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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시험? 하나님의 시험.
1. 어느덧 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로의 꿈대로 애굽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역 전체에 일어난 대기근이었습니다(41:57). 가나안에 있던 야곱의 가정도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기묘한 방법으로 요셉의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6).
2. 하지만 열 명의 자식들을 애굽으로 보내는 야곱의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4절). 그래서 라헬의 하나 남은 자식 베냐민마저 잃을까 두려워하여 베냐민은 남겨두었습니다(4).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기근에도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 땅을 지키고 있는 믿음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을 지키기 위한, 상속자를 지키기 위한 지혜로운 결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본다면, 여전히도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야곱의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을 다그치는 모습, 다른 아들들은 보내면서도 베냐민만 감싸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3. 요셉이 해야 할 일은 가족들을 모두 애굽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태도와 그들의 신실함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섭리로 그들을 보존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그들의 신실함을 먼저 테스트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냥 오늘 하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이것은 진실함(integrity)의 테스트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감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요셉은 3일 동안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감각을 자극합니다(18). 그들은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이,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두렵게 밀려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면 죄에 대한 감각도 살아나는 법입니다. 그들은 20년 전에 일어났던 요셉의 사건을 떠올렸습니다(21~2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한 양심을 깨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서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그리고 형제에게 범죄한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5. 두 번째 테스트는 형제 사랑과 용기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인질로 감금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는 것으로 진실함을 입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곡식을 가지고 가던 형제들은 여관에서 자기들의 돈이 그대로 있음을 알고 두려워하는데 그 두려움이 베냐민을 내어주어야 하는 야곱에게는 더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살아났다는 것은 자루 속의 돈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한 말로 입증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28).
6. 베냐민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 아버지 야곱에게 르우벤은 베냐민이 자기 아들이라도 되는 양, 데리고 돌아오지 못하면 자기 두 아들의 목숨과 바꾸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37). 거의 20년 동안 조용하던 집 안에 찾아온 이 위기는 오히려 이 가정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가정으로 만들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축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세우시기 위하여 저들의 양심을 자극하시며, 죄악된 본성을 자극하시고, 영적으로 민감하도록 수많은 시험과 테스트를 하십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진실함을 입증해야 하고 신앙의 성숙과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당신은 그 테스트 가운데서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지은 죄를 떠올리게 하고, 실패한 일들을 기억하게 하고,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있는 양심을 건드실 때마다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더욱 신실하게 무릎 꿇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과 변화를 위하여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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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날들,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하루가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때때로 이전과 다른 특별한 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좋은 일이면 상관이 없는데, 좋지 않은 일일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안 좋은 일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냥 묵묵히 견딜 수도 있고, 그 일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법을 찾아 고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정말 방법이 없어 보이는 답답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의 형들이 그런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싶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의 형들은 어떻게 했는지, 왜 이런 일이 그들에게 벌어졌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과 애굽에서 벌어지는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처음과 마지막이 가나안에서의 이야기이고, 그 가운데 애굽에서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건은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시작된 흉년이 원인인데, 그동안의 모든 풍년을 잊어버릴 만큼의 극심한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흉년은 단순히 애굽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냥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던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1-2)
그래서 야곱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현재 야곱에게 몇 명의 아들이 있습니까? 열 한명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열 명의 아들만 보냅니다. 막내아들,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은 보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베냐민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큰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먼저 떠나보낸 것입니다. 요셉을 잃은 후 요셉에 대한 사랑은 베냐민에게로 이어졌는데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면 자녀 사랑이지만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편애입니다.
야곱의 편애 때문에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자녀들이 애굽으로 내려갔고,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큰 계획안에서 요셉과 형들이 만나게 됩니다.
그럼 요셉과 요셉의 형들은 얼마 만에 다시 만나는 걸까요? 야곱은 열일곱 살에 애굽으로 갔고 서른 살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의 풍년이 있었고, 흉년이 계속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45장에 보면 요셉이 지금 2년째 흉년이 지났고 앞으로 5년의 흉년이 더 남았다는 언급을 합니다. 조금 차이가 날 수 있지만, 대략 계산하면 요셉은 22년 만에 형들을 만난 것입니다. 22년 만의 이루어진 첫 만남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6)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팔고 있는 요셉에게 와서 엎드려 절하고 있습니다.
자신 앞에 엎드려 있는 형들을 보는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매정하게 노예로 팔아버렸던 형들, 그동안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형제로서 느끼는 긍휼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참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의 요셉과는 달리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요셉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형들이 보기에 요셉은 애굽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머리 모양, 그들의 복장, 그들의 말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형들에게 요셉은 모른척하고 거칠고 엄하게 쏘아붙이는데, 애굽을 엿보려고 온 정탐꾼으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곡식을 구하러 왔다가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난 형들은 당황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정탐꾼이라고 말하는데 어찌합니까? 요셉은 지금 애굽에서 바로, 다음으로 높은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에 그들 모두를 처형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요셉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불리한 입장에 놓인 형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11)
여기 ‘확실한 자’라는 말은 정직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형들은 지금 요셉 앞에서 자신을 거짓말 하지 않는 자로 소개합니다.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형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 요셉 앞에서 자신을 정직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형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관계없이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엎드려서 아니라고 하고, 설득해도 먹히지 않습니다.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요셉은 형들에게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딱 하나의 방법을 말해줍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15)
그들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하는 방법은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은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합니다. 애굽에서 바로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신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런 요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와야 한다니! 좀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마음을 한 번 떠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가지고 우기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다른 나라를 정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낸 일과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낸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극심한 흉년을 겪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위해 애굽을 오고 갔던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 이방인 무리를 정탐꾼으로 의심하는 것은 상식에 벗어나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의 말대로 정말 그들이 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집에 있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곳에 오지 않은 동생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면, 정탐꾼이 아니라는 말도 사실이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형들을 삼일 동안 감옥에 가둡니다. 삼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지난날에 대한 생각도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요셉을 노예로 판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우리가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살펴봤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죄에 대한 결과로 지금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행한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애굽 말이 아니니까 요셉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다 토해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의 말을 다 듣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셉은 지난날의 서러움이 복받쳐옵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떠나 형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웁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형들에게 돌아온 요셉은 시므온을 끌어내어 결박합니다.
이렇게 열 명 중에서 시므온은 애굽에 남겨지고 아홉 명이 각자 곡식이 담긴 자루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대략 칠일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가는 중에 여관에 들렀는데 보니 그 자루에 곡식을 사면서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돈을 내지도 않고 그냥 곡식을 가져온 꼴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들을 더욱 두렵게 만듭니다. 일이 또 잘못 꼬이면 정탐꾼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곡식을 훔쳤다는 죄목까지 추가될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28)
요셉의 형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자를 돌아보며 양심의 일깨움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동생에게 저지른 죄, 해결하지 않은 그 죄에 대한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형들은 ‘다음에 애굽으로 갈 때 베냐민을 데리고 갈 것인가?’ 라는 주제를 두고 아버지와 설전을 벌이게 되는데, 르우벤은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서 베냐민을 데려가야 함을 말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야곱이 탄식합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 야곱은 이미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이제는 베냐민까지 빼앗아가려는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대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르우벤이 야곱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한 말이지만, 그만큼 가족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 아들을 편애하고, 다른 아들들은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자기 자녀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놓습니다. 이 가정에 죄가 들어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렸고, 죄로 인해 망가진 가정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 시작되었고,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이 죽고, 베냐민만 남았는데 또 다시 베냐민을 잃는 것은 야곱에게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
야곱의 반대에 부딪힌 형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애굽에 가려면 베냐민이 꼭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애굽에 가지 않으면 시므온을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시간문제입니다. 야곱이 지금은 반대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흉년은 앞으로 5년 동안 더 지속될 것이고 곡식은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내야만 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떠나는 두 번째 여행,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형들과 요셉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괴로움을 당했던 자가 괴로움을 주는 자가 되었고, 감옥에 갇혔던 자가 감옥에 가두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총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형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요?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이렇게 대해도 괜찮은 걸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그렇더라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닐까요?
