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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은혜를 바라보라.
1. 사람은 힘든 고난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될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이 약화됩니다. 요셉은 순종의 보상(?)으로 감옥 생활을 시작했지만(사실, 감옥에서 보내는 하루는 밖에서 자유인으로 보내는 시간 계산과는 전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그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기꺼이 해석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기회라고 생각하였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어린 시절 하나님이 주신 꿈을 포기해 버렸다면 그는 결코 이 두 사람의 꿈을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낙심 가운데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런 기회들을 포착하는 법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할 수 있도록 요셉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꿈의 해석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을 때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오래 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장래의 은혜에 대한 기대가 아니겠습니까!
4. 무엇이 요셉을 이 긴 시간 동안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37장에서 요셉이 소개될 때 함께 드러난 두 가지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던 요셉이, 자신이 해석해 준 대로 일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을 때, 두 관원장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신 꿈도 착각이나 헛된 꿈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꿈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5. 이러한 요셉의 기대감은 바로의 술 관원장에게 한 요셉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14).” 하지만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잊혀졌습니다(23). 사람들은 이렇게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6. 하지만 믿는 자들의 소망은 사람들이 기억해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다시 부르실 것입니다. 요셉은 그 날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고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순종하면서 인내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오늘을 견디며 인내하며 믿음으로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인내의 시간이, 당신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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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꿈을 해석합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오늘 이야기도 이 속담이 통할지 아니면 다르게 표현해야 할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40장은 ‘만남, 두 개의 꿈과 해석, 그리고 성취’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두 사람과 만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꿈을 해석하고 요셉이 해석한 대로 꿈은 성취됩니다.
이 일이 벌어지는 장소는 39장에 이어서 여전히 감옥입니다. 요셉은 이 감옥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요셉의 나이가 스물여덟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2년 후에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되는데 그 때 나이가 서른입니다. 그래서 계산하면 지금 나이가 스물여덟이고, 열일곱 살에 애굽으로 왔으니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와서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11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셉, 그의 나이 스물여덟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이미 알기 때문에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얼마나 더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억울함은 해결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서, ‘이 꿈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꿈일까? 정말 이 꿈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요셉은 지금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죄수의 신분이었고,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는 달리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넘긴 형들은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도 잘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없는 나는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두 사람을 만납니다.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입니다. 이 두 관원장은 바로에게 범죄하여 요셉이 있는 감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관원장은 왕실의 주방장, 왕을 모시는 전속 셰프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 먹고 마시는 것을 책임지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독살의 위험이 있던 왕은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자를 관원장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래서 관원장은 왕의 측근이 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의 성벽을 재건했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관원장을 요셉은 감옥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만남을 보면서, 이것이 그냥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원장이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된 것, 그리고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섬기게 한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만, 요셉 입장에서는 관원장의 시중을 들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과 우리를 향한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을 주관하시며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작은 일들, 작은 만남들, 크고 작은 사건들, 우리 인생에 오고 가는 작은 이야기들, 우리는 무심코 지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작은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때로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는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과거의 어려움과 아픔을 돌아보면 그런 경험들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험들은 너무도 아프기에, 너무도 힘겨운 일이에 말처럼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 그런 아픔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지금 상황에서 요셉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왜 이런 모습으로 지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두 관원장이 동시에 특별한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두 관원장이 서로 다른 꿈을 꿉니다.
아침이 되어서 요셉이 관원장의 시중을 들 때, 이들이 근심에 빠져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간밤에 꾼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함과 불안함으로 고민하고 있던 것입니다. 당시에 꿈은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꿈을 꾸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꿈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상황을 파악한 요셉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며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8)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입을 엽니다. 그의 꿈은 이러합니다.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고 세 개의 가지가 있는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그 포도를 따다가 즙을 짜서 바로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나무에서 포도송이가 열리는 모습인데, 우리가 TV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영상을 보는 것처럼 묘사되는 꿈입니다.
