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9번 말씀 제목 : 본문: 행 7:37-38 (기도) ,,, 저희들에게 이 시간에도 십자가를 보여주옵소서. 십자가의 의미만이 우리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와 고통스러움을 몰아낼 수 있다, 라는 것을 하나님이 성경에서 그렇게 누누이 말씀해주셨사오니 이 시간에도 십자가만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행전 7장 37-38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아멘. 오늘도 이 생명의 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생명의 도라는 어구를 정확히 좀 번역을 하면, ‘살아 있는 도, 살아 있는 말씀’ 이란 뜻이에요. 살아 있는 말씀. 여러분 말씀이 살아 있다, 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살아 있는 말씀. 말씀이 살아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한 번 가볼까요? 1장 9절, 살전 1:9-10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아멘. 우리가, 저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했기 때문에다,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떨어져서 여러분이 진짜 그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뭔가 이렇게 변화되어지고 그 말씀이 여러분을 어떻게 분해하고 해체하고, 사도바울이 그러죠? 감찰한다고 그러죠? 말씀이? 감찰한다는 말씀은 이렇게 판단하고 분별해낸다는 뜻이거든요. 근데 여러분의 잘잘못을 그 말씀이 그렇게, 말씀에 의해서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이고 이게 정말 그른 것이구나, 라는 것을 그런 영향을 정말 말씀을 통하여 받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생기고 땅아 솟아라, 그러면 바다에서 땅이 올라와 물과 뭍이 갈라지고 하는, 이런 어떤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게 말씀이거든요. 근데 그 말씀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주어져있어요. 네? 하나님의 말씀이 이거잖아요, 그죠? 근데 이 말씀을 여러분이 듣고 공부하고 읽으실 때에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그런 영향을 정말 주세요? 여러분 안에 창조를 하십니까? 창조가 일어나야 된다, 라는 건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새 창조가, 살아 있는 말씀, 히브리서 4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골수를 쪼개고 기존에 있던 어떤 것들을 폭파하고 분해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리고는 새롭게 창조를 한다고 하는데 그럼 말씀이 들어와서 일차적으로 뭔가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의 전제가 뭐에요? 기존에 있는 것이 해체돼야 된다는 거죠? 쪼개지고 부서져야 된다는 뜻이에요, 말씀이 들어오면은. 근데 말씀이 들어가서 여러분을 그냥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기쁘게 해주고 감동을 주고 하는 그런 일만 하고 있다면 그게 잘 말씀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아니에요, 일차적으로 새 창조가 일어난다면 기존의 건축물이 부서져야 돼요. 근데 그 부수어지는 게 얼마나 아픈지 사도바울이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서신서 전체에서 하나님이 나를 마치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처럼 취급하신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리고 나를 마치 포로들 행렬에 그 맨 미말에 둔 자처럼 나를 그렇게 살게 하신다, 그래요. 그게 적국에 가서 승전을 한 다음에 이제 승전가를 부르면서 개선행진을 할 때 맨 마지막에 적국의 포로들 중에서도 그 왕가, 왕족이라든지 벼슬아치들을 발가벗겨서 질질질질 끌고 오는 게 개선행렬 맨 마지막에 있는 거거든요. 이게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였다고 해요.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은요 자기보다 굉장히 잘나고 멋진 사람들이 아주 저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을 굉장히 즐깁니다. 그거 구경거리로 알아요. 그래서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뭐 재벌기업 회장들이 자살하고 그러면요 속으로 사람들이 굉장히 기뻐한다, 그래요. 사람들이 이렇게 악해요, 여러분. 나보다 더 많은 걸 소유했었고 나보다 더 훌륭한 평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사람들이 구경하길 좋아한다는 거죠. 사도바울이 자기가 그런 구경거리가 된 것처럼 너무너무 고통스러웠다는 거예요. 어떤 삶이?