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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꿈을 통하여 요셉을 세우시는 하나님.
1. 요셉은 드디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2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오래 걸린 것 같지만, 이 시간표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리하게 짜여진 것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진작에 바로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때에는 완전히 무시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요셉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 2년의 시간을 더 기다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요셉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합당한 나이인 30세가 되기를 기다리신 것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렇게 꿈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에 꾼 두 개의 꿈, 바로의 두 관원장이 꾼 두 개의 꿈, 그리고 바로가 꾼 두 개의 꿈입니다.
3. 바로는 일곱 암소와 일곱 이삭의 꿈을 연달아 꾸고는 매우 번민했습니다. 이것은 술 맡은 관원장으로 하여금 2년 전의 요셉의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바로 앞에 선 요셉의 태도는 기가 죽은 죄수이거나, 주눅이 든 종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겸손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없는 당당한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꿈의 해석을 시작했고(25), 하나님과 함께 마쳤습니다(28). 그리고 32절에서 하나님을 두 번 더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언급이 아니었습니다.
4. 애굽에서는 바로가 신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요셉이 하나님을 바로 앞에서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건방진 것도 아닙니다. 요셉의 태도는 겸손과 당당한 믿음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5.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주신 꿈은 요셉을 통하여 이 위기의 때에 애굽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을 높이 세우시고자 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었습니다. 만일 애굽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된다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그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38). 요셉은 바로 아래서 애굽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살아갑니다.
6. 그의 믿음을 엿보게 하는 증거는 두 아들의 이름에서 나타납니다. 요셉은 바로가 자기에게 준 온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지만,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지어주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나로 내 모든 고통과 내 아버지의 집을 잊게 하신다”라는 요셉의 신앙 고백이며(51),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내 고통의 땅에서 열매를 맺게(창성케) 하셨다”라는 신앙 고백입니다(52). 요셉은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늘 자신과 동행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 백성을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주권자와 나라들을 동원하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는 자기보다 더 강력한 주권(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했기 때문에 자기 나라와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신실하게 4대에 걸쳐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들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입니다.
8.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이제 언약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도 언약적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일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을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지 못해서 자기의 방법으로 시도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닙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면서, 어떠한 자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을 다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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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열일곱 살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 노예가 되었고, 아무런 잘못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애굽에 온지 십삼 년의 시간이 지났고 그의 나이 서른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수였던 요셉이 총리라는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그 교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 된지 이 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요셉의 인생을 또 한 번 완전히 바꾸어놓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일도 역시 꿈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꿉니다.
바로는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꿈, 두 개를 연이어 꾸게 됩니다. 날이 밝은 후에 바로는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 있는 자들을 모두 불러서 꿈을 말하지만,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냅니다. 아마 바로의 꿈을 들었을 때 자신의 경험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이 년 동안 잊고 지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을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신기하다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요셉은 꿈으로 인해 뜻밖의 어려움들을 겪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고 그 밑바닥에서도 꿈을 만납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꿈이 기회가 되어 그의 인생을 역전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꿈은 그 한 사람의 인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드라마가 됩니다.
그 드라마가 지금 펼쳐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바로가 요셉을 필요로 할 때 가장 극적으로 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지혜자들이 해석할 수 없었던 바로의 꿈을 노예로 팔려온 히브리 청년, 그것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가 해석하러 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연출하고 계시는 드라마입니다.
바로의 부름을 받은 요셉은 급히 왕을 만나기 위해 준비합니다. 수염을 깎고 죄수의 옷을 벗어 버리고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신 앞에 있는 요셉에게 묻습니다.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15)
바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죄수가 정말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수 있을까? 애굽의 모든 지혜 있는 자들이 해석하지 못한 꿈을 이 같은 자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왕의 질문에 대해서 요셉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요?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지금 감옥에 있는 건 내 잘못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거라며 자신을 변호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적당히 포장하며 꾸며야 하지 않을까요?
‘아! 이거 진짜 어려운 일인데, 제가 특별히 힘 좀 써볼게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이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저 정도 되니까 하는 겁니다. 정말 다행인줄 아세요.’ ‘특별히 왕이니까 제가 해드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한데는 말하지 마세요.’ 이러면서 자신이 정말 대단한 것처럼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겸손했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대해 요셉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합니다. 꿈을 해석하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에 따른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와 대변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그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말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하나님께서 꿈의 해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알려주고 요셉은 그 해석을 바로에게 말해줍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면서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합니다. 첫째는 바로가 꾼 두 개의 꿈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꿈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하면 앞으로 애굽에 7년 동안의 큰 풍년이 있고, 그 후에는 7년 동안의 극심한 흉년이 있다는 것입니다. 풍년 뒤에 있는 흉년이 얼마나 심한지, 흉년은 7년 동안의 풍년을 모두 잊을 만큼 엄청난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풍요로움과 넉넉함은 순식간에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이 7년의 흉년으로 애굽은 망하게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으로 바로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애굽은 나일 강으로 인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다른 나라에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굽이 앞으로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기근을 맞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기근을 대비하는 것은 애굽의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로에게 흉년을 위한 대책을 제안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제안한 대책은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비축해두었다가 7년의 흉년 동안 비축해둔 곡식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데, 요셉이 말한 대책을 따져보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지휘할 수 있는 지혜로운 책임자를 택하고 그 책임자의 명령에 따라 일을 수행할 감독관들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둘째, 7년의 풍년 동안 생산되는 곡식의 1/5을 거두어두라는 것입니다. 셋째, 저장한 곡식은 한 곳이 아니라 각 성읍에 저장해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흉년이 되었을 때 애굽의 백성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곡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보급망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바로에게 좋은 제안을 하고 있지만, 사실 왕에게 이러한 조언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조언을 했다가 왕이 나쁘게 생각하면 조언한 사람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두려움 없이 지혜로운 조언을 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그 즉시 이러한 조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 온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지내온 과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동안 요셉이 보낸 시간들은 어떻게 보면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에서 가정 총무의 일을 하면서, 그리고 감옥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맡아하면서 요셉은 많은 것들을 실제로 배웠을 것이고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요셉에게는 성장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특별 과외를 받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요셉은 총리가 되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에도 이런 배움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우리는 그런 훈련의 과정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때로는 직장에서, 때로는 교회에서, 학교에서 인생을 배우고 환경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훈련을 받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직장 사람들로부터, 나의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과외 선생님이 되어주는 나의 남편, 아내, 자녀들, 나의 영적인 성숙과 훈련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나의 인격을 훈련받게 됩니다. 그 과정은 즐겁지 않지만, 또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것을 그 뜻에 따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 요셉을 훈련시키셨고, 때가 되었을 때 요셉은 지혜롭게 바로에게 제안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제안을 들은 바로와 모든 신하들은 이 제안을 좋게 생각합니다. 요셉이 꿈을 제대로 해석했다는 것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이 제안한 대책도 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이런 요셉의 모습을 보고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38)이라고 평가합니다. 바로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삼아 나라의 모든 살림을 맡도록 합니다. 자신이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줍니다. 인장 반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칙령이나 문서를 왕의 이름으로 만들어 보낼 때 필요한 것입니다. 세마포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입을 수 있는 고급 옷감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총리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바로는 자신의 병거에 버금가는 병거에 요셉을 태우고 사람들 앞에서 요셉을 높여줍니다. 사람들에게 요셉을 대할 때 바로를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종들은 병거를 앞서 가면서 ‘엎드려라’하고 외칩니다.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높은 사람이 길을 갈 때 앞에서 ‘물렀거라’하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의 이름을 지어 주고,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하게 합니다. 아마도 요셉이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에 왕족 중에 하나와 결혼하는 것은 어려웠고, 그 다음이 되는 유능한 제사장 집안의 여인과 결혼시킨 것 같습니다. 요셉에게 애굽의 이름과 애굽의 아내가 주어졌다는 것은 바로에 의해 요셉이 애굽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 다음이 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침에 감옥에서 죄수로 깨어났다가 애굽의 총리로 하루를 마칩니다. 애굽에서 가장 낮은 자에서 애굽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무엇을 먼저 하고 싶었을까요? 나를 억울하게 감옥에 가둔 보디발과 그의 아내, 불러서 혼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술 맡은 관원장, 꿈을 해석해주면서 내가 그렇게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좀 따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요셉은 총리라는 권력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합니다. 총리에 오르기 전에 어려운 환경에서 단련된 자로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며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들입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중에는 계산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기 전에 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에는 요셉의 간증, 요셉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 버리게 하셨다”(51)라고 하며 이름을 ‘므낫세’라고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52)라고 하며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합니다.
