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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섬에 맞는 스토리텔링(2)
장보고에 버금가는 능창을 아시나요?
최홍길(선정고 교사, 자은도 출신)
섬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고기를 잡아야 하고, 김과 미역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때에 따라 농사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력이 많이 소모되고 고생을 많이 하지만, 그 덕분에 강인한 정신력과 함께 인내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육지 사람에 비해 다양한 경험을 소화한 그들은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서 도시로 나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강렬한 열망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이처럼 섬에 사는 사람들의 핏속에는 개척정신이 남다르게 흐르고 있다. 하의도 출신의 고 김대중 선생처럼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몇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도 코르시카 섬사람이다. 섬 출신이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많은 것 역시 강인한 모험정신과 개척정신이 밑바탕이 된 게 아니겠는가.
능창 그리고 왕망, 압해도
압해도는 지명으로는 드물게 누를 압(押) 자에 바다 해(海) 자를 쓰고 있다. 읍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낙지다리가 세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바다와 갯벌을 누르고 있는 형상이라 압해도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외지 사람들은 목포 앞에 있는 섬이라 ‘앞에도’가 변해서 압해도가 된 것 아니냐며 가벼운 상상력을 펼치기도 한다.
이 섬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곳곳에 흩어진 40여 기의 고인돌을 비롯해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선돌, 갯가에 자리한 석기시대 유물인 독살도 남아 있다. 또한, 압해 정(丁) 씨의 선산과 시조묘가 있다.
압해(押海)란 ‘바다를 눌러 진호한다’란 뜻으로 진해(鎭海)나 청해(淸海)란 말과 의미가 통한다. 여수 진해루에 이순신이 있었고, 완도 청해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엔 능창이 있었으니, 여수와 완도와 압해도는 한 시대 바다를 석권한 해양 영웅들이 활동한 현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능창은 장보고가 비운의 암살을 당한 지 반 세기 만에 압해도에서 일어나 장보고의 꿈을 재현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왕건에 의해 생포당하여 꿈을 실현하지 못했기에 덜 알려졌을 뿐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능창의 위세는 대단한 것으로 나타난다.
왕건도 정면으로 대결하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능창의 위세가 대단하였다. ‘도적의 우두머리’나 ‘도적의 무리’라 표현되고 있으나, 이는 왕건과 고려왕조의 입장에서 패배자를 비칭(卑稱)한 것일 뿐, 능창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분명 장보고를 잇는 서남해 지역의 유력한 해양세력이었다. 그의 해전능력은 물개의 일종인 수달이라 달리 부를 정도였다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당시 서남해의 호족들은 대세에 편승하여 대거 왕건에게 복종해 버렸다. 하지만 능창은 마지막까지 서남해 해양세력을 결집하여 왕건에 저항하였다. 서남해 해양패권을 장악하여 장보고의 꿈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국 왕건의 주군이던 궁예에게 끌려가 참수당하고 말았다.
압해도에 송공산성이 있다. 신라 말 능창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고려 말 몽고군이 바닷길을 차단하기 위해서 압해도를 총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도민들은 침략군을 패퇴시켰다. 송공산성은 그때의 근거지로도 활용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더욱이 능창의 별명으로 알려진 수달은 1∼2급수에서만 사는 바다동물이다. 지금도 압해도와 영산강 유역에 오염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수달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창은 송공산성 및 수달과 함께 서남해 해양세력의 기개와 청정 해양생태를 상징하는 존재로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압해읍에 속한 고이도(古耳島)에는 현재 2백여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왕성이 있었던 역사의 섬 고이도는 압해도·지도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무안반도가 건너다 보인다. 고려 왕건과 관련된 전설은 이렇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의 작은아버지인 왕망은 최선을 다한 자신의 공을 왕건이 무시한다고 생각해 전복(顚覆)을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있기도 전에 탄로가 나 도망쳐 온 곳이 고이도였다. 왕망은 이곳에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가 살던 흔적은 남아 있다. 1km 정도의 성터와 집터도 있다. 큰 산을 왕산이라 부르고, 일제 말 우리나라 지도에 이 섬이 왕도라 적혀 있었다고 한다.
