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둘레길 5코스 '무태팔달길’
대구둘레길 5코스 무태팔달길의 들머리는 대구광역시 북구 호국로에 위치한 무태네거리에서 시작된다. 이번 구간의 난이도는 중간 정도이며, 특히 망일봉(279m), 함지산(287.7m) 등 산 길을 포함하고 있어 실거리가 8.8km 인데도 5시간 30분정도 많이 소요되는 코스이다.
들머리인 무태네거리에서 망일봉까지 2.1km는 완만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며, 망일봉은 2017년에 전망대와 망원경을 설치하였는데, 전망대는 높이가 6m이며 바닥면적은 50㎡로 어른 100여 명이 동시에 올라 전망할 수 있는 규모이며, 망원경은 금호강, 시가지, 팔공산 등의 자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망일봉에는 연리지가 있는데, 이 곳의 연리지는 소나무로 서로 다른 나무가 아닌 뿌리가 같은 한 나무의 줄기가 갈라져서 다시 합쳐진 형태로 연리목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망일봉에서 함지산까지 1.8km인데, 망일봉과 함지산 가운데는 오목하게 들어가 있고, 경사가 매우 급한 지형으로 함지산 이름도 이 지형과 관련이 있다. 함지산 정상에 오르면 대구 칠곡 지역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함지산은 북동쪽으로는 팔공산과 연결되고, 북서쪽으로는 대구 칠곡지역과 접하며, 남서쪽은 팔거천을 따라 금호강까지 형성된 연봉으로 이어져 있다. 함지산에는 정상석이 있다.
함지산에서 600m 진행하면 팔거산성이 나오는데, 팔거산성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6호. 흔히 ‘노곡동산성(魯谷洞山城)’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에서 비롯된 것이며 신라 때에는 독물성이라 하였고 팔거리현(八居里縣)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을 팔거현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 산성을 팔거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칠곡과 상주를 거쳐 한양을 향하는 교통로에 이 성곽이 위치하고 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케 해준다. 성안은 분지형태의 오목하게 생긴 평탄한 지형이어서 군사가 주둔하기에 편한 반면, 성 바깥은 노곡동 쪽만 완경사이고 나머지는 30°이상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요새이다.
또한 팔거산성(八莒山城)이 있는 함지산에서 뻗어나간 여러 줄기의 구릉상에는 크고 작은 고분이 무리〔群〕을 이루고 있으며, 157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제56호분이 1975년에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구암동고분군의 성격의 일단이 밝혀지게 되었다. 2018년 8월 7일 사적 제544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팔거산성에서 이번 구간의 날머리인 팔달역까지 4.3km 산 입구까지는 내리막이고, 산입구에서 팔달역까지는 평평한 길이다. 팔달역은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로 2길 43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천동은 약 400여 년 전 야성 송씨(冶城 宋氏)가 현재의 태전교 남쪽에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현재 매천1동은 매남(梅南)에게 매천2동은 송천(松川)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번 구간은 팔달역에서 마무리 한다.
망일봉
2017년 9월에 전망대 설치사업을 완료했으며, 12월에는 이용객들이 멀리까지 전망할 수 있는 대형 망원경 2대를 설치했다. 망일봉 전망대는 땅바닥에서 전망대까지의 최고 높이가 6m이며 바닥면적은 50㎡로 어른 100여 명이 동시에 올라 전망할 수 있는 규모이며, 전망대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가까이는 화담산과 금호강이 보이고 동북쪽으로 멀리 팔공산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신천과 대구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최적의 해맞이 장소로 손꼽힌다. 전망대에 망원경을 설치해 금호강, 시가지, 팔공산 등의 자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망일봉을 즐겨 찾는 시민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망일봉 연리지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산 53번지에 위치한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의 줄기나 가지가 맞닿는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매우 희귀한 현상을 말한다.
연리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흔히 남녀간의 사랑을 비유하며, 나아가서는 부모와 자식, 가족사이, 친구사이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하나로 이루어진 두 나무로 형상화 되고 있다. 즉, 두 그루의 나무이지만 서로 상통한다는 데에서 ‘화목한부부’나 ‘남녀간의 깊은 사랑’을 의미한다. ‘지극한 효심’이나 ‘친구간의 우정’을 뜻하기도 한다.