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아서 사도로 살았던 삶이. 그냥 영광스럽지만은 않았다니까요. 막 늘 행복하고 기쁘고 이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의, 온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경거리가 되고 너무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이 진짜 나를 죽일라고 합니까? 이렇게 외쳤을 정도란 말에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건 고통스러운데 그걸 덮어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은혜 때문에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거지 그게 없었던 게 아니란 말에요. 소망으로 그냥 견뎌낸 거예요. 살아낸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오죽하면은 야, 내가 여기서 사는 것보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게 훨씬 좋으나! 그래요, 네? 훨씬 좋으나. 그 말은 죽고 싶단 뜻이에요. 아, 너무 죽고 싶다, 정말. 너무 죽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기에 살아있을 뿐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세요. 사도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도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은 그 이후에 해체작업에 들어가요. 그래서 하나님이 수시로 감옥에 처넣고 수시로 팹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그런 일들이 절대 일어날 수 없어요. 그 똑똑하고 그 착하게 살았던 사도바울의 그 스스로 착하게 살았던 그 자기 의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자기 머리로 가득 채우고 있는 지식들을 하나님이 두들겨패서 몰아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어떤 고백을 받아내시느냐 하면 내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모든 이 세상적 지식들은 다 배설물이다, 라고 고백을 하게끔 그렇게 만들어내는 거죠. 그러니까 그동안에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그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을 한 이후에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그리고 왔다가 다시 가시고 이제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지금 기다리고 계시는 거거든요. 뭘 기다리고 계시느냐 하면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만들어놓은 것들이 얼마나 인간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인지를 깨달으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성도의 삶 속에서 말씀이 계속 지금 일을 하시면서 어떤 일을 하시느냐 하면 그런 것들이 무용하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아주 훌륭한 지성인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의 철학이나 아니면 뭐 과학적인 근거, 전제 이런 것들을 막 들어서, 그리고 다른 종교의 교리 그런 것들을, 지식들을 막 합쳐서 오히려 이 교리와 신학을, 기독교 교리와 신학을 엉뚱한 것으로 이제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기독교 교리와 신학도 요만큼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그런 선에 대한 추구라든지 이런 것도 요만큼 있고 과학적인 내용도 요만큼 있고. 그리고 예수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십자가도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다른 게 덕지덕지 이렇게 붙어 있는 거죠. 그때에 하나님이, 구약에 보면 너희들이 나를 버렸다,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을 버린 게 아니라 거기에다가 뭘 이렇게 보태서 그래서 그걸 하나님처럼 섬기는 거. 그리고 바알이라는 이름이요, 원래 그 가나안의 풍요의 신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부로 못 불렀잖아요? 그 여호와라는 이름도 그게 정확한 발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도 그들이 안 불러갖고 이걸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 그들이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도 이걸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도나이를 거기에다가 자음을 붙여가지고 여호와 이렇게 부르는 건데. 그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아도나이 혹은 바알, 이렇게 불렀었어요, 하나님을. 