셩령의 역사 대한민국(完) |
빈농의 아들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 중에 가장 가난 하게 살았다. 박정희에게 가난은 특별하게 기억된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24시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스승인 가난과 관련된 일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다” 배고픔과 가난에 대한 박정희의 고통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배고품을 몰아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단순한 배고품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이땅에서 살아가는 모든이의 삶의 질을 높였다. 그의 산업화는 산업화와 산림녹화, 녹색혁명, 정식혁명과 문화혁명을 동시에 일군 혁명이었다. 중국이 죽어라 박정희 대통령을 베꼈지만 자연은 황폐화 되었고 정신과 문화는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 박정희는 당대를 넘은 미래를 준비했다. 박정희 정신의 유산은 우리의 정신이 되었고, 대한민국 산하의 현재 나무 중 10그루 중에 8그루는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이다. 통일벼 개발의 그 치열한 투쟁은 이제는 모두 잊었다. 지구상에 재배 되는 벼품종은 우리와 일본이 주식으로 삼는 japonica 계열의 품종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와 인도 등에서 재배 되는 찰기 없는 쌀이 indica 계열이다. 자포니카는 우리들 입맛에 맞고 밥맛도 좋지만 수확량이 적고 인디카는 밥맛이 없지만 수확량이 많았다. 인디카의 치명적 약점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두 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을 위해 수십년을 연구 했지만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다. 당시 필리핀은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앞선 선진국이었다. 특히 농업분야는 비교 조차 안될 정도로 필리핀이 앞서 있었다,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문회 교수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가서 벼 육종 기술을 배웠고, 7년의 뼈를 깍는 노력으로 통일벼 개발에 성공한다. 1977년 쌀 생산량이 ㏊당 4.94톤으로 일본의 4.78톤을 앞서며 단위 면적당 쌀생산량의 세계 기록을 세운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고픔에 대한 아픈 기억이 통일벼와 같은 녹색혁명을 이끌었다. 벼 한포기에 80-90알 열리던 낱알이 무려 120- 140알이 달렸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은 건국 후 개발품에 대한 10대 연구개발품으로 꼽았고 1등이 통일벼였다. 1997년 여름 평양을 들렸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넘어온 미의원은 휴전선을 넘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북한의 황토색 민둥산만 내려다 보다 녹색으로 뒤덮인 널푸른 산야의 남한을 보고 한마디 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황장엽씨가 남한에 와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산림녹화가 잘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UN 식량농업기구에서 2차대전 이후 유일하게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꼽았다. 주린배를 쥐고 나무를 심었던 박정희의 결단이 오늘의 녹색한국을 만들었다. 박정희의 산업화는 농업과 공업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농공병진책이었다. 1970년대 초 농가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을 앞질렀다. 인류역사의 산업화 혁명 이후 유일한 기록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농촌이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이 김영삼 정권 이후 부터인 것으로 안다. 민주투사들 그들의 무능함이란 정평이 나있다. 하기사 팔뚝질 한 것 이외에는 한 것도 없고 공부한 것도 없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말이다. 산업화 시대 소년빨치산출신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이나 팔아 먹던 김대중 수준도 가소로울 뿐이다. 그는 건국 이 후 가장 성공한 국가정책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새마을운동이 꼽혔음에도 근거 없는 적의를 자서전에서 쏟아냈다. “농촌에는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아침마다 마을에는 새마을노래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정작 농촌은 골병이 들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 농촌은 변한 것이 없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잘살게 되었다는 선전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김대중의 망언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김대중의 지적능력이 의심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직자와 공무원을 대동하고 새마을운동 현장을 시찰하고 있을 때 어느 기업가가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인 곳을 보며 “참으로 목가적이다”라고 감탄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초가집에 살아 봤습니까?” 초가집은 해마다 묶은 지붕을 뜯어 내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다시 올려야 한다. 해마다 연례행사로 하는 지붕을 개보수하는 것은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갔고 자원이 낭비 되었다. 