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구약성경(구약시대)의 마지막 역사를 다루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마지막 부분이 다윗의 왕조였던 남 유다가 망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망했습니다(BC 586).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남 유다의 왕들과 왕족들, 귀족들,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몽땅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참고로 유다 백성들은 BC 605년, 597년, 586년, 582년 네 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열왕기하 25장을 보면, 바벨론이 세 차례에 걸쳐 유다를 공격했고, 유다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52장을 보면 바벨론이 한 차례 더 유다를 공격하고 남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고 나옵니다(BC 582).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 생활하던 유다 백성들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1차 포로 귀환은 BC 538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차 포로 귀환은 458년,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차 포로 귀환은 BC 444년, 총독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 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 봅니다.
바벨론 포로 | 포로 귀환 | |
BC 605(다니엘과 세 친구들) | 1차 | BC 538(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
BC 597(에스겔과 기술자들) | 2차 | BC 458(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 |
BC 586(농부 외 백성들 대부분) | 3차 | BC 444(총독 느헤미야) |
@ 에스라서-느헤미야서(한 권)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남 유다 백성들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1)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느헤미야 총독을 중심으로 2)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rebuilding)한 이야기 +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3)포로 귀환 공동체를 하나님 백성으로 일으켜 세우는 (영적 부흥) 이야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한글 성경에는 두 권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한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원래 한 권이었는데,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분량이 두 배로 늘어나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두 권)로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스라서 1:1-3절은 역대하의 마지막 두 구절(36:22,23)과 같은 내용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되던 해,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조서를 내렸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남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고레스의 조서를 보면, 남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배경(포로 귀환)이 잘 나와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정복한 나라가 너무 넓어서 제대로 통치할 수가 없어서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게 아닙니다. 포로 귀환과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다시 건축한 것은 고레스 왕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왕위에 오른 첫 해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다.”(에스라 1:1)
하나님은 약속을 꼭 지키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포로 귀환'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남 유다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사용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남 유다가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선지자 예레미야 혼자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거짓 예언자들에게 예레미야가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했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졌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붙타는 광경을 보고 가슴을 찢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기록한 책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한 이유는 왕과 선지자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가 망했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70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10절입니다.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예레미야 29:10)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포로 귀환'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예레미야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사용하셨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내린 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땅위의 모든 나라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시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이 나라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모두 올라가게 하여라”(역대하 36:23; 에스라 1:2,3)
에스라서에 에스라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라서 1-6장까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학사(제사장) '에스라'는 나오지 않습니다. 1차 포로귀환의 책임자였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BC 536년에 시작)하는데, 사마리아인들이 방해해서 520년까지 16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셔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을 격려해서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BC 516년에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에스라 1-6장 내용입니다.
@ 에스라서 1-6장 한 눈에 보기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게 하시고 울타리(성벽)를 주셨다! (9:9) | |
1차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1-6장)/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 |
1차 포로 귀환과 귀환자들 명단(1,2장) | 1차 포로 귀환(1장) |
포로 귀환자들 명단(2장) | |
성전 재건(3-6장) | 성전 재건 시작(3장) |
성전 건축 방해/ 중단(4장) | |
성전 건축 완공/ 봉헌식(5,6장) |
2차 포로 귀환 지도자인 에스라는 에스라서 7장부터 나옵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후손이기 때문에, 제사장입니다. 또한 에스라는 학사(탁월한 율법 학자)입니다. 2차 포로 귀환 때,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포로 생활하던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BC 458년이었으니까 1차 포로귀환 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고 나서 꽤 많은 기간이 지났지요.
에스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2차 포로 귀환(BC 458)은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 지 8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라가 이끈 2차 포로 귀환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은 지, 58년 되던 해에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는 58년의 시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기록한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는 1차 포로 귀환(BC 538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과 2차 포로 귀환(BC 458년: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기록한 책입니다.