7년의 풍년이 끝나고 요셉이 꿈을 해석한대로 7년의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이 때를 준비한 요셉은 백성들에게 양식을 팔기 시작했고, 인접한 다른 나라에서도 애굽으로 식량을 사러 옵니다. 주변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왔다는 것은 다음 장에서 요셉의 형들이 애굽을 찾게 되는 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면서 그가 열일곱 살에 꾸었던 꿈이 성취된 것 같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여전히 성취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성취되려면 아직 남았습니다. 요셉이 감당해야 했던 여러 가지 어려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마무리되었지만, 형들과의 관계가 남아있습니다. 아직 형들과의 관계에서 남아있는 갈등이 있기에 우리는 요셉의 다음 이야기를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은 물론 나라와 그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기근으로부터 야곱의 가족들을 보호하시고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셨고, 이를 위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를 총리 자리에 앉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되어 줍니다. 요셉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위치에서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25)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28)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요셉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했던 고백에도 나타납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51)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52)
요셉의 입에서 무엇이 먼저 언급이 됩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16) 요셉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이런 요셉을 바로는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행정적인 계획과 일처리가 탁월한 사람? 어떤 일을 대비하는 능력이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바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요셉을 통해 하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39). 그래서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사실 요셉에 대한 이런 평가는 바로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도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애굽의 왕으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다시 듣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의 능력이 뛰어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어떠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알고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대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정말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가지는 특별함, 그 사람의 뛰어남, 능력과 재능,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바라는 참된 자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움직이는 삶, 그래서 내 삶을 통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원하는 인생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내가 아니라 나의 주님” 우리는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원합니다.
왜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런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나의 마음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나의 욕심이, 나를 높이려는 마음이, 나의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보다 나를 앞에 두려고 하고, 하나님보다 내가 높아지려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녹아내리고,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다시금 그리스도만이 내 삶에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요셉처럼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큰일을 행하셨는지, 나를 위해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내 삶의 초점과 방향을 나에서부터 하나님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나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일이든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 안에서, 나의 분량대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하는 삶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앞세우면 언제나 작아질 뿐입니다. 한 없이 약해질 뿐입니다. 나를 드러내려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에게 마음을 쏟을수록, 삶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만족을 경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앞세우고 그 크신 하나님 뒤에 있을 때 우리는 더 없이 강하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자랑할 때, 나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경험하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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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도소에 있던 죄수가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창세기 41장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당시 최강대국인 애굽의 총리가 된 이야기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본장에는 요셉의 급속 승진을 위한 네 개의 중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바로의 꿈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1-4절)
두 관원장이 풀려 난 후로부터 만 2년이 지났을 때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왕이 나일강가에 섰는데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강에서 올라와 풀밭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강에서 올라와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와 함께 섰다가 모두 잡아먹었습니다.
암소는 더위와 파리 떼를 피하여 나일강의 갈대밭 속에 반쯤 잠긴 채로 서 있기를 좋아하며, 풀을 뜯어 먹을 때 강물 밖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강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만 2년’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하여 요셉이 감옥에 3년간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요셉이 1년 동안 있었다고 봅니다. 출소한 그 해 30세에 총리가 되었으므로 감옥에 들어갈 당시는 27세였고, 17세에 보디발의 가정에 종으로 팔렸으므로 10년간 보디발의 가정에서 봉사한 것입니다.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5-8절)
바로는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가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또 그 후에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그 마른 일곱 이삭이 풍성하고 충실한 일곱을 삼켰습니다. 바로가 깨니 꿈이었습니다. ‘동풍(sirocco)’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대성 모래바람으로 동식물에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더욱이 암소는 애굽의 풍요의 신, 아이시스를 상징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바로는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애굽에는 여신 아이시스와 남신 오시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호루스와 같은 신들의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시스로 대변되는 암소가 비쩍 말라서 살찐 암소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비쩍 말랐다는 내용의 꿈을 꾸고 나서 바로의 마음속에는 국가적인 재앙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가 그 꿈을 꾸고 아침에 번민했습니다.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이 절대자가 준 숙제로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자기가 만일 그 숙제를 풀면 살 수 있지만, 만일 숙제를 풀지 못한다면 자기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도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점술가와 현인을 모두 불러 모아 꿈 이야기를 하였으나 아무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점술가’는 사제 계급으로 신비한 것을 취급하는 자이며, ‘현인’은 일상생활과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가진 현자입니다. 모두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이 꿈 자체는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듣고 금방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사와 술객들은 아무도 꿈을 해석해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꿈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던 것입니다. 점술가들조차 해몽하지 못하자 바로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자도 두려워 벌벌 떨게 된 것입니다.
꿈 가운데 허망한 꿈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분명하게 기억됩니다. 그래서 이런 꿈을 ‘영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욥기 33장 15, 16절에 보면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밤중에 귀를 여시고 경고로 교훈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몽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 응답이 꿈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의 꿈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몽이었습니다. 바로의 꿈은 요셉의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 바로 왕 앞에 서게 된 요셉
바로가 꿈의 의미를 몰라서 쩔쩔 매고 있으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과거의 허물을 추억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 감옥에 갇혔을 때 떡 굽는 관원장과 함께 있었는데 그 때, 히브리 청년 요셉이라는 사람이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주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왜 술 맡은 관원장은 2년 동안이나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때를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며 정하신 때에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9-13절)
바로가 요셉을 불렀습니다. 신하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데려와 수염을 깎게 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바로 앞에 세웠습니다. 30년 동안 겪은 모든 고난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준비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요셉은 준비된 모습으로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부자가 될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준비된 사람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30년 동안 하나님이 철저하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어려운 환난을 거치는 동안에 강하고 지혜롭고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준비된 사람으로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해몽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며 자기의 꿈을 해석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것이라고 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
바로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살지고 아름다운 암소 일곱 마리가 하수에서 올라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그 뒤에 약하고 심히 흉한 암소 일곱 마리가 올라와 그 소들을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가진 곡식이 있었는데, 그 후에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서 앞의 곡식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다음과 같이 해몽하였다.
“그 꿈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일곱 마리의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의 좋은 이삭도 일곱 해인데 이는 칠 년간의 큰 풍년이 들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한 소들과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를 의미하는데 일곱 해 동안 큰 흉년이 들 것을 말합니다. 애굽에 일곱 해의 큰 풍년이 있겠고, 그 후에 일곱 해 흉년이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 너무 심하여 이전에 있는 풍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릴 것이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입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서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정하고 속히 행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해몽에 그치지 않고 대책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소서! 바로께서는 나라에 여러 관리를 두어 일곱 해의 풍년이 들 때 땅의 수확의 1/5을 거두어 여러 성에 적치(積置)하게 하소서! 그렇게 저장한 곡식으로 이어 임할 흉년에 예비하여 나라가 멸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히브리인이었고, 노예였던 요셉이 지금까지 누구도 제안하지 않았던 곡식 소출의 20%를 세금으로 거두라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바로는 주변에 많은 행정관들도 있었습니다만 일개 히브리 노예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이 제안의 핵심은 애굽에 세금 혁명을 일으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죽이는 혁명이 아니라 살리는 혁명입니다. 매우 합리적인 혁명인 것입니다. 풍년이 올 때 세금을 올리면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올 때 세금을 올리면 누구라도 반발하게 되어있습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울 때는 세금을 낮춰야하고 호황을 누릴 때는 세금을 좀 더 거두어도 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제안이었던 20%의 세금을 거두라는 것은 백성들의 반발을 살 필요도 없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훗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큰 신상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을 잊어버리고 그 꿈을 밝히고 해몽도 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로 꿈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해석해 주었습니다(단2장). 하나님께서는 징조 있는 꿈을 꾸게 하시고 또 그것에 대해 해석도 해주십니다.