그건 가나안의 이방의 신으로써의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냥 바알이라고 불렀다고요. 가나안에 그런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그런데 거기에다가 이렇게 무엇으로 부르던 자기네들은 괜찮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만 섬기면 되니까. 그런데 그 바알이라는 이름에다가 이 세상의 축복과 풍요를 허락하는 바알의 개념이라는 게 들어오니까 그들의 하나님이 진짜 가나안의 바알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갖고 나중엔 하나님이, 그래놓고 인제 이걸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다 자꾸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니 무슨 소리냐? 니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이게 아닌데 왜 자꾸 이걸 하나님이라 그래? 근데 이스라엘은 박박 우기는 거예요. 아니에요, 우린 하나님을 믿어요. 그러면 한번 만들어봐, 그랬더니 송아지를 딱 만들어낸 거예요. 하나님이 거기서 폭로시키는 거예요. 거봐, 이게 나냐? 니네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랬잖아요? 송아지 만들어놓고 이가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낸 하나님이다! 그랬단 말에요. 그런데 만들어놓은 건 바알이잖아요? 송아지가 풍요의 신이니까. 그렇게 인간들이 이 순수한 복음에다가 뭘 자꾸 이렇게 붙이기 시작하면요 그러면은 엉뚱한 이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가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자꾸 뭐 순수한 의미에서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제가 예전에 만난 그 사람들, 그 킹 제임스 버전만 성경이라고 나머지는 다 마귀의 성경이라고 하면서 막 그냥 저한테 간증을 했던, 그 중에 미국사람도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 하나님이 예수님 시대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선택해서 당신의 말씀을 계시했는데 지금은 지게 영어를 택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킹 제임스, 제임스 왕 시대 때부터는 이제 영어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언어가 되어서 이제 다른 헬라어 히브리어 그런 사본들, 원어성경은 다 쓰레기가 된 거고 그 이후버터 킹 제임스 버전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수하고 있다고 얘길 하더라공료. 킹 제임스 버전이 좋은 성경 번역본 중에 하나는 맞잖아요? 저도 설교준비를 할 때 성경번역본들을 이렇게 책상에다가 쫙 일곱 권을 펴거든요. 그 중에 하나, 킹 제임스 버전 저도 씁니다. 그렇지만 킹 제임스 버전이 잘못 오역된 것도 많고. 그러니까, 여러분이 설교 들어보셔서 아시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어떤 단어 하나에 무슨 뭐 어떤 따로 떨어진 개념하나에 중요성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전체 문맥 속에서 예수로 끌어내어지면 되는 거거든요. 근데 뭐 그 단어 몇 개 가지고 말이죠 뭐 그냥 야, 이 킹 제임스 버전만 그거 너무 우매한, 성경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너무 그러다보니까 이분들이 그걸 갖다 또 문자적으로, 막 이것만 진짜라고 문자적으로 파다보니까 거기서 또 엉뚱한 이야기들이 막 나와 가지고 그냥, 왜냐하면은 이게 진짜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의 오류를 자꾸 잡아내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보면은 굉장히 공부는 많이 하고 열심을 부렸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요. 거기에서 빠져나온 친구들이 그 (?). 처음에는 절 만나갖고 얼마나, 예전에 몇 년 전에, 한 육칠 년 전에. 뭐 한 열댓 명이 저를 둘러싸고서 막 이 킹 제임스만 갖고 설교해야지 목사님 같은 분이 다른 성경을 갖고 설교하시면 안 된다고 얼마나 막 그랬는지. 그런데 너무들 똑똑해요, 다. 그런데 이제 설교를 듣다보니까 어, 아니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풀려야 성경이구나! 그래서 시은성경, 표준새번역 성경, 현재인의 성경, 심지어는 공동번역 성경 다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원어성경도 다 필요하고. 왜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은요 문자에 갇히지를 않아요. 살아 있다니까요. 근데 왜 몇 가지 문자가 틀렸다고 또 다르다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려고 해요? 성경번역본 안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그 자체가 살아 있어요. 