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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시험.
1. 기근은 회복될 기미가 없고 사 온 양식은 다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야곱이 지체하고(10절) 고집을 부린다고 해도, 형제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애굽에 감금되어 있는 아들 시므온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기근이라는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내려야하는 결정이었으며, 베냐민을 향한 애정 때문에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결국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맹세함으로 설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놓았고, 야곱 특유의 선물 전략(?)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언약 백성 전체를 테스트하고 계십니다.
2. 시므온을 애굽에 남겨둔 채 돌아온 형제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아버지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좌불안석이 아니었을까요? 이 시므온으로 인해 더욱 형제에 대한, 동족에 대한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나갈 공동체의식을 더욱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우리와“
3.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형제들의 마음을 이미 건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형제들을 대표해서 유다는 해결의 열쇠를 가진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맹세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다녀오겠다고 요청합니다. 시므온도, 그리고 베냐민도 반드시 지키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런 책임감이 과연 언제부터 그들에게 있었습니까? 어쩌면 유다와 형제들은 이런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그리고 이 시험과 고난에 대한 선택과 결정을 통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과 자세에 대해서 배워가고 있을 것입니다.
4. 형제들은 지난번 착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두 배의 돈을 가지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청지기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다시 그들의 마음에 깊이 잠겨있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었을 것입니다.
5. 또한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함께 식사를 하려고 인도받은 형제들은, 형제의 나이 순서대로 앉도록 배석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6. 요셉은 베냐민에게 형제들보다 5배를 주는 편애를 보임으로써 편애 받는 형제에 대한 그들의 시기심을 다시 한 번 테스트합니다. 첫 애굽 방문 이후 지금까지 베냐민을 위해서 자기 두 아들의 생명을 내어놓겠다고 한 르우벤이나, 그를 위해서 자신이 죄를 다 뒤집어쓰겠다고 맹세한 유다나,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 있어서 지난 시간들은 팔아버린 형제 요셉과, 잊혀진 형제 시므온, 그리고 열쇠를 쥐고 있는 베냐민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7.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시험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부추김을 받는 우리의 시기심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며 자족함을 배우기까지는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육신의 욕망일 것입니다. 자족함, 만족함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코 믿음 안에서 기쁨을 온전하게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8.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셔서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름답게 빚어 가시려고 조각칼을 대십니다. 하나님의 테스트는 대부분 단기 시험이지 않고, 장기적으로 오래 바라보시면서 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야곱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형제들을 기다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을 시험하고 단련하기 위해 만지고 계시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지금 당신이 만나고 있는 그 시험이, 바로 당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며, 그 약한 부분을 더욱 단련하셔서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조각칼을 대서 아프지만, 그 손길이 지나가면 우리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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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7년의 풍년 후 극심한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었기에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갑니다. 형들은 만난 요셉은 자신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가며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시므온을 애굽에 남겨둔 채 아홉 명만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43장은 42장에 나오는 애굽으로 간 첫 번째 여행을 기초로 벌어지는 일이고, 44장에 나오는 사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3장은 장들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43장이 앞장과 뒷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만, 제 입장에서 말하면 설교하기에 애매한 본문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 애매함을 극복하기 위해, 저는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형들에게 조금 더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은 해결해야 하는 까다로운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을 단어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어떤 단어를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 단어를 말할 수 있겠지만, 세 단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므온, 양식, 베냐민’ 형들은 애굽에서 시므온을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흉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양식이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 야곱의 반대로부터 베냐민을 구해야 합니다. 시므온을 구하고 양식을 구하고 베냐민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형들을 볼 수 있는데, 시므온과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두고 이미 아버지 야곱과 아들 르우벤의 설전이 있었는데, 결과는 아버지의 승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두고 부자간의 설전이 한 번 더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흉년은 계속되었고 양식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애굽으로 가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1-2)
이렇게 해서 또 한 번의 대결이 시작되는데 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3) 대결 상대가 바뀌었습니다. 지난 번 대화에서 르우벤이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실패했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다가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아버지와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유다는 아버지에게 요셉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가 들었던 말을 반복하며, 그 경고의 말을 강조합니다.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5) 요셉이 형들에게 했던 말을 반복해서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안 해도 되는 말, 왜 또 다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말했는지 따지면서 원망도 해보지만 이제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유다는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립니다.
유다는 세 가지 사실을 언급하면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는 방법입니다. 세 가지를 보면 첫째,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8) 먼저 유다는 아버지가 허락했을 때 얻게 되는 유익을 언급합니다. 지금 3대가 위험에 처해있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의 손자들까지 다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시면 우리 모두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아버지가 계속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국 우리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9) 다음으로 유다는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걱정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며 만약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베냐민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셋째는 10절입니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10) 마지막으로 유다는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음으로 겪고 있는 현재 상황을 평가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허락했다면 벌써 이 일은 마무리 되었을 것이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아버지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내키지 않았지만 가족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위험한 일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은 아버지의 허락하심을 얻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라고 무시하거나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몰래 베냐민을 데리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일인데 아버지가 고집을 피운다면서 말다툼을 벌이며 아버지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곡식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렸고, 아버지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일을 진행합니다.