3. 요셉이 총리로 임명됨
요셉은 바로 앞에 서서 주어진 기회를 100% 살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해석과 제안을 들은 바로 왕은 전무후무한 요셉의 승진을 허락한 것입니다. 요셉은 승진정도가 아니라 노예 죄수의 신분에서 애굽의 둘째 권력자로 올라간 것이니까 이런 경우는 승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대박’입니다.
역사가들은 그 당시 애굽 왕조가 힉소스 왕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셈족입니다. 그들이 약 300년간 애굽을 통치했는데, 셈족이었던 바로가 셈족이었던 요셉을 총리로 세우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 역시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승진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요셉의 해석하고 제안한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다 받아들였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38-40절)
바로와 그 신하들이 요셉의 제안을 좋게 여겼습니다. 바로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그를 기뻐하며 총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비밀을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가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을 복종하리라.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다. 내가 너로 애굽의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요셉에게 ‘명철하고 지혜가 있다’라고 한 것은 가벼이 생각하지 않고 신중하고 살피고 한 말입니다. ‘보좌만 너보다 높다’라고 한 것은 왕으로서 지위가 그보다 높지만 모든 실권을 요셉에게 준다는 말입니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란 말처럼 재상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41-43절)
그리고 자기의 인장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의 버금(2호) 수레에 태웠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무리(의전관들)가 그 앞에서 ‘엎드려라!’고 외쳤습니다. ‘인장반지’는 최종 결재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모든 권세를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권위입니다.
이렇게 하여 요셉은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땅과 생산물을 주관하며 기타 모든 것을 다스렸을 것입니다. 또 바로는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리는 자가 없으리라’고 격려하고,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인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요셉은 이에 나가서 애굽의 온 땅을 순찰하며 총리의 직책을 담당하였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위임한 것이지요. ‘사브낫바네아’는 ‘비밀을 열어 보이는 사람, 비밀의 계시자’란 뜻입니다. 애굽인으로 확실한 정체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온’은 카이로 동북쪽 11km에 떨어져 있는 곳으로 태양 숭배의 중심지로 ‘헬리오폴리스’로 불립니다. ‘보디베라’는 ‘태양신에게 바쳐진 사람’이란 뜻이고, ‘아스낫’은 ‘여신 네이스(Neith)에게 속한 자’란 뜻입니다.
드디어 요셉의 꿈이 실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애굽의 모든 백성이 요셉을 향해 절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을 하지는 않았지만 요셉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절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4. 요셉의 통치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 30세였습니다. 요셉은 애굽 온 땅을 순찰했습니다. 17세에 종으로 팔렸다가 13년의 종과 수감생활로 연단을 받고 난 후에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46절)
요셉은 바로의 칭찬을 감상하면서 집무실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집무실에 앉아서 과거에 자기에게 아품을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서 보복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애굽에 종으로 팔려 온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7년 대흉년 동안에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가 직접 순찰을 하면서 민심도 살피고 농사 정책도 챙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부지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단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자기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하고,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요셉은 매우 바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굽 전역을 여행하면서 7년 풍년의 기간 동안 부지런히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각종 곡물을 세금으로 거두어 각 성의 창고에 저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어떤 거래든지 정확하게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었는데, 얼마나 세금을 많이 거두었는지 그 거둔 것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49절)
7년 동안의 풍년이 연이어서 들었습니다. 토지의 소출이 심히 많았습니다. 요셉이 그 땅의 모든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비축했습니다. 성 주변의 밭에서 난 곡물을 그 지역의 성에 저장하게 했습니다. 저장한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져 계산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심히 많아서 다 셀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51, 52절)
요셉은 흉년이 들기 전에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통해 낳았습니다. 장자를 ‘므낫세’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잊어버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과 아비의 집의 모든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기 때문에 지은 이름입니다.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결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애굽에서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결전의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애굽과 가나안 땅에 축적된 죄로 인하여 대흉년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죄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예고 없이 전쟁이나 기근이나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앙이 자동적으로 터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7년의 풍년이 그치자 요셉의 말처럼 흉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일강이 말랐고, 사막의 치명적인 모래바람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온 세상에 흉년이 들었다고 한 것을 보면 비가 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이 부족하면 농산물이 자라지 못합니다.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55-57절)
각 나라들에서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는 식량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애굽인들도 점차 식량이 떨어져서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가서 양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모든 백성들에게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창고를 열어서 곡식을 팔았습니다. 애굽뿐 아니라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으므로 각 나라에서도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몰려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IMF 위기가 왔을 때 당시 IMF 총재는 캉드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아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했는데, 캉드쉬 앞에서는 우리나라 대통령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많은 은행이 문을 닫았고, 살아남은 은행이나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명예퇴직을 강요하는 등 구조조정을 하면서 직원 수를 대폭 줄였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외국에 헐값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IMF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고, 너무 서구적인 방식을 우리나라에 강요한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우리나리는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10여 년 전에 구조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자 철저하게 구조조정을 했고 흉년에 대비한 농업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뽑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요셉이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애굽 경제 전체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애굽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되 썩지 않는 곡식 중심으로 농사를 짓도록 권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된 것은 저장 가능한 상태로 가공하게 했을 것입니다. 또한 불필요한 성의 건축을 막고 저축이나 분배를 용이하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모든 농업 정책은 7년 흉년에 대비하여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41장에는 두 가지 교훈이 있는데, 인간적인 교훈과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적인 교훈입니다.
첫째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잊어버리는 시간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때를 기억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너무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을 말씀으로 채우시고 연단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정금이 되게 하시며 보석이 되게 하십니다. 또 실제로 우리에게 좋은 직책도 주시고 물질의 복도 주셔서 존귀한 것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둘째는 인생의 기회가 왔을 때, 요셉처럼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을 때 놓치지 않는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것입니다. 바로는 양식이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여러 말 하지 않고 단 한 마디를 했습니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 받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시 하시는 대로 하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 가면 기쁨이 회복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면 천국에 갈 사람들로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좋은 것이 풍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한 마디는 바로처럼 “요셉에게로 가라!” 즉, “예수님께로 가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고통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자는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유능한 사람은 괜찮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라! 그리고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생명의 떡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디도 생명의 떡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생명의 떡이 있고,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다 생명의 얻게 됩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바로는 아주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행하십시오!” 우리도 삶을 살다가 고통스럽고 좌절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로 가면 됩니다. 예수님께 수시로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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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을 다루어가실 때 '꿈'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세 번의 꿈이 등장하는데, 각 꿈을 꾼 이후에 극적인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 등장하는 꿈은 요셉이 직접 꾸게 된 꿈이며,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으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두 번째 꿈은 요셉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있었을 때 만난 두 관원장의 꿈입니다. 요셉이 말한 꿈의 해석처럼 떡 굽는 관원장은 죽임을 당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 번째 꿈으로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계기가 되는 바로 왕의 꿈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 이년 후에(1절)
(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한 이후로부터 바로 왕이 꿈을 꾸기까지 만 2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전직에 회복되면 바로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화장실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처럼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에 나와 복직하자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습니다.
이 2년의 시간 동안 요셉은 어떤 마음으로 감옥에서의 생활을 이어갔겠습니까?