그럼 좀 더 분명하게 생각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요셉은 지금 형들에게 복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을 통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16)
요셉은 형들이 자신의 진실함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하면서 ‘시험하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요셉은 형들은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 시험을 했고, 형들이 다시 애굽을 방문했을 때 더 본질적인 두 번째 시험을 합니다.
요셉이 한 일은 형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계획된 것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결과, 형들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다루고 계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이렇게 하지 않고, 시험하는 과정 없이 형들을 보자마자 바로 용서하고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들 입장에서 요셉이 정말 자신을 용서했는지 확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할까? 불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도 형들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정말 뉘우치고 있는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결국, 이들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거나 더 발전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는 그냥 회복되고, 그냥 괜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고,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있을 때 그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모든 대가를 치르셨고, 우리가 회개함으로 돌이킬 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셉의 형들처럼 그것을 죄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심을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가운데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할 수 있고 그분의 선하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내가 당한 어려운 일이 항상 나의 죄에 대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벌하신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징계를 행하시고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는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허락하심을 알고 그분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나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할 부분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며 필요한 일입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면 그런 과정은 늘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은 일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며,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자기점검은 항상 나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잘못을 하며 실수하기도 하고 죄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잘못을 반성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저주받은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 그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작은 인도하심에서도 하나님의 세밀한 역사하심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보다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벌어지는 작은 일들, 반복 되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민감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점검하고,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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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땅이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땅 애굽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리로 가서(1-5절)
(1-5)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왜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들고 애굽은 번성할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이라고 하면 그 땅은 풍요롭고 인간이 살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은 정반대입니다. 심지어 야곱은 가나안 땅에 아들들과 잘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근을 보내셔서 그 곳을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직면하면 자기중심적인 우리 인간들은 문제가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빵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의 육이 문제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그 아들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것은 약속의 땅이란 원래 육을 입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땅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들을 약속의 땅에 살기 합당한 존재로 바꾸기 위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곡식을 좇아(6-10절)
(6-8)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은 총리로서 식량 배분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그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중심에 있습니다. 나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내가 살기 위해, 식량을 찾고 요셉을 찾은 겁니다. 이런 자들에게 요셉은 돈을 받고 식량을 팝니다. 그게 세상 이치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고 싶으면 그에 합당한 값을 치뤄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그래서 요셉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살기 위해 찾아갔던 애굽이 잃어버린 형제와의 만남의 장소로 변해야 합니다. 식량에서 관계로, 나의 배를 채우는 것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것으로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이 이렇게 통째로 바뀐 자만이 약속의 땅에 살기 합당한 자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보자마자 요셉은 그들과의 관계 회복을 계획합니다. 식량을 팔고 얼마를 받는 것에는 이제 관심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돈도 안받고 식량을 넘치게 퍼줍니다. 정당한 대가가 오가는 사이가 아닌 아무런 대가없이 생명을 퍼주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형들은 관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곡물만 사면 됩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13절에서 그들은 요셉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요셉은 없는 자입니다. 없는 자는 단순히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자가 아닙니다. 없는 자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세상의 세속적 원리와 법칙에서 자유로운 자를 뜻합니다. 없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포착될 수도, 관계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형제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요셉에게서 일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그들이 변화를 위해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의도한 변화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건 결국 나의 의가 될 뿐입니다. 진짜 변화는 내가 포착할 수도 의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살다 보니깐 변화한 겁니다. 과거를 회상해 보니 내가 달라진 겁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정탐꾼들(9-14절)
(9-11)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요셉은 이제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누명을 씌우고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게 한 후 자신이 사실 누구인지를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극적으로 밝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근거가 이전에 그가 꾼 꿈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꿈인지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마 창세기 37장에 형제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 눈앞에서 자기에게 절하는 형들을 보고 예전 꿈이 생각난 겁니다.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입니다. 꿈은 이 땅의 현실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꿈에서 밥을 먹었다고 배부른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꿈은 결국 현실이 됩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현실은 결국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하신 데로 완성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 넘기고,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만난 관원장은 요셉과의 약속도 잊었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으로 완성됐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주관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계시입니다. 주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지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장악하고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형제들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그들은 물론 정탐꾼이 아니었지만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무작정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자 형제들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은 확실한 자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여기서 확실한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켄’은 영어로는 ‘honest’ 혹은 ‘right’ 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옳고 정직한 자라고 변호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나의 존재 구축에 불리한 기억은 삭제하고 조작하여 나를 올바른 사람으로 포장합니다. 동생을 살해하려다 팔아먹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이 죽였다고 거짓말까지 한 자들이 자신을 옳고 정직한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삭제한 기억들 마저 모조리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숨겨진 기억들을 모조리 폭로하며 형제들의 실체를 까발립니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할 점은 요셉은 그들이 정탐을 해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인으로 이미 상정해 놓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진짜 죄를 폭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가끔 본인은 솔직히 세상 사람들보다는 죄인이 아닌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이들은 본인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를 죽인 죄는 잊고 그저 정탐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겁니다. 죄를 지었던 짓지 않았던 우리는 모두 예수 죽인 자들입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예수를 믿고, 나의 선행들을 통해 자기 의를 쌓는 것 자체가 은혜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증거입니다.
(12-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형제들이 자신을 정직하고 옳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요셉은 재차 그들을 죄인으로 몰아 세웁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들이 열두 형제인데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다고 하는데 마치 요셉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이려고 하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팔아 넘겼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거짓말을 하고 기억을 조작해서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포장합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너희의 그 말이 바로 너희가 정탐꾼인 이유라고 합니다. 정탐꾼은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속이고 적에게 잠입하여 내 나라를 위해 거짓말 하는 자들입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조작된 기억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속이고 거짓말로 자신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국가란 결국 나의 연장선이기에 나의 나라를 위해 거짓말 하는 정탐꾼들이나 나의 의를 구축하기 위해 거짓말 하는 요셉의 형제들이나 본질적으로 같다는 겁니다.
베냐민이 오지 아니하면(15-17절)
(15-17)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요셉은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베냐민이 라헬의 아들인 것을 알고 그랬는지는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창세기43장 29절에서 베냐민을 보고 한눈에 자기 어머니의 아들임을 알아본 것으로 보아 친동생을 만나기 위해 형제들에게 그러한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동생 베냐민이 자신처럼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하루빨리 그를 자신의 보호 아래로 데려오려고 했는 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던 그렇게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려와야만 정직한 자임을 인정받고 식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 없는 한 형제를 통해 다른 원수된 형제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생명의 주관자요 잃어버린 형제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이 명령은 야곱 집안에 감춰져 있던 죄악을 드러냅니다.