지붕이 세는 경우도 많았고, 온갖 벌레와 해충의 온상이 되어 불결하기 짝이 없었으며, 난방이 되지 않아 외풍이 심했고 자리끼를 떠서 머리 맡에 두면 아침에 꽝꽝 얼을 정도로 추웠다. 그러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고 낭만적으로 목가적 운운하는 것을 타박한 것이다. 얼마나 초가집이 불편한지 살아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초가집 들어가서 살라면 죽어도 살지 못할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시대 전통 운운하며 목가적 초가집 타령하는 지금시대의 골빈 선비들의 헛소리가 가소로울 뿐이다. 그사람들 죽었다 깨어나도 초가집에서는 살지 못할 사람들이다. 산업화라는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따라서 산업화를 통해 성장 하는 것이 있으면 그에 대한 희생을 요구한 것이 산업화의 역사이다. 즉 공업화는 필연적으로 농업이 무너졌고, 농촌은 무너져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는 농업도 성장하고 공업도 성장했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소득이 올라갔다. 좌파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 빈자에게 나누어 주는 퇴보를 동반성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진정한 동반성장을 일군 것은 박정희 한사람이었다.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학자이다. 현대 경영학은 그에게서 모두 흘러나왔다. 세계적으로 읽히는 전문서적이나 책 한권 내지 못하는 대한민국 지성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2차대전 이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이다” 일천한 지식으로 저마다 한마디 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판론자들의 지적수준이 워낙 한심한 수준이라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무식과 무지에 전율할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았다. 죽을 때까지 매달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며 수출 확대를 독려했다. 박정희는 초기에는 경공업 중심의 제조 상품 수출에 역점을 두었다가 점차적으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가면서 ‘수출주도 고도성장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선견지명은 한국은 지금 세계 7위의 무역대국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한국은 인구 5천만 명 이상의 나라가 수출 5천억 달러 이상을 달성한 소위 ‘5천-5천 클럽’에 세계 역사상 여섯 번째로 가입한 나라다.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이 가져온 결과이다. 5.16혁명은 유신시대가 없었다면 무의미한 혁명이 되었을 것이다. 즉 5.16혁명이 곧 유신헌법이다. 그 유신헌법 죽어라 공부해서 판사되고 변호사 한 노무현이나 문재인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한편의 코미디인 것이다. 그 시대 유신헌법에 국민 95%가 찬성표를 던졌다. 박정희 대통령 아니어도 뛰어난 한국인의 민족성으로 경제는 성장했다고 비판한다. 똑 같은 생각과 똑 같은 언어, 똑 같은 문화를 가진 북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실패한 국가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 때문이라면 공산권 국가에서도 북한은 가장 악질독재가 이루어졌고 퇴보된 굶어죽는 공산국가였고 모든 나라를 통틀어 가장 닮지 말아야 할 막장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에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고 북한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차이일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세계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없다. 그만큼 가난은 그에게 한 서린 것이었다. 군군주의 시대 일본의 모든 인재를 긁어 모은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재원이다. 그 당시 일본육사는 동경대학교를 압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육사, 일본육사, 대한민국 육사 등 3곳의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미국 포병학교까지 유학한 군사학에 관한 당대를 아우르는 인재였다. 6.25. 사변일 일어나기 6개월전 남로당 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연말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작성하여 보고하며 6.25 사변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중공군의 개과 소련의 배후조정, 6.25사변 발생일, 도발루트까지 정확했다. "적(敵)이 1950년 3월에 공격해올 것이 확실하다. 다만 중국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했던 동북 한인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이 늦어진다면 침략 시점은 6월로 연기될 것이다. 동두천·의정부·서울 선에 전차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 이상이 주공(主攻)을 지향할 것이다. 또 개성·파주·서울 선과 춘천·원주·평택 선엔 각각 1, 2개 사단이 조공(助攻)을 하게 된다. 함경북도에서 훈련 중인 유격 전문부대인 766부대는 배를 타고 후방에 투입될 것이다. 적은 2, 3개월 이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 전 병력을 일제히 투입할 텐데 총 병력은 최초 단계에서 약 12만, 서울 이남 공격 단계에선 20만으로 예상한다. 적의 전차부대는 아군에 결정적인 위협이 될 것이고 항공기는 지상군 엄호(掩護)를 주 임무로 삼을 것이다. 