처음에는 간수장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또, 감옥에 나가면 어떤 삶이 펼쳐질지 미래를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미래에 대한 꿈은 좌절로 바뀌었고, 2년의 시간은 관원장으로부터 걸었던 모든 기대를 내려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요셉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는 41장을 통해 세상은 감옥에 있는 요셉을 잊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잊지 않으셨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후에 요셉이 바로 왕 앞에서 꿈을 해석해 주시는 분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담대히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잊혀진 사람, 그리고 잊혀진 시간은 없습니다. 만약 관원장이 복직한 직후에 요셉이 바로에게 알려졌다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루실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을 바라본 요셉은 2년 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의 시간이 결코 잊혀진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길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루 속이 코로나가 종식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실망과 좌절로 변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요셉이 감옥에서 겪은 2년의 시간처럼 이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두려움과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존재로 여겨진 것만 같은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여전히 우리가 낙심과 외로움 속에 짓눌려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살게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 안에서 잊혀진 시간은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살아가기에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은 우리를 잊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르다는 것과 우리의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더 바른 길임을 인정하며 오늘의 삶을 주님을 더욱 뚜렷하게 바라보는 시간으로 가꾸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마음이 번민하여(2-8절)
(1-4)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애굽의 궁궐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꾼 꿈 때문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이 두 꿈을 꾸었던 것처럼, 바로 왕도 비슷한 두 번의 꿈을 꾸었습니다. 이 두 편의 꿈에는 애굽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의 마음을 불안하게 할 만큼 끔찍한 꿈이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꿈에서 아름답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더위와 파리를 피해 나일 강에 반쯤 몸을 담그고 있다가 풀을 먹으러 강가에 나와 서 있었습니다. 평소 나일 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요롭고 평온한 장면입니다. 나일 강은 애굽의 힘과 풍요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뒤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일 강에서 올라왔습니다. 앞서 아름답고 살진 암소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의 암소들입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아름답고 살진 암소를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초식동물인 소가 다른 소를 잡아먹는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놀란 마음에 꿈에서 깬 바로 왕은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꿈을 꾸게 됩니다.
(5-7)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두 번째 꿈은 앞선 꿈과 동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마른 이삭이 삼키는 끔찍한 꿈이었습니다. ‘동풍’은 5월과 10월에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 즉 열풍을 말합니다. 뜨겁고 파괴적인 이 바람은 성경에서 많은 경우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꿈에 등장하는 소, 갈밭, 이삭이 당시 고대 근동에서 모두 식량을 상징하기에 이 꿈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8)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2년 동안 바로는 여러 꿈을 꾸었겠지만, 그 어떤 꿈도 이번만큼 바로를 괴롭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두 꿈으로 말미암아 바로는 '마음이 번민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다니엘 2장 1절에서 느브갓네살이 꿈을 꾼 이후에도 등장 합니다. 또한 시편 77편 4절에서 고민에 찬 시인이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로 표현합니다.
바로가 이 꿈들로 인해 마음이 괴로웠던 것은 이 꿈이 자신과 애굽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로가 이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마음의 괴로움이 없었다면, 요셉은 평생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며,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번민함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로는 번민한 마음으로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 즉 지혜로운 모든 사람을 불러모아 꿈을 해석하게 하였으나 그 누구도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어 바로의 마음의 번민함은 더욱 깊어져만 갔습니다. 이제 바로는 그 누구에게라도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감옥에 갇힌 히브리인 노예의 말까지도 귀 기울일 수 있는 준비를 하나님께서 마음의 괴로움으로 다루어가셨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과 우리를 짓누르는 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않습니다. 그 어떤 권력을 가진 자라도, 그리고 이 땅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없이는 결코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애굽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바로 왕과 애굽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모두 모였으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신 한 사람,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히브리인 노예에 귀를 기울여야 했고, 그것이 곧 다가올 재앙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며, 나의 선택과 계획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낮추어 가십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마음의 괴로움도 사용하셔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고백했던 것처럼, 세상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의 길을 겸손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9-13절)
(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 모인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이 그 꿈을 해석할 수 없어 고개를 가로저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의 머리에 한 사람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죄'를 복수형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2년 동안 요셉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 요셉에 대한 죄이며, 바로에 대한 죄임을 깨닫고 '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이 알지 못하는 죄를 먼저 꺼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 감옥에서 만났던 히브리 노예였음을 확신하였고, 지난 2년 동안 요셉을 잊고 지냈던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며 요셉을 소개합니다.
(10-13)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소개하기 위해 2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 과거의 일들은 바로에게도 그리고 관원장에게도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만난 히브리 청년의 꿈 해석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근거를 설명해야 했기에 관원장은 요셉의 해석대로 자신이 복직되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제 친위대장의 종된 히브리 청년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섭니다. 요셉의 말에 권력의 중심에 선 애굽의 왕과 그 땅의 모든 지혜롭다 여기는 자들이 귀 기울입니다. 요셉이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순간마다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관원장의 머리속에서 요셉을 기억하게 하시고, 꿈으로 인해 마음이 번민한 바로 왕과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해 고개 들지 못하는 그 땅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 앞에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꼬여 있는 것 같고, 너무나 큰 걸림돌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길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길이 높다는 것과 우리의 지혜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가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눈을 들어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바라보며, 은혜의 통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 보디발 장군의 집에 종으로 팔려와 억울하게 감옥생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감옥을 나가게 되면 자신을 꼭 기억해 달라는 부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가고 만 이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요셉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광야 생활과 같은 외로운 시간들을 홀로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요셉의 마음 한 켠에는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라는 실망감이 들 수 있었지만, 그 때 요셉은 갑작스럽게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바로왕 앞에 드디어 서게 됩니다.
바로 앞에 서는 요셉(14-16절)
(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술 맡은 관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는 즉시 요셉을 감옥에서 불러오게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음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하고 만 이 년이 지나며 이제는 아무도 감옥 속에 있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거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동사가 여섯 개나 등장합니다. ‘보내다’, ‘부르다’, ‘내놓다’, ‘깎다’, ‘갈아입다’, ‘들어가다’가 연속으로 사용됩니다. 바로의 절박한 심정을 말해 주는 동시에 이제 곧 요셉에게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을 함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5-16)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바로는 요셉을 보자마자 먼저 말합니다. 바로의 주변에 두었던 마술사들이나 지혜자들은 바로가 꾼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꿈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전해들은 요셉의 존재는 바로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바로의 말을 들은 요셉은 침착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바로가 요셉을 감옥에서 기껏 끌어내어 불렀는데, ‘내가 아니라’는 요셉의 대답은 바로 앞에서 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고 먼저 말했을 때, 그냥 침묵하며 마치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요셉이 지금 죄수의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바로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되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겸손히 말하며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요셉은 극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려고 할 때 겸손한 척하지만, 은근슬쩍 나 스스로가 잘나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영광을 가져가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날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셉에게 꿈을 이야기하는 바로(17-24절)
(17-21)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첫 번째 꿈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1-4절에 나타난 바로가 꿈을 꾸는 장면의 설명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추가하여 말합니다. 19절의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는 말과 21절에서 “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않고 여전히 흉하더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바로는 꿈에서 본 내용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그가 그 꿈 때문에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22-24)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
바로가 두 번째 꿈을 설명합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더하는 것 없이 5-7절에 나타난 바로의 두 번째 꿈과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는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고 나왔지만, 24절에서는 바로가 현인들을 제외하고 점술가만 언급합니다. 이는 바로가 지금 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초조하고 조급한 상태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25-31절)