민어 파시, 대태이도
임자도의 명소인 대광해수욕장 앞바다에 작은 섬 대태이도가 있다. 큰 귀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는데 수백 년 동안 타리 파시로 유명했던 섬이다. 일본 노인들이 전라도와 목포는 몰라도 타리섬은 알 정도로 전국 최고의 파시였다. 그래서 대태이도는 주로 타리섬이라고 알려졌다.
대태이도는 전국 제일의 민어 어장으로 목포로부터 서북쪽으로 45km 정도 떨어졌다. 1925년경에는 어선 한 척의 1년 어획고가 당시의 화폐가치로 30만 원 정도로, 엄청난 소득을 올렸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이 파시가 바로 이웃 섬인 재원도로 옮겨 갔으나, 타리섬은 198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1991년도에 무인도가 되었다.
타리 민어는 파시를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에 팔려 나갔다. 4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파시는 매년 6월 상순에서 10월 하순까지 약 5개월간 열리며 최대의 성어기는 8월이었다. 따라서 파시도 8월이 되면 최고로 흥청거렸다. 그러면 이곳 일대는 수백 호의 초막과 항구에 정박한 발전선에서 끌어온 어선들의 전깃불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타리항에는 고기를 팔러 들어온 배, 사러 온 배, 수천 명의 어부와 민어를 사러 온 상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들끓었다.
백과사전에도 타리 파시가 등장한다. 더불어서 기생들에 대한 부가설명까지 있다. 임자도 출신 김영회의 저서『섬으로 흐르는 역사』에 이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기록해 두었다. 요릿집의 그녀들은 문장실력도 좋고 창과 춤에 능하며 손님접대까지 잘하여 타리기생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우리나라의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의 게이샤들도 이곳을 찾아들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기생과 일본 게이샤를 모두 합하여 1백여 명이 넘게 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양산도 가락이 장구소리에 실려 왔고, 샤미센(三味線) 섞인 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시와 노래와 술과 춤이 외진 서해의 바닷가에서 어우러지던 곳, 그곳이 타리 파시였다.
일제의 국권침탈 직후 일본인 한 무리가 기생들을 불렀다. 그들은 장구를 치며 창을 하던 기생들에게 훈도시 차림으로 잠자리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기생들은 ‘창이나 글이라면 모르나 우리가 당신들에게 몸을 허할 수는 없소’ 하며 거절하였다. 술에 취하였던 일본인 한 명이 기생의 당돌한 거절에 격분하여 곁에 놓아두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파시 기생들이 일어났다. 장터에 있던 조선사람 모두가 의분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나라 없는 한 아녀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가해자인 일본인들에게 어떠한 보복도 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유유히 웃으며 임자도를 떠나던 날, 50여 명의 기생 모두는 모랫바닥에 앉아 울어댔다.
종일 울다 목이 잠긴 그녀들은 그날 저녁 함께 머리기생의 초막에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일본인들의 횡포에 항의하는 뜻으로 양잿물을 마시고 숨을 끊고 말았고, 뱃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하우리 쪽 모래밭에 함께 매장되었다. 모래무덤은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조금씩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들의 이름도 남겨지지 않았다.
한편, 조희룡은 1851년 조정의 예송논쟁에 개입하였다가 임자도에 3년 동안 유배조치되었다. 그는 유배지 오두막집에 ‘만구음관’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칩거하면서 집필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조희룡의 기량은 이론의 정립과 기량의 완숙으로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2005년 3월에는 ‘조희룡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에서 ‘조선 문인화의 영수 조희룡’이라는 기념비를 임자도 흑암리에 세우기도 했다. 게다가 전장포에는 ‘전장포 아리랑’ 시비와 새우젓 토굴까지 있기에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유림들의 유배지, 지도
무안반도 끝자락에는 신안군 지도가 있다. 지도읍 관할구역으로는 7개의 작은 섬인 어의도, 송도, 사옥도, 대포작도, 소포작도, 선도, 율도가 있다. 1975년에 무안군 해제면과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 이후 지도와 송도가 1982년에, 송도와 사옥도는 2004년에 연륙이 되었고 사옥도에서 증도까지는 2010년에 연도교가 개통되었다. 따라서 지도는 ‘육지 아닌 육지’가 된 섬이라 할 수 있다.