목사의 입으로 나왔을 때가 아니라 자체가 살아서 지금 당신의 백성들을 이 말씀이 찾아다닌다니까요. 찾아다니는데 성도가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확 들어가기도 하고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그 목사의 말을 통하여 들어가기도 하고 하는 것이지 이 말씀 자체가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요. 시편에 그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모든 것을 창조한다고 해요. 말씀이 살아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입으로 나가서 결코 아무 소득 없이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거예요. 그리고 그 소중함을 너무 몰라요. 어제도 우리 그 여러분 하고 이제 회의를 하는데 아 우리 교회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누구를, 누가 교회에 온다고 그러면 그 집 주의에 어떤 딴 교회를 소개시켜주고 거기 가라고 그런다고,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저도 어떤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아요. 설교를 이십 번에서 오십 번을 들어야 된다는 그런 개념, 어떻게? 아니 설교를 어떻게 이 바쁜 이민생활을 하면서 한 설교를 어떻게 이십 번을 들어요? 그것도 짧지도 않은 한 시간 반짜리 그런 설교를? ㅎ. 그렇게 해서까지 이해를 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설교를 해야 되느냐? 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어렵습니까? 진짜? 제 설교가 그렇게 어려워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온다는 사람들, 아, 당신은 와도 견디질 못해. 그러니까 오지 말고 딴 교회에 가. 이럴 정도로 어려워요? 그러면 정말 저는 고만하고 싶어요. 그냥 사람들이 한번 들어서 뭐 다 이해받을 수 있고 격려 받을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한다면 서머나 교회에서도 굳이 그런 설교를 해야 한다면 제가 굳이 여기에 있을 이유를 못 느끼는 거죠. 저 큰 교회에서 청빙 왔을 때 차라리 그런 데에 가죠.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존 파이퍼처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뭐 차라리 전하지 뭐 하러 이 (?)데에, 복작복작한 데에 여기서서 뭘 똑같은 그런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그건, 그런 말씀은 서머나 교회만 이해를 할 수 있다, 라는 마음 때문에 어디에서 오라고 해도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당신들은 내가 가서 하는 설교를 절대 들을 수가 없어. 인내심을 갖고 들을 수가 없어, 라는, 나는 여기에서만 설교할 수 있어, 라는 마음을 갖고 이렇게 남아 있었는데 너무 어려워갖고 열 번씩 스무 번씩 들어야 된다고. ㅎ. 아, 저는 그게 이해가 안 가요. 뭐가? 어떤 게 어렵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어려울까봐 근거 구절들 다 대드려. 그리고 그거 근거 구절들이 어려울까봐 거기에 대해서 또 설명해. 그러느라고 계속 길어지기는 하지만. 그동안 잘못 전해지고 잘못 이해되어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하나라도 더 많이 설명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 몇 구절을 이해시켜드리기 위해서 그 시간을 할애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신학생들이나 들어야 되는 그런 설교를 교인들한테 한다고? 신학생들과 교인들은 뭐가 달라야 되는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여러분은 스스로를 그렇게 폄하하십니까? 신학생과 여러분은 달라야 돼요? 신학생, 이제 스무 살, 스물한 살 먹은 그 애들과 수십 년 신앙생활하신 여러분이 달라야 돼요? 스스로 그렇게 왜 본인들을 자꾸 끌어내리시냐고?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는 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아요. 증인으로 부름을 받는다는 건 언제든지 그 하나님을 올바로 설명할 수 있어야 된다는 뜻이고. 그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내어 예수는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 거, 그게 성도거든요. 근데 신학생들을 이제 목사가 될 사람들이니까 어려운 거 들어도 되고 일반 성도는 그냥 쉬운 얘기만 들어야 되는 거예요? 복 받고 잘사는 방법 뭐 이런 거? 아니에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셔야 돼요. 그리고 아예 딱 앉으실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이 주제를 머릿속에서 놓치지 않고 쭉 따라오면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게 내 안에 쌓이게 돼요. 저는 제가 설교를 하고 편집을 하기 위해서 또 한 번 듣거든요. 