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신춘문예-동화당선작>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김연진 |
우리 집은 왜 세탁소를 할까? 지금은 그 생각뿐이다. 슈퍼마켓도 아니고 피자가게도 아니고 왜! 남이 입던 오염된 옷을 걷어다 빨래해 주는 일이냐고! 경태는 기어이 김치 국물 묻은 재킷을 벗으며 내게로 걸어왔다. “너희 아빠가 세탁물 걷으러 올 때까지 기다릴 거 뭐 있냐? 네가 가져가면 되지.” 경태가 재킷을 내 책상 위로 던지며 말했다.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종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을 만들었다. “지욱아, 아빠가 칭찬하시겠다. 학교에서 돈 벌어 온다고.” 경태의 쌍둥이 동생 경수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분노의 눈물을 참느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눈 대신 주먹이 울어 주고 있었다. 뱀 허물처럼 징그러워 보이는 재킷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경태와 경수는 내가 폭발하기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긴장했다. 그 기대를 만족시켜 주고 싶지 않아 조용히 교실을 나왔다. “야, 강지욱. 옷 가져가야지.” 경태의 말이 가시처럼 뒤통수를 찔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경수가 옷에 일부러 물감을 묻히고는 빨아 오라며 벗어 줬었다. 그때는 그 옷을 경수 얼굴에 집어던지며 말다툼을 했다. 그래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저 세트로 못된 형제들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내 운이 좋아져서 싸움을 찾아 헤매는 쌍둥이가 전학 가게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은형이 물려준, 유행이 지난 운동화를 신고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뒤축이 찢어졌다. 작은형은 신발을 구겨 신는 버릇이 있었다. 다행히 요즘은 고친 것 같지만. 슬리퍼가 되어 버린 운동화를 질질 끌며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조심혀야지. 안 다쳤남?” 고개 들어 보니 폐지가 가득 담긴 리어카를 세우며 할머니가 말했다. “안 다쳤어요. 죄송합니다.” 나와 부딪친 충격으로 리어카에서 떨어진 종이박스를 주워 올리며 대답했다. 좋은 신발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데 내 신발은 폐지 더미로 안내하는구나. 그래도 내게는 희망이 있었다. 새 운동화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거실 책꽂이에 꽂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생각을 하니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신발 역할을 못하는 운동화를 신고서도 기록적인 속도로 집에 도착했다. 「지혁 세탁소」 부모님은 큰형 이름으로 세탁소 이름을 지었다. 세탁소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욱 세탁소였다면 어땠을까? 윽. 생각만으로도 공포였다. 큰형은 별 불만이 없나 보다. 하긴, 형 주위엔 세탁소집 아들을 사냥하는 쌍둥이가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가 양복바지를 다림질하고 있었다. 아빠의 등 뒤에서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돌아가고 있었다. 천장엔 깨끗하게 세탁된 옷들이 이름표를 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어땠어?” 아빠는 왕창 구겨진 바지를 마술처럼 펴면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다. “지난주와 똑같죠 뭐.” 이마를 잔뜩 구기며 얼버무렸다. 드라이클리닝 기계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엄마의 재봉틀이 있다. 옆 선반에는 동네의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수선해야 하는 옷들이 쌓여 있다. 그 뒤에 보이는 조그만 쪽문을 열면 우리 집이 나온다. 현관에서 너덜너덜해진 운동화를 벗었다. 신발장에는 작은형이 신다 작아진 신발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양제를 주는지 작은형의 발은 머리카락처럼 자란다. 운동화에게 낡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헌 운동화들은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차지가 됐다. 그 덕에 난 새 운동화를 신었을 때의 그 산뜻한 느낌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겐 희망이, 이럴 수가! 없다! 아침에 학교 갈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없어졌다. 