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으나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수 있다.”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명석했던 박정희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일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의 법과 제도, 산업화는 독일을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선진문명을 견학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는다. 독일을 롤모델로 사회시스템과 군대를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헌법을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독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국가이며 종교개혁의 산물로 압축성장을 통해 세계열강이 되었다. 일본은 독일을 벤치마킹함으로서 종교개혁의 산물을 그대로 흡수했다. 일본의 산업화 과정도 독일의 압축성장을 그대로 베꼈다. 독일의 산업화 과정은 특수한 방법과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300여 소국으로 분열하는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여 산업화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통합이 산업화의 전제 였다. 독일은 영국 산업화의 길을 답습하는 것을 거부한다. 자력으로 산업화를 이룬 영국의 과정을 답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여 100여년 이상 늦은 산업화를 압축해야 했다. 산업화는 국가시스템을 바꾸는 것으로서 국민을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공장의 건설, 인력의 육성, 교육, 항만들의 사회간접 자본의 건설, 법과 제도의 정비, 시장의 구축 등 온갖 국가와 사회적 시스템을 순차적으로 산업화 하는 과정이다. 자력으로 산업화를 달성한 영국은 순차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산업화를 이룩했다. 뒤쳐진 독일은 산업화 과정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산업화에 성공한 독일을 벤치마킹한 일본은 더욱 압축하여 빠른 시간에 산업화 과정을 걷는다. 독일의 압축성장은 자력으로 산업화를 선도하는 영국을 후발주자가 따라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미국 또한 압축성장을 통해 산업화를 이룩한 국가 중 하나이다. 특히 석탄과 증기로 대변되는 영국의 산업화를 미국은 석유와 전기로 바꾸어 2차 산업혁명을 일으키며 세계 패권국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가장 늦게 산업화에 뛰어 들은 일본의 산업화 과정을 다른 길을 걷는다. 철저한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산업화는 전례 없이 빠른 산업화를 성취했다. 일본의 산업화와 경험은 만주국으로 이어진다. 나폴레옹을 롤모델로 군인의 꿈을 키웠던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군인의 길로 들어선다.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 보상으로 일본육사에 진학하는 특전을 얻게 된다. 육사 졸업 후 만주군 사령관의 부관이 된다. 생도시절과 군생활을 만주국에서 보낸 박정희는 만주국의 산업화를 온몸으로 체득한다. 만주국의 산업화는 놀라웠다. 일본은 일본국가예산의 3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돈을 투자하여 20년 만에 산업화 국가를 건설한다. 1931년 2억2천4백만엔에 불과했던 만주의 공업생산은 패망직전 1943년에는 14배의 성장을 하며 39억3천6백만엔에 이르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만주국 수도 신장에서는 중국최초로 백화점이 들어섰고 택시가 달렸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100Km를 주파하는 고속열차가 달렸고, 육로를 통해 14일이면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포드 자동차와 제너럴모터스가 자동차 판매점을 세웠고 홍콩과 상하이 은행, P&O 영국기업 등 다국적 기업이 만주국에서 지사를 두고 영업하였다. 영구, 안동, 대련, 뤼순 등 자유무역 도시들에는 외국인의 비즈니스가 활발했고 치치하얼, 하얼빈, 훈춘 등 자유항에서는 국제무역이 흥했다. 만주국 건설을 위해 일본은 만주국의 모든 문호를 개방했다. 조선의 지식인과 젊은이는 앞다투어 만주국을 달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일권 국무총리, 만주건국대 교수 최남선, 최규하 국무총리, 강영훈 국무총리, 동국대 총장 이선근, 김일환 내무부 장관, 이한림 건설부 장관, 황종률 재무부 장관, 오정수 상공부 장관, 고재필 보건사회부 장관, 서범석ㆍ박창해ㆍ강문봉ㆍ강필선 국회의원, 이주일 감사원장, 이인기 숙명여대 총장, 이민재 강원대 총장, 신기석 영남대 총장, 송석하 민속박물관장, 원용덕 헌병사령관, 조권순 유한양행 사장, 배응도 신동아상사 사장, 백선엽 참모총장, 김백일 장군,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 해병대 사령관 김일환 상공부 장관 등 수 많은 인재들이 만주국에서 공부하고 만주국 건설에 참여했다. 조선인은 문화와 예술계에 진출하여 활약했다. 대한민국 실내악의 초석을 다진 전봉초, 김동진, 안병소, 이재옥 등 음악가들이 활약했고, 한국 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윤봉춘도 만주국에서 공부하며 활약했다. 만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 유치환, 이태준, 한설야, 강경애, 백석, 김팔봉ㆍ민태원 등의 문학가들이 만주에서 활약했으며 이순자 영부인과 만화가 고우영도 만주국에서 태어났다. 만주국 등록의사 13%, 1만명에 이르는 관료와 공무원, 3천명에 이르는 교사가 조선인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 만주국의 위상은 중국에서 절대적이 된다. 만주는 중국 전체로 볼 때 면적은 11.5%, 인구는 8%에 불과했지만 중국 내 선철 생산의 87%, 전력의 78%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공업생산량의 90%를 차지했다. 