바로 고날 들어요. 설교를 할 때는 전해야 된다는 그런 압박감이 있기 때문에 막 저도 흥분해서 전하다가 그 말씀을 제가 다시 들으면서 너무너무 행복해합니다. 준비하면서 수십 시간 쓰고 설교 하면서 몇 시간 또 쓰고 다시 그거 들으면서 몇 시간을 감격하며 들어요. 그냥 구구절절이 은혜와 십자가. 그게 성경이니까. 그래서 그걸 들으면서 야, 정말 이런 감동이 이걸 듣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그걸 듣고 세계 각지에서 몇 명 안 되지만 메일 해주고. 아, 내가 살아났어요. 이게 그런 말씀이었군요? 그럼 또 어떻게 해야 되나요? 내가 믿은 건 어떻게 되나요? 어제도 멕시코에서 선교하시는 그 선교사님과 사모님이 이메일을 해주셨는데, 멕시코에서 누가, 원주민 사역을 하시는 분인데 누가 씨디를 줘서 이렇게 듣다보니까 그럼 내가 여태까지 이 선교를 하면서 여기에서 전한 게 뭔가? 이렇게 망치로 한 대 꽝 맞은 기분이었다. 근데 그 사모님이 그래요. 그래도 목사님 인제부터는 이 불쌍한 원주민들에게 사기 치지 않고 올바른 걸 가르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우리 부부가 먼저 살아났고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이 원주민들이 우리와 같은 똑같은 감동으로 살아날 차례입니다. 그래서 그냥 감사해서 위로의 격려의 말씀, 한 마디 드리려고 메일 했다고, 메일이 왔는데. 여러분 거기에서 그분들이요 원주민들에게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전해지는 설교를 그대로 얘기 하신다는데 예수에 대해서 전혀 알아듣지 못한 아주 그냥 일자무식인 그런 원주민들도 그 말씀을 듣고 그냥 깜짝깜짝 놀래서 그런 하나님이 계셨냐? 이러고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같은 나라 말로 오리지날이 여기서 전하고 있는데 ㅎㅎ 회의를 한다는 사람들이 아, 우리 교회, 사람을 전도를 못할 정도로. ㅎ. 그럼 제가? 어제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큰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구나? 서머나 교회를 위해 내가 떠나야 되는 거 아닌가? 이거 부흥시키기 위해서? ㅎㅎ. 이런 생각이 다 들었어요. 어, 나 때문에 부흥이 안 되는 거구나? 전도를 못한다니 이게, 어쩌면 좋은가? 참, 여러분 말씀은 제가 전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그 살아 있는 말씀에 의해 공격을 당해 그 말씀이 저를 먼저 해체시키고 해제시키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요동이 치다가 이게 갇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게 설교에요. 근데 그걸 들으면서 아, 못 알아들어. 저걸 다 어떻게 이해하나? 내가 그동안 배웠던 것도 맞고 저것도 한 종류일 뿐이지 뭐, 이런,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드냐고요? 와르르 그동안에 기반으로 쌓았던 것들이 무너져야 되고 새 창조가 일어나야 되죠, 내 안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그냥 막 내 안의 골수를 쪼개는 고통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있어야 돼요. 아, 성경은 분명히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 그랬는데. 쪼개면 얼마나 아파요, 그게? 생 뼈를 쪼갠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걸 피부를 찢어서 생 뼈를 쪼갠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건 그냥 상징적인 언어가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은 진짜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의 옛 자아를 이렇게 쪼개버리는데 쪼개면 아파야죠. 눈물이 나와야 돼요. 심지어 그 말씀이 떨어지는 그곳이 막 원망스러워야 돼요. 그리고 그 자기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해버리는 그 말씀과 그걸 전하는 목사가 막 미워질 정도로. 왜냐면, 바리새인들이 달래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라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열심 있는 종교행위와 착한 일로 막 가리고 잘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더니 자꾸 독사의 새끼라 그러고 너희들은 죄인이라고 그러고 그걸 자꾸 밝혀내니까 이걸 못 참고 죽인 거잖아요? 근데 그렇게 예수님을 죽인 한 무리가 있는 반면 베드로 같이 역시 똑같이 발가벗겨졌잖아요? 마지막까지 정말. 쟤는 요? 거기까지 발가벗겨졌는데 그 상태에서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저는 면목 없지만 저 덮어주세요, 그게 사랑이잖아요? 그 사랑 안에 들어 있는 저, 그거 하나님 사랑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가는 무리가 생기는 거예요. 아픈데. 베드로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나는 당신을 목숨 걸고 쫓아갈 거라고 그렇게 그냥 다짐을 해놓고, 자기를 믿었단 말이에요. 