이 꿈에 대해서 요셉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 개의 가지는 3일을 의미하기 때문에 앞으로 3일 안에 복직되어서 다시 예전처럼 술 맡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해석에 덧붙여서 그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4-15) 여기 나오는 “생각하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기억하다’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 대한 해석이 좋으니까 보고 있던 떡 굽는 관원장도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말합니다. 꿈에서 그는 떡이 담긴 세 개의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고, 맨 위에 있는 광주리에는 각종 구운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들어봐도 뭔가 안 좋을 것 같은 불길한 꿈입니다. 이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3일 안에 죽을 것이고 새들이 그 시체를 쪼아 먹는다는 것입니다. 해석을 사실대로 말해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셉의 해석을 들은 두 관원장, 이들은 각자 다른 마음으로 감옥에서의 마지막 3일을 보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자가 해석한 대로 될 것인가’ 초조함으로 마음을 졸이며 감옥 밖에서 전달되는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이 3일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내가 해석한대로 꿈이 성취된다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 이런 기대로 감옥에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났습니다. 마침 이 날은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당시 왕들은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날이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 죄인들을 풀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바로의 생일날,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술을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었고, 떡을 굽는 관원장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해석대로 된 것을 알았을 때, 요셉에게 큰 격려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자신의 처지와는 관계없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꿈이 틀리지 않았구나! 내가 해석한 대로 이루어졌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도 틀리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에 분명히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질 것이고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꿈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건하게 했을 것입니다. 비록 11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리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바로 왕에게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인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요셉은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인내해야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제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요셉은 그에게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꿈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관원장의 꿈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보다 다음에 나오는 바로의 꿈을 예비하고 바로와 요셉을 이어주는 일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요셉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꿈들은 모두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려주어서 그 일을 준비토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통해서 이 모든 일이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 아닙니까?’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그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시고 미래를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셉에게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속담,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을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표현하면 ‘꿈도 해몽도 하나님께 속한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떡 굽는 관원장이 불쌍하다는 연민의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죽게 되었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꿈을 해석하는 요셉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은 관원장이 아니라 요셉에게 있습니다. 단순히 꿈이 아니라 꿈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누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요셉이 해석할 수 있었고, 요셉이 해석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꿈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언제 꿈이 이루어지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인내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원장의 꿈에 대해서 자신이 해석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요셉 스스로가 꿈을 믿지 않고 있었다면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꿈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성실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요셉에게 있었던 그런 꿈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만 보여주신 특별한 것, 그런 것이 없잖아요. 정말 특별한 경험, 특별한 계시가 있다면 그것을 굳게 붙잡고 확신하며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하시거나, 내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한 꿈으로 보여주시면 다를 것 같지 않습니까? ‘네가 결혼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다’ 딱 보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없어서 우리가 확신할 수 없고 불안하고 염려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런 것이 있으면 다를까요?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었나요? 성경에 보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보여주신 꿈이 정말 특별한 일 인거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의 조상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직접 말씀을 하셨고 천사를 보내기도 하셨고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요셉에게 단 한 번도 직접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알려주신 것은 열일곱 살에 꾸었던 꿈이 전부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충분히 불평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하셨던 것처럼, 왜 나에게는 직접 말씀하지 않습니까? 정말 어려운 순간에 용기가 필요할 때, 믿음이 흔들릴 때, 왜 침묵하십니까? 이렇게 투정부릴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이미 내가 너에게 보여주지 않았느냐? 나는 너에게 이미 약속했단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신뢰하고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거란다.‘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바라고 원하지만,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고 특별한 것, 그 완전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시편 말씀을 한 구절 찾아보고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7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7) 하나님이 요셉을 앞서 보내셨고,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매여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그 약속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요셉의 꿈을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요셉에게 꿈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도 같았고,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꿈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어려운 일들, 힘든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단련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갑니다.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더 주님을 닮아가도록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를 빚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 중에 있고 그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을 기대하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문에 나오는 관원장과는 다릅니다. 요셉은 관원장에게 은혜를 구하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지만 관원장은 잊어버렸습니다.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언제라도 어느 때에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 상황을 아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행하심이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일을 행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며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눈에 더디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만약 관원장의 도움으로 지금 감옥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힘들지만 2년 후에 나오는 것이 요셉에게도 훨씬 더 좋은 일 아닐까요? 우리는 바로 앞에 것만 보기 때문에 모릅니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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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네 명의 믿음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중 마지막 족장인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었으나,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일순간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낯선 이방(애굽) 땅에서, 의지할 이 하나 없는 수많은 노예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그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곧 바로의 친위 대장 보디발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고 계심을 보고는, 요셉을 그의 가정의 총무로 삼아 자신의 소유를 다 맡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되는데, 이를 피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오해로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일순간 그는 노예에서 죄수로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참으로 불쌍한 신세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그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창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자신까지 은혜를 받게 되자, 곧 요셉에게 감옥 안의 죄수들을 모두 맡겼습니다. 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처리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요셉과 함께 투옥된 두 명의 관원장(1-4)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본문은 ‘그 후에’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 시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옥에 갇힌 요셉이 간수장의 신뢰를 얻어 감옥 안의 죄수들과 온갖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빵)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인 애굽 왕에게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어떤 죄를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어진 내용은 그 죄가 결코 작지 않은 것이 없음을 가늠하게 합니다.