거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행복한 왕자가 사라졌다. 아니, 행복한 왕자가 가출을 하건 말건 그건 상관없다. 문제는 행복한 왕자가 품고 있던 돈이다. 엄마한테 새 운동화 사 달라고 조르다 지쳐서 포기하고 장장 6개월에 걸쳐 모은 돈이었다. 그 사이에 설날이 끼어 있지 않아 세뱃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액수였다. 그 피 같은 돈 오만 원을 그림책, 행복한 왕자에 꽂아 두었었다. 작은형과 같이 쓰는 방 안에 놓아두기 불안해서 고르고 골라 선택한 안전지대가 책장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큰형이 군대 간 뒤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것이 아주 맘에 들었었다. 그런데 먼지와 함께 내 그림책들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큰형의 책들은 먼지를 벗고 본래의 색깔을 찾아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엄마!” 가슴이 뛰고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침착해야 한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목욕탕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내 그림책 어디 있어요?” 엄마는 목욕탕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세탁기 대신 엄마가 밟아서 빨고 있는 것은 아침까지도 창틀에 매달려 있던 커튼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집이 대청소 중이라는 표시다. “쓰레기 버리는데 폐지 모으시는 할머니가 달라고 하셔서 드렸어.” “왜? 왜!” 도대체 왜 오늘이냐고! 오늘은 그저 새 운동화를 사는 역사적인 날이어야 했다. “네가 하도 험하게 읽어서 앞집 현서도 못 주겠더라.” 차라리 현서를 주지. 그럼 돈의 행방이라도 정확하게 알 수 있지. 퍼뜩, 아까 부딪힌 리어카 할머니가 떠올랐다. “엄마, 그 할머니 리어카 끌고 다니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돌아 현관으로 갔다. “금방 또 어디가? 엄마 청소하는 것 좀 도와주다 학원 가지.” “엄마는 왜 물어보지도 않고 남의 책을 함부로 버려요?” “어머머, 형들한테 물려받은 책 싫다고 새 책 사 달라고 떼쓴 게 어제다. 그리고 너 그 책들 안 본 지 오래잖아.” 돈을 모으는 동안 행복한 왕자를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데. 물론 아무도 없을 때 봤으니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새 책을 사 주고 버리든가요.” 투덜거리며 신발장에서 형이 물려준 다른 운동화를 꺼내 신고 나갔다. 그 할머니 걸음이면 아직 멀리 못 갔을 거다. 운동화가 너무 커서 자꾸 벗겨지는 게 문제지만 부지런히 뛰어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부딪힌 장소에서부터 물어보며 찾기 시작했지만 없었다. 이대로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타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할머니.” 신이 나서 달려갔지만 뭔가 이상했다. 리어카가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 리어카에 있던 것들 다 어쩌셨어요?” “너, 아까 부딪힌 아 맞쟈? 근디 리어카에 있던 걸 왜 묻는감?” 할머니는 무릎을 주무르며 물었다. “저기 삼거리에 있는 세탁소집에서 책 받아 가셨죠?” “응, 그런디?” “혹시, 행복한 왕자라는 책 펼쳐 보셨어요?” “안 봤는디.” 휴, 다행이다. “그 책들 어디 있어요?” “왜? 다른 종이박스들이랑 고물상헌티 팔었지.” “네?” 돈을 팔다니. “고물상이 어디예요?” “저짝 중핵교 지나서 쫌만 가면 되는디. 근디 왜 그러는감?”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안녕히 가세요.” 또 뛰기 시작했다. 행복한 왕자님, 제발 내 돈을 꽁꽁 감싸고 있기를…. 도착한 곳은 고철과 폐지와 헌 옷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저기를 일일이 뒤져야 할지도 모른다. 아, 꼬질꼬질한 내 인생. “안녕하세요?” 우선 어른들이 좋아하는 배꼽인사부터 했다. “무슨 일이니?” 폐지를 정리하고 있던 아줌마가 물었다. 내 돈아, 조금만 기다려라. 당장 폐지 더미에 달려들어 내 행복한 왕자를 찾아내고 싶었다. “리어카 끌고 오셔서 폐지 팔고 가신 할머니 아시죠?” “누구?” 아줌마는 폐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림책이랑 종이박스 팔고 가셨다는데.” “아, 그 할머니.” “그림책 중에 행복한 왕자 펼쳐 보셨어요?” “그거 볼 새가 어디 있어?” 다행이다. 견물생심이라 했으니까. “네. 그 할머니가 팔고 가신 그림책 어디 있어요?” “헌책방 할아버지가 사 가셨는데.” “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러니? 괜찮아?” 아줌마가 놀라서 뛰어와 날 일으켰다. “파신 지 얼마나 됐어요?” 