전에 야곱의 아들들은 어떠했습니까? 여동생 디나의 일로 아버지를 몰래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렀고, 요셉을 팔아버리고 아버지를 거짓말로 속이기도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확실히 전과는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한 야곱은 지혜를 발휘하는데, 그것은 빈손으로 가지 말고 예물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이 했었던 선물 작전입니다. 야곱이 말하는 선물의 목록입니다. ‘유향과 꿀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 가나안에서 나는 특산물은 물론, 귀한 수입품까지 선물로 준비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방문 때의 돈을 두 배로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전에 가져왔던 곡식의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야곱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고, 베냐민이 잘못될까봐 불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 의지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4) 야곱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만약 베냐민을 잃게 되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으니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
이렇게 해서 요셉의 형들은 베냐민과 함께 그리고 여러 예물과 갑절의 돈을 가지고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형들은 멀리 애굽까지 내려오면서 어떤 일을 예상하고 왔을까요?
첫 번째 방문에는 예상치 못한 죄인 취급을 받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방문에는 완전 반대로 예상하지 못한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형들은 애굽에 올 때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을 만나는 겁니다. 애굽의 총리가 정탐꾼으로 죄인 취급 받던 자들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형들에게는 정말 뜻밖에 일입니다. 총리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고 정탐꾼이 아닌 것을 밝히며 거듭해서 억울함을 호소해야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왠지 모르게 불안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서 특별한 곳으로 가게 되니까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18)
그래서 형들은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부터 청지기에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합니다. 지난번에 양식을 가지고 가다가 보니 각자의 돈이 그대로 자루에 있었다며 지금 그 돈을 다시 가져왔고, 양식을 사기 위해 또 다른 돈을 추가로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청지기가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23) 청지기는 자루에 있던 돈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고, 너희가 값으로 지불한 돈은 이미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동안 잡혀있었던 시므온도 풀어줍니다. 이전과 달라도 너무 달라졌습니다. 애굽이 변했습니다. 다들 천사로 변한 것 같습니다.
그 때 요셉이 들어오고 요셉의 형제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가지고 온 예물을 요셉에게 줍니다. 베냐민을 포함한 요셉의 모든 형제가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며 베냐민을 바라봅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
베냐민을 만난 요셉, 동생을 축복한 요셉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올라서 울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요셉은 마음을 추스르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음식을 먹도록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지금 애굽의 총리 집에서, 총리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식사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배정된 자리에 앉고 보니 어떻게 나이 순서대로 앉은 겁니다. 얼굴에 나이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노안인 사람, 반대로 동안인 사람, 겉늙은 사람, 애늙은 사람. 이럴 수 있습니다. ‘네가 동생이야? 큰형처럼 보이는데’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지만, 네 명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열 한명입니다.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마지막 순서인 막내 베냐민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열 한 명을 나이 순서대로 앉힐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나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정확히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이니까 형제들은 또 다시 서로 이상히 여기게 됩니다.
형제들이 애굽에 와서 겪는 일은 계속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서프라이즈 애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걱정했었는데 막상 애굽에 와서 보니 아닙니다. 전에 왔을 때는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아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정탐꾼’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총리의 집에 초대를 받은 상황에서 지난번 자루에 들어 있었던 돈은 하나님이 주신 거라는 합니다. 총리가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나이 순서대로 자리를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온통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일이 추가되는데 베냐민이 특별히 다섯 배나 더 많은 음식을 받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형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합니다. 모든 걱정을 떨쳐버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사실 요셉이 베냐민에게 더 많은 음식을 준 것은 형들의 주의를 끌려는 의도입니다. 만약 형들이 여전히 동생이 받고 있는 편애에 대해서 질투하고 있다면, 분명히 이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을 때 불편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동생을 향한 미움의 마음을 또다시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단지 대상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베냐민이 또 다른 요셉이 된 것뿐입니다. 요셉은 이럴 때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형들이 달라졌습니다. 이 일에 대해 특별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받은 것으로 함께 즐거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애굽에서의 하루가 문제없이 마무리 됩니다. 형들은 평안히 영접을 받았고 시므온도 풀려났습니다. 자루에 있던 돈도 잘 해명되었고 하나님의 선물로 정리되었습니다. 애굽에서의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곡식을 가지고 베냐민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임무 완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드라마가 그렇습니다.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겁니다. 계속 긴장하면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서프라이즈가 남아있습니다. 진짜 시험은 아직 입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모든 일은 이 시험을 위한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형들을 위해 계획하고 준비한 시험입니다. 그러니 진짜 어려운 시험이겠죠? 이제 형들은 이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시험에 대해서 형들은 어떤 결과를 받게 될까요? 시험에 잘 통과할 수 있을까요?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형들을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형들이 달라졌어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형들의 모습을 보면, 베냐민에게 화가 미치면 자신이 처벌 받겠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책임을 집니다. 또한 감옥에 있는 자기 형제를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자기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을 보상하려는 정직한 태도를 가집니다. 그리고 베냐민이 더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전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형들이 왜 변했나요? 무엇이 그들을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분명 저절로 그냥 된 것은 아닐 텐데, 무엇이 이들을 변하게 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말할 때, 꼭 언급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마다 이것을 알려주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몇몇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14) 야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합니다.