(2-3)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여기서는 그들이 여러 관원들 가운데 장이었음을 밝힘을 통해, 앞서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로 불렸던 두 사람의 신분을 정확히 알려줍니다. 술과 떡을 굽는 관원장은 왕의 생명과 직결된 술과 음식 시중을 드는 왕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업무 외에도 국사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개인적인 말벗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술과 음식을 함께 하는 자리는, 단순히 마시고 먹는 것을 넘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는 자리가 되곤 합니다.
바로가 노하여 최측근이었던 그들을 옥에 가두게 한 것은, 그들이 죄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기자는 부사 ‘곧’을 활용해 그들이 수감된 감옥이 곧 요셉이 갇힌 공간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앞서 요셉을 가두면서는 그 옥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공간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창 39: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이는 곧 요셉과 그들이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요셉은 곧 그 관원장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요셉에게 옥에 갇힌 관원장들을 수종 들게 했다는 사실은 친위 대장 보디발의 두 가지 마음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보디발이 관원장들은 직접 챙긴 것은, 그들이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힌 상태였지만, 언제든 복직이 되어 왕의 측근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보디발이 요셉에게 그들의 수종을 들게 한 것은, 그의 아내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제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고 한다 한들 자신의 아내에게 범죄하려고 했던 이에게 중책을 맡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관원장들은 얼마 뒤 각각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관원장들이 꾼 꿈(5-8)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고대 근동에서 꿈은 개인의 신상이나 미래 등을 점치는 초자연적인 징조로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를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창 37:5-11, 19, 41:25-45).
꿈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조작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기록된 진리의 말씀(성경)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부분에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관원장들의 달라진 낯빛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6-8)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은 아침부터 그들에게 근심스러운 빛이 있음을 보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석할 사람이 없어 답답한 심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해몽은 하나님께 달렸으니, 자신에게 그 꿈에 대해 이야기 해 볼 것을 전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죄수의 신분이라는 상황과 환경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신뢰했기에 이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초라한 상황과 환경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시적인 상황과 환경에 불과합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하여 붙들어야 할 것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먼저는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그가 꾸었던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과 요셉의 해몽(9-15)
(9-11)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역시 현실과 다른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꿈의 전개는 신속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싹이 나고 꽃이 피기까지, 포도송이가 익고 포도주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이모든 것이 삽시간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해몽도 신속했습니다.
(12-15)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은 꿈속의 상징을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 사흘 안에 전과 같이 바로의 손에 다시금 술잔을 올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요셉은 그에게 잘 되면, 자신은 죄가 없으니 석방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덧붙여 말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 대한 해몽이 좋은 것을 듣고는, 떡 굽는 관원장도 요셉에게 그가 꾸었던 꿈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관원장들의 꿈과 요셉의 해몽(16-19)
(16-17)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시작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끝이 달라 보이는 꿈이었습니다. 역시나 요셉은 꿈속의 상징을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 전했습니다.
