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프로야구는 1982년 3월27일 동대문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을 필두로 시작되었다. 원년 우승팀은 OB 베어즈. 이 해 투수 박철순은 4월 10일 對 해태전에서부터 9월 18일 對 롯데전까지 161일간 30게임 등판, 22연승하여 한시즌 연승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고, 한국프로야구가 탄생 첫해부터 최고 인기스포츠로 자리메김 하는데 최대공헌을 한 기록이기도 하다. 흔히 야구는 '투수의 놀음'이라 하며 여러 포지션 중에도 투수를 가장 중요시한다.
원년 박철순 이후 한국프로야구에는 수많은 걸출한 투수들이 나타나 24년 동안 한해 한해 여러 발자취를 남기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훌륭한 경기와 모습을 보여주었다. 32승이란 다소 어처구니없는(?) 기록을 남긴 장명부는 83년 44경기에 선발로 나서 무려 36게임을 완투하며 32승이란 최다승 기록을 세우고 구단과 약속한 1억원(당시로선 꽤 큰 금액)을 받아냈지만 이후 한시즌 최다패전(25패, 85년) 한시즌 최다연패(15연패, 86. 4. 1~86.7. 26) 란 불명예 기록을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이어 최동원, 김시진, 선동열, 그리고 현역 최고령 투수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송진우까지 모두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불세출의 스타들이 지나갔다. 이에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는 누구인가? 란 질문을 던져본다. 야구 통계의 권위자인 빌 제임스(Bill James)는 좋은 선발투수를 세가지로 구분하여 평가한다.
1. 얼마나 많이 던졌는가? (How much he pitched, 이닝수, 상대 타자수 등), 2. 타자들을 상대로 어떤 피칭을 했는가? (What he gave up, 피안타, 사사구, 삼진 등), 3. 그리고 그 결과(승, 패, 방어율 등)로 구분한다.
이 세가지 척도를 놓고 위 질문에 답을 내려보니 선동열과 최동원으로 압축이 된다. 우리나라 야구팬들은 참으로 축복 받은 존재들이란 생각이 든다. 선동열과 최동원, 최동원과 선동열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야구란 스포츠에 미치도록 열광했으며 그들의 피칭에 얼마나 많이 놀라워했던가? 그래서 과연 누가 최고투수인가? 라는 이 질문 자체가 이 두 명의 위대한 투수들에게 혹여 누가 될까 걱정이 앞선다. 이 글은 절대로 이 두 위대한 투수들을 비교하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두 투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오래지 않은 옛날 한국프로야구가 이들로 인해 화려하게 비상했던 그때 그 시절로 잠시나마 회귀해 보고자 할 뿐이다.
1963년생인 선동열과 1958년생인 최동원. 나이 차로 5년 선배인 최동원에 대해 선동열은 이렇게 말했다. “최동원 선배 같은 거대한 목표가 있었기에 나는 더 노력했고 지금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 모른다.” - 1987년 5월 16일
▲ 프로 데뷔전의 선동열
광주 송정초등학교 4학년 때(72년) 야구를 시작한 선동열은 무등중학교를 거쳐 야구명문 광주일고 2학년 때부터 팀을 전국대회 정상으로 이끌며 이름을 떨쳤다. 1980년 봉황대기1회전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세우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선동열은 이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82년과 84년 한국과 쿠바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연속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며 국제 무대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하였다.
▲ '아마야구 best of best' 최동원
프로 이전 아마야구에서 최동원이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하기까지 하다. '안경잡이' 투수 최동원은 부산 토성중학교 3학년 때 중학야구 예선전에서 9회말 투 아웃 상황까지 '퍼펙트 게임'을 선보이면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75년 경남고 2학년 시절 '전국 우수 고교 초청 대회'에서는 당시, 고교 최강인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이튿날 對 선린상고 전에서 또 한번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한다.
1976년 6월 20일 고교3학년 때인 제31회 청룡기 결승전. ‘역전의 명수’로 잘 알려졌던 군산상고를 상대로 최동원은 탈삼진 12개, 피안타 2개라는 신들린 피칭을 선보이며 모교 경남고에 첫 청룡기를 안기게 된다. 이미 이 대회 2회전 대건고와의 경기에서는 탈삼진 10개, 선린상고와의 준결승에서도 탈삼진 11개, 군산상고와의 승자 결정전에서 탈삼진 20개를 기록했고, 그리고 패자 부활전으로 다시 결승에 올라온 군산상고와 대결에서 거의 완벽한 피칭으로 우승기를 거머쥔 것이다. '아마 야구의 신화 최동원'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전설은 이후 3개월 후 있었던 '한일 고교야구 친선대회'에서 또 한번 유감 없이 그 진가를 보여준다. 1차전은 7피안타 완투로 3-1승, 2차전에선 0-1로 뒤지고 있던 3회부터 릴리프로 기용되어 3-2로 팀의 역전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 일본 '초 고교급 투수'라 불리던 사까이와의 대결에서 판정승함으로써 최동원의 이름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로 인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스카우트 파문이 한국 대학 스포츠의 두 기둥 연세대와 고려대, 그리고 일본 롯데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먼저 고려대 측에선 최동원의 입학 합의서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지만, 최동원의 가족 측에서 무리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격적으로 연세대와 대학 연맹 측에 가등록을 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두 학교간의 스카우트 시비는 연세대의 판정승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그런데 연세대 입학을 앞두고 일본롯데의 전훈지인 일본 가고시마 현장에서 최동원이 투구를 하고 있다고 밝혀 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 는 추측을 남기게 되지만, 병역문제 등 여러 가지 설로 가느냐? 마느냐? 소문만 무성히 남겨놓은 채 '일본 프로 야구 진출'의 꿈은 접고 연세대에 입학한다.