에스라 1-6장 | 예루살렘 성전 다시 건축(Temple Rebuilding) |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아내가 되어 유다 백성들을 구원함 | |
에스라 7-10장 | 유다 백성들의 영적 재건(Spiritual Rebuilding) |
에스더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있었던 일이다.”(에 1:1) 뭐가요? 에스더가 왕후가 된 그 놀라운 일이 페르시아 제국 아하수에로 왕 때 있었던 역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아하수에로가 도대체 어떤 왕인지 알아야 합니다.
* 크세르크세스(Xerxes, BC 486-465, 아하수에로)
크세르크세스는 우리가 잘 아는 ‘아하수에로’의 그리스 식 이름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크샤얄산'에서 온 말인데, ‘영웅들의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아하수에로'로 나오지만 영어로 '크세르크세스'입니다. '크세르크세스'라는 명칭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먼저 사용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라 4:6절과 에스더 1:1,2절에 나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에스라 4:5,6)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부터 구스까지 127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에스라 1:1,2)
@ 페르시아 전쟁(그리스와의 세 번에 걸친 전투)
기원전 800년경부터 그리스는 지중해에서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식민지 건설과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의 세력 확대는 당시 오리엔트의 중심 세력이었던 페르시아와 불가피한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3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아래 내용은 “백투더 바이블 에스라-느헤미야서(그리심)”를 참고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페니키아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 서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아테네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에 저항했습니다. 페르시아가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 1세의 원정군이 그리스 본토까지 진출하려는 도중에 실패하고 돌아간 전쟁으로 BC 492년에 일어났습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 1세가 아테네를 응징할 목적으로 에게 해를 건너 아테네로 쳐들어간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리오가 수많은 군대를 데리고 쳐들어갔지만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이것이 BC 490년에 일어난 마라톤 전쟁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가 총력을 기울였던 전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상호 협력을 맺어 전쟁에 대처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군대를 괴멸시킨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은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쟁의 최종 승리는 그리스에 돌아갔습니다.
@ 3차 페르시아 전쟁(아하수에로가 페르시아 군대 지휘)
바벨론 반란을 진압한 후, BC 480년,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왕)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기 위해 사르디스(사데)를 출발했습니다. 육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거쳐 남하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는 테살리아 평원에서의 전투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최후 방어선으로 테르모필라이 협곡으로 정했습니다. 이 전투의 지휘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 연합군 7,000여명과 함께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2일 동안 페르시아 군대를 잘 막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의 한 배신자가 테르모필라이 협곡을 돌아가는 샛길을 알려줍니다. 배신자의 도움으로 협곡을 빠져 나온 페르시아 군은 스타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들을 죽이고 아테네 시내를 점령했지만 이미 아테네 시민은 살라미스로 피했습니다(BC 480년 9월).
실제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왕)
한편 페르시아 해군은 어떠했을까요? 이들은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그리스 해군을 무찌르고 다시 아테네 가까이에 육박했습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함대를 사로니코스 만에 가두어 놓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리스 사령관은 테미스토클레스(아테네를 해상 강국으로 만든 사람)였는데, 그는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여 살라미스 섬 근처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좁은 곳에 너무 많은 페르시아 함대가 묶여 있어서 움직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페르시아 배가 그리스 배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를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 함대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BC 480년 9월입니다. 이를 지켜본 크세르크세스 왕은 그의 장군 마르도니우스를 남겨 놓고 급히 본국으로 철수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은 본국으로 완전 철수하지 않고 그리스 동북부에 있는 테살리아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듬해,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 육군은 점차 남하하여 아테네 북동쪽 50Km지점인 플라타이아이 평원에 포진했습니다.
이 때, 그리스 군사들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였으며 병력은 약 3만 명 정도였습니다.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우스는 전략적인 실수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는 BC 479년 미칼레 전투에서도 참패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전투 후에 두 번의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결국 그리스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30년간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습니다.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아나톨리아 해안에 있는 이오니아계 도시 국가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공세를 폈는데 대체로 성공했습니다.