만주의 풍부한 지하자원은 석탄 생산량의 36%, 석유 생산량은 93%, 철도망은 41%, 금광은 50%에 달했다. 선철 생산은 본토의 8.5배, 전력 생산은 2.5배에 달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중일전쟁이 끝나자 만주를 선점하기 위하여 치열한 암투를 벌린다. 마오쩌둥은 절실하게 만주를 가지고 싶었다. "동북은 우리 당과 중국 혁명의 최근 변화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중요한 곳이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다 잃는다 해도 동북만 있으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견고한 것이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더욱 공고한 것이다." 장제스의 동북보안부사령관 쑨리런 또한 산업화 된 만주의 가치를 장제스에게 고하고 있었다. "우리가 동북을 탈취하지 않으면 중국은 근대 산업화된 국가로 발전 하기 힘들다." 결국 만주는 마오쩌둥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승리자는 마오쩌둥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승리 후 산업화 된 만주를 “공화국의 장자”라고 불렀다. 중공군이 6.25사변에 불법 참전 후 중공군의 군수품은 만주에서 조달 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만주 핵폭격론의 배경은 이와 같은 이유였다. 일제는 만주국의 건설을 통한 몸집 불리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이 충돌하는 지역에 일본이 참여함으로서 제3지대를 꿈꾸었다. 만주·한(漢)·몽골·일본·조선의의 5개 민족이 모여 사는 만주를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楽土)라는 슬로건을 걸고 국력을 총력동원하여 건설했다. 일본의 국가예산 3년치의 돈을 쏟아 부은 만주의 발전은 역동적이었다. 박정희는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용광로처럼 녹는 그 역동성을 온몸으로 지켜 보았다. 만주국의 공업화는 제일 먼저 제철소를 만들고 도로를 정비하고 제철소에서 나온 선철과 철강으로 비행기를 비롯한 중공업제품을 만드는 공업화 과정을 걷는다. 제철소를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 된 것이다. 우리나라 공업화 또한 만주국의 공업화와 비슷한 길을 걷는다. 포항제철이 설립 된 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자동차가 생산되었고 울산조선소가 세워진다. 즉 공업화 프로세스가 만주국와 매우 유사하다. 산업혁명을 가져 온 기독교 문명과 가치가 바탕이 된 만주는 힘이 넘쳤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만주국은 청년 박정희의 피를 끓게 했다. 그 뜨거웠던 피가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견인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근현대의 서구문명을 견인한 것은 개신교, 자유주의, 민주주의, 과학과 기술, 경제성장으로 대변 될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의 개신교는 하나님과 나라는 개인(個人)을 찾아 개인주의에 대한 가치를 발견함으로서 근대 시민사회를 낳았다. 또한 개인의 직업을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내려 준 소명 또는 축복으로 직업관을 심어주게 되면서 인류는 경제성장이라는 기적을 맞이하게 된다. 인류에게 경제란 얼마만큼의 인력의 양을 투입 하느냐의 매개변수 외에는 경제를 변화 시킬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경제성장은 있을 수 없었다. 종교혁명과 산업혁명이 있었던 1500년대부터 인류의 경제는 성장을 시작하였고 인류에게 풍요로운 삶과 여가를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건설 된 문명이 서구 기독교문명이다. 성장기에 대구 상모교회에서의 신앙생활, 기독교 문명으로 부흥을 일군 일본, 기독교 문명으로 건설한 만주국의 경험이 박정희를 만들었다. 청와대에서 만난 노병천으로부터 복음을 접한 박정희는 대답했다. “그래! 지금은 조금 곤란하고 내가 대통령을 마치면 꼭 교회에 나가마!”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여 만주국을 체험하고 배운 경험으로 산업화를 이룬 것이 뭐가 대단하냐고 묻는 멍청이도 있다. 만주국은 일본이라는 자금줄을 통하여 어마 어마한 자본이 투입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국가원수로 미국을 방문하는 박정희에게 전세기 한편 마련해 줄 돈 조차 없었다. 세금을 걷을 곳도 없었다. 부마사태 직전에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여 부가가치세가 부마사태를 부른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조국근대화의 종자돈을 구할 곳이 없었다. 박정희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빌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원조경제에 기대어 연명하는 대한민국에 산업화를 위한 단 한푼의 종자돈도 없었다. 그래서 산업화를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 치열한 조국 근대화를 반대하기 위하여 공격하기 위하여 “종속이론” “매판자본론” “주체사상”과 같은 무당의 주술만도 못한 논리로 공격했다. 그 싸구리 논리, 그 천박하고 수준 떨어지는 무식한 논리는 그것을 평가하기 위하여 적어 놓은 종이 한 장이 아까울 지경이다. 리영희를 비롯한 골빈 그 사람들, 그 시대 머리 나쁘고 무식했던 종속이론과 매판자본을 읍조린 그 사람들, 주체사상을 공부한 지능 떨어지는 그 사람들 지금이라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죄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로버트 달 박사는 추상적인 어찌보면 현학적이기까지 한 민주주의를 체계화 하고 구체화했다. 우리나라 정치학자 중에 그의 학문적 성과에 비교 될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 정착에 대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계량화 하여 제시했다.