요셉의 청지기가 말합니다.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23) 청지기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공급하셨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 요셉은 하나님이 베냐민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합니다. 모두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음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하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말했고, 요셉이 말했고, 심지어 요셉의 청지기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요셉의 형들은 아닐까요? 형들만 빼고 다른 사람들만 이렇게 말했던 걸까요? 우리가 43장을 좀 더 넓은 문맥에서 42장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43장이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고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42장과 같이 보면, 42장28절에 형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42:28)
형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사람들의 언급이 계속해서 그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화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강조됩니다. 이것이 그들을 변하게 만든 원인이며, 변할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보상하며, 자신의 몫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함으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태도를 취하고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그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달라집니다.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나의 삶에 직접 개입하심을 알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하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그분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나의 삶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이 내 삶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다 아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맞춤형으로 가장 알맞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했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베냐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할 때 그 외의 것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답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로 내가 원하는 않는 결과를 얻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 것으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이 주신 결과에 만족하며 그 결과를 두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신 답과 다른 사람에게 주신 답을 두고 질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주권에 따라 각자에게 맞는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그 모든 일을 나의 성숙의 기회로 삼고,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고 내 삶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함으로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살아계심 앞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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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구약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특별히 그의 생애는 예수님의 생애와 매우 닮았습니다. 17세에 형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노예가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13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이 그를 높여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모진 수난 끝에 영광을 얻게 되셨습니다.
반면에 야곱의 가족들은 많은 점에서 ‘죄에 빠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양곡이 차고 넘쳤지만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기근으로 굶어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기근으로 굶어죽을 상황이 되어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요셉에게 돌아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이 살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한 것 같아 보여도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의 가족을 요셉에게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를, 그리고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의 반응을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압박과 사랑
하나님은 압박과 사랑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창세기 43장 1-14절에 기록된 압박의 방법과 15-34절에 기록된 사랑의 방법입니다. 먼저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 가지 면에서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 압박은 그들이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한 압박이었습니다.
첫째, 상황의 압박(Pressure of Circumstances)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기근에 처해 굶어죽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42장에 기록되어 있는 애굽 1차 방문 때 얻어온 양곡은 이미 동이 났습니다. 기근이 곧 끝나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지만 얻어온 양곡을 다 먹을 때까지 기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근의 때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를 내릴 수도 없고 양곡을 심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애굽이라도 가야만 합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애굽의 총리라 해도 봐야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양곡을 구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황의 압박, 즉 기근의 압박이었습니다.
둘째, 사람의 압박입니다.
애굽 1차 방문 시에 야곱의 아들들은 둘째 형 시므온을 인질로 내주고 말았습니다. 지금 애굽에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애굽에 다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아우가 있다고 말을 하지 아니했느냐? 그런데 너희 아우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인질이 된 시므온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양곡을 얻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해결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양심이 그들을 압박했습니다.
양심의 압박(Pressure of Conscience)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을 1차 방문했을 때에 양곡을 위한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여관에 와서 자루를 열어보니 자기들 자루에 양곡도 가득 들었고, 지불했던 돈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도둑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서 총리에게 자신들의 무고함을 변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19-22절)
이처럼 그들이 애굽에 2차 방문을 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요셉의 청지기를 만나서 그 돈에 대한 해명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양심이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해명에 대해 요셉의 청지기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너희의 돈은 내가 이미 받았고, 그 돈은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말 속에서 요셉의 신앙적 영향력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규모가 있는 사업을 경영하거나 수하에 많은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 그들의 언행 속에서 ‘사장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셉처럼 복되고 거룩한 영향력을 미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사장님이 믿는 예수라면 이가 갈린다는 말이 나와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세 가지 압박, 즉 상황의 압박, 사람의 압박, 양심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압박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을 압박한 것이 상황, 사람, 양심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압박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사람의 주관아래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압박하시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박의 방법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법도 사용하십니다.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의 방법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 총리인 요셉에게 나아왔을 때 사랑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청지기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인도하여 내 집으로 들이라!” 총리가 자기 집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잡고 요리를 하라.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먹을 것이니라!”
누가 총리 공관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단순히 양곡을 얻으러 온 사람이 어떻게 총리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총리의 비서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애굽 총리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들이고 짐승을 잡아 요리를 해서 대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께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의 환대입니까? 그러나 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의 아들들은 총리의 호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18절)
요셉이 자기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고 당나귀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가진 애굽의 총리가 보잘 것 없는 당나귀를 탐낼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낙타의 가치에 절반도 안 되는 자신들의 당나귀를 탐낸다고 총리의 호의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의심한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악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이기적이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요셉을 봐도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은 총리의 극진한 사랑의 환대를 받았지만 그것을 의심하고 자기들의 당나귀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하면 하나님은 내가 가진 것이 탐이 나서 빼앗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하고 의심을 합니다.
