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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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근처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 준을 기다리는 동안 당시 조선일보사 모퉁이에 있던 영화관에서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감독의 〈길(La strada)〉을 보았다. 수영과 나는 좋은 영화가 개봉되면 항상 같이 극장을 찾았다. 그날은 다섯 살 된 둘째 아들 우도 함께 갔다. 영화를 잘 보고 나오는데 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대로변에서, 그것도 어린 아들 앞에서 부인을 때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시에다 우산을 두고 온 일이 아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에는 무엇이 섞여 있었을까?
그일이 있고 한참 후에야 그날, 수영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일단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수영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아니 그보다는 배우 줄이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남루한 모습을 한 채 방랑하는 야바위꾼으로 나왔던 그 영화. 상영내내 펼쳐지던 황량하리만큼 넓은 영화의 공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수영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8년 가을이었다.
- 김현경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책읽는 오두막,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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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인민군 징용...거제 반공 포로수용소 수용... 그 사이 친구와 딴살림을 차린 아내...김수영은 왜 그런 아내와 다시 결합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죽을 때까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았을까... 소위 하이데거式 사랑인가... 트라우마로 인한 병적인 집착인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의 아내.. 김현경이 지금도 그걸 시인의 사랑이라 부른다는 것... 그런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 어쨌거나 「죄와 벌」을 통해 드는 생각은... 아내 김현경에 대한 사랑을 이제 끝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과 "죽일 만큼 미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르겠다... -박제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