마른입에서 내 목소리 같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한 15분쯤 됐나?” “그 헌책방이 어딘지 혹시 아세요?” “알지. 그런데 왜 그러니?” “엄마가 제게 묻지도 않고 그림책을 버리셨어요.” “그 찢어진 그림책이 네 거니? 여태껏 갖고 있던 것도 용하던데.” “저한텐 소중한 책이에요” “책을 참 좋아하는가 보구나. 너, 헌책방 골목 아니?” 아줌마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친절해졌다. “그런 데도 있어요?” “그럼, 쇼핑센터는 알아?” “네.” “그 뒤 골목에 헌책방들이 모여 있어. 그중에 재중 헌책방을 찾아 가.”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제는 뛸 힘이 없다. 내 낡은 그림책이 이렇게 인기가 좋다니. 쇼핑센터를 지나다 사려고 봐 뒀던 운동화와 마주쳤다. 쇼윈도에 이마를 박고 한참을 바라봤다. 마지막 봤을 때보다 더 좋아 보였다. 운동화를 보니 힘이 솟았다. 기운을 차리고 도착한 헌책방 골목은 북적북적한 쇼핑센터와는 달리 조용했다. 크지 않은 간판들 중에서 재중 헌책방은 제일 작았다. 보이지가 않아 찾느라 고생했다. 드디어 찾은 헌책방 안에서 하얀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내 행복한 왕자 표지를 펼치고 있었다. 안 돼! “할아버지.” 아주 크게 소리 쳤다. “아이쿠 깜짝이야.” 할아버지가 놀라서 손을 휘저었다. 그 바람에 간신히 붙어 있던 행복한 왕자 표지가 쭉 찢어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더 찢어졌네.” 할아버지가 행복한 왕자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할아버지. 그거 제 책이에요. 돌려주세요.” 난 급한 마음에 떼를 썼다. “이 책이 네 거라고?” “네 제 거예요. 엄마가 제게 물어보지도 않고 버리셨어요. 근데 그걸 폐지 모으는 할머니께서 고물상에 파셨고 그걸 또 할아버지께서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떨어진 표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샀으니 내 거지.” “그럼 제가 다시 사겠어요.” 설마 오만원보다 비싸겠어? “왜?” “제게 너무도 소중한 책이에요.” “한 가지만 물어보자. 이 책들이 네가 함부로 다뤄서 찢어진 거니, 여러 번 읽어서 낡은 거니?” 할아버지가 좋아할 대답은 뻔했다. “여러 번 봐서 낡은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돈이 모일수록 행복한 왕자를 더 자주 들여다봤으니까. “좋다. 네 책들을 돌려주마.” 할아버지는 책 더미 속에서 책들을 골라냈다. 그것은 깨끗해서 내 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제 책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 행복한 왕자만 있으면 돼요. “깨끗해졌지? 내가 수선 좀 했다. 니들 말로는 리폼이라고 하지.” 놀라웠다. 쓰레기 더미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어울렸을 내 책들이 말끔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저 책도 고쳐서 줄게” 할아버지는 행복한 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행복한 왕자를 펼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돈 오만원이 무사히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돈을 옆에 내려놓고 책을 고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눈치챘다. 내가 책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돈을 찾아온 것을.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책을 다 고치고는 돈을 다시 행복한 왕자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자, 네 책이다. 가져가거라.” 낯설어진 책들을 차마 받아들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게 돈뿐이라면 돈만 꺼내 가도 좋아.” 나는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전 그냥 새 운동화가 갖고 싶었어요.” 할아버지는 내 운동화를 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마음이 놓이면서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직 쓸 만해 보이긴 하다만 너에겐 너무 크구나.” “형한테 물려받은 운동화예요. 딱 맞는 운동화가 아까 찢어졌어요.” “아저씨, 곰진 수학 문제집 있어요?” 옆 헌책방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조심스럽게 옆 책방을 살폈다. “거기 찾아봐라.” “아저씨 영어 문제집은요?” 작은형이다. 나도 모르게 형이 날 보지 못하도록 몸을 숨겼다. 여긴 왜 왔지? 어제 엄마한테 영어랑 수학 문제집 산다고 돈 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건 딴 주머니 차기? 