야곱은 자신이 베냐민을 품고 지키려고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베냐민은 형제들과 애굽으로 가지 않았는데 그것은 요셉처럼 베냐민 마저 죽임을 당할까 야곱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베냐민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대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지켜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은 야곱에게 아무리 본인 힘으로 아들을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베냐민 뿐만 아니라 요셉도 사실 하나님이 지키셨음을, 그간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계시를 이루기 위한 섭리였음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의 요구는 형제들의 죄 또한 폭로했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또 다시 라헬의 아들을 야곱과 떨어뜨려야 하는 고충을 겪으면서 과거에 자신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던 일을 되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 그들의 죄를 먼저 폭로합니다. 그건 곡식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죄가 폭로 당하여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 죽지 않으면 관계 중심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는 겁니다. 가둠없는 자유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 앞에 오셨습니까? 빵을 먹기 위함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를 위함입니까? 기적을 원하기 때문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사모해서입니까? 주님 앞에 빵만 좇던 우리의 마음이 낱낱이 드러나, 우리의 옛 자아가 철저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눈을 돌리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형제들을 십수 년만에 만나게 해 준 것은 흉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요셉이 예측했던 대로 7년 대흉년은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주위의 모든 나라에 심한 가뭄이 닥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식을 찾아서 애굽으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행렬에 야곱의 열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형들을 계속적으로 심문하면서 지금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 내고자 합니다.
생명을 보전하는 요셉(18-20)
(18-20)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18절에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에서 ‘경외’는 ‘두려워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는 보통 두 가지가 있는데, 본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단어는 파멸될까 두려워하는 공포심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닌, 경건생활과 관련 있는 ‘섬기다’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20절에서는 요셉이 과거에 자신을 구덩이에 던져 굶어 죽게 하려다가 결국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형제들에 대해 오히려 자비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이 굶주릴 것을 염려하여 곡식을 가지고 가라고 배려하는 것을 볼 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인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며 형들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습니다. 18절 이전까지만 해도 요셉은 바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고 말하여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하며 절망스럽게 느끼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을 형제들이 듣고 불안한 마음이 줄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지혜롭게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한 요셉의 언급은 바꿔 말하면 당신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겁낼 것 없다‘고 말한 뜻과 같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오래 붙들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서 그들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먼저 한 형제만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아홉은 뒤에 남아 애굽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고 16절에서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제안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바꾸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중에 한 형제만 애굽에 붙들려 있어야 하고 다른 아홉은 가나안에 돌아가게 합니다.
이렇게 요셉이 행동한 이유를 아홉 명의 아들들의 설득이 야곱으로부터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도록 더 잘 설득시킬 수 있다고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어떻게 한 아들이 가나안의 굶주린 가정에 충분한 곡식을 가지고 갈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홉 형제들이 곡식을 가지고 가면 더 많은 곡식을 가져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요셉은 한명만을 붙잡아 두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요셉은 자신을 잃었다고 많이 아파하셨을 야곱을 생각하여, 너무 많은 형제들을 애굽 땅에 묶어두면, 이는 야곱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요셉은 지금 형제들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18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명을 보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지금 형제들을 대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형제들(21-23)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참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21절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습니다. 이 단어를 넣어서 직역을 해보면 ’우리는 참으로 죄를 범한 자들이다‘ 라고 번역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가슴속에 품었던 아주 짙은 회한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범죄하였도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이 사악함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죄로 임하는 결과가 엄청난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요구대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오려 하면 요셉이 없어지고 난 후에 베냐민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하는 아버지 야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하고, 요셉의 요구를 무시하면 이 약속의 담보로 남게 될 형제 중 한 사람의 안전을 보장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민을 통해 과거 자신들이 동생 요셉을 핍박했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죄가 생각나 그들은 더욱 극한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그들은 모두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마치 요셉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동생이 미워서 그를 팔아 넘겼지만, 그들에게도 양심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20여 년의 세월이 결코 마음 편한 시간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조마조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순간 ‘이제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죄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받는 피해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많은 경우 죄는 가해자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아무리 창세기의 앞장들을 되 집어 보아도 르우벤이 본 절과 같이 말을 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두 번에 걸쳐 요셉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동생들의 행동을 제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37장21절에서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라는 말이었고, 또 한 번은 창세기 37장 22절의 ‘피를 흘리지 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번의 말을 종합해 보면 르우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는 것은 허용하였고 단지 요셉을 죽이는 일만 막으려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형제들이 요셉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 자체를 없애거나 요셉에게 해를 가하려는 행동 자체를 단호하게 말리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은 동생들에게 죄 자체를 만류하였다는 느낌을 주는 본문의 말을 할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때 르우벤이 동생들의 요셉을 죽이려 하는 생각 자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요셉에 대한 다른 어떤 제재를 가하는 것이나 시기심조차도 엄히 꾸짖었다면 과거 요셉이 당했던 고난은 물론 지금 그들에게 닥친 고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도 이일에 대해서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동생들을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꾸짖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동생들의 잘못만 지적하는 자기 위주의 말만을 뱉어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형제들은 요셉이 있는 곳에서 이 모든 고백을 하지만, 요셉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기들 앞에 있는 ‘애굽인’ 관료가 두 언어를 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본 절에 나타난 이런 행동을 통해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형제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려고 했던 것입니다. 21절부터 23절까지 각 절마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들었다’라는 동사인데, 형제들의 반응과 요셉의 반응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21절과 22절에는 형제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으나 듣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긴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했지만, 23절에서 요셉은 ‘듣지 아니하는 것 같았으나 다 들었다’라고 상황적 대조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동생의 간절한 요청을 듣지 않고 외면해 버린 형제의 모습과 복수를 할 수 있고 받은 대로 돌려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요셉이었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는 대조적 모습에서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나는 지금 르우벤처럼 내가 만든 죄의 모습과 죄의 결과들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요셉의 모습처럼 어렵고 힘들지만, 상대방의 과오와 죄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요셉(24-25)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요셉은 과거에 자신을 팔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르우벤이 동생들을 책망하자 그의 마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다른 장소로 옮겨 울 수밖에 없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20여년 만에 형제들을 대하였고 뿐만 아니라 지난 세월에서 밀려오는 회한으로 인해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냉정을 되찾은 요셉은 시므온을 형제들에게서 분리해 형제들 앞에서 그를 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정확히 요셉이 시므온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시므온이 형제들을 선동해서 요셉을 박해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디나의 강간 사건에서 나타난 시므온의 잔인함 때문에, 야곱이 나중에 시므온의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아들들이 잡혀 있는 것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들도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은 자기 종에게 형들의 자루에 곡식을 채우고 여행하는데 필요한 음식도 주라고 명령하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각 사람의 자루에 곡식을 사려고 가져온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요셉은 또한 자신의 형제들이 각자의 식구들을 위해 집으로 가져갈 양식 외에 여행 중에 그들이 먹을 음식까지 준비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렸던 요셉의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이 자신의 목숨보다 돈을 높이 평가한 때를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겨우 은 이십의 값어치로 팔려가며 혹독한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어떤 불이익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오늘 본문에 펼쳐진 장면들은 요셉이 형들을 징벌하는 장면으로 묘사한다고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형제들이 저지른 일에 비교하면, 요셉은 그 어떤 장면에서도 형제들을 골탕먹이거나, 그들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형제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직면하도록 하여, 그들의 잘못을 되 집어 보게 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조치도 없었습니다.