지도는 예전에 정기 여객선이 지나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목포를 출발하는 여객선이 지도와 임자도를 거쳐서 영광 낙월도로 향하는 노선은 몇십 년째 계속되었고, 이 노선은 새우젓을 운반하던 주요 항로였다. 지도를 거쳐 가는 뱃길은 나주평야에서 나온 세곡을 실어 한양으로 나르던 세곡선과 고대 중국으로 가는 국제선의 경로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바닷길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지도와 임자도에는 일찍부터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또한 지도는 예부터 신안 북부 섬 지방의 교육과 행정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유림들의 유배지였던 이곳은 이들의 교육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던 김평묵이 이곳에서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리고 최익현 등 조선후기 유림의 거장들의 유적이 많아 1901년 두류단이 조성되었다. 지도향교도 그 흔적 중의 하나다.
한편 두류단은 지도읍 감정리에 있으며, 1720년에 호남의 유림들이 세웠다. 최초의 두류단은 주희(중국 송대의 대유학자), 정여창, 김굉필 세 분을 모시는 정자를 지어 제향을 지내 왔다. 190여 년이 지나 전라도에 학문이나 사상에 있어 지주가 된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을 단으로 모시고 삼현단이라 했다. 그 후 5년이 지나 최익현 선생을 추가로 모시고 사현단이라 했으며, 나유영 선생을 1948년에 단비로 모시고 오선생단이라 불렀다.
또한, 지도읍 공적선정비는 신안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지도군과 지도의 역사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안산숲 공원에 있다. 총 27기의 비석들은 만호, 관찰사, 어사, 군수의 선정 기념비들로, 가장 오래된 것은 어사 박태보의 휼민(恤民) 기념비이다.
요즈음 관광지로 부상한 증도와 임자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지도읍은 다른 농어촌과 마찬가지로 5일장이 선다. 지도읍 장은 3·8일 장인데, 장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1955년 나루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장은 신안군에서는 유일한 재래시장인 셈이다. 증도, 사옥도, 임자도, 무안군 해제면 등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이라 장날이면 서로 만나고 어울리는 풍정을 이곳에서는 지금도 엿볼 수가 있다.
지도읍에 속한 부속섬으로 선도(蟬島)가 있는데, 낙지의 서식지인 광활한 갯벌이 있어서 낙지잡이로 유명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할머니 한 분이 수선화를 사다가 키운 게 발단이 되어 이제 선도는 ‘수선화의 섬’으로 탈바꿈했다. 매년 4월에는 수선화 축제가 열리고, 선도의 주동 마을 지붕은 수선화 색깔로 1년내내 빛을 발한다.
명품 소금, 신의도
신의면의 주도(主島)는 상태도와 하태도다. 청정바다와 때 묻지 않은 자연, 간척을 통한 전국 최고의 천일염 생산지, 고기가 잘 잡히는 개매기 체험장, 아름다운 황성금리 해수욕장, 섬과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웰빙 등산코스 등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신의도의 비경을 알리는 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2008년 9월에 신의도에서 촬영한 ‘1박 2일’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18.3%였는데 예능 프로그램 순위를 1위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2009년 7월에는 ‘인간극장’에서 ‘6형제 소금밭, 소금꽃 폈네’를 5부작으로 내보냈다. 훈훈한 가족애와 개매기 등 다양한 볼거리로 당시 시청률을 13.8%로 올리는 등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 덕에 신안군의 천일염 홍보와 이미지 개선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인간극장 상하태도 6형제집 편이 방송되자 그동안 일부 언론에 노예섬 등 부정적으로 비쳤던 신안군과 천일염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고 덩달아 신안군 천일염의 우수성 등이 널리 알려져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쌓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암염(岩鹽)이 많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소금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드는 천일염(天日鹽)이다. 그런데 이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하늘에서 주는 것이니 소금이 아니라 천일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닷물을 염전에 가두고 바람과 햇볕을 쐬며 기다려야 한다.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일염은 오랜 세월 동안 식품이 아니라 광물로 취급받던 천덕꾸러기였으나 2008년 식품으로 분류된 뒤, 법적으로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갯벌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공장에서 제조하는 소금에는 없는 83가지의 미네랄이 들어 있어 품질이 좋은 천연 건강소금이다. 갯벌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프랑스 게랑드 지역이 유일하다.