대학 1학년 때인 77년 '실업-대학 야구 평가전'에 대학팀 선발 투수로 나와 실업팀 타선을 5회까지 노히트노런으로 잠재우는 대 활약을 보이는 등, 연세대가 전국 대학야구 대회 5개 중 4개 대회를 석권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낸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성인 국가 대표팀의 당당한 에이스로 자리잡아, 77년 니카라과에서 개최되었던 '슈퍼 월드컵 대회'에서 대표팀 막내둥이로 출전해 미국, 일본, 콜롬비아 등 강호들과 대결 '선발 3승2패'라는 성적을 내며 당당히 한국이 우승하는데 한몫을 하게된다. 이 대회 기간 동안 미국 메이저리그 '볼티모어'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게된다.
그 당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보여준 최동원에 대한 관심을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큰 미련과 아쉬움이 따른다. 한참 후인 박찬호의 메이저리그에서의 성공을 보면서 말이다. '병역 문제' 라는 우리 유망주 모두의 영원한 걸림돌만 아니었더라도, 최동원의 운명이 어찌 달라졌을지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최동원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당시 실업 야구는 3개의 은행 팀과 경리단, 상무의 군 2개 팀, 3개의 공기업 팀 그리고 롯데, 한국화장품 등의 민간 2개 팀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 이중 '세미 프로 급'으로 불리던 두개의 민간 기업 팀이 스카우트 시장을 주름잡고 있었다.
또 한바탕 스카웃 문제로 소동이 일어 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최동원의 진로는 롯데의 구단주 신격호 사장, 박영길감독 모두 경남고 선배들이어서 롯데 행으로 싱겁게 끝나버리고 만다. 81년 실업 야구 입단 첫해부터 최동원은 롯데가 창단 2년 만에 '실업 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강호 '경리단' 을 물리치고 실업 야구 우승을 하는데 최대 공헌을 한다. 시리즈 6차전 동안 매 게임 등판해서(2게임 완투포함) 42와 2/3 이닝, 탈삼진 37개, 방어율2.32를 기록하며 최우수 선수상을 포함 '3관왕'의 영예까지 누리게 된다.
/> 이렇듯 누가 보더라도 '아마 야구 최고봉'인 최동원은 국내뿐만 아니라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해외 경기에서도 여지없이 최고임을 보여준다. 81년 8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개최되었던 '대륙간 컵 국제 야구 대회'에서 당당히 최우수 선수상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당시 나이 23세의 최동원에게 또다시 미국 메이저리그의 '토론토'구단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여전히 병역 문제가 있었지만, 토론토 측에선 일단 계약만 하고 난 후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적극성을 띄었고, 최동원 측 또한 '선계약 후 해결해보자'며 4년 연봉 61만 달러(약 4억2천만원)에 전격 계약 체결한다.
그런데 왜? 끝내 최동원의 메이저리그행은 좌절되었던가? 바로 최동원의 연봉이 메이저리그 선수 기준 최하위 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메이저리그에 밝은 전문가가 많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토론토 측도 메이저리그 상황을 잘 모르는 최동원을 헐값에 데려가려는 저의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82년에도 토론토는 또 다른 조건으로 입단 제의를 하고, 볼티모어도 '러브 콜'를 보내지만 최동원은 해외 진출의 꿈을 접고, 1983년 2월 한국프로야구 2년 차를 맞는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금 4천만원, 연봉 3천만원외 보너스 등 총 1억원으로 한국프로무대에 서게된다. 이렇게 아마 무대에서 최동원이 보여 준 야구는 그야말로 'best of best'였고, 최동원은 'best of best'의 대접을 받으려 했다. 그게 전부였다.
