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천정에서
이번 주 문학기행은 수락산 자락의 천상병 기념 공원과 천상병 산책길입니다.
천상병은 지역의 명문 마산 중학교를 나와서 서울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마산 중 5학년때 시인 김춘수 국어 선생님을 만난다.
이 만남은 그의 일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이때부터 벌써 그는 수준급의 시작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서울 상대 4학년 때에는 한학기를 남기고 학교를 중퇴한다.
지금도 수재들의 집합처인 "서울 상대"는 나라의 경제가 어려웠던 당시 더욱
그러하였는데, 그런 학생이 마지막 한 학기를 헌신짝 던지듯 포기하다니---.
지도 교수의 복학 권유도 여러차례 받지만 그는 신문사와 잡지사 그리고 문단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한다.
정신나간 사람의 우발적 행동은 아니었다.
"자유를 찾기 위하여서"라는 그의 말은 구도자의 행위를 연상케한다.
낭인 혹은 걸인 기질이 원천적으로 그에게 내재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구도자의 자세란 모든 것을 버려야하는 존재론이 그런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지도---.
독일 유학후 대학에 자리를 잡은 친구 강빈구를 만나 술을 마신 천상병은 강교수로 부터
몇푼되지 않는 돈까지 얻어쓰게되는데 이것이 소위 '동백림사건'(1967년)에 연루되고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은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이후 천시인은 1970년에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당시 지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천시인이 죽었다고 생각, 유고시집 《새》를 발표하였다.
이때 앞장서서 일을 추진한 분은 성춘복 시인이었다.
인사동 찻집 '귀천'에서 천상병 시인과 목순옥 여사
1972년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 여사와 결혼한 천상병 시인은 1979년 시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냈고,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년),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1987년),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1993년)도 발표하였다.
천시인은 하느님에 대한 소박하고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활동도 하였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대우주는 넓다.
/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천상병은 개종을 하지는 않았다. 천주교 성당을 다니다가 81년부터 개신교 연동교회로 나갔다.
수락산 자락의 천상병 공원에는 시비(詩碑), 육필 원고를 새긴 의자, 정자, 천 시인의
등신상(等身像)등이 있고, 1.4m 높이 청동 등신상엔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의 시와 인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꾸준히 추진되어,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소풍〉과
뮤지컬 〈귀천〉이 만들어져 공연되고 있으며 2004년부터는 그의 기일에 맞춰 해마다
〈천상병 예술제〉가 열리고 '천상병 시문학상'이 수여된다.
2009년 4월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시인 천상병 공원'이 생겼으며
2009년 4월 마산 만날공원에 그의 시 〈새〉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
2010년에는 의정부에 '천상병 시인 문학관'이 건립되엇고 천상병 예술제가 열린다.
마산은 그가 중등학교를 다닌 고향이고 수락산 자락은 그가 아내 목순옥 여사와 신방을
차린 다음 평생 가난하게 살고 배회했던 곳이며 의정부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장안동
거처와 지금 영면하고있는 의정부 시립묘지와 인연을 맺고있다.
천상병 공원에는 그의 일대기 등으로 사뭇 도배를 하였는데 과유불급이라는 생각도 드는가하면
이 정도나마 문화적 여유를 갖게된 나라의 형편에 뿌듯한 마음도 생긴다.
위의 석재 시비엔 시 '귀천'이 음각됐고 버튼을 누르면 시 낭송이 흘러나오는데 '귀천' '피리'
'새' '변두리' 같은 천 시인의 대표작 20편이 녹음됐다.
다만 야외 노천의 한계인지 지금은 제 구실을 잘 못하고있다.
또 타임캡슐을 매설해두었는데 속에는 천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찻잔·집필원고 등,
시인의 유품 41종 203점을 모아 (타임캡슐에) 묻었다
이 타임캡술은 천 시인 탄생 200주년을 맞는 2130년 1월 29일 개봉될것이다
유치원 학생들이 야외수업을 나왔다.
이날도 해설은 펜 클럽 사무총장인 김경식 시인이 맡아주었다.
이분의 강연은 치밀 정치하면서도 낭만적 상상력에 불을 붙이고 또한 중독성이 강하다.
수락산 등산객들이 줄을 이었다.
천상병 시인은 중앙정보부에서 당한 고초를 시나 일상에서 일절 밝히지 않았는데
오직 "그날에"라는 시 한편에서만 메타포로 읊었다고 김경식 시인이 지적한다.
천상병의 온유한 세계관이다---. 회원 한 분이 낭송하였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고문)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가 듣기로는 옥고를 치룬 많은 지식인들이 문민정부 때에 모두 세상에 밝혀내었고
때로 영웅담으로 포장되기도 했다는데---.
주간 문학신문 편지인 배문석 시인
신세훈 전 한국문협 이사장의 찬상병 시인 회고
천상병 산책길에도 있는 정자
이날 문학기행은 김수영 기념관으로 계속되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중앙정보부에서의 고문 학대를 오직 시 한편에서만 은유하고 일절 입을 다문 천상병이
세상을 온유와 용서로 대한 반면 김수영의 세계관은 항상 불온의 대상이었고 참여하여
개혁해야할 상대였습니다.
두사람의 세계를 이곳에서 대립이항으로 취급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김수영 기념관
이야기는 전에 두어차례 올리기도 했고 일찍 온 여름 날씨가 잠시 휴식을 명합니다.
이날도 여의도 펜 본부에서 리무진 버스가 떠났습니다.
가난한 시인의 발길을 찾아서 부유한 도심을 떠나는 감상이 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