세계적인 명품소금으로 꼽히는 게랑드 소금은 자연이 선사한 걸작으로 불린다.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 서북부 해안마을인 게랑드는 천혜의 염전과 무역풍 덕에 영양분이 풍부한 천일염 생산지로 명성이 높다. 이 소금이 유난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짠 맛을 내는 나트륨은 적은 반면, 마그네슘과 칼슘 등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게랑드 소금보다 뛰어난 영양분을 함유한 천일염이 바로 신의도의 소금인 것이다.
하지만 이 소금은 아직까지 게랑드의 명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국산 천일염이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이용되고 미식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다면 우리 소금의 세계화도 그만큼 앞당길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관계로 사람들의 접근성이 어렵고 홍보가 제대로 안 된 것도 사실이다. 한여름에 힘들게 땀 흘려 일한 대가는 소금값을 제대로 받는 것이다. 게랑드를 누를 수 있는 지속적인 홍보로 수출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소작쟁의의 섬, 암태도
농업을 삶의 근본으로 살아온 신안군 섬들은 역사적으로 땅을 지키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많이 흘렸다. 소작쟁의 시조가 되는 ‘하의도 소작쟁의’가 3백여 년 동안 계속된 기록이 있고, 인근 섬인 암태도에서는 열성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농촌계몽운동과 애국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섬 주민들 또한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일제의 가혹한 소작료 수취가 발단이었다. 당시 암태도의 지주는 문재철, 천후빈 등이었다. 보통 5할 정도 소작료를 받아갔는데, 문재철은 60∼80%에 이를 정도로 가혹했다. 따라서 암태도민들은 이러한 가혹한 소작료로부터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년 서태석, 서창석 등은 1923년 말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진주소작노동자대회와 순천소작쟁의에서 결의한 대로 논 40%, 밭 30%로 하며, 불응하는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지 말 것, 소작료로 내는 농작물 운반은 4km 이내로 결의하였다. 이 결과, 지주 천후빈은 이를 대체로 수용하였으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소작료 납부 거부와 함께 협상을 시도하던 중, 지주 측에서 암태소작인회 간부에게 폭력을 가하여 부상을 입히자 화가 난 소작인들은 문재철의 부친 송덕비를 무너뜨리는 등 고소와 고발, 구속 등으로 분쟁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지주 측에게 유리한 집행으로 농민들 13명이 구속됐다.
6월 4일과 5일, 7월 두 번에 걸쳐 암태면 주민 1천여 명이 수십 척의 풍선(風船)을 타고 목포까지 나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앞에서 단식 농성을 계속하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아사동맹결의 때문에 그 당시에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신문의 보도로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13명의 석방은커녕 공판에 회부되고 말았다. 그러자 다시 500명의 섬주민이 목포법원 마당에서 밤낮을 불문하고 6박 7일에 걸친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이에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지원하는 강연회와 지원금을 모금하였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로 변호를 자청하면서 파문이 계속 확산됐다.
13명이 형무소로 이감되자, 소작인회는 광주법원에서 다시 단식농성을 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목포경찰서장이 암태도로 달려와 중재를 시작하였다. 전남도청과 무안군청 쪽도 문재철을 설득하여, 결국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주민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다른 소작쟁의에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면소재지인 단고리 삼거리에는 소작쟁의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암태도라는 제목의 소설을 쓴 송기숙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높이 7m, 폭 1.2m의 크기로 건립된 이 기념탑에는 소작인 항쟁사와 항쟁에 참여했던 농민 43명의 이름도 기록되었다.