본문은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행하기 참 어려운 용서와 사랑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던 형제들을 용서해 나가는 요셉의 모습과 함께, 지난 날들의 과오와 죄를 고백하며 아파하던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들을 묘사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근본에서는 본문에서 드러낸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르우벤의 모습이 만연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전가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도 기억하지 못했던 르우벤의 모습은 그 어떤 사람의 모습이 아닌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오래전 교회를 떠나던 한 학생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지만, 그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악의적으로 죄악을 있는 힘껏 뻔뻔하게 가리려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없어 교회를 떠난다’라고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당시, 저는 다른 사람이 생각이 나지 않고, 나의 모습은 어떤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셀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용서를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나는 지금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받아야 하는 회개와 용서의 권리로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고민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지만, 회개하며 자기 부인을 이루며, 변화하려고 하는 기회로 여기며 감격하며 살아가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십시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복된 하루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26-28)
사방에서 유일하게 곡식을 구할 수 있었던 애굽으로 간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정탐꾼으로 몰려 호된 고초를 치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불러오기 위해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나머지 형들은 되돌려 보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많은 곡식을 주었고, 가는 길에 먹을 양식도 따로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들 몰래 그들이 가져왔던 모든 돈들도 곡식 자루에 담아주었습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형들이 길을 가다가 하룻밤을 묵으려고 여관에 들어갔을 때 자루에 돈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26-28)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요셉을 팔아넘겼던 돈을 받고 좋아했던 형들이 지금은 요셉이 준 돈을 받고 깊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들의 단말마적 외침,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이 말에 그들의 깊은 당혹감이 묻어납니다. 요셉은 지금 22년 전 사건을 그대로 재연하는 중입니다. 한 형제, 곧 시므온을 애굽의 감옥에 남겨둔 채, 나머지 형제들이 돈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게 한 것은, 자신을 팔고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갔던 사건의 재연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로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만들려고 하시는 듯합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까 요셉의 형들이 하나님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형들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이 언급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소름 끼치도록 두려움이 엄습하자 그들은 혼이 나서 떨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사는 선데이 크리스천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근이 오기 전까지는, 애굽에서 요셉을 만나고 정탐꾼으로 몰리기 전까지는, 지금 두려움이 엄습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평온한 일상,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그 삶의 귀결이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라면 그 삶은 오히려 우리에게 불행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육신의 안락함이 우리의 영혼까지 깊이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3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뒤로 하나님을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신앙인으로서는 긍정적 반응인 셈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다가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들을 겪게 하시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재를, 과거와의 연장선상에 놓고, 왜 오늘 이런 일들을 겪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지난날을 반성하기 위해 양심을 깨우는 중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서 당했던 이 모든 일들이 지난날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동생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사막의 대상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양심의 가책을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고 있을지언정 꺼내어 직면할 용기조차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서 둘러댔던 말처럼 없어졌다고, 실종되었다고 말하고 다니며 그렇게 자기들을 합리화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직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정은 22년 전 요셉을 판 값을 가지고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던 여정과 달리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이었는지 회상하고 되새김질하는 시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용서 받는 은총을 누리지만 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으나 그 죄에 대한 책임으로 다윗의 네 명의 아들을 데려가셨음을 기억하면 쉽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 짓는 것 가볍게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은 언젠가 그 죄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회개는 복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직면할 수 없는 죄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듬어가시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가시며,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물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과론에 근거해서, 이런 일의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변인들이 작용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적절한 균형감을 가지고 우리의 현재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이끄시려는 선하신 뜻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상기하며, 순결한 삶을 이어가시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애굽에서의 일을 알리다(29-34)
형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러 아버지 야곱에게 그들이 당한 일을 알립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애굽의 총리로부터 정탐꾼으로 오해 받은 내용을 해명했던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밝힙니다.
(31-34)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앞서 형들이 요셉 앞에서 가족사를 말했던 내용과 지금 아버지 앞에서 진술하는 강조점이 조금 다릅니다. 요셉에게 말할 때는 막내 곧 베냐민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하나, 곧 요셉은 없어졌다고 말한 데 반해서 아버지에게 진술할 때는 반대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바꿔서 말합니다. 창세기 기자가 의도한 것인지, 실제로 형들의 말이 그러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듣는 사람이 가장 듣기 뼈아픈 말을 제일 뒤에 언급한 셈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모든 일을 보고한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정탐꾼으로 몰려 3일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일과 시므온이 투옥된 것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여기 두라”고 전할 뿐입니다. 요셉이 또 42장 20절에서,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으나 이들은 베냐민을 데려가면 애굽에서 자유로운 상거래가 가능해질 것이라며 그 수위를 낮춰 완곡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아버지를 안심시켜, 요셉이 요구한 대로 베냐민을 데려가는 데 있었습니다. 붙잡혀 있는 시므온을 데려오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두려움에 휩싸일까 하여 수위를 대폭 낮춰서 설명했으나 야곱은 이 말에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들을 나무랍니다.
(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야곱의 말 속에 아들들을 향한 불신이 진하게 베어 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낼 마음이 없을뿐더러 시므온도 죽은 자식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힙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아들들을 애굽에 보낼 생각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36절에,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는 이 말은 형제들의 “범죄”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야곱 입장에서도 아들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려운 것이,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 자루에서 발견된 돈의 의미가 야곱 입장에서는 시므온의 몸값을 나눈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때 르우벤이 나섭니다.
