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일텐데도 놀라는 사람도, 아는 척 하는 이도 없다. 산행식구들을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어렵다. '처음오셨죠?' 그 한마디 하는 게 뭐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다들 입을 꽁꽁 매어두었다. 서울에서부터 매섭게 불어치던 바람은 서해안고속도로에서 12명이 탑승한 한대의 승합차를 날려버릴듯한 기세였다. 다같이 숨죽이고 그 날의 안전을 책임진 기사의 운전솜씨를 믿는 눈치다. 그러나, 여전히 120~140km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취소하지 않는다는 원칙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뼈져리게 느끼며, 회비를 과감히 포기하지 못한 내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여행이 무엇인지 또 생각한다.
낯선사람들, 낯선 잠자리, 낯선 음식에 적응하며 모르던 사실을 배우고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을 공유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하는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사람들의 말투와 행동에서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판단하고 때로는 비난도 한다. 그러다가 선입견을 가지며 옹졸하게 구는 나 자신의 못난 행동도 본다.
단체여행이란, 단체에서의 개인의 행동반경과 규칙과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방법들을 익혀나가는 좋은 방법이 된다. 가령, 이런 사람이 옆자리에 앉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1.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하루종일 떠드는 사람
2.하루 종일 단 몇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는 사람
3.음식을 건네도 사양하며 본인의 음식도 나누지 않는 사람
4.잠만 자는 사람
5.조금만 부딪혀도 불편해하는 사람
무시하던가, 같이 잠만 자던가, 혼자 즐기던가 모두 각자의 방법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내 툴툴거리며 자신의 여행을 망칠수는 없는 일이다.
혼자만의 여행이 힘들다고 느낄 때는- 함께 위기를 헤쳐나갈 동료가 없다는 사실이고 단체의 여행이 힘들때는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해야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사람이 문제인것이다. 도시의 환락가를 걷든, 시골길을 걸어가든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이 걷는 사람. 즉 동료이다. 그러나 자연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가장 부드러운 방법으로 상황을 대처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즉, 여행은 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조화로운 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종의 과정인 것이다.
여행후기면서...사설이 길어졌다.
무주군에서 도로가 유실되었고 애초에 예정했던 오지마을에 전기도 나가버려서 일정에 큰 차질을 빚게됐다. 결국, 전남 무안군의 염색학교를 찾아가기로 했다. [염색학교는 가수 김은희('꽃밭에서'를 부르던 고운 목소리의 주인공)씨가 제주도 전통옷인 '갈옷'을 만드는 곳으로 여행대장과 오랜친분을 갖고 있었다. 폐교를 활용한 염색학교의 이름은 '봅데강'(제주도 말로 '보셨습니까?'의 뜻이란다.)이다. 봅데강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30분. 귀한 손님이 왔을때라야 대접한다는 홍어회와 전라도 특유의 장아찌 반찬들이 곱게 올라와 있었다.
새벽을 넘기고서야 자기소개로 이어진다.
'42살입니다'로 소개하는 사람부터, 영자신문 편집장이라는 꼬장꼬장해보이는 아주머니, 불어 통역원으로 일하던 서른중반의 아가씨, 학교 선생님, 치과의사인 여행대장, 디자이너, 외국계 지사에 근무하는 윌리엄 조, 연극학과 교수, 백수, 북디자이너, 화가, 까불이 아저씨, 수자원공사에 근무하는 아가씨, 세무소 직원...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만난 여행은 난생처음이다. 그리고 평균연령이 서른후반에서 마흔사이이다.
덜컹대는 창문소리와 마루바닥의 찬 공기로 밤새 잠을 설쳐댔다.
새벽부터 일정을 시작한다던 큰소리는 헛소리로만 끝이나고 결국 10시반을 넘은 시간에 이미 연꽃이 다 져버린 회산백련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해질무렵 보아야 운치 있다던 연꽃방죽을 땡볕에 한바퀴를 돌고나니 등으로 식은 땀이 한줄기 흐른다. 서울로 출발해야 될 시간에 갑자기 '아무것도 한게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 목포 해저반도-국립해양박물관-남농기념관-유달산을 숨가쁘게 질주했다.
남농기념관에서는 '바보'가 뭔줄 아요?하며 불호령을 내리는 할아버지의 안내덕분에 동양화가 아니라 한국화가 맞고 낙관이 아니라 전각이 올바른 표현이란 사실을 알게됐다. 또 바보는 '바로 볼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노인으로부터 꾸지람도 들어가면서 둘러본 그림들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어두워질무렵 돌계단으로 이어진 유달산을 올랐다. 유달산 입구에 흘러나오는 이난영의 노래가 일제시대의 분위기를 낸다. 그곳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하며 인사를 하는 자원봉사자 한분을 만나 목포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유달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건물 하나하나의 유래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순전히 그날의 행운이었다.
"저기 멀리보이는 포구가 조선시대 3대 항구의 하나이던 목포항구입니다. 지금의 목포항구는 눈꼽만큼도 발전하지 않은 채로, 150년 전의 크기 그대로, 모습 그대로입니다. 엄청난 일이죠"
조선총독부 건물이 한동안 목포시청 건물로 쓰여졌던 사실, 200여채의 일본식 건물, 월드컵경기장 만한 선박, 일제시대 지어진 학교건물이 여전히 초등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는 사실 등. 유쾌한 설명에도 목포의 애환이 느껴지고 목포에 대한 애정이 절로 스며들었다. 일등바위에서의 해넘이는 장관이었다. 얼굴을 익힌 몇 사람과 기념촬영을 하고는 서둘러 내려온 것이 7시30분이었다.
목포에서 쉬지 않고 달려오니 11시 30분이라는 경이적인 시간에 서울에 도착했다. 휴게소에서 30분간 저녁을 먹고서도 말이다.헤어질 무렵이 되자 사람들에게서 친근함이 느껴진다. 이제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함.기대했던 오지여행은 아니였지만, 새로운 길과 사람을 만나고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세상을 배우되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게 되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