약 1년간 지속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의 대표적인 소작쟁의로 특히 서해안 여러 섬인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등에서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농민들의 승리로 당시 7할이 넘는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5할의 일반적인 세율보다 더 낮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암태도 농민의 승리가 아니라 전국 농민들의 승리이며 모든 지주들에게 파급효과를 주었다.
암태도를 이곳 사람들은 항쟁의 섬으로 부른다. 일제치하에서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발한 농민항쟁은 보기 드문 승리를 얻어냈다. 고등학교에서 우리의 근현대사 공부를 하면 암태도 소작쟁의가 언급이 되고, 한국사능력시험에도 간간이 출제되고 있다.
한편, 익금에서 나와 송곡리로 가면 매향비(埋香碑)가 하나 있다. 길 옆 논 가운데에 위치한 보호각 속의 비석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매향은 향을 묻는 의례이다. 말단 향촌사회를 단위로 해서 구현되며, 특히 발원자들이 공동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위기감에서 시작된 순수한 민간신앙이다. 이 매향비의 특징은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가 명시된 점과 매향처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남북한을 통틀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점이 특이하다.
군영소가 있는 팔금도
팔금도와 안좌도를 연결하는 다리는 신안군 최초의 교량이자 많은 교통량을 소화해내고 있다. 팔기교라고도 불리는 신안1교가 개통된 지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 신안군의 연도교와 연륙교 상황은 다음과 같다. 안좌도∼팔금도(신안1교), 자은도∼암태도(은암대교), 비금도∼도초도(서남문대교), 팔금도∼암태도(중앙대교), 지도∼사옥도(지도대교), 사옥도∼증도(증도대교), 목포∼압해(압해대교), 압해∼운남(김대중대교)이며, 2019년 4월에 천사대교가 개통되었다.
팔금도는 신안군의 면 단위의 섬 중 가장 작다. 매도, 거문도, 거사도, 백계도, 원산도, 매실도, 일금도 등 8개의 섬이 연결되어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팔금도가 지금의 간척지로 확장된 농지를 갖춘 것은 19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는 현재의 논들은 대부분 갯벌이었으며 농지라야 고작 산골짜기 논배미 정도에 불과했을 터였다.
섬의 중심지인 사거리에서 남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안좌와 백계로 가는 도로이다. 도로명은 탑목개길. 이 길에서 삼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잔디밭 조그마한 공간에 철제 경계선을 둘러놓은 석탑인데, 도로이름으로까지 정해질 정도로 이곳에서 이 석탑의 비중은 상당하다. 실제로 이 탑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2.3m, 둘레 3m의 고려 말에 건립된 것으로,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는 석탑만 남아 있다. 탑신은 옥개석이 하나씩 있고 모서리가 뚜렷하며 밑쪽과 같이 기둥형의 각이 있다. 1층의 받침은 2단이고 2, 3층의 그것은 3단식 구조이나 옥개석 받침은 4단이다. 국내에서는 경주 현곡면의 월성 나원리와 양북면 장항리의 5층석탑, 낭산 황복사의 구황동 3층석탑이 이 탑과 닮은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왜군의 2백여 척과 이순신 장군의 12척이 진도의 울돌목에서 맞붙는다. 장군은 바다를 알았고, 명량의 특이함을 파악했다. 세계해전사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명량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장군은 상처 입고 신음하는 군사들을 보면서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안편도(지금의 팔금도)에서 20여 일을 보낸 뒤, 고하도를 거쳐 고금도에 진을 꾸렸다.
암태도에서 중앙대교를 바로 건너면 팔금도가 나오는데 이 섬의 입구에 ‘군영소’라는 표지석이 있다. 10월 열하루부터 스무아흐레까지 머문 곳으로, 장군은 수시로 159m의 채일봉에 올라가 해상을 탐방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전투에 대비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밤바다를 보며 솔직한 심정이 담긴 시를 남겼고, 나흘째 되던 날에는 왜군과 싸우던 막내아들의 비보를 듣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곳 팔금도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보살펴 드림으로 인해 힘을 얻는다.