요셉은 드디어 형제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현실적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습니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7-28절)
요셉은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고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냐고 물어봅니다. 형제들의 대답을 듣기 전에 요셉은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복을 빌어 주고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30절)
요셉은 급히 안방에 들어가 울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베냐민을 그리워했으면 울었겠습니까? 그리움의 눈물이요, 사랑의 눈물입니다. 참으로 감격적인 눈물입니다. 요셉이 다 울고 나서 감정을 억제하고 얼굴을 씻고 나와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이 순간까지도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애굽의 총리가 어떤 분이기에 자기들에게 이렇게 귀한 음식을 베풀어주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요셉은 식탁에 형들을 앉힙니다. 그런데 장유(長幼)의 순서대로 정확하게 앉혔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요셉 자신이 앉고, 베냐민이 앉았습니다. 12명을 순서대로 앉혔습니다. 자신을 제외하면 11명 아닙니까? 여러분, 11명이나 되는 형제를 순서대로 맞힐 수 있는 확률이 몇 퍼센트입니까? 장남을 맞출 확률은 1/10입니다. 차남을 맞출 확률도 1/10입니다. 그러므로 11명 아들의 장유순서를 맞출 확률은 곱해서 10의 11승 분의 1의 확률입니다. 엄청나게 어려운 것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한 여자의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네 여자가 낳은 자녀들이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터울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음식을 풍성하게 주고, 막내에게는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그것도 요셉이 형들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 가운데 아무도 “총리님, 질문 있습니다! 어째서 막내에게만 다섯 배를 주시는 겁니까?”라고 따지는, 그런 경우 없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아우 베냐민에게 다섯 배를 주어도 시기심을 발하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기근 가운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다 죽을 줄 알았는데, 막내아우가 다섯 배를 먹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과거에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을 때 그 형들이 그를 시기 질투하여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형들이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사 존 스토트(John Stott)가 회중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교회를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들의 대답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며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복된 소식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사랑 때문에 교회를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압박도 중요하지만 사랑에 훨씬 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에도 행인의 겉옷을 벗기기 위해 서로 힘을 자랑하며 다투었던 북풍과 태양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겉옷을 벗길 때 강한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더욱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압박을 하기도 하시지만 더불어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섯 배 이상의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야곱과 아들들의 반응
하나님은 압박과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야곱의 아들들을 요셉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야곱과 그 아들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째,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 야곱이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고 하다가, 이러다가 모두 다 죽을 판이니 베냐민이 죽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국을 이판사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면 다 죽는데, 베냐민을 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생각으로 제정신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11-13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으면 죽었지 베냐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티던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굴복하게 된 것입니다. 압박이 가해질 때는 굴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판단입니다. 강한 압박이 계속 되는데도 버티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야곱은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장남은 르우벤이었지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2장 37절에 “르우벤이 아버지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남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막내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내 아들 둘을 죽이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두 명의 손자를 죽이라는 말은 정신이 나간 말입니다. 그러니 르우벤은 형제들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제정신을 차리더니 창세기 43장 8절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8절)
르우벤은 자기 자식들에게 책임을 지운 반면 유다는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을 합니다. 유다가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유다도 사실 창세기 38장에서 엄청난 짓을 저질렀던 사람 아닙니까? 이방 여인가운데 창기를 찾아다니다가 자기 며느리를 창기인 줄 알고 범한 것이 유다 아닙니까? 아주 정신 나간 짓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되어 제정신 차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의아한 것은 창세기 42장에는 야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창세기 43장에 야곱이 정신을 차리니까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과 유다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4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기도가 나왔던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엘사댜이(El-Shaddai)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이는 아브라함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창 17:1).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우리 아들들을 하나도 죽지 않고 돌려보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돌려보내 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혹 자식을 잃게 하시면 나는 잃겠다고 완전히 포기하고 맡기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셋째, 야곱은 하나님의 긍휼(Mercy)을 의지하였습니다.
택하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긍휼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14절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야곱은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 주심을 믿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 가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3. 요셉의 인생의 연출자이신 하나님
요셉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는 압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생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진 것도 형들이 한 일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린 것도 미디안 상인들이 판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도 보디발 장군이 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도 애굽 왕 바로가 시킨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두 번의 애굽 여행을 통해서 양곡도 얻고, 요셉과의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과 역사는 마치 연극과 비슷합니다. 연극배우들이 무대에서 각자 맡은 연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배우들의 배후에는 연극을 연출하는 연출가가 있어서 모두 지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사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나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3장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의 심한 감정의 기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워하다가 안심하다가, 이상히 여기다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본문도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나타난 부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형제들이 울거나 웃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간에 요셉의 계획과 의도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형제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화목해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궁무진한 축복을 내려주고자 하는 것이 요셉의 의도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을 통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배후에는 변함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유익과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 신앙이 주는 큰 위안입니다. 요셉은 이 신앙을 가지고 어떤 역경에도 잘 참고 이겨냈습니다. 창세기 50장에 섭리 신앙에 대한 요셉의 분명한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둘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어느 시점까지는 숨겨져 있습니다.