근데 곰방 예수님이 뒤를 돌아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데 그 예수님에게 쌍욕을 하면서 부인, 난 저 사람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기의 모습이 발각되었을 때에 얼마나 아팠겠냐고요? 그게. 성도에게 그거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픈 게 어디 있어요? 내 자신이 그 실체가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거보다 아픈 게 어디 있냐고? 근데, 아 나는 이런 존잰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덮은 거구나? 성경은 전체가 그 이야기에요. 제가 이번 사사기 강해를 하기 위해서, 사사기가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니까. 여호수아서부터 이제 끌고 들어가서 사사기를 설명하려고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전쟁부터제가 한번 하나하나 짚어서 읽어봤어요. 어, 저는 또 깜짝 놀랬어요. 여호수아서 안에도 예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름도 예수에요, 여호수아서의 이름은 예수. 여호수아하고 예수가 같은 이름이니까. 여리고성, 아이성, 다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고 안에다가 딱 그려 넣었더니 여리고성 아이성, 아이성의 왕의 죽음 이게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짝 달라붙어요. 그래, 이런, 이런 감격적인 것을. ㅎㅎ. 그래서 제가 어제, 무지하게 스트레스 받아서 한 삼일을 못 잤거든요. 공부하느라고 못 잔 게 아니라 뭔가를 하나 이렇게 설명,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이건 무엇이다, 를 먼저 잘 설명을 해줘야 되잖아요? 그거 이후에 사건 화된 에피소드는 설교하기 그리 어렵지 않거든요.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설교를 할까, 이걸? 그냥 맨 삼손이야기만 알고 있으니, 이 사사기 하면은. ㅎㅎ. 기드온의 이야기나, 삼백의 용사가 되자~! 삼손처럼, 뭐 이러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근데 그렇게 해서 탁 뭔가가 발견되었을 때 얼마나 이렇게 행복하고, 아,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거든요. 근데 그렇게 해서 Exciting하게 막 올라왔는데 축구 본다고 텅 비어 있어. ㅎ. 그나마 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축구 시간이 몇 시지? ㅎ, 시계를 막 보면서 아, 그 시간까지는 가야 되는데, ㅎㅎ. 이러고 있으니까. 그러면요 제가 위축이 돼요, 설교를 하다가도. 에이 나만 알고 말지 뭐. 얘기해줘도 못 알아듣는 거 뭐 계속 얘기해? 뭐 이런 생각이 자꾸 든다니까요. 그냥 이렇게 설교를 하면, 강해를 하면 그래요. 학생들 중에 뭔가 이렇게 배우고 싶고 열정이 있는 자들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깊숙이 이렇게 들여서 앉지를 못해요. 의자 앞으로 바짝 당겨서 강의를 하는 사람의 눈을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만큼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때때로 이제 외부에 집회하면 고런 갈급한 사람들, 인터넷 교인들 보면은 맨날 앞에 쫙 앉아요, 그 사람들이 다. 쫙 앉아갖고 곧 튕겨져 나올 거 같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곧 튕겨져 나올 것처럼. 그러면요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또 익싸이팅하고. 화장실까지 쫓아오면서 질문을 하고 이런. 근데 그냥 철퍼덕 앉아가지고 ㅎㅎ. 시계만 계속 보고 앉아 있고 그러면. 내가 꼭 이분들한테 설교를 여기서 해야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다른 거, 그러니까 일상의 삶을 불성실하게 살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열심히 사세요, 최선을 다해서 살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선포되어지는 곳에서는 좀 열정을 갖고 그러고 자꾸 오셔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내 안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 막 기대 속에서 아, 오늘 들은 이 말씀이, 오늘 내가 이해한 이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일을 하나? 어떻게 지금 새 창조가 지금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나? 이걸 막 확인하는 이런, 그거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세상은 다 헛것예요, 여러분. 이렇게 밝은 태양이 비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태양을 언젠가 없애버리신다고 그랬죠? 빛이 있는데 그건 태양빛 아니다. 그 말은 태양빛 없어진다는 뜻이거든요. 