(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에게 르우벤의 말이 먹힐 리 없습니다. 르우벤의 아들이면, 야곱의 손자인데 베냐민이 잘못된다고 한들 야곱이 이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르우벤은 베냐민을 반드시 데려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저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의 안전을 신경쓰고 있음을 어필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르우벤은 마치 베냐민이 자기 아들이라도 되는 듯이 그 안전에 크게 마음을 쓰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형들이 요셉을 대했던 20년 전의 태도와는 다른 반응입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던 까닭은, 단순히 한 어머니의 혈육을 보고자 하는 그리움을 넘어서서, 자신이 유년 시절에 형들로부터 겪었던 어려움을 베냐민도 여전히 겪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늙었고, 사자와 같은 형들 속에서 눈칫밥이나 먹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을 지나며 하나님은 형들의 마음을 만지셔서 배다른 막내 동생을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놓을 만큼 끈끈한 가족애를 갖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인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의 인생도 인도해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변화시켜 가십니다. 오랜 시간 우리를 다듬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앞에서 드라마틱하게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기적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마음판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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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간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과 드디어 상봉합니다. 과거 꿈을 통해 요셉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며, 또한 요셉의 꿈에서처럼 7년 풍년과 7년 기근을 통해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가난안 땅에 기근이 닥쳐오자 아들들에게 애굽에서 식량을 구해 오게 합니다. 아마 애굽에는 곡식이 많이 있음을 주변으로부터 들었고 또 사람들이 곡식을 사 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미루고 관망만 할 뿐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촉에 아들들은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고대사회에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 2절에서의 ‘살고 죽지아니하리라’는 야곱의 말처럼 당시의 기근은 생명을 위협 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처한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더 큰 계획과 섭리의 짧은 서막이었습니다. 이들이 처한 어려움을 통해 택한 백성을 애굽으로 옮기시고 그곳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고, 마침내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역사의 큰 강줄기를 이어가시려는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야곱은 10명의 아들들을 보냅니다. 이렇게 한 두 명이 아니고 열 명이나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당시 야곱이 살았던 ‘헤브론’에서 ‘애굽’까지 약 400km나 되는 장거리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위험에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거니와, 또 70명이라는 대가족이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곡식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막내 베냐민은 보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늙어서 얻은 아들인데다가 사랑하는 라헬이 그를 낳다가 죽었기에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히 더 애틋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험난한 여정 속에서 과거 요셉이 광야에서 들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재앙이 베냐민에게도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애굽에 도착한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6). 20여 년 전 요셉의 꿈이 당시에는 허황되고 또 가당치 않은 것처럼 여겨졌지만 지금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는 형들의 모습은 바로 그 꿈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은 직접 보자마자 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른 체 합니다. 그리고 거칠고 가혹한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이 정탐꾼이 아닌가 하며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은 형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보려 하였습니다. 즉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이 이전과는 달리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보았을 때 그의 생각 속에 불현 듯 과거에 꾸었던 꿈,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두었던 꿈이 떠올랐습니다. 그 옛날 요셉의 꿈을 시기하고 방해하려했던 형들의 행동은 오히려 요셉의 꿈을 성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형들을 바라보던 요셉은 과거의 꿈과 더불어 이러한 모든 상황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애굽에 정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양식을 사려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것은 형들이 자신을 팔았던 죄를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먼저 베냐민을 데려오고 후일에 야곱을 비롯한 모든 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갈 때 요셉의 그 꿈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요셉의 꿈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 현실은 오히려 그 꿈을 이루는 길이 되었습니다. 형들을 보면서 요셉은 불현 듯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되었고, 자신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이야기들을 은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생명과 선을 이루어 내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롬8:28). 요셉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발걸음을 힘있게 내어딛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당신의 방법으로 진실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삶을 통로로 삼아 당신의 섭리를 계속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양식 사러온 형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삼 일만에 풀어줍니다. 요셉은 '당신들이 진실한 사람들이라면 한 사람을 볼모로 남기고 가라'고 말합니다. 시므온이 볼모로 남았고 그들은 각각 양식 자루를 가지고 떠납니다. 객점에 이르러 보니 돈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자루에서 돈이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고 야곱도 두려워합니다.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베냐민을 다음에 애굽으로 데리고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야곱은, 요셉도 잃었고 더군다나 시므온도 잃은 마당에 베냐민은 결코 그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형제들도 베냐민을 안 데리고 갈 수가 없고, 야곱도 베냐민을 안 내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만약 요셉의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려 죽어야만 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질렀던 죄악은 그들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두려워하는 이들, 오늘 성경은 요셉과 형제들의 마음 상태가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요셉은 평안하지만 형들은 불안합니다. 한 사람을 볼모로 남기고 가라는 요셉의 명령에 형들은 옛날 저질렀던 일이 생각나 불안합니다. (21-22절)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기억하고 시인하는 모습입니다. 양식을 사러 왔다가 겪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괴로움을 줬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해 봐야 잘못을 돌아볼 줄 아는 것 같습니다. 혹, 그 죄 때문에 화가 미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런데 불안함은 계속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축 먹이를 주기 위해 곡식 자루를 풀어 보니 돈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28절)
요셉을 팔아버린 일은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다 잊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불안은 다시 야곱에게로 연결됩니다. 야곱이 가지고 온 아들들의 양식자루에서 돈이 나오자 불안에 떱니다. (35절) 죄지은 사건은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죄로 인하여 겪는 불안은 그 죄악을 회개할 때까지 계속 됩니다. 이들의 불안은 45장에서 요셉이 자신을 형들에게 밝히고 “나를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라고 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야곱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저 아들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그런 고난과 불안은 50년 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사람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
그는 그 때 심은 것을 이제야 열매로 거두는 것입니다. . 죄에는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용서를 확인하고야 불안에서 벗어납니다. 반대로 요셉은 다 알고 있고 죄의 문제가 없기에 평안합니다. 극심한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요셉이지만 항상 평안했습니다. 노예 생활할 때도, 감옥 생활 중에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늘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평안하면 베풀며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렇습니다. 형들은 자신을 팔아먹었지만 요셉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그의 평안과 넉넉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지시한 것입니다.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먹을 양식도 주었습니다. 양식 값을 도로 넣어주고 양식도 거저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넉넉한 베풂조차도 죄를 지은 형제들에게는 불안의 원인이 됩니다.
똑 같은 상황이 여기서도 형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죄인의 눈에는 호의도 불안의 대상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을 모시고 깨끗이 사는 이들의 것입니다. 형들은 그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셉은 너무 힘든 요구를 하고 형들은 그런 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요구를 안 들었다가는 자신들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상황입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다시 동생을 데리고 가야만 할 상황입니다. 그곳에 시므온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야곱이 완강히 거절합니다. 르우벤은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 꼭 다시 돌아올 것이라 말하면서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까지 합니다.(37절) 그만큼 그 일은 요셉의 요청을 안 들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형들도 야곱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지은 죄 때문입니다.
죄의 값을 치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오늘 성경은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를 지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대신 값을 치러야 해결되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는 양식 때문입니다.
양식은 애굽에서만 구할 수 밖에 없고 양식을 사자면 요셉의 청을 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흉년, 같은 호의적 상황에서도 한 사람은 평안하지만 다른 이들은 불안합니다. 평안한 사람의 요청에 불안한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죄가 없는 사람과 죄를 지은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죄는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을 괴롭힙니다.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의 자리로까지 끌고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하나님을 잃은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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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명가(名家)와 가풍(家風)
한 분야에 있어서 이름이 난 사람, 또는 그런 집을 일컬어 ‘명가’(名家)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가가 대대로 이어지는 집안을 일컬어 ‘세대명가’(世代名家)라고 합니다. 이런 명가들을 유심히 살펴보다보면 비록 분야는 다를지언정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집안 나름의 바르고도 고유한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 고유한 정신을 일컬어 '가풍' (家風)이라고 부릅니다. 가풍은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규칙성을 띄게 되는데, 이러한 규칙성은 대를 거듭하면서 전해지고, 축적되어 가족의 품격을 나타낸다고 해서 ‘가품’(家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살펴보면, 잘되는 집안은 잘될 수밖에 없는 가풍이 있고, 못되는 집안은 못될 수밖에 없는 가풍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서 집안이 바로 서고, 명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그에 앞서 명가에 어울리는 가풍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② 야곱집안의 가풍
"그때에"라는 시간부사로 시작하는 창세기 42장에서 보여지는 야곱의 집안은 안될 수밖에 없는 가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때"는 이집트에 7년 풍년이 끝나고, 7년 흉년이 시작되었을 때입니다. 동시에 17살이었던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온지 22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즉 요셉이 39살의 총리로 재직 중일 때입니다.