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 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우녕할 수 있는 중상층의 형성, 국민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이다” 1. 물질적 산업적 토대 위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1인당 GDP 4,000불. 2. 탄탄한 중산층. 3. 민주시민교육 과거의 화폐기준으로 4,000불이지만 지금의 시대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 되는 1인당 GDP를 10,000불에서 15,000불 정도로 보고 있다. 로버트 달의 주장에 새뮤얼 헌팅턴과 세이모어 마틴 립셋도 동조하고 있다, 박정희는 가난한 개도국이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말을 남겼다. “개발도상국의 나라에 있어서 정치의 초점은 곧 경제 건설이며, 민주주의도 경제 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사실상 돈 없는 나라가 가난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성취한 단 한건의 사례가 없다. 박정희의 민주화의 길이 유일한 길이라 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 조건에 대하여 공부한 적은 없지만, 로버트 달을 본적도 그의 책을 읽어 본적도 없지만 그가 가진 천재성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달의 1인당 국민소득 4,000불(지금의 가치로 10,000~15,000불)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도 문화와 종교, 체제, 국민성, 교육수준 등을 갖추지 못하여 민주화의 문턱에서 무너진 사례는 많다. 새무엘 헌팅턴의 주장에 따른 민주주의의 유지 가능성이 높아지는 소득수준이에 도달하였음에도 민주화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중국을 비롯하여 아르헨티나, 중동의 석유부국들, 브르나이, 싱가폴,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멕시코 등을 민주주의 국가로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만큼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이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국부 이승만은 모든 취학아동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청소년을 중등교육을 받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는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었다. 국부 이승만은 건국과 동시에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의회주의의 천재라는 영국도 고작 우리보다 20년 앞서 모든 여성의 참정권이 실현되었다. 국부 이승만의 이러한 시도는 당시의 민도로서 엄청난 모험이었음에도 민주주의를 선포하였고, 혼란 속에서도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역사 속 독재자는 국민이 많이 배우고 배가 부른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배부르고 교육 받은 국민은 반드시 독재에 맞서게 되어 있다. 독재자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배를 채워 주었을 뿐이며 최소한의 교육으로 독재자의 존재를 심었을 뿐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과 카스트로, 카다피와 후세인이 자국민의 배를 주리게 만들었고, 체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교육만 시켰다. 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자의 권력이 필요했다면 국민을 교육시키고 배를 채워주려 전전긍긍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을 독재자라 매도하고 있는 자들은 김일성식의 유교 공산주의 독재나 또는 인도식의 봉건제 독재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 틀림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기독교 문명에 편입 됨으로서 오늘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종교개혁의 산물인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속에 살아가고 있다. 산업혁명과 민주주의가 가져다 준 최고의 선물은 누구나 자기의 노력에 따라 “자유”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는 지배와 폭력에 의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서 자신의 자유를 늘렸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인간은 누구나 존중 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 아래 모두는 평등하다는 대중주권사상을 낳았다. 민주주의 출발인 것이다. 존녹스를 도와 장로교를 출발시킨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은 모든 정치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국가는 즉 천부권을 빼앗는 군주는 비천한 어느 누구라도 죽일수 있다고 했다. 개인의 천부권, 자유의 시작은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으로 시작 된다. 개인의 경제적 독립은 가장 큰 죄악인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는 독재만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사유재산의 보장이 곧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사유재산 제도는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토지왕토설이 국가 이념인 가산제국가 봉건조선을 깨운 선교사들로부터 박정희의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그 시간은 개인의 자유를 찾는 투쟁이었다. 