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시산맥 신인상 /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4편 / 박동민
방문의 배꼽을 꼬옥 누르는 순간부터 사춘기는 시작된다
성벽은 높고 천장은 낮은 다락
프레스코화 속 성인(聖人)이 두 손 모아 배꼽의 심지에 불을 붙이면
펑, 소리와 함께 사생활의 구름이 성채를 덮는다
웅크린 가슴의 단추 하나 풀고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는 사춘기
저요 저요 대신 쟤요 쟤요
팔랑이는 창문은 나무의 자세를 따라한다
단추 하나 더 풀어볼까
합법의 우듬지에서 불법의 밑동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수시로 넘나드는 사춘기의 배꼽
밖에서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배꼽은 열리지 않아요
멋있는 척 어른인 척하지 않아요
뭘 자꾸 척척 해내라는 거예요
겁나거나 골나지 않아요
골라도 내가 골라요
성스러운 손으로 빼꼼 성문을 열고
흔들리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오후
천장의 야광별이 넝쿨손을 타고
광장의 배꼽으로 쏟아진다
법정에서 맞선, 甲과 乙의 동화
소장 접수
한 번 보실래요?
절친한 변호인이 느닷없이 야밤에 소장을 보내주었다 첨부된 사진 속 여드름 자국이 틀린 맞춤법처럼 도드라졌다 각하해버릴까, 소개팅은 몰라도 맞선은 싫었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 명절, 후견인들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기는 척 만나보겠다는 답변서를 즉각 제출했다
제1회 변론기일
드디어 법정에서 맞선, 원고 甲과 피고 乙
수차례 법정을 들락날락 했지만 처음처럼, 간단히 신원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환하게 웃는 제3자 丙판사가 메뉴판을 건넸다 첫 만남부터 펼쳐진 심리적 공방
차 많이 막히셨죠?
실은 마실 차보다 타고 온 차가 궁금했다 딱 벌어진 보닛에 사진보다 각진 얼굴 두툼한 에어백과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시원한 목소리
그는 세단보단 신형 지프에 가까웠다 게다가 국산차, 그녀는 애국자니까
조정절차
역시 믿고 쓰는 국산차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하다 몇 건의 통화와 문자가 뻥 뚫린 도로를 내달렸다 신호 한번 걸리지 않고 그린라이트,
추정이 간주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회 변론기일
사람은 사계절을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 乙의 지론
절친하고도 친절한 丁변호인은 나이도 있는 만큼 지나친 검증과 감정(鑑定)은 삼가길 권고했다 丁을 믿고 몇 번의 데이트를 이어갔다 접촉사고 같은 돌발 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변론 종결 및 판결 선고
甲은 乙에게 고백을 했다
‘당신의 그루터기가 될게요. 우리 사랑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압류 당한 피고
더 이상 그들은 맞선 상대가 아니었다
악수하며 법정을 나오는 화해의 당사자
쌍방을 대리한 丁은 기꺼이 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계절의 묵시적 갱신이 수십 번 이어졌고
원고 甲돌이와 피고 乙순이는
호숫가 청둥오리처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거북처럼 오래오래
분양받은 보금자리에서
서로서로 항복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부러짐은 이렇게 말했다
낙타들이여,
우측통행 표지판을 보면 왼쪽으로 걸어라 보이지 않던 오른쪽 얼굴이 지나가리라
빈 좌석의 유혹을 견디고 서서 가라앉은 아침의 표정을 읽어라
음모에 찌든 찌라시 대신 눅눅한 책장에 눈길을 주어라 그대들이 펼치는 곳마다 길이 태어날 것이다
그 길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언가(無言歌) 들리리라
사자들이여,
엘리베이터를 며칠씩 굶겨라 굶어도 배가 부른 놈들이다 인큐베이터가 필요 없는 불길이다 폭발적인 반응으로 계단의 몰락을 몰고 오는 놈들이다
흡혈모기를 사랑하라 그대들의 죽음과 그 현장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수호천사다 혼자 먹던 편의점 도시락에 담긴 혼을 기억하는 자다 남은 반찬들은 그대들이 짊어지고 갈 잉여다 놀랄 나머지들이다
청춘들이여,
우선순위 영단어를 아직도 외우는가 상해버린 숙회처럼 단어들은 비리지 않은가
책상에 그어진 금은 지우고 금을 넘었는가 자율학습은 자유로운가
한쪽 소매에 더듬이 같은 이어폰을 끼고 킥킥 웃다가 떴다! 척후병의 외침에 수학공식보다 정교하게 사다리를 걷어찼는가 그런데 매점은 누가 다녀오기로 했는가
육체여,
울고 싶을 때 크게 웃어라 울다가 웃어도 괜찮다
토할 것같이 괴로울 때 ‘토마토’를 읊조리며 더듬이를 세워라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미끼를 물어라 더듬더듬 찌가 흔들리면 몰려올 삐끼들을 물리쳐라
기억하라 지렁이의 마지막 꿈틀거림을, 상대는 강하다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반복되는 시간표의 피복을 벗기고 날 것이 되어 날아올라라
당신이여,
부러짐이 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규칙의 칠판에 예외를 그으러 강을 거스르는 은어 떼들이 보이는가
해금소리 들린다
산이 이마에 닿을 것 같은 오지에 당신을 묻었다.
