수 앞 3번 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903번 지방도가 면을 남북으로 달리어 장전리에 이르고 이 두 도로가 면소재지에서 교차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불령산(수도산)에 천년 고찰인 청암사와 수도암이 있고 경치가 뛰어난 골짜기가 많아 관광지로서의 전망이 밝은 편이며, 면 전체가 고지대인 관계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길고 추운 편이다.
증산의 증은 시루가마를 뜻하는 것으로 부항의 부와 무관하지가 않다. 그것은 부산- 대증에서 가마와 시루가 같은 개념으로 통용됨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본디 성주쪽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계열로 보아 그렇다는 줄거리다.
16.용암동
김천 시가지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의 서안에서 모암산 중간지점까지의 시가지 지역 일대인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상신기·하신기로 일제시대에 상신기는 나시키마치, 하신기는 혼마치·아사히마치 등 일본식 이름으로 명명되고, 광복후에는 우리말 이름 용두동·감호동·모암동으로 고치고, 1993년에 감호동과 용두동을 합하여 용호동이 되고, 1998년에 용호동과 모암동을 합하여 용암동이 되었다.
17.성내동
성내동과 모암동에 걸쳐서 가운데 앉은 산을 이르러 자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은 언덕배기인데 옛부터 큰 마을이 있어 자산 마을이라 불렀다.
동으로는 모암동 시가지와 이어지고 서로는 평화동과, 남으로는 남산동과, 북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내리는 직지천을 경계로 하여 신음동과 마주한다. 공공기관으로는 교육청이 있으며, 자산 마을 밖으로는 상가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오늘날의 중앙초등학교에서부터 철도 건너 시교육청으로 능선이 이어져 있으며, 자연부락이었던 자산마을이 있을 뿐이었다. 1905년 무렵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고 뒤이어 국도가 만들어짐에 따라서 1920년을 전후하여 시가지가 이루어졌다. 1909년 일본식의 마을이름을 붙이면서 죠나이마치라 하였다가 광복 이후에 우리말 식으로 하여 성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62년에 1동과 2동으로 나누었다가 1983년에 이르러 시조례에 따라서 통합하여 오늘날까지 그리 부른다.
18.평화동
평화동은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김천면 에 속했던 갈마동의 자연 마을과 대여섯 집이 모여 살던 서낭대이가 있었을 뿐이다
갈마동은 지금의 김천역 북쪽의 80번지라 부르는 마을 앞이며, 서낭대에는 서부 초등학교 진입로 갈림길 언덕기로 그곳에 서낭당이 있었고 서낭당 동쪽 도로변에 대여섯 집이 있었다.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 김천역 앞에는 일본인들이 요지를 잡아 철도 승객들을 상대로 음식점 등 기재를 열어 급속도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의 자치단체인 일본인회를 1906년 조직하고 그 단체에서 1909년에 김천 역전지역을 일본식 동명을 지어 야모토마찌라 부르다가 1914년에 지방행정 구역 개편시 야마토마찌 구역을 지금의 평화동 구역과 같이 정하고 정식 동명으로 확정되어 일제시대까지 사용되어 왔었다
광복 후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평화동이라 고치고 62년에 1,2동으로 분동했다가 83년에 한동으로 통합하였다.
19.양금동
고성산의 동남쪽을 둘러싸고 동쪽 감천내 너머에는 지좌동이 있고, 북쪽은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용암동과 접하고, 서쪽은 남산동과 인접하다.
조선시대에는 좌동·우동·약수동의 자연부락이 1914년에 황금정으로 통합되어 1948년에 황금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고, 한편으로 조선시대에 상리·중리·하리·양곡동을 하로라 부르는 자연부락과 노천마을을 1914년에 양천동으로 합동하고 일제시대에 도로변에 형성된 신기동을 병합했다.
1998년에는 황금동과 양천동을 통합하여 양금동으로 되었다.
20.대신동
1998년 9월 금산동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김천시에서 가장 큰 동이 되었다. 시가지 북쪽의 직지천을 건너 외곽지대의 마을은 시청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행정 중심지로 변모하고, 대단위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공업의 중심지가 조성되었다.
음성나환자의 집단 거주지인 삼애원이 지명으로 굳어져 가고 있고 김천시민운동장과 문화예술회관이 건립되어 김천의 중심지로 발돋움해 가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지이던 금산동은 점차 쇠퇴해 오다가 이곳에 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다.
21.1998년초 미곡동과 부곡동을 통합하여 대곡동이라 했다. 이 고장은 김천의 서북쪽에 부곡동 시가지와 이곳을 벗어난 농촌 마을이 인접하여 있고 서로는 대항면 대룡리와 인접하다.
또한 직지천을 사이에 두고 대신동(삼락동)과 마주본다.
22.지좌동
김천 시가지의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을 사이하고 있다. 요즘 들어 국도 길가에 아파트 밀집 지역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 나면서 준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및 국도가 마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동으로는 농소면 신촌 마을과 이웃하였으며, 서쪽은 감천을 사이하여 용호동 시가지와 마주 보고 있다.
남으로는 응봉이 가로 막은 산악지대이며 감천면과 조마면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있다. 북으로는 감천 냇가에 발달한 마잠들이 있으며 이곳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지좌동은 갈대. 배다리. 마잠. 새말. 매실. 병실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갈대와 마잠은 조선왕조 시대에 군대면에 속한 마좌산리였고, 새말은 고가대면에 속한 지수리였다. 한편 매실과 병실은 개령현 농소면의 응곡과 호동이었다.
1914년 고가대면의 지대리와 지수리와 군내면의 마좌산리를 합하여 지좌동이라 하여 감천면에 속하게 된다. 또한 응곡과 호동을 합하여 덕곡동이라 하여 농소면에 속하게 되었다. 1938년에 이르러서 지좌동은 김천읍에 속하게 되고, 1960년에는 1동과 2동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가 1983년에 이르러서야 덕곡동과 함께 어우르면서 1동과 2동도 합하여 지좌동이란 행정동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23.남산동
고성산 기슭 언덕에 자리한 마을이다. 동쪽은 황금동 주거지역과 연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평화동, 남쪽은 고성산에 가로 막혀 있다. 북쪽은 경부선을 경계로 하여 성내동과 이웃하여 있다. 동쪽으로는 남산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고려 초기부터 이곳에 김천역이 있어 이에 따른 마을이 이루어졌다. 김산군 김천면 관할인 중동과 하동이 있었다.
1914년에 일본식으로 이름하여 난산마찌라 하였는데, 1946년 우리말식으로 고쳐 남산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이곳에 금이 나는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하여 금지천이라 하였다. 이 샘에서 금을 캐어 나라에 바쳤으나 해마다 많은 금을 공량으로 바치라고 하여 견디기가 어려워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묻어 없애 버렸다고 한다. 김천은 이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고성산에 쌓았던 산성터가 있으며 고성산 봉우리에는 봉수대 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