(18-19)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요셉은 떡 굽는 관원장에게 사흘 안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쉽게 전할 수 있지만, 좋지 않은 이야기는 전하기가 어렵기 마련인데, 요셉은 이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 그 꿈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해몽대로 이루어짐(20-23)
(20-22)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모든 신하가 보는 앞에서 직책이 회복되어 전과 같이 바로의 손에 술을 따라 올리게 되었습니다. 반면 떡 굽는 관원장은 모든 신하가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관원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요셉의 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23절로 이루어진 창세기 40장의 마지막은 다소 씁쓸합니다.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요셉은 그의 시중을 들어주었습니다. 그가 꿈을 해몽하지 못해 근심에 사로잡혔을 때, 요셉은 그의 꿈을 구체적으로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는 극한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요셉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요셉의 그 한 가지 부탁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시금 술 맡은 관원장의 자리에서 선 그는, 옥 안에서 큰 도움이 되어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잊어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가장 사랑받던 아들에서 일순간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요셉의 삶은, 복수와 보복을 준비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주 선 이로 하여금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천한 이방 노예에서 또다시 일순간에 옥에 갇힌 죄수 신분으로 전락한 요셉의 삶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주 선 이로 하여금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접 들어내 보이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의지해야 할 이는 흐릿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요셉과 함께하셨던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다음 장(41장)은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된 직후에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이방 죄수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상황과 환경으로 초대하십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했던 까닭에 실망하고 계신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통해 요셉도 그 사람에게 잊혀졌다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에게는 잊혀졌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잊혀질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소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허락된 삶의 자리에서 늘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 때, 마주 선 이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고백)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필시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해를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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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특별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을 받았고, 그만의 특별한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사랑받고 대우받은 그 사실로 인해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요셉은 특별한 꿈을 꾸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그 꿈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더 큰 시기를 받고, 결국엔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요셉은 특별히 사랑받고, 특별한 꿈을 꾸었지만 그 대가는 억울한 노예살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 의해 발탁되어 특별한 총애를 입어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하는 유혹을 물리친 대가로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셉의 인생은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 엎치락뒤치락하기를 반복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요셉의 이런 인생은 오늘 본문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간수장의 은혜를 입어 옥중 죄수의 제반 사무를 다 관장하는 일을 맡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요셉이 있던 감옥에 구금됩니다. 그리고 그 두 신하가 동시에 각각 꿈을 꿉니다. 꿈 전문가인 요셉에게 그들의 꿈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확신한 요셉은 두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었습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3일 후에 전직을 회복했고, 떡 굽는 관원장은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전직을 회복할 술 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몽해 주며,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14-15절입니다.
(14-15)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은 억울하게 끌려왔고, 억울하게 옥에 갇혔습니다. 죄가 없었던 요셉은 옥에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감옥에서 나가거든 자신을 생각하고 바로에게 이야기해서 건져 달라고 요청합니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호기롭게 말한 것과는 달리 이제 요셉은 비참한 심경으로 낮은 자가 되어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해석해 준 요셉에게 돌아온 결과는 요셉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23절입니다.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요셉은 기억되기를 원했으나 잊혀진 존재로 살았고, 건짐 받기를 원했으나 이후로도 2년 간 더 감옥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결과를 아는 우리는 요셉이 이 와중에도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고 견뎌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요셉에게 그 감옥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요셉의 심경은 시편 105편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시105: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요셉의 발에는 차꼬, 즉 족쇄가 채워졌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렸습니다. 라틴어 번역본(벌게이트)은 우리말 ‘차꼬를 차고’를 ‘쇠가 그 영혼에 파고들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쇠사슬은 단지 요셉의 몸만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뼈 속까지 옥죄었고, 영혼까지 스며들어 고통을 가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옥살이로 인해 몸과 영혼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감옥에서조차 은혜를 입기도 했지만, 길어지는 옥살이로 인해 때때로 비참한 심경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하나의 진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요셉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영원히 잊혀진 존재로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결코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큼은 요셉의 고통의 시간을 단련의 시간으로 삼아 ‘때’가 오기를 지켜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시간 그곳에서 고통을 견뎌내며 인내를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만을 의지하는 말씀의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었고, 장차 온 애굽과 팔레스타인에 닥칠 큰 재앙에서 사람들을 구출해 낼 제국의 리더로 훈련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하나님의 방법은 때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대기만성형의 리더로 담금질을 하셨고, 결국 그 일은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잊혀짐이라는 처벌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혹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들의 얼굴과 이름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은 설령 억울하게 일어날지라도 그 고통은 반드시 누군가를 살리는 생명의 자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단련하여 고난받는 이웃을 살리는 일에 그를 반드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여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자신의 선행이 기억되지 않고, 진실이 규명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삶의 한복판을 살아갈지라도,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코 짧지 않으신 여호와의 손은 완벽하게 일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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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요셉의 범사가 형통하였다고 전 장을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요셉의 형통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옥에 수감 된지 얼마 후에 왕궁의 두 고위관리가 요셉이 갇혀 있는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들은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였는데, 친위대장은 요셉으로 하여금 이 두 사람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꿈을 꾸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4-15)
꿈이 자신의 해석대로 이루어지면 자기를 기억하여 바로에게 선처를 호소해서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감옥에 수감 될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요셉의 해석은 정확하였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사흘 후, 바로의 생일에 두 사람은 바로 앞에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목이 매달립니다. 그러나 요셉의 소망은 물거품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술 맡은 관원장으로 부터 잊혀진 기간이 얼마동안이었는가 하면 만 2년 동안이었습니다(41장 1절).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헤어지고 나서 감옥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얻었고, 이제 곧 자신의 억울함이 드러나 출감하게 될 것이라고 매일 매일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그마치 만 2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꿈을 해석하는 놀라운 요셉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잊혀진 요셉'으로 끝을 맺습니다. 요셉이 정확하게 꿈을 해석 한 것, 아니 더 이전으로 가서, 고위급 관료가 그것도 요셉이 수감된 감옥에 갇히게 되고, 또 요셉이 그들을 섬기게 된 것, 그 모든 것은 다 요셉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요 섭리였습니다. 만약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술 맡은 관원장으로 인해 요셉의 억울함이 드러나고 회복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섭리하신 기회였고, 또 그렇게 결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요셉은 자신의 처지와 탄원을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꺼이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잊혀짐'으로 다가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승리, 깊은 은혜의 체험 뒤에 당연히 따라올 회복과 응답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회복과 응답이 아니라 더 깊은 고독과 잊혀짐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원망하고 끊임없는 갈등과 회의 속에 빠져들며,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 믿음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케 한 요셉으로 하여금 2년의 기간을 '잊혀짐' 속에 두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가 만들어 낸 어떤 영적공식 속에서 우리에게 응답하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요셉의 잊혀짐'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요셉은 '세상의 시간'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전 생애를 통해 나타내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요셉은 훈련되고, 다듬어 지고, 결국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온전한 통로로 세워졌습니다.