원정에 실패한 크세르크세스는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투는, 그리스에게는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투였지만, 강대국 페르시아에게는 제국 서쪽에서 벌어진 하나의 전투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스에게 졌다고 페르시아가 당장 망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후 크세르크세스는 외교와 매수로 그리스의 내분을 조장했는데, 이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 페르시아 전쟁 발발 원인
이오니아의 유력한 도시 밀레토스는 흑해 연안의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식민지는 에게해 방면의 포도주, 올리브유, 흑해 방면의 목재, 모피, 어류 혹은 노예 등을 무역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영향 때문에 이를 제지 당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키프로스 섬의 그리스 식민지가 이 반란에 가담했다.
이오니아의 반란은 다리우스 1세에 의해 일단 수습되었으나 다리우스는 재국 영내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의 배후 세력인 아테네, 에레트리아 등을 정복할 필요를 느끼고 대군을 파견했다. 이 사건이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오랫동안 계속된 페르시아 전쟁의 발화점이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아테네가 그리스 내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만들어졌습니다(BC 478년). 물론 주전 6세기에 폴리스 중에서 우세한 것은 스파르타였지만 페르시아 전쟁으로 아테네가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이런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스파르타 역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BC 431-404).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손을 잡고 경제적 원조를 받음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BC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승리를 인정하고(아테네 진영에 흑사병이 발생했고, 지도자 페르클레스가 사망함으로써) 가혹한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한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서 철수한 이후에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기거하면서 부왕이 시작한 건설에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한편 크세르크세스는 극도의 수치에 빠져 음탕한 생활을 탐닉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군대 장교들의 아내들을 포함하여 왕궁의 가장 아리따운 여인들과 유희에 빠졌습니다.
@ 에스더서 배경이 되는 사건들
BC 486 | 아하수에로(Xerxes)가 페르시아 통치 |
BC 484 | 페르시아의 모든 귀족들, 지방 관리들, 신하들 소집(에스더 1장) |
BC 483 | 모든 귀족, 지방 관리, 신하들과 6개월 동안 잔치(에스더 1장) ☞ 이때 왕후 와스디가 폐위(에스더 1장) |
BC 480 | 아하수에로가 그리스와의 전투(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고 돌아옴 ☞ 이때 새로운 왕후를 뽑게 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됨 |
에스더는 유대인이었지만 다른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시아 제국의 수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BC 538년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기간이 끝나고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세 수도들 중 하나인 수산에서 살았습니다. 수산은 바벨론에서 동쪽으로, 지금으로 보면 인도 근처입니다.
에스더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촌 오빠 모르드개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아하수에로 왕의 새로운 왕후가 된 여인이 에스더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은 한 마디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에스더서를 아무리 열심히 눈을 씻고 읽어봐도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도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 조차 에스더를 성경에 포함시켜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에스더서를 누가 기록했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은 '모르드개'가 에스더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에스더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사람, 페르시아 제국의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바로 '모르드개'였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는 러브 스토리가 아닙니다. 에스더서의 주제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성공한 유대인 이민자의 성공 스토리도 아닙니다. 에스더서를 읽을 때, 에스더라는 여인의 용기와 믿음, 출세와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에스더나 모르드개가 아닙니다.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에스더서에 한 번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이야기, 왕후 와스디의 이야기, 모르드개의 이야기, 하만이라는 악한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된 에스더서의 주제, 중심 내용은 조국을 떠나 살 수밖에 없지만, 죽음의 위협을 받고 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 일어난 모든 일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하수에로왕이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킨 것도, 왕후가 왕의 청을 거절하고 잔치자리에 안 나온 것도,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고개숙여 절하지 않는 것도, 하만이 장대를 세운 것도,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안 와서 궁중실록을 가져오게 해서 읽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각 사람 하만의 계략으로 페르시아 제국 내에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2월 13일(태양력으로 6월 13일) 하루 동안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는 모든 나라, 모든 도성에 사는 유다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왕의 조서가 공포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아도 된다는 조서가 왕의 이름으로 온 나라에 공포되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다 하만에게 인사했는데, 모르드개만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 때문에 열 받은 하만이 꾸민 일치고는 너무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내 맘에 안 든다고, 꼴 보기 싫다고 몽땅 다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놈이 정신이 바로 박힌 놈입니까? 