형제들에게 인신매매되어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명가를 이루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의 형제들이 속한 아버지 야곱의 집에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름 없는 가족 간의 건조함과 무관심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가풍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집트를 강타한 대기근이 가나안 땅에도 휘몰아쳐왔는데, 야곱의 열 한 아들들은 아무런 대책도, 시도도 없이 멀뚱멀뚱 서로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방관만 하고 있는 이런 아들들의 모습에 화가 난 130살의 야곱이 나서서 대책을 내놓을 지경이었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야곱집안의 이러한 방관과 형제들의 무대책하고도 무심한 가풍은 동시대를 살아가던 요셉과는 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동일하게 20여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사람은 신속하고도 정확한 예단과 대책을 통해 어려움의 시간을 잘 해결해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집트 전역과 고대근동지역을 살리는 지도자로 섰습니다. 그러한 명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은 속수무책과 방관 속에서 스스로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조차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으로 서 있었습니다.
③ 요셉과 형들의 만남
<야곱의 아들들(1절), 요셉의 형들(3, 6절), 이스라엘의 아들들(5절)>이라고 표현된 이 무책임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버지의 성화에 떠밀려 이집트의 총리로 있던 요셉에게로 찾아옵니다. 당시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서 모든 곡물의 매매를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요셉의 허락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형들과 요셉의 만남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와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드디어 22년 전에 하나님께서 꾸게 하셨던 그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을 보며 “꿈을 잊지 말고 끝가지 붙들어라. 비전을 품어라.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르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2장 9절 상반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요셉은 결코 22년 전의 꿈을 붙들고 살아갔던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중간에 정신병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꿈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실을 견디지 못해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요셉은 장남 므낫세의 이름처럼 그 꿈을 새까맣게 잊고 살았기에 견딜 수 있었으며, 살 수 있었을 겁니다.
④ 얼키설킨 실타래를 푸는 요셉
여하튼 22년 전의 요셉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 꿈을 허황된 것이라며 미워하던 형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그의 선처를 빌고 있습니다. 마치 22년 전의 요셉이 살려 달라고 그들 앞에 엎드려 간구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당장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대신 ‘정탐꾼’이라며 4번을 연이어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정탐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면서 22년 전에 자신들이 팔아버렸던 동생 요셉의 존재까지 거론하는 형들을 향해 집에 남아있다는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며 그들을 3일 동안 감옥에 가두게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요셉은 그렇게 했을까요?
복수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22년 전에 없어진 동생과 집에 두고 온 동생 등의 가족 상황까지 상세히 밝히는 가운데 지난 날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돌아보게 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는지에 대해 검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라고 서로 말하는 형제들의 21절 고백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번거럽기도 하고 또 괴롭기도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제들과의 얼키설킨 과거의 실타래를 풀고 있습니다. 22년의 아주 해묵은 원한도 원망도 섭섭함도 풀고 있습니다.
⑤ 건강한 가풍이 흐르는 가정
실은 가족은 이러해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밉고 보기 싫더라도 만나면 풀어야 하는 겁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품어야 하는 겁니다. 어제 주일설교의 관점에서 풀어보자면, 가족의 목에 메인 멍에를 풀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가족이 새롭게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가풍이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품고 세워주는 명가가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여관을 들렀습니다. 여관을 들러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어 보니까 애굽에서 양식을 살 때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공짜로 양식을 사게 되었습니다. 공짜로 양식을 사게 되면 이것 정말 신나고 좋은 일이지요. 우리나라 말에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대머리들을 집단으로 골탕 먹이려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대머리들은 하나님께서 이쁘다. 이쁘다 하고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 줘서 대머리가 되었다. 이 얼마나 멋집니까?
만약 우리가 슈퍼에서 어떤 물건을 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물건을 비닐봉지에 싸주었는데 집에 와서 비닐봉지를 풀어보니까 돈을 그대로 넣어 놨더라. 이러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이 웬 횡재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둘째는 양심상 찝찝하니까 다음에 가면 돌려주어야지, 그러면 주인이 나를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이 두 가지 생각을 둘 다 하지 않습니다. 횡재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다음에 가면 돌려주면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고마워하고 정직하다고 좋게 봐 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생각을 가지냐 하면 28절을 보면 혼이 나서 떨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형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35절을 보면 야곱과 그 아들들 모두가 돈뭉치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요셉의 형들과 야곱은 공짜로 생긴 이 돈뭉치를 보고 좋아하거나 기뻐하기는 커녕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슈퍼에서 물건을 샀는데 비닐봉지 안에 돈이 그대로 있다. 만약 그 돈이 적은 돈이면 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큰돈이면 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힘듭니다. 그냥 꿀꺽하고 그 가게에 안가고 다른 슈퍼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싶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동네, 아니 자기가 살고 있는 온 나라 안에 슈퍼가 하나 밖에 없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슈퍼에 반드시 가야하는데 슈퍼 주인이 물건은 주면서 돈은 비닐봉지에 넣어 돌려준다. 그런데 슈퍼 주인이 웃으면서 기분 좋게 보내주었다면 주인의 호의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싸우거나 주인과 안 좋은 상태로 슈퍼를 나왔는데 돈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그러면 드는 생각이 이 슈퍼 주인이 우리랑 거래를 안 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너희 돈 필요없다. 오지 마라.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가져 간 돈은 분명 적은 돈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야곱의 식솔들이 몇 명이냐? 46장 27절에 보면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때 요셉의 두 아들까지 쳐서 70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서 요셉의 형들이 10명이나 양식을 사러 간 이유가 약 70명의 인원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사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나 이틀 먹을 양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사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꽤 많은 나귀를 가지고 가서 양식을 사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굉장히 큰 돈을 가지고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큰 돈을 요셉이 자루에 그대로 넣어준 것입니다. 그것도 일부러 넣어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당시에 지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용카드로 긁을 수도 없고 전부 무게가 나가고 덩치가 있는 화폐였으므로 일부러 다시 자루에 넣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다시 갈 일이 없다면 돈뭉치가 들어 있는 것이 횡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므온은 잡혀 있고 기근은 심해지고 양식은 곧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오직 요셉이 있는 애굽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무조건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마지막으로 애굽에서 떠나올 때 마지막 광경이 어떤 광경입니까? 24절을 보면 시므온을 그들 눈 앞에서 결박당하는 것을 보고 떠나왔습니다. 요셉의 따듯한 마음과 사랑과 정성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엄하게 대하고 무서운 요셉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돈뭉치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 우리 보고 다시 오지 말라는 말인가보다. 우리랑 거래하기 싫다는 이야기인가보다. 우리 돈따위는 필요없다는 생각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양식은 다시 구하러 가야하고 이런 상황 속에 야곱의 가족들은 돈뭉치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야곱과 그 아들들이 이 돈뭉치 사건을 설명했느냐 하면 과연 요셉이 정말 요셉의 형들보고 두려워하라고 돈을 그대로 돌려주었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단순한 에피소드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돈뭉치를 이야기하고 있고 43장에서도 돈뭉치 사건으로 요셉의 형제들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그들에게 돈을 다시 돌려 돌려주었는가?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극심한 기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47장에 보면 기근이 심해지자 사람들이 땅 팔고, 집팔고, 재산을 다 팔아 양식을 사 먹습니다. 양식은 없는데 사람들은 이제 돈이 없습니다. 기근이 심해지면 모든 사람이 궁핍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요셉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야곱의 집안의 어려움을 막아 주고 도움을 주고자 돈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인도하고 계신데 그것이 오히려 두려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되는 요셉과 그 형들 사이에 있는 전반적인 오해입니다.