(25-31)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성경의 다른 번역본들을 보면, 25절의 제일 앞부분에 ‘그 때에’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셉이 바로가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따로 기도하거나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고 그 때에 바로 바로에게 꿈의 해석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요셉은 하나님을 통하여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초조한 상태로 꿈의 해석을 기다리는 바로에게 두 가지의 꿈은 결국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꿈은 하나님이 앞으로 애굽 땅에서 행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합니다. 일곱 암소나 이삭은 7년을 가리키며, 7년의 큰 풍년이 오고 7년간 심한 흉년이 올 것을 말합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7년의 큰 풍년을 나타내고, 파리하고 흉한 일곱소와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은 7년에 걸친 극심한 흉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흉년이 얼마나 극심한지, 이전 7년간의 큰 풍년은 잊어버릴 정도로 애굽땅을 망하게 할 만큼 위협적이라고 합니다. 바로의 꿈은 7년간 극심한 흉년이 올 것이기에 앞으로 먼저 7년간 오게될 풍년의 때에 잘 준비하라는 것이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흉년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32-36절)
(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바로가 같은 내용을 의미하는 꿈을 두 번 겹쳐서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확정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앞으로 속히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행하실 이 일은 7년의 풍년 이후에 닥칠 극심한 7년의 흉년이지만, 창세기 전체의 문맥 속에서 보면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15:1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고 하신 말씀과 요셉의 꿈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팔려 오기 전에 요셉은 상징을 통해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습니다. 이 두 번의 꿈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만 계획되었으며, 이제 하나님은 그 계획을 신속하게 실행하십니다. 그리고 극심한 흉년은 요셉이 나중에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애굽에서 만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33)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이제’라는 원어는 주로 사실의 진술에 대한 결과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며, ‘지금’, ‘곧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이란 표현도 항상 쌍을 이루어서 사용되는데, 이는 훌륭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요셉은 지금 바로 이러한 자질을 갖춘 자에게 애굽을 다스리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는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요셉밖에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33절의 말씀이 요셉을 애굽 총리의 자리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36)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행하사’는 25, 28, 32절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반드시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바로도 할 일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셉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다스리는 자로 임명하고 그 밑에 관리들을 두어 7년의 풍년 동안 수확물들을 잘 관리하라고 권고합니다. 철저히 대비하면 7년의 흉년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서 그분의 생각과 뜻을 나타내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만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통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고,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을 행하실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묵상하고 공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잘 알리고 전파하며 준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살게 하신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은혜의 해를 전하는 통로로 살아갈 수 있어야 겠습니다. 지금 우리들 인생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음을 늘 기억하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만을 눈을 들어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총리에 임명된 요셉(37-43절)
오늘 본문 3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이 일’은 어제 나눈 바로왕이 꾼 꿈과 그것에 대한 요셉의 해석과 대안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요셉의 인생 13년은 표면적으로는 꽈배기처럼 꼬임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으로 팔린 것만 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자기 주인의 부인으로부터 억울하게 모함을 당해서 이제는 영어(囹圄)의 몸,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신실하게 살았던 요셉은 죄수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수를 죄수에게 맡기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지금 어떤 지위에 있는지, 어떤 자리에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자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없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은 자리와 업적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복직하게 되거든 바로왕에게 아뢰어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과 그의 부탁을 잊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함흥차사(咸興差使)였습니다. 아마 요셉의 실망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 2년이 지나고 이제는 바로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살진 암소 7마리가 나일강에서 올라와 갈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그 뒤에 흉측하게 야윈 암소 7마리가 올라와 살진 암소를 잡아먹었습니다. 채식동물인 소가 소를 먹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그렇게 소가 소를 먹으면 배가 터질 듯이 부르거나, 배불러서 죽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소를 먹고서도 전혀 먹지 않은 듯이 야윈 상태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다시 꿈을 꾸었는데, 두 번째 꿈도 신비하였습니다. 한 줄기에서 이삭이 7개가 나왔는데 그것들은 꽉 차게 아주 잘 여문 것이었고, 후에 또 한 줄기에서 이삭이 7개 나왔는데 그것들은 잘 여물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온 이삭이 물을 먹지 않고 앞에 나온 이삭을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은 애굽 전역에 있는 모든 점술가와 현인(지혜자)들을 이 꿈을 해석해 주기를 바랐지만, 해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요셉을 불러서 자신이 꾼 꿈이 이야기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이 꾼 꿈이 상이하게 보여도 동일한 꿈임과 그 의미가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같은 의미의 꿈을 꾼 것은 하나님께서 속히 그 일을 시행할 것임과 그 일을 반드시 행할 것임을 의미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과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을 통해서 풍년에 이은 흉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일(이 말)’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신비하게도 요셉이 바로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고, 하나님의 길은 길보다 높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요셉이 제안한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대책으로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등용하고, 조세제도를 통해서 흉년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을 바로왕은 물론, 모든 신하도 함께 좋게 여겼습니다. 원문에 가깝게 해석하면 ‘바로의 눈에 좋았고, 모든 신하의 눈에도 좋았다’입니다. 어떻게 바로와 신하들이 함께 좋게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왕이 요셉이 히브리인이라고 배척할 수도 있었고, 신하들이 바로왕에서 “저 자는 신분이 미천한 노예요, 죄수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의 말을 믿으십니까”라고 상소를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 요셉의 해석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경에 최초로 성령충만했던 사람이 요셉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왕과 그의 신하들은 요셉이 해몽한 것이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임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수석은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최고의 교수가 되었다면, 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보디발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줄곧 ‘청소반장’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왕의죄수감옥대학교, 심부름학과’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왕과 신하들의 이런 탄성에 가까운 소리는 요셉의 해몽은 그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요셉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또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향내가 난다면 그보다 더 복된 사람, 가치 있게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요셉은 지난 13년 동안 종살이 옥살이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 신실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현재의 일에 신실한 것보다 미래를 더 잘 준비하는 것이 없습니다.
요셉을 칭찬하는 바로의 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요셉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잘 대비하기 위해서 33절에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십시오”라고 제안했습니다. ‘명철하다’라는 것은 ‘분별력이 있다’라는 의미로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지혜있다’라는 것은 ‘감각이 있다’라는 의미로 실제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론과 실제를 모두 겸비한 사람을 택해서 관리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왕의 말은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은 바로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왕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뒤를 봐주시기 때문에 요셉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되었습니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30살짜리 재상이 탄생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인정받는 정도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보디발 장군의 집을 다스리게 되었고, 감옥을 다스리게 되었고, 마침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집 가운데 하나인, 애굽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지난 13년, 아니 30년 동안의 삶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갑자기’는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유명하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의 모습에는 과거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요셉의 총리 위임식이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41-43)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바로왕은 애굽 백성들 앞에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그 증거로 자신의 인장반지(옥쇄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그 반지에는 소유자의 이름이나 소유자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대통령이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세마포 옷은 당시의 고관들이나 제사장이 입었던 옷이었고, 애굽의 왕들이 죽으면 그 시신을 쌀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옷은 무게로 달아서 팔았는데, 그 값이 금값보다 비쌌다고 합니다. 옷이 신분을 상징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군인이라면, 바로왕은 지금 요셉에게 별이 4개의 대장 계급장이나, 별이 5개가 달린 원수(元帥)의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혀주는 것과 같습니다.
위임식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왕은 요셉을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태우고 대중에게 선포했습니다. 버금 수레는 오늘날로 하면, 버스보다도 더 긴 최고급 리무진 승용차를 관용으로 주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애굽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애굽 최고의 관직에 앉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기분이 나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수천 명, 수만 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말단직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가 갑자기 그 나라의 최고 기업의 부회장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그를 부하로 데리고 있던 사람들은 훨씬 더 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왕이 하사한 버금 수레를 타고 행차할 때마다 앞선 사람들이 “엎드리라”라고 외쳤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임금이나 고관들이 지나가면 머리를 숙이게 했습니다.