요셉 전 인생의 여정에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비록 그것이 2년이라는 기간이었지만 한 점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선, 즉 하나님의 시간을 인식하는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그 2년은 지나가는 여정이 아니라 인생의 결론이 될 것이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분노하고 원망으로 자신의 삶을 소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꿈을 해석하게 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속에 자신을 던져 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의 잊혀짐 속에서 '잊혀지고 버림받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있는 자신'을 다시 한 번 인식하였습니다.
우리 삶에서 당연했던 희망의 결과가 부셔질 때,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속에서 '잊혀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시간, 찰라가 아니라 영원의 시간을 사는 자신'을 발견하는 영적 감각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의 시간 속에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심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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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마지막 단락에서는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요셉이 하나님의 동행으로 감옥에서도 형통하였던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에서, 그동안 요셉이 그토록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각도로 인간사를 섭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때가 이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약속과 계획을 우리의 역사 속에 실현시키십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시련 가운데 처할 때 먼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로써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뢰하는 믿음과 소망이 필요합니다.
1. 만남의 섭리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1-4절)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꿀려와 감옥에 투옥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어느 날 바로의 신임을 받던 관원장 둘이 그의 미움을 받아 요셉이 있던 감옥에 투옥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의 최종적인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이곳에 감금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투옥된 감옥이 다름 아닌 요셉이 있던 감옥이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해 계획하신 바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위한 사건을 만들어가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어떤 난관을 만나도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훗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그 일들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힘들었던 경험과 사건들도 영광의 자리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자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십니다.
요셉이 있던 감옥으로 끌려온 바로의 두 관원장 중 하나는 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술 관원장이었고, 하나는 왕이 먹을 떡을 굽는 떡관원장, 곧 왕의 주방장이었습니다. ‘관원장’이란 히브리 원어 ‘사리스’는 ‘거세하다’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환관(宦官)이나 내시(內侍)를 뜻합니다. 특히 왕에게 술잔을 올리던 자는 왕이 가장 신임했던 자였습니다. 독살이 성행하던 시대에 왕들은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임할 수 있는 자를 이 자리에 앉혔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왕들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없는 이방인들을 이 자리에 많이 기용했으며, 이들은 왕들의 최측근이 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왕에게 청탁을 하거나 잘 보일 일이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술 관원을 통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큰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느헤미야도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이 두 사람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셉과 이들의 만남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진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요셉의 삶에서 손을 뗀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는 우리의 삶에서도 역력합니다.
2. 관원장들의 꿈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5-8절)
감옥에 투옥된 지 며칠이 지난 다음 두 관원장들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이들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다는 것은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서려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꾼 꿈의 내용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꿈은 항상 쌍으로 나타나고 그 뜻이 같은데, 이번에는 두 꿈의 내용뿐만 아니라 의미도 서로 달랐습니다.