이 이후에도 요셉은 형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셔서 우리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가운데 내가 이곳으로 왔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형들은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분명 요셉을 통해 온 가족이 굻어 죽을 위기를 넘기고 편안한 삶을 보장을 받는데도 그 두려움과 근심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이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죄와 현실에 대한 염려와 걱정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뭉치가 자루에 다시 들어가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손길임을 몰랐고, 요셉의 총리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 이런 말을 합니다.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도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다친 야생동물들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친 야생동물들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취총을 쏘아서 마취 시킨 후에 치료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들에게 아무리 잘 설명해도 모릅니다. 자기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너희들이 다친 것, 덫에 걸려서 가만히 두면 죽는다고 암만 얘기해도 모릅니다. 자기들을 해치려고 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경계하고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야생 동물들은 사람들의 말이나 뜻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의 손길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면서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그것을 잊어버렸고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렸고, 요셉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길을 가면서도, 이러한 선물을 받고서도, 마치 이 돈이 자기들을 죽이려는 음모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앙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님의 관심 밖의 일인 것은 없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속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이 분별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의 뜻을 알아갑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한다고 하는데도 엉터리가 많습니다. 르우벤은 자기들이 요셉에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요셉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는 것인데 오해합니다. 우리 또한 집에 우환이 생기면 쉽게 ‘십일조 안해서 그래. 교회 빼먹어서 그래’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일이 잘 풀리면 ‘교회생활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너무 쉽게 말합니다. 물론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 접촉사고는 십일조를 안해서 나느냐? 헌금생활 잘 안해서 하나님께서 차 수리비로 빼앗아 가고, 합의금으로 돈을 빼앗아 가기 위해 사고가 나느냐.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돈을 많이 벌면 신앙생활 잘해서 좋은 회사 취업하고 돈을 많이 벌게 되느냐. 그것도 절대 아닙니다. 좋은 회사 취업하고 돈 많이 벌어서 신앙생활 제대로 안하는 수많은 사람을 우리는 봐 왔습니다. 반면 신앙이 정말 훌륭한 사람인데 생활이 변변치 않게 사는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게 도식화 시킬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것은 명확합니다. 요셉의 꿈과 형들의 시기와 죄악 그리고 요셉의 고난 이런 것이 엄청나게 엉켜 있는 것이 요셉의 삶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한 순간만을 콕 집어서 요셉의 삶이 이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삶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의미에 대한 선명하고 분명한 분별력을 지닐 수 있어야 삶이 능력이 있습니다. 폼나는 인생이나 폼나지 않는 인생이나, 화려한 인생이나 화려하지 않은 인생 모두 그들의 삶의 작은 부분에서 큰 부분까지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신비합니다. 그러기에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 이면에 오묘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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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이 모든 나라에 일어나자 가나안에 있는 야곱도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들들을 보내 양식을 사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갔을 때 총리를 만났는데 그가 요셉인 줄을 몰랐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며 가정의 사정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고 가나안에 있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의심을 풀고 교역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야곱에게 사실을 말하고 곡식 자루를 풀어보니 각 사람의 자루에 돈뭉치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르우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 시므온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나 야곱은 거절했습니다.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특별히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한이 있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과거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접근방법 가운데 적절치 못한 네 가지 형태의 접근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거북이식 해결로, 다른 말로 하면 도피형입니다. 도피형의 사람들은 문제 해결 그 자체보다 다만 고통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피하기만 합니다. 그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서, 현장에서, 상황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은 해결이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나 잠복되어 있어, 훗날 그것이 더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상존합니다. 그러므로 거북이가 슬금슬금 도망가듯 문제의 현장에서 도망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도피는 결코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상어식 공격방식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승리의 관점에서 풀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기어이 상대방을 누르고서라도 내가 승리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소위 ‘나는 이기고 너는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상대방의 더 큰 저항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물론 의지가 강할수록 승리할 가능성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접근방식은 흔히 아기곰 접근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아기 곰’ 하면 따뜻함이 연상됩니다. 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취합니다. 이것은 양보입니다. 자신이 지고 상대방이 이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해결은 아닙니다. 결코 이런 사람들이 양보할 때 기분 좋게 양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분 좋게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관계가 왜곡되는 것이 힘들어서 져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이 먼저 사과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불만과 상처가 계속 쌓여갑니다. 문제는 그 양보가 기꺼이 하는 양보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통이 계속 축적되어 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보도 해결이 아닙니다.
네 번째는 여우식 접근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충형 혹은 타협형이라고 말합니다. “너도 양보해 나도 양보할게” 이렇게 타협해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한 많은 상황 가운데 이렇게 절충과 타협이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타협을 잘못합니다. 그러나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타협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상황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양보하고 상대방도 양보함으로 문제가 해결될 때 쌍방이 모두 불만족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자체가 불만족스러운 절충이거나 불만족스러운 타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양자 모두의 마음속에 갈등이 여전히 상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절충이 필요한 상황이 있기도 하지만 반드시 절충이 최선의 해결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인간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지들이 제안하는 최선의 해결방법은 부엉이식 접근방법입니다. 부엉이는 지혜가 있습니다. 여우의 지혜는 간사한 지혜이지만 부엉이의 지혜는 건강한 지혜입니다. 부엉이는 도망가지 않고 해결을 합니다. 도망가지 않는 것은 현장에 부딪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면(直面)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창세기 42장은 요셉이 자기 일생에 괴로움을 주었던 형제들을 드디어 직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요셉이 연극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잔인한 연극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매우 지혜로운 접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오랜 세월을 인내했습니다. 인내함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인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대부분의 아픔이 인내하지 못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환자는 영어로 ‘patient’라 하는데, 참는다는 뜻입니다. 의사는 환자가 치료 상황을 잘 참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참 많이 참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때에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여 해결한 지혜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몰아넣었던 형제들을 만나는 이 장면에서 요셉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1. 요셉이 형들을 만남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1-4절)
기근이 심할 때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들에게 곡식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서로 관망(觀望)만 하느냐? 내가 들으니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고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곡식을 사오너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곡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굶어 죽지 않겠느냐고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도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의 형들에게 애굽은 무엇인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의 형들은 자기 동생을 팔았던 곳에는 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 10명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동생 베냐민은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가 요셉처럼 재난을 당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이며 막내이므로 아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곱은 자기 아들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7-9절)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그 땅의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값과 양을 조절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그러한 일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도착하여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곡식을 팔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요셉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창 37:7). 그들이 엎드리는 것을 보고 요셉은 옛날에 꾼 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언젠가는 곡식을 사러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외국인들에게 곡식을 파는 일도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인 줄 알았으나 짐짓 모른 체하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애굽을 정탐하러 온 간첩이 아니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들의 우애를 시험하고 가족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네 번이나 정탐꾼으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요셉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통역을 세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총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종으로 팔린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하나님은 요셉을 철저하게 훈련시키기 위해서 가족과의 관계를 끊으셨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14, 15절)
그들은 곡물을 사러 왔으며 한 사람의 아들들로 모두 독실(篤實)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계속 정탐꾼으로 몰아치자 다시 자신들의 가정사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열두 형제인데 가나안 땅의 한 사람의 아들들이며 말째는 오늘 아비의 집에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말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며, 자기 동생 베냐민도 아버지와 함께 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는 너무 많다는 것을 핑계로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붙였습니다. 즉, 어떻게 한 사람의 자식이 열 명이나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너희는 아무리 봐도 어느 부족에서 정탐하러 온 족장들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막무가내로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간첩이 틀림이 없다. 만일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 너희의 말이 입증될 때까지 너희가 감옥에 있고 한 명이 가서 데려오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거니와 말째 아우를 데려오지 않으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그렇지 못하면 너희가 간첩이 틀림이 없다.”