오이도(烏耳島)
까라면 까!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귀가 없어요 귀 좀 빌려 주실래요
저기, 까마귀가 날고 있어요 까마귀는 눈이 없어요 까막눈도 알 수 있어요
눈 좀 빌려 주실래요
까라면 까! 발랑 까진 것들, 가랑이 사이로 통과!
까진 건 무릎 밖에 없어요 까진 것들은 더 깔 게 없어요
까졌다고 까면 잠깐만요,
더듬지 마세요! 친밀이 침입이 되는 순간 소름 돋아요 허벅지에서 더듬이가 돋아요 수작 부리지 마세요 건넨 적도 없는 잔을 채우라니요 쏟지도 않은 말을 담으라니요 대거리할 가치도 없는 대가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정나미, 토할 것 같아요 등 좀 두드려주세요 아니다 등 좀 빌려 주세요 어부바해주세요
림보를 통과하면 까마귀들의 귀 무덤
문고리 없는 집의 둥그런 처마에서 태어나
부러진 숟가락을 쫑긋 세우고 걷는 까마귀의
마귀의 귀까지
물이 점점 차올라요 몸이 점점 떠올라요 날아올라요 귀에서 마귀가 툭 튀어 나와요 귀 좀 빌려 주실래요 탱자나무 가시로 귀 파드릴게요
귀도 없고 눈도 없는 까마귀는 칼을 물고 있어요 칼자루가 없는 칼로 시간을 두드려요 갈수록 무뎌지는 날로 시간을 구부려요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자장가 소리 들리세요
섬들이 꺼이꺼이 가라앉고 있어요
세로수길 가로등
내가 어둡대요
밤새 손들고 벌 받는 중에도 쉴 새 없이 까부는 난데
바닥에 붙은 은색 껌종이처럼
나의 꿈도 통통 튀는 용수철이었죠
커서 뭐가 되려는지
뭐라도 되겠지, 하시던 분들
보세요!
나는 매일 런웨이를 걸어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워킹 워킹,
배운 적은 없죠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옷걸이들이 홋홋 모자를 쓰고 걷네요
나는 통유리 앞에서 마네킹이 웃을 때까지 춤을 춰요
이렇게 흥이 많은데 내가 어둡다니 원
어젯밤에는 발톱에 페디큐어를 칠하다가 미친년처럼 웃었어요
런웨이에선 절대 웃으면 안 되거든요
요새 시즌이라 먹어도 자꾸 말라요 체질인가 봐요
모가지보다 다리가 길어서 슬픈 족속
자기 전에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사실 워킹보다 중요한 건 턴 턴,
뒤도 안 돌아보고 꿈속으로 워킹 워킹
배우지 않은 걸음으로
[당선소감]
제 몸속에 항아리를 심었습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읽고 그린 것들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런 습관이 관습이 될 때쯤 하나씩 꺼내 추체험(椎體驗)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허리띠와 넥타이를 풀고 알몸으로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아 아, 외쳤습니다. 제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듣는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둥치에 끈을 단단히 묶고 엄마의 배꼽 속으로 들어가는 그 설렘이 좋았습니다.
엄마의 살결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보드라운 부분에 손등을 대면 잠이 금방 옵니다. 엄마의 귀와 배꼽과 팔뚝을 만지는 버릇이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글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행진곡이 마태수난곡처럼 들렸던 겨울과 몇 시간 동안 아가리를 굳게 다문 수술실을 떠올려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질까 마음 졸였던 시간, 제가 골라준 장갑 끼고 서로 팔짱 끼고 생태하천길을 따라 소풍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냉장고 속 아이스크림처럼 엄마 몸에 산다는 나쁜 병 덩어리도 꽁꽁 얼었으면 좋겠다고, 목련을 볼 수 없어도 봄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봄은 옵니다.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려 얼굴을 바꾸는 나에게 보내는 인사처럼, 서서히 녹아 손가락을 빠져 나가는 아이스크림처럼.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도를 잃고 길을 헤매던 저에게 지남철(指南鐵)을 건네주신 고경숙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자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품처럼 차가운 이 핏덩이를 낳고 길러주신 아버지, 엄마 덕분에 저는 차가운 입김으로 수많은 당신의 뜨거운 이마를 짚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조정인, 유종인 시인님, 예심을 봐 주신 최연수, 진혜진, 강주 시인님 고맙습니다. 아들처럼 아껴주신 큰아버지, 큰어머니, 김동훈 교수님, 친형처럼 든든한 김봉철 교수님, 천웅 고맙습니다. 그리고 시인 등극을 해주신 시산맥에도 감사드립니다.
시작(詩作)은 반(半)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이라 모자라고 반이라 충분합니다. 끊임없이 반을 채우고 반을 비워나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골방에서 구석만 찾아다니던 제가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손목이 되어준 아내 연미, 연미를 낳아주신 장모님, 곧 태어날 ‘봄’에게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