“내 계획은 이런 것이다!” 하시면서 다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들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 섭리를 다 알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섭리의 목적은 영원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다”라는 정도만 알려주실 뿐입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29-31절)
동생 베냐민을 몇 년 만에 만난 것입니까? 22년 만에 만났습니다. 30절에 보니까 마음이 타는 듯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방으로 들어가서 실컷 울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씻고,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고 하고 나옵니다.
우리는 요셉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면의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영적인 각성이요, 형제들끼리의 화목이요, 나아가 가족 전체의 구원이요, 자기를 통해서 가족에서 수없이 많은 축복을 부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한다면 죄를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털어 놓고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아보려고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성업하는 비즈니스가 있는데 그것은 ‘점(占)’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미래에는 무엇이 일어날까를 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어느 때까지는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숨겨 두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알면 무슨 재미와 유익이 있겠습니까? 영화를 봐도 옆에 앉은 사람이 스토리를 다 이야기해 주면 얼마나 재미가 없습니까? 우리는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저 현재 충실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은 힌트처럼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 섭리의 커튼을 잠깐 열어서 잠깐잠깐 보여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요셉이 점심 초대를 해놓고 형제들을 장유(長幼)의 차서대로 앉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열둘이 있다면 가끔 그 아들들의 순서가 헷갈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을 장유의 차서대로 앉혔다는 것은 요셉이 힌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눈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장유의 순서를 알고 있고 허구한 날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우리와 신앙도 같고 우리의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자꾸 묻고 하니 우리를 해치지는 않겠구나!’라고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숨겨 놓으셨지만 가끔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죽기 전에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 후에 돌아가시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하나님께서 힌트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해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총리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는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요셉 때문입니다. 요셉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로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왜 이러한 환대를 받는지도 모른 채 호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누구 때문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제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가는 길이 천국 길인지, 지옥 길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가야 살게 되는 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죄인들은 예수께로 와야 삽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죄인들을 압박과 사랑을 통해 예수께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오면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로 나아온 자들에게 세 가지 복을 주십니다. 첫째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죄의 복(Blessing of Forgiveness)이고, 둘째는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는 칭의의 복(Blessing of Justification)이며, 셋째는 살아가면서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화친의 복(Blessing of Reconciliation)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압박이 있으십니까? 예수께로 나오라는 부르심입니다. 나는 이미 나왔는데도 압박이 있습니까? 그것은 더욱 가까이 나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죄를 짓지 말고 가까이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그가 널리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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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양식 자루를 들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자루를 풀었는데 그 속에 돈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시므온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고자 한다며 분노합니다. 르우벤이 야곱에게 두 아들의 목숨을 걸고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지만, 절대 그 아이만은 보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져 갑니다.
유다의 설득(1-10절)
(1-2)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야곱의 가정에 닥친 기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이기에 지나고 나면 그 의미와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든 기근 곧 영적인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또다시 찾아온 위기 앞에서 자녀들에게 해결을 촉구하지만, 족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유다가 설득합니다.
(3-5)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야곱은 모두가 원하는 그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현재 볼모로 잡혀 있는 시므온도 살아 돌아올 수 없고, 양식도 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가족 공동체 모두가 생명을 잃을 위기 앞에 있지만, 자신의 상처와 과거의 아픔에 얽매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야곱의 모습을 봅니다. 위기 속에서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 판단 능력, 바른 의사결정, 그리고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많은 경험과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크리스천 리더에게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안목과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아들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왜 자신을 괴롭게 하느냐고 하소연합니다.
(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6절에서 야곱이란 이름 대신 이스라엘을 사용한 것은 이 말씀이 언약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 야곱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순종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참다못한 아들들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7)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본래는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정탐꾼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먼저 자신들의 처지와 가정 상황을 이야기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애굽 총리가 조목조목 자세하게 먼저 물어봤다는 사실을 호소하듯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셉이 아버지와 집안 상황이 궁금하여 자세히 물어봤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자신들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는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아버지 야곱을 설득합니다.
(8-10)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유다는 스스로 자신이 담보가 될 각오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손에서 그를 찾으시라는 말은 막내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다시 오겠다는 강한 확신과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영원히 죄를 지겠다는 것은 만일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다 자신의 남은 평생에 아버지 앞에 죄인으로 살면서 그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의 표현입니다.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야곱을 설득했지만,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과거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상인들에게 팔 때도 르우벤이 나서서 성공하지 못한 것을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의 생명을 죽음에 이르지 않게 했던 것과 유사한 장면입니다. 왜 유다가 전면에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했는가에 대한 의견은 이러합니다. 르우벤은 이미 빌하를 범함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상태이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죽이는 죄를 범했고 더욱이 시므온은 지금 애굽에 있기 때문에 유다가 실제적인 장자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헌신한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희생은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새로운 생명을 낳게 되는 것이며, 생명을 살리는 길이 됩니다. 이러한 희생의 각오가 있었기에 야곱의 마음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꾼 야곱이 드디어 아들들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다녀오라는 말을 합니다.