나뭇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라 하고,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 뿌리가 서로 연결된 것은 연리근이라 한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나무는 동종연리지,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는 이종연리지라 한다.
여기에 있는 연리지는 소나무로 서로 다른 나무가 아닌 뿌리가 같은 한 나무의 줄기가 갈라져서 다시 합쳐진 형태로 연리목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며 매우 특이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연리지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사랑이 성취되고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함지산
대구 구암동, 조야동에 걸쳐 있는 높이 284.4m 의 산이다. 높이는 낮지만 비교적 경사가 급한 구간이 많다. 특히 함지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경사가 매우 급하므로 조심하는게 좋다. 동네 야산이지만 산 정상만 있는게 아니라, '망일봉'이라고 해서 다른 봉우리가 있고 가운데는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산의 이름도 '함지'산인 것. 정상에 오르면 대구 칠곡 지역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등산에 많이 이용되기 때문에 등산로가 여러 갈래로 개척이 잘 되어 있다. 산 밑은 운암지 수변 공원이 있고 산 정상에는 헬기 착륙장도 있으며 곳곳에 식수원과 정자, 그리고 여러 운동시설들이 포진해 있어서 등산하다가 쉴 공간이 많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산은 사실 그냥 동네 야산이 아니다.
이 산에는 고대에 지어진 '팔거산성'이 존재하며, 산의 부분 부분에는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수장급 지배세력의 고분이 존재한다. 팔거산성은 팔공산에 가산산성이 지어지기 전까지 대구의 핵심적인 방어시설이었다. 고분은 특이하게도 돌무지돌덧널 무덤 형식인데, 이는 신라의 지배층 돌무지덧널 무덤 형식과 다르게 덧널까지도 돌로 만든 형태라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사 당시 안타깝게도 고분이 도굴 당하여 유물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지만, 칠곡 지역의 지배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의의가 크다고 한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유적군을 '구암동 고분군'으로 부르고 있으며 대구시는 북구청 중심으로 예산을 들여 팔거산성과 구암동 고분군을 복원해 역사 테마파크로 만들려고 하는 중이다.
대구 칠곡 쪽의 산 바로 밑은 언급한 대로 운암지 수변공원이 있으며, 그 옆과 앞에는 먹자 골목이 매우 길게 형성되어 있다. 산 근처에는 구암초등학교, 구암중학교, 함지고등학교, 구암성당, 구암교회, 옻골 동산 등이 있으며 근접한 주변 주택들은 산 바로 밑의 가구골목과 아파트 단지들, 외식 상가들과 유치원 밑 2층 가옥들, 소규모 자영업 상가들이다. 전체적으로 칠곡 주민들에게 외식과 산책 및 등산, 소풍의 장소로 이용되기 딱 알맞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노곡동(魯谷洞)
일명 '노로촌(魯谷洞)', '논어실'이라고도 합니다. 마을 뒤편에 함지산 중턱에 노곡산성, 일명 팔거산성이 있는데 노곡은 노노촌에서 유래된 말로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팔거산성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6호. 흔히 ‘노곡동산성(魯谷洞山城)’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에서 비롯된 것이며 신라 때에는 독물성이라 하였고 팔거리현(八居里縣)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을 팔거현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 산성을 팔거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산의 모양이 함지같다고 하여 ‘함지산성’, ‘반티산성’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칠곡과 상주를 거쳐 한양을 향하는 교통로에 이 성곽이 위치하고 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케 해준다. 성안은 분지형태의 오목하게 생긴 평탄한 지형이어서 군사가 주둔하기에 편한 반면, 성 바깥은 노곡동 쪽만 완경사이고 나머지는 30°이상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요새이다.
성곽의 동쪽 성벽은 능선 정상을 따라 쌓았고 서쪽 성벽은 바깥쪽 둘레의 사면에 돌과 흙을 이용한 편축법(片築法)으로 축조하였다. 성 안에는 많은 양의 삼국시대 토기편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5∼6세기 경의 성곽으로 추정된다.