요셉의 결혼과 활동(44-45절)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수족을 놀릴 자가 없다’는 ‘어느 누구도 손발 하나 까딱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요셉은 애굽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애굽 전역에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바로왕은 요셉이 총리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2가지의 배려를 해 주었는데, 이름을 바꾸어 주었고, 결혼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로왕은 요셉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그를 총리로 임명은 했지만, 이방인을 거부하는 애굽사람의 정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빌 게이츠와 같은 재능을 가진 외국 사람을 국무총리로 세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국내에 산적(山積)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머리를 가진 외국 사람을 총리로 세우려 한다면 국민의 항의가 빗발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냥 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름을 빌 게이츠는 ‘문빈’과 같이 개명해 주었을 것이고, 또 아인슈타인은 ‘안한석’과 같이 이름을 바꾸고 세울 것입니다. 요셉의 이름이 바꾸어 준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바로왕이 요셉에게 지어준 ‘사브낫바네아’는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신께서 말씀하시니 그가 살고 있도다’의 의미나 ‘사물들에 알고 있는 그 사람’, 또는 ‘생명의 지탱자’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든지, 요셉에게 애굽의 생명과 애굽의 운명을 맡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또한 요셉은 온 지방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도 했습니다. ‘제사장(코헨)’으로 번역된 단어는 ‘제사장’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두머리, 통치자’, ‘주요 공직자’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즉 보디베라는 종교적인 수장과 상당한 지도력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가톨릭으로 하면 중세시대 어느 지역의 ‘대주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직무를 태만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도 그러했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서도 그러했듯이 총리가 되어서도 주어진 일에 신실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애굽 온 땅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상, 애굽의 상황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나온 요셉의 삶은 칠흑같이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는 것만 같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 깊이가 수백 미터나 되는 구덩이 속에 빠져서 그 속에서 도와달라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외면하시는 것 같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신 것만 같이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도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응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즉 요셉은 종살이와 옥살이하는 시간에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의 해 속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의 자리가 쉽지 않아 보여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오늘이라는 시간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바로의 꿈을 해석한 요셉은 노예 신분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바로의 임명이 있었고,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의 결혼을 통해 요셉의 지위는 더욱더 공고해졌으며, 마침내 7년 대기근의 해결사가 됩니다. 그러나 요셉이 총리가 되어 수많은 백성을 구원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결코 요셉 개인의 흥망성쇠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온 나라를 구원하시기 위한 과정 가운데 요셉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본문은 굶주려 죽어가던 온 나라와 백성들이 요셉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애굽에 7년 풍년이 듬(46-49절)
(46-47)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이방으로 팔려온 이후 13년 동안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비록 종과 죄수로서 참혹한 고난의 기간이었지만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로 있을 때에는 재정이나 행정 등의 실무를 익힐 수 있었고,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에 있을 때에는 애굽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다루어 가실 때 그것이 때로는 연단이고 훈련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단과 훈련은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기간이지만 그 순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연단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통로가 되었으며, 삼십 세에 총리가 되기 전 기반을 닦아주었습니다.
요셉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애굽의 온 땅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동안 엄청난 풍년을 이루게 됩니다.
(48-49)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요셉은 7년 이후에 다가올 대흉년에 철저히 대비했습니다. 눈앞에 소출이 심히 많다고 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각 성 주위의 밭에서 거둔 곡물의 오분의 일을 그 성들 안에 저장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저장한 곡식의 양은 앞으로 극심한 흉년이 온다고 해도 적어도 7년 동안 먹어야 할 양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따라서 풍년 기간 중에 해마다 모아 둔 곡식은 애굽의 모든 사람들은 물론 이웃 나라까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한편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가족들은 앞으로 대대적인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가족들을 생각하사 7년의 흉년 기간 동안 그들이 먹을 곡식을 요셉을 통해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미리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허락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완벽한 타이밍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십시다.
요셉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음(50-52)
(50-52)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은 풍년의 때에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통해 두 아들을 얻게 됩니다. 장자의 이름은 므낫세이며, 뜻은 ‘잊게 하는 자’ 입니다. 요셉이 과거에 겪었던 고난과 아버지의 집에서 겪었던 모든 아픔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잊게 되었다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고난과 상처 받았던 경험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노예로 있을 때나, 죄수로 있을 때나, 그리고 총리가 되었을 때나 늘 한결같이 동행해주셨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과거의 고난과 상처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너무나 끔찍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면 결코 ‘잊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자녀의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자녀를 그 단어로 부르다보면 오히려 잊고 싶었던 과거가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과거에 깊게 패인 마음의 상처는 인간의 힘으로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껏 우리의 인생을 사랑과 은혜로 다루어 오셨다는 것과 앞으로도 그렇게 다루어 가실 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 상처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 과거의 아픔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된 날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그 어떤 날보다 감격스러운 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 날입니다. 죄에 눌려있었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포로가 되어있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아물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신음하던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사 자유와 은혜를 선포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이 땅만 바라보던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상처로 얼룩진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옭아맨다고만 여겼던 고난과 상처는 오히려 복음을 더욱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게 해주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고난과 상처로 엎드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충만한 은혜의 해를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는데, 뜻은 ‘기름진 땅’ 혹은 ‘두 배의 창성함’입니다. 장남 ‘므낫세’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사랑으로 다루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둔 이름이었다면, 차남 ‘에브라임’은 애굽 땅에서 자신을 지키시고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현재에 초점을 둔 이름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과거의 고난을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현재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52절에서 애굽을 ‘수고한 땅’으로 표현합니다. 사실 단순히 수고한 땅 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생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고생을 딱 그 정도로만 요약합니다. 수고를 통해 성공을 이룬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수고를 드러낼 수 있을 만큼 드러내며 업적을 자랑합니다. 그 이유는 수고와 성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그것만을 위해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아지는 것을 목적삼은 적이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나, 감옥에서 죄수로 있을 때에나, 요셉은 자신과 동행하시는 주님을 신뢰했으며 하나님을 목적 삼았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된 지금도 하나님을 목적 삼고 있으며 하나님께 둔 시선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오직 번성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만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수고와 업적들이 있습니다. 주위에서 인정해 줄 때면 더 드러내고 싶고 더 높아지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그 마음이 유혹임을 분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만 드러내며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다.
애굽에 7년 흉년이 시작됨(53-55)
(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요셉의 해몽대로 칠 년간의 풍년이 그치고, 이어서 칠 년간의 흉년이 찾아오게 됩니다. 흉년이 시작되면서 작물과 땅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심각한 기근에 허덕이게 됩니다. 54절에서는 각국에 기근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칠 년간 찾아온 대기근은 애굽 땅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 전역에 대대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대기근으로 인해 수많은 자들이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채 굶주림 속에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먹을 것이 풍족한 땅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애굽이었습니다. 이는 흉년의 때를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그 말씀에 순종하여 풍년의 때에 곡식을 거두어 모은 요셉의 성실함의 결과였습니다. 풍년의 때에 흉년을 준비한 요셉과 좋은 일기만 계속되던 시대에 홍수를 준비한 노아는 모두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은 노아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판에 대비하면서도 전파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 땅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풀의 꽃과 같은 세상을 부여잡고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낙심하기보다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속적 가치관에 눈멀어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얻고 누린다 해도 주님이 부재한 죄인에게는 진정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이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대를 향해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영원한 안식은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애굽에는 양식이 있었지만, 백성의 손에 있던 것이 아닌 각 성읍 창고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바로는 식량에 대한 모든 재량권을 요셉에게 주었는데, 요셉의 해몽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더욱더 그를 신뢰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저장해 둔 곡식을 각국 백성에게 판매함(56-57)
(56-57)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요셉은 흉년을 대비하여 저장해 두었던 모든 창고를 열고 곡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백성에게만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기근으로 죽어가던 각국 백성도 양식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백성이든 주변 국가의 백성이든 오직 요셉에게 나아올 때 양식을 얻을 수 있었고 요셉에게 부여받은 곡식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흉년에 대비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과 각 나라 백성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며 영적 대기근을 겪고 있는 자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 백성이 요셉에게 찾아가지 않고는 양식을 얻을 수가 없었듯이, 영적 대기근을 겪고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요셉은 값을 받고 양식을 내어주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또한 요셉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구원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양식인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7년 간의 풍년 이후 7년 간의 대기근이 왔듯 눈 앞에 보이는 풍요로움도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잠시뿐인 안개와 같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내어줄 것처럼 유혹해도 주님이 부재한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참된 만족과 기쁨도 영원한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안식 또한 주님께 나아갈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도 주님 없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주님을 찾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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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 정결한 모습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그는 분명 끊임없이 감옥에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제가 형들께 배신당해 이렇게 애굽에 와서 노예로 생활하지 않았습니까! 제 마음이 교만하고 자랑하여 내린 벌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참아왔고 주인에게 복종하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죄를 지어 이곳에 왔다면 내 영혼이 평안하였을 것이나이다. 그러나 보소서. 나는 의를 지켰고 주인께 복종하며 올바른 마음으로 섬기다 억울하게 이곳에 왔나이다. 이제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나이다. 내 젊음은 이곳에서 썩을 것이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는 감옥의 벽을 뚫지 못한 채 다시 나에게 메아리로 울릴 뿐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감옥 안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겠습니까?