야곱의 결단(11-15절)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야곱은 애굽 총리를 잘 설득하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치밀한 계획을 말해 줍니다. 당시 주식으로 먹을 것은 없었지만 가나안 땅의 갖가지 향품과 나무 열매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요셉이 몰래 넣어 두었던 자루의 돈까지 다시 챙겨서 갖다주므로 확실한 자, 곧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합니다. 애굽을 정탐하러 온 사람들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는 정직한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입니다. 여러 지침을 이야기한 후 맨 마지막에 베냐민을 함께 보낼 것을 이야기합니다.
(13-14)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베냐민마저 잃을까 큰 근심 속에 있던 야곱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를 보내기로 합니다. 체념 섞인 결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라는 고백과 함께 결단을 내립니다. 이러한 야곱의 고백과 삶의 결단은 우리의 삶에서도 필요합니다. 어떠한 일 앞에서, 또는 교회 사역을 감당할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소망하는 믿음과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용기와 결단,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 나의 삶에서 믿음이 필요한 영역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야곱과 같이 믿음으로 결단하며 용기 있게 행동하며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또 한 가지는, 서로의 생명이 붙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잃었던 야곱이 베냐민을 보호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상황이 베냐민만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양식의 문제는 모두가 같이 죽거나 같이 사는 연대감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가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은 베냐민에게 있고 베냐민의 생명은 요셉의 손에 있습니다. 유다의 생명은 다시 베냐민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생명은 그들의 리더 유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면서 교회 공동체를 또한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에, 교회는 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연결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애굽으로 내려가는 형제들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난날의 과오와 또한 시므온을 데리고 올 수 있을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막내 베냐민과 함께 길을 걷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죄는 항상 그 결과와 대가가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후 요셉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선으로 바꾸셔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한 나라를 세워가는 과정으로 선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구약의 예언대로 오시고 그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믿는 자의 삶과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온전히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은혜의 말씀을 더욱 더 기억하며, 그 말씀이 우리 삶을 비추고 인도해 주심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귀한 한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냐민을 만나다
곡식을 구입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갔던 요셉의 형제들은 기근이 지속되자 막내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시점이 지난 상황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형제들의 막내를 데리고 와야만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놓은 상태였지만 아버지 야곱은 막내아들 베냐민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심해지자 넷째아들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만 식량을 살 수 있다고 간곡히 말씀드려 베냐민의 동행을 허락받았습니다. 마침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동생 베냐민이 요셉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16절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요셉이 동생 베냐민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2년 전이었습니다. 베냐민이 갓난아기일 때 헤어졌기에 청년이 된 동생의 얼굴을 알지 못한 요셉은 형제들을 보자마자 베냐민부터 찾았습니다. 그리고 무리 중 가장 젊은이를 베냐민으로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동생이 눈앞에 있지만 요셉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청지기에게 점심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마치 잔치를 하듯 짐승을 잡도록 명령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만난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먼 길을 온 형제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시켰지만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8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요셉의 형제들은 기근에 곡식을 구하러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터인데 자신들처럼 이방의 한 가문 사람들을 총리 집으로 안내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첫 번째 곡식을 구입하고 난 이후 발생했었던 일, 즉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보았던 일과 곡식 자루에 자신들이 지불했던 돈이 발견된 일, 그래서 시므온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던 일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를 향해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19절에서 22절입니다.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뿌리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온 요셉의 형제들은 지난번 일에 대해 변명하며 자신들을 변호하기 바빴습니다. 총리의 집 가까이 오자 형제들은 자신들이 총리의 집에 억류되거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청지기를 ‘내 주여’라고 부르며 자신들에게 죄가 없음을 변명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요셉의 청지기는 불안으로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23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청지기의 답변을 통해 그도 요셉의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집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철저히 훈련했음을 암시합니다. 예상 밖의 사람 청지기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요셉 형제들을 안심시키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계십니다. 청지기는 요셉의 형제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인질로 잡혀있던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데려왔습니다. 비록 인질이었지만 매우 평안한 생활을 해 왔을 시므온은 형제들과 반가운 만남을 가진 후 해를 당할까 염려하는 형제들을 안심시켰을 것입니다. 이때까지 시므온도 총리 요셉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청지기는 형제들을 요셉의 집으로 안내한 후에 발을 씻게 해 주었습니다. 당시에 손님을 접대하던 관례가 발을 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청지기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그들의 발을 씻게 하며 평안으로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타고 온 나귀까지 챙겨주었습니다.
마침내 정오가 되자 요셉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6절입니다.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형제들의 절을 받고있는 요셉이 열 일곱 살 때 꾸었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애굽으로 팔려와 종살이하고, 옥살이하는 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오래전 꿈은 요셉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렇게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꾸었던 꿈 이야기는 형제들의 시기를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요셉에게는 힘들고 고단하고 억울한 삶이었지만 한 인간의 일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일생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끄셨습니다.