결국 악한 하만은 자기 꾀에 넘어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장대에 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유다 백성들이 몰살당할 12월 13일 '죽음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에스더의 용기, 믿음 덕분에 몰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유다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때, 시작된 이스라엘의 축제/절기가 바로 부림절(the Feast of Purim)입니다. 부림은 '제비(주사위)'를 뜻하는 '부르'에서 나왔습니다. 하만이 보는 앞에서 ‘부르(제비)’를 던져서 유대인들을 모두 없앨 날짜를 정했습니다. 그날이 12월 13일이었습니다(에 3:6,7).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원래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는 그날이 원수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에스더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된 왕은 급히 조서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죽음의 날, 사망의 날, 절망의 날'은 '생명의 날, 구원의 날, 희망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그 날 이후, 지금도 유대인들은 해마다 12월 14,15일을 명절로 지킵니다.
“그날에 유대인들이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날에 유대인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뀌었으므로 모르드개는 그 이틀 동안을, 잔치를 벌리면서 기뻐하는 명절로 정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지키도록 지시했다”(에스더 9:21,22)
부림절(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귀한 날이지만, 에스더의 용기/믿음 있는 행동도 한 몫했습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가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이름이고, 히브리어 이름은 '하닷사'입니다(2:7).
페르시아 이름 '에스더'의 뜻은 ‘별’이고, 히브리어 이름 '하닷사'의 뜻은 아름다운 나무 ‘도금양’입니다. 도금양(myrtle)은 은매화, 하얀색 또는 분홍색 꽃과 검은색 열매가 열리는 상록수과의 관목입니다. 에스더는 이름의 뜻처럼 '별처럼 빛나는 사람'입니다.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주시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기적이 불같이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큰 불이 아니라 작은 믿음의 불씨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작은 불꽃을 큰 불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혼자 모든 일을 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기적을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현장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날, 에스더와 함께 기적을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 당신과 함께 기적을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거대한 세계사 - 흥하고 망하는 제국의 역사 - 의 물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죽음(절망)을 바꾸어 생명(소망)이 되게 하시고, 슬픔의 날을 기쁨의 날로 바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기록 목적/이유
1)예루살렘으로 돌아 오지 않은 사람들도 언약 백성임을 알게 하기 위해
2)이방 나라에서도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도록 도전하기 위해서
3)이방 나라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4)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5)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손길을 깨닫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6)유대인의 구원의 날, 부림절의 기원에 대해서 알게 하기 위해서
@ 이 책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품
1)숨어 계시지만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통치자 하나님
2)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3)역사(세계사)와 제국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4)이방인들도 구원하시는 하나님
5)신실하신 하나님
@ 에스더서 한 눈에 보기
나의 자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자리!(4:14) | |
유대인 공동체 몰살 위기 (1-4장) 에스더를 왕후로 세움 | 왕후 와스디의 폐위(1장) |
새 왕후 에스더 즉위(2장) | |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하만(3장) | |
자기 민족을 살리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4장) | |
유대인 공동체 구원받음 (5-10장) 하만 심판 ⟺ 모르드개 높임 | 에스더의 첫 번째 잔치(5:1-6:13)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음 |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6:14-8:17) 하만 나무에 달림 & 유대인을 위한 조서 | |
부림절(9:1-10:3) 유대인의 구원 & 모르드개 더 높아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