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실습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 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2. 선택의 가능성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독자가 계속 이어서 써야 하는 시
-쉼보르스카의 시에 이어서-
류시화
기억보다 오래된 산들을 좋아한다
희고 긴 다리로 자작나무 숲으로 달려가는 바람을 좋아한다
신의 손금 같은 허공의 잔가지들을 좋아한다
물속에서 얼굴을 부비는 두 개의 돌을 좋아한다
번개의 순수한 열정을 좋아한다
단 하나의 육체를 상속받은 개똥지빠귀를 좋아한다
겨울에만 태어나는 입김의 짧은 생애를 좋아한다
새벽빛보다 먼저 들판을 가로지르는 어린 동물을 좋아한다
밤새 생각이 낳은 알들 위로 내리는 싸락눈을 좋아한다
여러 개의 보조개로 웃는 감자를 좋아한다
호미에 속살이 드러난 고구마
어렸을 때 치아 교정을 한 옥수수를 좋아한다
섬 뒤에서 사랑을 나누는 뭉게구름
죽은 새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높새바람을 좋아한다
겨울 하늘을 나는 쇠기러기들의 각도를 좋아한다
바람을 가르기 위해 앞장서서 나는 길잡이 새를 좋아한다
달고 태양 사이의 공간을 좋아한다
발톱을 다듬지 않은 기슭
입에서 해초 내음을 풍기며 절벽을 물어뜯는 파도를 좋아한다
나리꽃 입술에 박힌 점들을 좋아한다
연꽃의 얼굴을 빋어내는 진흙을 좋아한다
저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쏙독새를 좋아한다
오래된 나무 속에 서 있는 오래된 영혼을 좋아한다
물속에 던져도 그 모습 그대로 가라앉는 돌을 좋아한다
얼음 구멍에서 내다보는 투명한 눈의 물고기를 좋아한다
옥수수 밭에 퍼붓는 비를 좋아한다 옥수수 잎을 춤추게 하는 비를
발품을 팔아 발견한, 짧은 생의 풀꽃을 좋아한다
노을 쪽으로 스무 걸음 떨어진 강을 좋아한다
상처가 꽃이 된 사람을 좋아한다
별을 보기 위해 불을 끄는 사람을 좋아한다
침묵 수행 중인 수도자와 나누는 필담을 좋아한다
파도와 혀를 나누는 어린 조개를 좋아한다
행성의 한 귀퉁이에서 봄이면 맨 먼저 밝아 오는 노랑제비꽃을 좋아한다
선택의 가능성
서지희
해가 떠오르는 아침을 좋아한다
그런 아침을 밝혀주는 새벽을 더 좋아한다.
나를 경계한하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나를 향해 꼬리치는 강아지도 좋아한다.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내 방을 좋아한다.
시끄럽고 사람이 붐비는 장소도 좋아한다.
겨울을 좋아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풍경을 좋아한다.
길거리의 호빵과 계란빵을 좋아한다.
실력은 없지만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망한 음식을 맛보는 것도 좋아한다.
예쁜 전시회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사진찍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무 의미없는 대화를 좋아한다.
의미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더 좋아한다.
선택의 가능성
김서현
밤고구마를 더 좋아한다
묵은지보다 겉절이를 더 좋아한다
도심보다 자연을 더 좋아한다
학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듣는 노래를 더 좋아한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소외된 것들을 더 좋아한다
묵묵히 지탱하는 것들을 더 좋아한다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때론 자신감 넘치는 것보다
다 표현하지 못하는 망설임을 더 좋아한다
쉴틈없이 바쁜 하루보다
차 한잔의 여유가 있는 하루를 더 좋아한다
삶에 있어서 정해진 길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을 더 좋아한다
추위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을 더 좋아한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더 좋아한다
화려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더 좋아한다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더 좋아한다
직접 쓴 손글씨를 더 좋아한다
애견 샵에서 잘 관리받은 개보다
시골 똥개를 더 좋아한다
저마다의 사연있는 것들을 더 좋아한다
아빠의 울퉁불퉁한 손을 좋아한다.
미처 말하지못한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