형제들의 안부를 물은 후에 요셉은 자기를 가장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의 평안을 물으며 생존해 계심을 확인하였습니다. 130세에 이른 아버지 야곱이 살아만 계셔도 좋겠다는 소망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 라헬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바라보았습니다. 29절입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은 베냐민을 ‘소자’라고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었습니다. ‘소자’는 문자적으로 ‘아들’ 또는 ‘손자’, ‘아이’, ‘소년’이라는 뜻이지만 손아래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인 베냐민을 친근감에 겨워 그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냐민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전한 요셉은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마음이 북받쳤다는 것은 심장이 녹아내릴 정도의 고통, 창자를 스스로 태우는 듯한 고통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심장이 녹아내릴 정도의 괴로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요셉은 급히 울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공간인 안방으로 들어가 울었습니다. 요셉의 울음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마음을 진정시킨 요셉은 음식을 차리라 명령합니다. 31~32절입니다.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시종들은 세 개의 상을 차렸습니다. 요셉을 위한 상과 요셉의 형제들을 위한 상, 그리고 배식하는 애굽 사람들을 위한 상입니다. 이렇게 상을 따로 차린 이유는 애굽 총리 요셉의 신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고, 애굽 사람들은 애굽 종교를 숭배하지 않는 이방인, 특히 히브리인과는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인이 사육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한 도구나 식기조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신들을 위해 차려진 상 앞에 앉았는데 요셉 앞에 앉은 형제들의 자리가 나이 순서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 것을 보고 서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형제들이 서로 이상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연히 배치된 자리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정확한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요셉의 의도된 행위였지만 형제들은 애굽 총리가 점을 잘 치는 사람이거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상황은 이상했지만 정탐꾼으로 몰리거나 자신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상황이 아닌 지극한 환대에 그들은 즐거운 식사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요셉은 자신의 음식을 다른 형제들보다 베냐민에게 다섯 배나 더 나눠주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행동은 실제로 베냐민에게 더 많은 음식을 먹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손님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고대 근동의 상징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에게 다섯 배나 더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보고도 형제들은 어린 시절 요셉 자신에게 보였던 시기심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요셉이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형들이 아직도 형제간에 우애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더 환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형제들에게서는 더 이상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마시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34절입니다.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본 요셉은 편애받던 자신을 팔아넘기던 형제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회개하고,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총리 요셉의 인생도 순탄한 인생이 아니었지만 기근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까지 오게 된 형제들 역시 고단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지난 행동을 심판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기회를 틈타 휘두르려고 칼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샬롬을 살아가고 있는 요셉을 보며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샬롬, 평화의 사람으로 살 것을 주님께서 부탁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가 평화를 구현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통해 믿음의 성숙을 이루어드리는 오늘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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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기근이 깊어갔습니다. 땅의 기근은 곧 양식의 부재였고, 먹어야 사는 인간에게는 양식의 부재는 생명의 위협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말합니다. 넉넉히도 아닌 ‘조금’은 생명을 연명할 정도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지난번 애굽에 다녀온 아들들이 전해준 상황을 전해들어, 다시 애굽에 가게 된다면 막내아들 베냐민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도 아들들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덮어두었던 일이건만, 기근은 그들을 선택의 벼랑 끝으로 몰아갑니다. 이후 3절부터 14절까지의 대화는, 베냐민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야곱과 아들들의 괴로운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결국 야곱의 결단으로 맺어집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4절).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아넘겼던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의 일 이후에 얼마나 상심한 채 살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22년의 세월이 더 흘러가도록 가슴에 묻은 자식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형들인들 어찌 야속한 마음만 들었겠습니까. 그렇게 요셉을 잃고선 베냐민을 붙들고 살아갔던 야곱을 곁에서 보아왔던 형제들의 마음은 요셉을 팔던 때와 같지 않습니다. 베냐민을 팔아서라도 우리가 기근 속에 살겠다는 마음은 느껴지지 않고 채무감과 책임감이 더욱 짙게 느껴집니다. 9절에 쓰인 유다의 말을 들어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으리이다”.
이처럼 본문에는 베냐민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내어놓는 야곱과 그 아버지를 이해하여 아버지의 희망인 베냐민을 지키고자하는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2년의 세월을 지내며,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야곱의 아들들은 이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더욱 이해하는 모습입니다. 이전과 다른 아들들의 마음을 느꼈기에, 야곱도 마지막 희망인 베냐민을 그들의 손에 맡겨 애굽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이들이 마주한 상황은 위급한 기근이지만, 야곱 가정 안에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커져있음을 보게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기근이, 야곱의 가정에 해묵은 갈등을 풀어가는 시간이 되니, 이 가정에게 기근은 배고픔 보다도 화해와 회복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표면적 기근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야곱가정의 화해와 회복의 드라마는 요셉에게도 계속됩니다.