아침이 되어 요셉이 이들을 찾아보니 ‘근심의 빛’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근심과 걱정으로 뒤집어져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간밤에 자신들이 꾼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해몽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꿈을 해몽해 줄 사람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의 꿈을 누가 해몽해 줄 수 있겠습니까! 꿈을 신들의 계시라고 믿었던 당시 정서에서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꿈을 꾸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일 것입니다. 바로의 관원장들이 해몽하지 못하는 꿈을 보잘것없는 히브리인 노예 요셉이 해몽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상황을 파악한 요셉이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나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하고 그들과 대화를 청했습니다. 자기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해몽하실 수 있고, 자신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힘을 빌어 꿈을 풀이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 꿈을 해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꿈을 제대로 해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사를 받아야 꿈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변했습니다. 형제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자랑할 때만해도 자신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었는데, 어느덧 그는 꿈을 해몽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해몽하는 은사로 인해 요셉은 최초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됩니다. 훗날 바로도 이런 요셉의 은사를 보고는 그를 ‘하나님의 영이 감동된 사람’으로 극찬하게 됩니다(창 41:38).
기도해 보지도 않고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 요셉이 부럽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만 확실하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확실하고, 하나님께서 그 꿈에 대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다면 말입니다.
3. 꿈의 해석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9-11절)
먼저 바로에게 술잔을 올리던 관원장이 자기가 꾼 꿈을 요셉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술 관원장의 꿈 이야기는 숫자 3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그가 자기 앞에 서 있는 포도나무의 세 가지에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맺자 그 포도를 따다가 바로의 잔에 즙을 짜서 바로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2-15절)
요셉은 이렇게 해몽했습니다. 세 가지는 3일을 의미하며, 앞으로 3일 후에 바로가 그를 다시 불러 옛날 지위인 술 관원장으로 회복시킬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가 복직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알려 풀려날 수 있도록 선처를 해달라는 부탁을 곁들였습니다. 요셉의 이와 같은 부탁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원장에게 아주 커다란 확신과 소망을 갖고 3일을 기다리게 했을 것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16-19절)
첫 번째 관원장의 꿈에 대한 해몽이 좋게 나오는 것을 보고, 두 번째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의 꿈도 3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떡이 담긴 바구니 세 개를 머리에 이고 있었고, 이 바구니에는 바로에게 드릴 떡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들이 와서 바로에게 드릴 이 떡들을 쪼아 먹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술 관원장이 그의 꿈에 보인 가지에 달린 포도송이에서 즙을 짜 왕에게 바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한 것과 달리, 떡관원장은 꿈속에서 떡을 쪼아 먹는 새들을 보고도 쫓을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 바구니라는 것이 술 관원장의 세 포도 가지와 비슷해서 꿈에 대해 자신 있게 말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셉의 해몽은 뜻밖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3일 후 죽을 것이고 새들이 당신의 시체를 쪼아 먹을 것이다’라는 해몽이었습니다. 술 관원장과 달리 떡관원장은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 같은 처형과 사후처리가 내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떡관원장은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으며 요셉에게 꿈 내용을 말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이때부터 그는 공포의 72시간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히브리인 노예가 그의 꿈을 잘못 해몽했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반면에 먼저 해몽 받은 술 관원장은 기대로 한껏 부푼 가슴을 안고 72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일로 인해 같은 날 같은 감옥에 수감되었고, 같은 밤에 3일을 중심으로 한 비슷한 꿈을 꾸었건만, 대조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4. 잊혀진 약속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0-23절)
드디어 3일이 되던 날 요셉의 해몽이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날은 마침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당시 왕들은 오늘날 대통령들이 국경일에 그러는 것처럼 종종 자신의 왕위 취임 기념일이나 생일과 같이 특별한 날 죄인들을 사면해 주곤 했습니다.
애굽 왕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두 관원장을 불러냈습니다. 요셉이 해몽한 대로 잔을 올리던 자는 복직되었고, 떡을 굽던 자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제는 술잔을 나르던 자가 요셉의 부탁을 까마득히 잊었다는 점입니다.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관원장이 철저하게 요셉을 잊었던 점을 두 차례나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관원장이 요셉을 잊은 것은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관원장이 요셉을 잊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될 때 나이가 30세였습니다. 앞으로 2년 후에 있을 입니다. 즉, 요셉은 이때 28살이었습니다. 애굽으로 노예가 되어 팔려온 이후 벌써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그는 현실에 충실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계속 꼬여만 가고 있었습니다. 채 풀리지 않는 실타래와 같고,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정신이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마다 통곡하는 요셉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그를 이렇게 위로하시지 않았을까요?
“요셉아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너를 어렵게 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마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날이 올 것 이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구나! 나를 믿어라 때가 되면 내가 너를 찬란한 태양과 같이 빛나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이 모든 일의 증거이니라.”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오직 그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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