구암동고분군
팔거산성(八莒山城)이 있는 함지산에서 뻗어나간 여러 줄기의 구릉상에 크고 작은 고분이 무리〔群〕을 이루고 있으며, 157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제56호분이 1975년에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구암동고분군의 성격의 일단이 밝혀지게 되었다. 2018년 8월 7일 사적 제544호로 지정되었다.
제56호분은 밑지름 18m, 높이 4.5m의 본분(本墳)과 지름 10m, 높이 2.6m의 북분(北墳)으로 된 쌍분(雙墳) 형태로 봉분(封墳)을 형성하고 있는 돌무지〔積石〕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세장(細長)한 장방형의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으로, 본분과 북분에 각각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을 서로 평행되게 배치한 여러덧널식〔多槨式〕이면서 으뜸·딸린덧널식〔主副槨式〕인 돌무지무덤이다. 두 덧널의 거리는 남북으로 약 10여m로서 대립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한 칠곡고분군은 주변의 대구 또는 경산지방 고분군의 봉분이 토축인데 비해 돌무지로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형의 묘제는 이른바 돌무지돌덧널무덤〔積石石槨墳〕으로 불리고 있다. 껴묻거리〔副葬品〕는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일부가 잔존해 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본분의 으뜸덧널에는 동침(東枕)된 사람뼈 조각 일부와 함께 금동허리띠조각〔金銅銙帶片〕·손칼 등의 철기류와 재갈 등의 마구류, 굽다리접시·유대발형토기(有臺鉢形土器) 등의 토기류가 부장되어 있다. 딸린덧널에는 말띠드리개〔杏葉〕등의 마구류 약간과 굽다리접시·짧은목항아리〔短頸壺〕·유개사이부호(有蓋四耳附壺) 등이 다수 부장되어 있고, 조개껍질도 일부 출토되었다.
북분의 으뜸덧널에서는 금동관조각〔金銅冠片〕·쇠투겁창조각〔鐵矛片〕·토기조각 약간이 조사되었다. 딸린덧널에서는 쇠손칼조각, 철제은장(鐵製銀裝)의 말띠드리개 및 말띠꾸미개〔雲珠〕등의 마구류와 토기로는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구암동고분군에서는 봉분 돌무지 내에 유대발형토기의 기신부(器身部)가 부장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토기의 굽다리〔臺脚〕부분이 본분의 으뜸덧널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매장 당시 의도적으로 이 토기를 깨뜨려서 따로따로 부장한 것으로서, 그 당시 장송의식(葬送儀式)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56호분과 같은 돌무지돌덧널무덤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는 특이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로 연결된 쌍분형태의 적석부 내에 두 돌덧널이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신라·가야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배치양식이다. 그러나 원형의 적석봉분이나 쌍분 축조와 같은 특징은 경주의 신라계 무덤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낙동강 동안지역의 양식으로 묶일 수 있는 지역적 특성도 가지고 있으나 대체로 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경주지역 토기양식의 유입도 많아진다.
구암동고분군은 출토유물으로 볼 때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라의 영향 안에 있던 지역집단 지배계급의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매천동(梅川洞)
약 400여 년 전 야성 송씨(冶城 宋氏)가 현재의 태전교 남쪽에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현재 매천1동은 매남(梅南)에게 매천2동은 송천(松川)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한 송원기(宋遠器) 선생이 광해군의 폭정을 간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자신의 호를 벙어리라는 뜻에서 아헌(啞軒)으로 고치고 이 지역에 내려와서 후진양성을 하였다는데서 매남(梅南)마을이 유래되었고, 또한 마을 뒤쪽으로는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앞은 팔거천(八莒川)이 흐르고 있어 소나무 송(松)자와 팔거천(八莒川)의 천(川)자를 따서 송천(松川)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들 자연부락을 하나의 동으로 합하게 되었는데 매남의 매(梅)자와 송천의 천(川)자를 따서 매천동이라고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1. 일시 : 2018. 10. 27(토)
2. 코스 : 무태네거리←<2.1km>→망일봉←<1.8km>→함지산←<0.6km>→팔거산성←<4.3km>→팔달역
3. 실거리 : 8.8km
4. 소요시간 : 5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