한편, 원산리에서 출생한 최하림(1939-2010)은 군사정권 시대 억압받는 엄혹한 현실을 거치면서 민중의 분노와 한을 담은 완성도 있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열린 시선으로 사물과 세계를 관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난했던 일제강점기, 바닷가 섬마을에 태어났던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전쟁을 겪었다. 시인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며 공부하고 싶어도 등록금 낼 돈이 없어 수업을 못 듣게 되자 부둣가를 헤매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림을 이어가던 시인의 어머니는 6·25전쟁이 터진 후 더 이상의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결국 목포로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 신문배달을 하며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시인은 목포 오거리에서 김현, 김지하 등과 만나며 문학에 심취하게 되고, 1964년에 등단한 이후 1970년대를 대표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장산들노래의 장산도
장산면은 장산도를 포함해 마진도, 막금도, 백야도, 율도와 같은 부속섬이 있다. 주섬인 장산도는 서남해안의 다도해 섬들 사이로 요리조리 항해하는 항로이다. 해안을 따라가는 이 항로는 비교적 순탄하여 예로부터 소형선박도 안심하고 항해할 수 있는 뱃길로 꼽혔다.
특히, 서남해 섬 지역들은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 교역로의 중심이 되어 육지보다도 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장산이라는 이름은 산줄기가 오음산에서 아미산을 거쳐 대성산에 연결되고 여기서 비둘기산, 부학산, 중용마을 뒷산을 거쳐 활목마을 산까지 산줄기가 끊기는 데 없이 길게 연결되었다고 하여 장산(長山)이라 칭하였다 한다.
이 섬의 중심은 도창리이다. 본래 지도군 장산면 소속으로 세금을 미곡으로 징수하여 저장했던 창고가 있어 도창(都倉)이라 하였다. 그러다 현재는 도창(道昌)이라는 의미로 바꿔 불리고 있다. 노거수 수림은 마을 뒤로 조성되어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규모는 352m이며 300년 전 방풍림, 풍수지리 등으로 인하여 조성되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끊임없이 왜구의 노략질로 골치를 앓던 주민들이 식량을 감추기 위해 동헌과 양곡 창고가 있던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멀리서 보면 숲으로 보이게 해서 왜적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했던 것이라 한다. 지금도 1백m 이상의 노송숲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의 도창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마을에 세워져 있다. 한때 장산현이 들어서기도 했던 장산도는 서남해 섬의 행정중심지이기도 했던 까닭에, 실제로 갖가지 역사적 유적들이 많다. 도창리에서 백제의 무덤인 석실고분이 1966년에 발견되었다. 마을 독서회관을 세우려고 흙을 채취하다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지금까지 이곳의 발견이 유일한 백제 무덤의 사례로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도창길 56에 들어선 ‘장산들노래 전수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산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방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장산도 들노래다. 장산면의 여자들이 논일을 하면서 부르는 민요로, 다른 지방의 노동요와 달리 경쾌하면서도 외로운 섬마을의 한이 서려 있어 독특하다. 이 노래는 신안의 대표적인 민요로 1981년 제12회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최고상을 수상하였고, 1982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장산도의 대표적인 인물로 장병준을 꼽을 수 있다. 독립운동가 장병준은 장산도 대리마을에서 태어났다. 대리경로당 바로 옆에 솟을대문으로 된 전통가옥이 바로 장병준의 생가이다. 장병준(1893∼1972) 선생은 1919년 무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지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재무부 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20년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 때 서태석, 박복영 등과 함께 유달산에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주동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후손들 가운데에도 장하준 교수를 비롯해 빼어난 인물들이 많다.
*참고도서 : 이재언 ‘한국의 섬’ 신안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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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원고 감사합니다
방학 때 내려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기다리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