누구는 새 운동화 한번 사 보려고 했다가 이 고생을 하는데 누구는 새 책을 살 수도 있는데 헌책을 사? “엄마는 새 문제집 사는 줄 알 텐데.” 작은형이 미웠다. “야, 이 문제집은 딱 두 문제 풀고 말았네.” 작은형이 몹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와, 돈 굳었다. 이 돈으로 게임머니 사야지. 지호 넌 뭐 할 거야?” 작은형 친구가 물었다. “지욱이 줄 거야. 걔가 요즘 새 운동화 사려고 돈 모으는 중이거든. 그동안 내가 물려준 헌 운동화만 신었어.” 형이 내가 돈 모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비밀인데. “정말 싫겠다. 그런데 너, 이렇게 좋은 형이었냐?” 작은형 친구가 형을 놀렸다. “좋은 형은 아니지만 양심은 있는 형이다. 왜.” 작은형은 친구를 한 대 치고는 달려갔다. “얌마, 엄마 속이고 돈 빼돌리는 게 어느 나라 양심이냐?” 작은형 친구가 따라 뛰며 소리 질렀다. “난 엄마한테 새 문제집 산다고는 안 했다.” 작은형이 질세라 소리 질렀다. “저 학생 동생도 너처럼 물려받은 운동화를 신나 보다. 그래도 저런 형이 있어서 좋겠네. 그렇지?”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제 형이에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허허허, 이놈아, 너랑 똑같이 생겼는데 내가 몰라볼 것 같으냐? 어디 가서 형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다. 어찌 그리 판박이일꼬.”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형이 저렇게 절 생각해 주는 줄 몰랐어요.” “형 말을 들어 보니 넌 새 운동화를 신을 자격이 있구나. 지겨워졌다고, 유행이 지났다고 마구잡이로 버리는 세상에, 형이 물려준 신발을 신었다니 기특하다.” “그냥, 신발이 낡지를 않아서 엄마가….” 내가 받아야 할 칭찬이 아닌 것 같아 거북했다. 원해서 신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다. “착하구나. 네가 죽어 가는 신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준 거야.” 할아버지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생명?” “그래. 자, 네 책들 가져가라. 응급처치는 내가 했지만 살리는 건 네 몫이야.” 할아버지는 그림책들을 내 손에 올려 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비로소 애타게 찾아 헤맨 행복한 왕자를 품에 안았다. 오만원을 찾았다. 이제 새 운동화를 살 수 있다. 기뻤다. 그러나 오만원어치의 행복이 아니었다. 돈으로 사지 않고 얻은 그림책들 때문인가? 더 많은 만족감이 밀려왔다. “할아버지, 저는 수선도 못하는데 어떻게 살려요?” “그런 거 못해도 돼. 그 신발도 네가 고친 건 아니지? 그냥 신었을 뿐이잖니.” 할아버지는 또 다른 낡고 더러운 책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너무 쉬웠다. 신발은 신고 책은 읽는 것.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방해가 될까봐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잘 가라.”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할아버지는 편안해 보였다. 나는 헌책방 골목을 나와 쇼핑센터 앞에 도착했다. 쇼핑센터 안에는 새 물건들이 가득했다. 내가 찜한 운동화도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서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와서 나를 사 줘’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늘은 사고 싶지 않았다.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는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정리해서 천장에 매달고 있었다. 엄마는 재봉틀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배 안 고파? 어, 그림책 찾았네?” 엄마가 긴치마를 짧게 싹둑 자르며 물었다. 어제 뒷집 창경이 누나가 수선 맡기고 간 옷이었다. 저 치마는 이제 창경이 누나가 좋아하는 미니스커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세탁소 안은 늘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기운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내가 쌍둥이들과 어이없는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 “네, 찾았어요.” 나는 그림책을 더 꼭 안으며 대답했다. “아까 지호가 와서 그림책 없어졌다고 찾고 난리 났었어. 너 오기 전에 찾아야 한다면서 뛰어나갔는데 안 오네.” 엄마가 재봉틀을 돌리며 말했다. 내일이 오면 행복한 왕자를 들고 현서에게 가야지. 그리고 아직 한글을 모르는 현서에게 읽어 줘야겠다. 지금은, 다리가 몹시 아프지만 지호형을 찾으러 가야겠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