이전에 요셉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 후에 자신을 기억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 부탁은 잊힌 지 오래입니다. 이제 요셉을 기억하는 사람은 애굽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형제들도 그를 잊었을 것이며, 그를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 야곱 또한, 기억이 희미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요셉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를 주목하고 바라보시는 단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을 감옥에서 건져내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로 왕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의 해석하는 자를 찾게 하십니다. 8절입니다.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관원장에게 요셉의 이름을 기억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의 방법으로 모든 상황을 뒤바꿔 놓으십니다. 모두가 잊었을 요셉,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불가능한 곳에 길을 내시며 모든 여정을 순탄하게 만드십니다. 바로와 모든 신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그에게서 놀라운 능력을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만큼은 그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16절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이 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어렸을 적부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젊은 시절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셔서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풍요로움 가운데 요셉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남들 부러울 것 없는 가장 귀한 아들로 자랐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수저 중에서 최상급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꿈을 주십니다. 요셉이 원한 것도 아닙니다. 굳이 그러한 꿈을 꿀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미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하였고 특별하게 길렀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이라는 장자가 있었으나 야곱 가문의 사실상 장자는 요셉이었습니다. 17살의 요셉은 남부러울 것 하나 없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부지런히 일하여도 오직 요셉, 그는 놀며 지내도 괜찮았습니다. 17살의 요셉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굳이 찾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젊은 시절 요셉은 남부럽지 않은 모든 것을 갖고 있었고 미래의 풍요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존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십니까? 형제의 배신이요. 살인의 냄새 나는 구덩이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덤벼드는 형들의 눈빛에 바르르 떨었을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겁에 질려 있었을 것입니다. 형들이 달려들어 자신의 입고 있는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내동댕이치며 던져 버릴 때 요셉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형은 구덩이 위에서 형들을 위해 가져온 음식을 먹고 즐깁니다. 요셉은 구덩이에서 벌거벗겨진 채 굶주리며 그의 머리 위에서 자신을 조롱하며 어떻게 죽일 것인가 아니면 돈을 받고 팔아버릴까 논의하는 형들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제들은 은 이십에 마침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립니다. 훗날에 요셉은 하나님께서 미리 미디안 상인들을 때마침 지나가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요셉에게 있어서 난생처음으로 절박한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 처음으로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껏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던 요셉은 하나님께 울며 살려달라고 기도하느누법을 배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의 환경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편안한 침상은 사라졌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요셉의 편은 없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습니다. 오직 살기 위해 복종해야 합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구걸해야 합니다. 새로운 주인이 누가되었든지 그는 어쩌면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보다 큰 자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형들과 떨어져 귀한 대접만 무려 17년을 받아온 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다가왔겠습니까?
그동안 그의 주인은 어쩌면 그를 아끼며 사랑하던 아버지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노예로 팔려간 후에 요셉의 주인은 애굽 사람 친위대장인 보디발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지 않았다면, 만약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여전히 아버지 야곱을 의지하며 또는, 친위 대장 보디발을 의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그가 오랜 감옥 속에서 깨달은 것은 바로 하나님 밖에 의지할 자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감옥에서 이방 나라의 요셉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인의 아내를 탐하려던 더러운 범죄자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의 현재 고통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던 과정일 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손이 절대 짧지 않은 것은 알았기에 반드시 주님이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고백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또한,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그분만의 방법으로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그 연단은 주님 앞에 더욱 견고한 믿음의 승리자며 능력자로 세워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와도 주님의 결코 짧지 않으신 손을 놓지 마십시오. 인내하며 견딜 때 주님은 반드시 모든 환경을 역전시켜 놓으실 것입니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던 17세 소년, 요셉은 친형제들의 손에 팔려 낯선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시작했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받았으나 여주인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 지하 감옥에 투옥됩니다. 억울하고 괴로운 시간이 이어집니다. 투옥된 왕의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주고, 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달라는 부탁은 잊혀지고, 그의 존재도 모든 희망도 꺼져버린 듯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동행해도 요셉처럼 억울하고 괴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러했고 바울도 그러했고, 오늘 우리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고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파라오 왕이 꾼 꿈을 해석할 길이 없던 차, 불현듯 술 맡은 관원장이 지하 감방에서 만난 히브리 청년이 떠올렸고, 덕분에 요셉은 왕 앞에서 꿈을 해석할 뿐 아니라, 다가올 일들의 대비책까지 세워서 알려주었고, 바로와 고관대작들의 반응을 본문 37절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당시 모든 문화와 정치, 과학의 정점을 찍은 애굽의 지도자들에게 히브리인 노예에 불과하던 요셉의 이야기는 사리가 맞고 무릎을 칠 만큼 지혜로웠습니다. 요셉의 말에 힘이 실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38절을 보면,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본문 45절을 보면 파라오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고 지어주는데, 그 뜻은 ‘신이 말씀하시며 살아계신다’입니다. 이방인이 보아도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언어와 행동이 하나님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요셉의 존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통로였습니다.
둘째, 요셉은 주어진 환경에서 성실과 정직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에 팔려온 노예 소년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애굽 문물과 일을 익혔습니다. 억울하게 지하 감옥으로 내려간 후에도, 좌절과 분노의 시간으로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지 않고 또다시 정직과 성실로 환경을 꾸려갑니다. 왕의 술과 떡을 맡은 관원장들의 꿈을 해석해주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로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곳에서 애굽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깊고 넓게 익혔을 것입니다. 요셉 자신이 애굽 총리가 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주어진 삶의 자리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정직한 시간이 쌓여 애굽의 총리의 역할을 감당할 내공이 길러진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분에 넘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제게 어떤 자리를 주십시오.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떤 자리에 도달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정작 그 자리를 감당할 내공을 기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내공을 쌓는 일은 고단하고 괴롭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며 요행만 바라는 신앙은 그릇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담기 전에 그릇을 빚습니다. 요셉은 13년간 하나님 앞에 큰 그릇으로 빚어졌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이며, 환경을 통해 빚어집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에 요셉의 신앙고백을 담습니다. 첫째 아이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본문 51절입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장남의 이름은 ‘잊어버림’의 뜻을 지닌 므낫세입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던 17세 요셉이 첫 아들을 보기까지 20년가량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요셉의 마음에 쉽게 떠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구덩이에 자신을 던져 넣던 형들, 지하 감방에 던져 넣던 사건 등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잊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지워주셨다고 합니다. 신앙의 첫 단계는 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내셨습니다. 성도는 과거 수많은 감정적 앙금과 미처 답을 찾지 못한 숱한 일들에 주님과 함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과거와 결별하지 못해, 평생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못하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요셉이 형들의 사건과 보디발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분노와 부정적 감정이 남아 있다면 그는 대단히 파괴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과거 부정적 감정을 지워주셨습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과거와 멋진 화해와 작별을 고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에브라임’입니다. 본문 52절입니다.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번영’을 뜻하는 ‘에브라임’은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방 땅에서 두 아들을 얻으며 번영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번영은 요셉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형들과 마주한 요셉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 45장 7∼9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은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고백입니다. 성도에게 주신 번영과 은사, 작은 달란트는 그저 개인의 만족이나 자신의 가족을 돌보기 위한 도구로 그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더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17년간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온 요셉은 애굽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주어와 동사삼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아픈 과거를 잊게 하셨고, 하나님의 손길로 길을 열고 번영시키므로 요셉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교우님, 억울하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의 손길에 우리를 맡기십시다. 요셉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들을 말끔하게 지워주시고 더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도록 주님의 은사를 주십니다. 각자 은사대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십시다. 바로 왕이 요셉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했듯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는 하루 되십시다. 특히, 명절을 맞아 함께 마주한 가족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신앙의 절기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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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장의 잡 안에 있는 옥에 갇힌 요셉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자신이 꿈을 해석해 준 대로 만약 관원장이 잘 되어 복직하게 되면 자신을 옥에서 건져주기를 부탁합니다.(40:14절) 그러나 복직된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40:23절). 요셉은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소원을 무산시키시며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장면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옥 중에서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사건이 있은 지 만 2년이 지났을 때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꿉니다. 두 차례 꿈을 꾸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애굽에 7년간 풍년이 있은 후에 다시 7년 간 애굽 전역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은 모두 바로의 꿈을 해석해 내지 못했습니다. 번민하는 바로의 모습을 본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이 그제서야 요셉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9절). 술 맡은 관원장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바로는 여전히 옥살이하던 요셉을 불렀습니다(14절).