특히 박정희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인권, 민주 모두 다 좋은 말이요. 그러나 참다운 인권과 민주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나옵니다. 당장 배고파 죽어가는 국민들 앞에서 말장난을 해서는 안됩니다. 인권이나 민주는 경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 됩니다. 두고 보시오. 모든 결실은 나보다 오래 사는 세대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 단 한가지 이유는 자유이다. 박정희는 개인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싸웠다.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한반도의 자유문명은 영미권을 비롯한 서구에서 수백 년 동안 수 없는 전쟁, 셀 수 없는 죽음 속의 투쟁과 피로서 쟁취했다. 그 자유 문명이 자유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던 칠흑 같이 어둡고 암울했으며, 엄혹한 봉건질서가 지배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적은 희생 속에 뿌리 내린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수천명의 서양 선교사가 있었고, 이승만의 고난과 박정희의 투혼이 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세계 역사 속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적은 희생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며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어느 역사 어느 나라에서 우리보다 적은 피로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우는 단언하건데 없었다. 1980년대 한반도에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를 열었다. 조선이라는 희대의 자유말살 봉건제 사회에서 식민시대를 걸쳐 고작 30년만에 완벽한 자유사회를 구축한 것은 인류사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러시아와 중국, 중동과 동남아, 남미와 아프리카에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질을 따라 오지 못한다. 민주주의 출발은 영국의 명예혁명이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제임스 2세의 폭정을 몰아내고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로 상징되는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8년에 일어났다. 의회는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국민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선거는 귀족과 일정량의 재산을 가진 부유층만이 누리는 그들만의 리그에 지나지 않았다. 선거에서 배제 된 평민과 여성은 투표권을 얻기 위하여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을 비롯한 투쟁을 통하여 평민과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이 230년이 지난 1918년이었다. 봉건질서의 낡은 때가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1948년 모든 국민에게 국부 이승만은 투표권을 주었다. 의회정치의 천재로 불리는 민주주의의 상징 영국 조차 수백년의 투쟁을 통해 확보한 선거권을 우리가 쟁취한 것은 영국 보다 고작 30년 늦었을 뿐이다. 와트의 증기기관이 발명 되는 시기인 17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만들었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이룩한 후 1차대전까지 세계 경제를 지배했다. 청나라와 무굴제국, 오스만 제국의 경제력을 1800년대 모두 압도했고, 1차대전이 끝났을 때도 여전히 세계 경제를 호령했다. 그 막대한 부에 기초하였음에도 보통선거가 실현 된 것이 고작 우리나라보다 30년 앞섰을 뿐이다. 한반도에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은 단 한 사람 하나님이 보내준 국부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300년간에 걸친 산업화를 박정희는 고장 20년만에 일구어냈다. 박정희의 산업화는 너무나 특별하다. 철강, 자동차, 조선, 전자와 반도체, 전기와 기계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전분야에 걸쳐 너무나 완벽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 포트폴리오를 가진 나라로 미국과 일본, 프랑스 정도만 꼽힌다. 이 작은 나라에서 6.25 사변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미국과 일본, 프랑스에 비교 되는 산업포트폴리오를 가진 것은 기적이며 절대자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 발생지인 영국보다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민주화 원년이라는 1987년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지우고 있다. 패악한 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당대의 지성이었던 이승만과 박정희는 봉건질서를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성과 미개한 국민성을 끌어 않고 공산주의와 싸우며 달렸다. 그 시대의 진실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지금의 가치로 그 시대를 평가하는 무지와 패악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그 패악과 무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 시대를 기억하지 못할 미래세대에게 까지 우리의 무지와 패악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둘 것을 약속하셨다. 미래세대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1절~2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