이렇게 태양이 우리를 미혹하고 있지만 실체인 것처럼 미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 사라지는 거예요. 하물며 저 태양이 사라질 건데 우리 눈에 보이는 태양빛이 없으면 색깔이 없어지고요. 색깔이라는 것 자체가 태양빛이 반사되는 거거든요. 근데 색깔이 없는 곳에 온통 흑백인 곳에 매력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실체를 자꾸 말씀 속에서 봐야 되는데 그냥 언젠가 사라질 이 화려한 매력들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인색하고 은퇴 뒤의 삶을 준비하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수준을 놓을 수가 없으니까 거기에서 그냥 덜덜 떨고 이런 거죠. 그런 건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고 했잖아요. 아, 그런 면에서 정말 한국 같은 데, 여기는 좀 위험하니까. 전 가끔 한번 여기서도 가보지만. South central, 홈리스들 자고 데에 한 두어 번 가봤거든요. 실지로 두 번 같이 자고 왔는데. 한국 같은 데 서울역 아래에 그 해만지면 모여드는 홈리스들 있죠? 노숙자들. 여러분 고속에서도 행복이 있어요. 때로는 그런 자유 좀 만끽을 하고 싶어요, 저는. 그런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서 그냥 하루 두끼 먹고 그렇게 잠깐이라도 잠들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 있으므로 인해 감사하는 그런, 그런 삶들을 가끔 좀 보셔야 돼요. 너무 위만 보시니까 지금 내 수준이 늘 불행해 보이는 거예요, 이게. 아니라고요, 그거. 그런 거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다 이렇게 불행하고 두려운 거예요. 뭘 불행하고 두려워요, 여러분? 여기 미국 땅에서 뭘 한들 뭐 못살겠어요? 다 차 굴리고 따듯한 물로 샤워하면서 잘 살면서 괜히 딴 사람들 비교해갖고 그냥 나는 못사는 거야, 못사는 거야. 스스로 자기 최면 걸어가지고 말이죠. 어 내가 이 상황에서 이 나이에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이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에서부터 우리의 마음을 쪼개내어 하나님께로만 집중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여러분 그럴 때에 행복해하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십쇼. 오늘 하루 저 태양을 외면하면서 한번 살아보세요. 너는 언젠가는 사라질 거야. 내가 니가 주는 이 매력에 절대 끌려 다닐 수 없어. 네? 여러분은 다스리는 존재들이지 절대로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에요. 여러분 자연에 의해 지금은 자연이 뭐 철을 바꾸고 이러면 얘가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그죠? 이렇게 해가 쨍쨍 쬐버리면 우리한테 벗어, 하고 요구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반팔로 이렇게 벗잖아요. 그렇게 지금은 질질 끌려 다니지만 우리의 실체는 아니다, 라는 거. 언젠가는 내가 너를 심판할 거다, 라는 이런 당당함으로 가끔 털 쉐타도 입고 다니고 ㅎㅎ 그러세요. 미친 사람처럼. ㅎㅎ. 아이 그런 좀 변태기가 있어야 돼요, 성도들은. 왜 세상에게 왜 치리를 당하냐고요, 자꾸? ㅎ.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살아서 운동력 있는 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두려웁겠습니까? 그리고 나를 그렇게 지키는, 살아서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수시로 떨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말씀이, 말씀 떨어지는 곳을 경홀한 마음으로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더욱 더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나를 창조해 가시는 그 말씀 앞에서 진지해지게 하옵시고 그 말씀이 우리의 해체되어지고 새롭게 부활의 몸으로 완성되어지고 있는 우리의 실체를 경험 속에서 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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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성수 목사님에 강해는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들으면 참 어려운 이야기죠 그러나 복음이 들어온 상태에서 들으면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것을 알게되지요...
복음.생명.구원.영생.믿음 모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언어들
이죠 ..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것이 성경 에 결말이죠 김성수목사도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던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