요셉은 자기가 그들을 의심하고 있고, 그들에 대하여 호락호락하게 사정을 봐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모든 형제를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3일 동안 형들은 별의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즉, 과연 자기들이 이 감옥에서 나가서 곡식을 구해 가지고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최강대국이고, 그 나라의 총리가 자기들을 스파이로 의심하는 이상 거기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만일 요셉이 섣불리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면 형들이 놀라서 다시는 애굽에 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흉년은 쉽게 끝나지 않고 7년 동안 지속되는 살인적인 흉년이기 때문에 가족들을 자기에게 더 묶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일하시는 방식이 이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일단 내가 원하는 그것만 얻으면 되니까 그 후에는 다시 세상으로 달아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고, 아이들이 입시를 앞두고 있고, 자신에게 병이 있으면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기도회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고,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거나 병이 나으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열 명의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한센병 환자 열 명을 고쳐 주셨지만, 아홉 명은 모두 세상으로 달려가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중요한 한두 가지는 들어주시지 않고 붙들어 두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계속 기도하고 세상으로 달려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형들이 원하는 곡식은 주었지만 형들 중에서 한 사람을 붙잡아 두어서 결국 이들이 애굽에 올 수밖에 없도록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만 해결 되면 다시 자신의 욕심을 향하여 떠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려움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어려움을 넘겼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보따리를 싸서 하나님께 와야 하는 것입니다.
2. 양심의 가책으로 후회하는 형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18-20절)
3일째 요셉은 그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히브리 신앙을 가졌음을 밝히고 약간 친밀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형들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려고 하면 안 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은 형들에게 그들 중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아버지와 가족들을 먹여 살린 후에 다시 올 때에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반드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한 이유는 형들이 자기 동생 베냐민에게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진심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한 명이 가서 막내를 데려오기보다 한 명이 머물고 나머지가 양식을 가지고 가서 주림을 구하고 다른 사람이 막내를 데리고 무죄함을 증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절)
요셉의 형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우 요셉의 일로 죄를 범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 그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않았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르우벤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러므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형들은 예전에 요셉에게 잘못한 것으로 인해 이와 같은 억지 누명을 쓰는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후회했습니다. 아마 평소에는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들이 애굽 총리에게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니까 드디어 마음속에 있던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것 같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잘못과 죄를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24, 25절)
요셉은 통역관을 통해 말했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자신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이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가슴이 아파서 그곳을 떠나 울고 나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하다가 시므온을 끌어다가 목전에서 결박하고 투옥시키고, 형들에게 곡식을 팔았습니다. 그들의 자루에 곡식을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먹을 양식을 따로 주었습니다. 르우벤이 가장 큰형이었으나 요셉을 선대했으므로 빼고, 그 다음으로 연장자인 시므온을 형제의 대표로 감금한 것입니다.
요셉이 울음을 참았다가 다른 곳에 가서 울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자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이 처음부터 이렇게 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반을 당해서 노예가 되고, 감옥살이를 하고, 온갖 고생을 다 했을 때 감정 폭발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과거의 원한이나 형제의 정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에 얼마든지 울 수 있는 시간도 있고 과거의 원한도 저절로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충동적이고 너무나도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정이나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말씀에 헌신된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까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붙들었습니다. 요셉은 노예가 되고 감옥에도 들어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절대로 자포자기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선물이 생겼는데도 이것을 자기들을 죽이려는 통보처럼 생각해서 사색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 일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아주 좋은 일인데도 두려워하고, 그래서 때로는 부부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확신입니다.
3. 가나안 귀향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26-28절)
시므온을 뺀 나머지 아홉 명의 형제는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어 보았더니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형제들에게 “내 돈을 도로 돌려주었어! 이것 봐, 자루 속에 돈이 그대로 있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혼이 나서, 두려워 떨면서 서로를 쳐다보며 한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러한 일을 행하셨는가?” 그들은 이 돈을 보고 ‘너희가 내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내가 땅 끝까지 가서라도 너희를 잡아들이겠다’는 애굽 총리의 메시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분들은 업무 시간이 끝나고 돈을 맞출 때 돈이 남으면 돈이 모자랄 때보다 더 긴장을 한다고 합니다. 은행원들에게는 돈이 모자라는 것도 문제이지만 돈이 남는 것은 더 골치 아픈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돈이 모자라면 자기가 갚아 넣으면 되지만 돈이 남는 것은 어디에선가 자기가 모르는 중요한 착오가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돈이 도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놀라고 두려워한 것은 자기들이 모르는 가운데 무엇인가 어떤 엄청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좋은 뜻으로 돈을 주었는데도 이것을 사형 선고로 받아들여서 부들부들 떨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의 총리를 만난 일에 대해서 자세히 고했습니다. ‘자기들을 정탐꾼으로 여기고 추궁하므로 형제들에 대해 말했더니, 막내를 데려와 보이면 의심을 풀고 서로 무역하겠다. 그동안 볼모로 시므온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자루를 쏟아 보다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각인의 곡식 자루 모두에 돈뭉치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과 그 아비 야곱은 모두 두려웠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요셉이 돈을 돌려보낸 것은 형들을 위한 배려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36, 37절)
야곱은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내 자식을 잃게 하는구나!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다. 이제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려느냐? 이 모든 일이 나를 괴롭게 하는구나!” 야곱은 낙심하며 시므온이 죽게 될 것으로 여기고 비탄했습니다.
르우벤이 아비를 달래며 위로했습니다. “내가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않으면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르우벤의 아들은 하눅, 발루, 헤스론, 갈미인데(창 46:9) 그들 중에 둘을 언급했습니다. 시므온과 베냐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야곱은 거절했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38절)
야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베냐민은 애굽에 보내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까지 집착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것을 포기해야 모두 살 수 있는데 야곱은 베냐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또 그들은 굶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데 아무도 믿음이 없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집은 20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자기 생각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20년이 아니라 50년, 100년이 지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있을 재난에 대비해서 이미 오래전에 요셉을 애굽에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하고, 또 요셉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길을 가면서도 두려워하고 있고, 절망에 빠지고, 서로 정죄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하여,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치부를 다 드러내고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앙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면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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