바로 앞에 선 요셉은 꿈을 해석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대답해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7년 풍년기간동안 애굽 땅의 양식을 저장한 후에 이어지는 7년 흉년동안 대비할 것을 제시합니다. 요셉은 꿈 해석 말미에 애굽 땅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주고 있습니다. 꿈의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번민하던 바로는 요셉을 통해 전해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전해 듣고 긴 안도의 숨을 내 쉬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기억할 것은 요셉이 계획하지 않고, 요셉이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옥살이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옥살이하는 요셉을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때에 요셉을 들어 사용하심으로 애굽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요셉의 삶, 전 과정이 드라마틱하지만 오늘 본문의 사건은 주인공이 드디어 단단한 모습으로 역전하는 순간입니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준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계획하지 않고, 요셉이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계획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의 시나리오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때론 지루합니다. 때론 번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의 무대에서 우리가 더욱 든든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아무 의미없이 보낸다면 기다림은 기다림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훈련의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 확실히 훈련을 받아야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 다음 경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다음 경기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은 훈련의 시간입니다. 규칙적으로 진지하게 훈련에 임할 때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되길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잠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 나오기 직전까지 꿈을 꾸신 분도 계실 겁니다. 옛날부터 꿈이 예사롭지 않으면 그것이 태몽, 길몽이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몽인 것 같다며 기분 안 좋게 하루를 보냅니다. 심지어 그 마을의 점술가나 무속인은 그 꿈에 대해 마치 예언하듯이 단정적인 투로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 년 전, 그러니까 오랜 인간의 역사에 비하면 최근이라 할 수 있겠는데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등장하면서 '꿈'을 '무의식의 세계에 속하는 인간의 또 다른 내면적인 반응현상'으로 보고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해내기 시작합니다.
꿈은 이처럼 두 가지 영역에 관한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떤 장면이 미래에 관련하여 해석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현실에 일어나지 않는 개꿈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꿈을 잘 해석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과 다니엘입니다. 이들은 꿈을 잘 해석하여 대제국의 총리에까지 오른 사람들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흘렀어도 지금부터 4천 년 전 애굽의 바로 왕이나 2천5백 년 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해괴한 꿈을 꾸고서 잠을 못 이루었던 인간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제국을 다스리는 일국의 왕으로서 가지는 정치적 중압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 추앙받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늘 영토확장에 대한 번민과 반란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살아갔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자인 바로 왕 앞에서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도 못했을 요셉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한낱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 무속 예언자이던 박수들처럼 꿈 풀이를 잘해주는 바람에 죄수에서 총리로 한 순간에 수직상승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끌려나온 요셉이 꿈을 해석하되 ‘7년 간의 풍년과 7년 간의 대흉년’에 관한 것이므로 이를 잘 대비하면 부국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결코 바로 왕의 무의식적 내면을 분석하여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의 생각에 ‘꿈’을 통해 이미지를 보여주고 요셉을 통해 해석하기 위한 의도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40장 14절에 보면,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을 때 이미 그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3일 후에 복직이 되면 꼭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40장 23절에서처럼 요셉의 은혜를 2년간이나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41장 9절에서야 그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해내게 됩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카르’인데, 사람은 불완전해서 머릿속에 생각을 까먹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셔서 요셉이 형들에게 꿈 얘기를 하던 어린시절부터 지금 감옥에 갇힌 때까지 근 30여 년의 세월을 모두 다 기억하고 계시고 배후에서 붙잡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요셉보다 더 참담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결코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인생은 언젠가 주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꿈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님을 만나게 되는데, 성경에 나오는 꿈은 매우 특별한 상황에 일어난 일들이므로 이를 주관적인 해석으로 시도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의 바른 길이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 37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당시 대제국을 경영하는 왕과 신하들 모두가 젊은 죄수의 말에 설득당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 요셉이 나이 30인데도 하루아침에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설 같은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40절 말씀입니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요셉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졸지에 총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좋은 옷과 금 목걸이, 그리고 왕궁 수레를 타고 애굽 전국을 시찰하며 다녔습니다.
게다가 요셉이 왕에게서 건네받은 인장 반지는 최종 결재권을 나타내는 반지입니다. 일단 그 반지가 부드러운 진흙 토판 문서 위에 찍혀 그 자국이 굳어지게 되면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됩니다.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남은 여생을 포기한 채 살아가던 청년 요셉이 총리가 되자마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수많은 환경들이 급격하게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늘 간수에게 잘 보여야 하고 누구에게든 허리를 굽혀 굽신거리던 인생이 이제는 먹는 것도 달라지고 요셉이 가는 곳마다 모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훌륭함은 성공한 후에 더 잘 나타났습니다. 늘 죄수들만 만났는데 이제는 왕과 신하를 비롯한 왕궁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치와 충분히 야합할 수도 있고 자기 영리를 취하기 위해 오만함을 부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성공한 후에 몰락합니다. 성공하는 것은 마치 꽃과 같습니다. 성공만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화려한 꽃에만 정신이 쏠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꽃만이 아니라 열매 맺는 인생,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다.
요셉은 즉각 애굽 온 땅을 다니며 7년간 풍년이 되는 동안 곡물을 거두어 각 성마다 곡물을 충분히 비축해두게 합니다. 그리고 뒤 이어서 찾아온 7년간의 흉년 동안 애굽 백성에게는 비축한 양식을 나눠주었으나, 타국 사람들에게는 값을 치르고 양식을 내주었으므로 애굽 나라가 부국(富國)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모습은 왕의 꿈을 해석한 후 총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다니엘과 비슷한 케이스이기도 하지만, 애굽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으면서 히브리 이름으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고 지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세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모세는 두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과 ‘엘리에셀’이라고 지으면서 자신의 인생이 철저히 나그네 인생이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인생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모세보다 훨씬 이전 선조이기도 한 요셉은 과거 가족과의 찢어지는 이별, 형들의 배신, 그리고 감옥생활 등 고통스러웠던 13년간의 세월을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게 해주셨으며 남은 인생은 더욱 풍성하게 인도해주셨다는 것을 두 아이의 이름 가운데 남김으로써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꿈이 성취되는 순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지난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게 되면서 점점 어두웠던 지난 시절에서 조금씩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이 출세하게 되면 ‘모두들 두고 보자’는 식으로 복수의 칼날을 간 것이 아니라 비록 감옥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부르셨는지를 나중에야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면서 야곱의 가족들이 이주해올 수 있었고 애굽 땅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때가 될 때까지 미숙아가 여물어지도록 커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잠든 무의식적인 뇌 속에서도 꿈의 이미지를 심기도 하시고 이를 통해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가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내다보면서 하루하루를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먼저 안다 해도 그 길을 갈 수 없음은 성숙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모습 그대로를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는 요셉처럼 자신을 버린 형들에 대한 쓰라린 감정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전히 회사 상사인 보디발에게 잘 보이는데도 일이 꼬여 애매하게 감옥생활 같은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꿈 속에서 분노나 적대감 같은 억압된 감정이 표출되고, 무의식적인 상실감과 악몽을 꾸기도 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갔어야 할 것 같은 젊은이 요셉은 그럼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나쁜 꿈은 거두어 가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대책’이 되는 꿈과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비록 13년의 삶이 하루하루 죽고 싶을 정도로 배신과 속상함의 연속이었겠지만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잊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때가 되어 꽃을 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러할 때 땀 흘리며 피눈물 흘리며 또 기다리며 이룬 성취는 쉽게 이룬 성취보다 배나 기쁘고 값지고 감격적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게 하나님께서 요셉의 과거의 인생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으심 때문이고 우리 각자의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의 인생까지도 ‘자카르’, 다 기억하시고 은혜로 베풀어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은혜가 이 새벽에 주님께 은밀히 간구하러 나아온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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