형들의 모습이 자신을 팔던 때와 같았다면 요셉 또한 형들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형들을 용서하였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은 형들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치미는 분노를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사다난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요셉과 형들을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준비시켜주셨습니다. 16절부터 34절까지의 본문은 요셉과 형들의 용서하고 용서받는 대서사시의 서두와도 같습니다. 본문에서 형들은 요셉의 집으로 안내를 받습니다(16-17절). 이 때 형들의 마음 상태는 두려움입니다. 애굽총리의 집으로 인도받는 까닭을 알리없는 형들은 두려움에 청지기를 잡고 구구절절 사정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청지기를 통해 들리는 말은 23절 상반절과 같습니다.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마주했을 때 두려워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이를 향한 평화의 선포는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 여정에 늘 있는 모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말씀을 의지하여 한걸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형들을 이끄셨고, 이제 베냐민과 요셉의 재회를 통해 요셉의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 30절입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두려움을 가지고 한걸음씩 걸어가는 형들과 사랑으로 눈물흘리는 요셉,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이곳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인간이 자아낸 불행’과 어찌할 수 없는 ‘기근’ 속에 고통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인간의 불행과 어찌할 수 없는 기근 속에서도, 당신의 이야기를 펼쳐가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인간이 자아낸 불행’과 ‘기근’ 속에서도 새로운 마음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형들의 만남을 준비시키시고 인도하셨듯,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제와 우리 가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시대 속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펼쳐가시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그 하나님을 따라 두려운 마음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간 그리스도인에게, 오늘 이 시대는 다르게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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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성경(66권)에서 첫 번째 책이기에 주목을 받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가 내러티브(Narrative)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러티브는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 관계로 엮어진 실제 혹은 허구적인 사건들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러티브란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허구적인 사건을 연결하는 소설이 아닌 실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내러티브를 읽으면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창세기를 아주 많이 읽었어도 전개가 흥미진진하여 독자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문학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창세기를 문학서로 비유하여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가 이야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내러티브를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최소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타락한 인간, 그리고 한 민족을 선택하여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알게 됩니다. 창세기 내러티브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11장까지인데 창조와 인간의 기원, 인류의 타락, 그리고 전개되는 악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12장부터 마지막장인 50장까지인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11:27-25:11), 야곱(25:12-37:1), 요셉(37-50장)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43장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 중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요셉의 이야기 속에 야곱의 가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43장은 생사기로에 놓인 야곱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이야기의 일부분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큰 위기를 직면하게 됩니다.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갖게 하는 대목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제외한 그의 아들들과의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들들의 대표로는 유다가 등장합니다. 1절에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기근의 기간은 7년인데 이는 요셉을 통해 예고되었던 바 앞으로 5년의 기근이 더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야곱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야곱은 지난 번에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가 아들들에게 양식을 더 구해 올 것을 말합니다.
아들들도 곡식이 떨어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곡식을 살 돈이 있어도 구입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았기에 아버지와 논쟁을 벌입니다. 아우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곡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너희 아우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던 말을 아버지께 상기시키며 베냐민을 동행시키도록 요청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왜 아우가 있다고 해서 나를 괴롭게 하느냐’고 유다를 꾸중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이것 저것 따져가며 원망하게 됩니다. ‘왜 그 때 그렇게 했느냐’는 식입니다. 야곱의 푸념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야 이놈들아 왜 베냐민이 있다고 말해서 일을 어렵게 만드느냐’라고 자식들에게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야곱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집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었는데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마지막으로 남은 소생 베냐민마저 잃을 것 같으니 야곱은 불안감에 휩싸여 많은 번민에 괴로워하였으리라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야곱은 대가족을 이끌어가는 가장으로 다른 식구들의 생존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아들 유다의 호소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맙니다. 유다의 호소가 8절입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야곱은 손자 손녀를 포함한 처자식을 살릴 결단을 하게 됩니다. 애굽 총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귀한 선물을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지난 번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곡식 을 구입하려고 가져갔던 돈이 집에 돌아와 보니 곡식 자루에 그대로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돈의 두 배를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사랑하는 베냐민도 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 때 야곱이 했던 결단의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라헬의 소생 베냐민에게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두 번째 애굽에 내려갔던 유다가 애굽 총리에게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 품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버지 야곱은 슬퍼 죽을 것이라고 말을 했었습니다(창44:14). 유다의 이러한 발언을 통해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베냐민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는 결단은 ‘내가 죽으면 죽으리로다’는 결단과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의 결단은 에스더의 결단을 연상하게 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로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에스더가 3일 밤낮으로 금식한 후에 왕 앞에 나아가 왕이 금 규를 내밀지 않게 되어 내가 죽을지라도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민족을 구하려는 시도를 해보겠다는 결단과 유사합니다. 야곱 역시 내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될 위험성이 있지만 가족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결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결단을 언급하면서 가장의 책임을 다하는 야곱의 위대함을 말씀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야곱의 결단의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의 결단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애굽 총리)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야곱의 기도입니다. 야곱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결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일이 생겨 아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는 또 다니엘 3장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세친구의 결단도 연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금신상에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서 바벨론 왕에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야곱 역시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즉, ‘그리아니실지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위기를 직면했을 때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 위기의 원인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아쉬워합니다. 그래서 그 원인 제공자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앞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기도했다면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라도, 즉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결단은 인간승리의 결단이 되어서는 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믿음을 전제로 한 결단으로 가족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추석과 같은 명절을 보낸 후 가정불화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통계로 보면 명절이후에 이혼이 더 늘어난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해야 할 시간에 서로 원망하고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푸념은 결코 가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이해하고 도와야 할 부분은 도와야 할 것입니다. 가족 공동체의 미래는 내가 어떤 믿음의 결단을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면 가족 공동체가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희생하더라도 가족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 모두의 안녕을 위하여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믿음에 기초한 결단을 할 때 가족 공동체는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을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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