▲ 프로 입단 첫해부터 최고의 길을 걷는 선동열
1985년 선동열은 해태 입단으로 고향팬들의 열렬한 성원에 부응했다. 방어율1.70 25경기 111.0이닝 완투1 완봉0 7승 4패 8세이브 안타74 홈런2 사구20 삼진103 실점30 자책점21 WHIP 0.85 입단 첫해 방어율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이후 프로야구 투수부문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 다음해를 기약하는 프로초년생 최동원
아마야구의 최고였던 최동원은 프로에서도 승승장구하리란 예상과는 달리 프로 첫 시즌인 83년 성적표는 38경기에 나와 9승16패 4세이브 방어율2.89를 기록한다. 프로 이전인 81년 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는 한 달의 휴식기간을 사이에 두고 열린 실업야구 전기 리그에서 13승 2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 최동원의 성적이 13승 1패였으니 거의 매 경기 등판한 셈이 된다. 이로서 81년부터 간간이 어깨부상에 시달린 것이 기대이하의 성적을 올린 이유였겠지만, 자만심도 컸다고 본다. 야구팬 누구에게나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되고있는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멤버 그 누구도 신인왕을 받지 못했고, 최동원 역시 기대이하의 성적만 남기며 생애 첫 신인왕타이틀을 OB 박종훈에게 넘겨 줘야했던 것이다.
참고로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나가기 위해 최동원을 비롯, 대표선수들은 82년 원년멤버로 프로로 뛰어들지 않고 거의 대부분 아마야구에 잔류했었다.
▲ 선동열이 보낸 최고의 시즌
1986년 방어율0.99 경기수39 완투19 완봉3 24승 6패 6세이브 262 2/3이닝 안타153 홈런2 사구52 삼진211 실점38 자책점29 방어율 부문 1위, 다승 부문 1위, 탈삼진 부문 1위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 페넌트 레이스 MVP
1989년 방어율1.17 경기수36 완투8 완봉6 21승 3패 8세이브 169이닝 안타82 홈런2 사구7 삼진198 실점27 자책점22 승률 부문 1위 (0.870), 방어율 부문 1위, 다승 부문 1위, 탈삼진 부문 1위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 페넌트 레이스 MVP
1990년 방어율1.13 경기수35 완투8 완봉6 22승 6패 4세이브 190 1/3이닝 안타121 홈런1 사구50 삼진187 실점35 자책점24 승률 부문 1위 (0.780), 방어율 부문 1위, 다승 부문 1위, 탈삼진 부문 1위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 페넌트 레이스 MVP
1991년 방어율1.55 경기수35 완투12 완봉3 19승 4패 6세이브 203이닝 안타135 홈런8 사구25 삼진210 실점42 자책점35 승률 부문 1위 (0.826), 방어율 부문 1위, 다승 부문 1위, 탈삼진 부문 1위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
▲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84년 한국시리즈
84년 시즌 성적은 방어율2.40 51경기 27승리 13패전 6세이브 284 2/3이닝 안타229 4구82 삼진223 실점91 자책76. 프로데뷔 첫해 9승16패란 이름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올린 최동원은 이듬해 84년엔 뭔가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절치부심 한다. 이에 페넌트레이스 내내 선발·중간·마무리 등, 보직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등판해서 27승13패의 성적을 올린다.
양대리그로 레이스를 펼친 끝에 전기리그 1위를 차지해 일찌감치 시리즈행 티켓을 거머쥔 삼성은 후기리그에서 1위를 달리던 OB 대신 '만만한 상대' 롯데를 파트너로 삼기 위해 시즌 막판 져주기 게임을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롯데는 삼성의 져주기 시합 덕택에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된다. 그런데 우승을 장담한 삼성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무쇠팔 최동원'이라는 존재를 잊고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최동원이 등판하는 게임 외 나머지 게임을 잡으면 우승은 '떼 논 당상'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에서도 나오지만 삼성의 김일융도 혼자서 3승을 책임지긴 했다. 그 당시 지금보다 투수진이 턱없이 부족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동원과 김일융이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철완의 이미지는 이후 더 이상 볼 수 없는 명승부였다.
결과는 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7차전 8회초 롯데 공격 때 유두열의 역전 쓰리런 으로 6대4 롯데 승. 시리즈 스코어 4대3. 롯데의 한국 시리즈 우승. 시리즈 기간동안 최동원은 5게임에 등판, 무려 40이닝을 던져 4승 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롯데 마운드를 거의 홀로 지킨 셈이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되어 있고, 투수 로테이션이 엄연히 있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수많은 야구팬들이 84년도 한국 시리즈를 역대 최고 시리즈라고 믿는 이유는, 유듀열의 '역전 홈런'보다 승리를 향한 최동원의 놀라운 집념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19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한국프로야구의 전설로 남아있다.
▲ 한국프로야구 투수부문 역대순위
승리 1위 송진우(193) 2위 이강철(152) 3위 선동열 11년(146) 15위 최동원 8년(103) 완투 1위 윤학길(100) 2위 최동원(80) 3위 장호연(79) 4위 선동열(68) 완봉 1위 선동열(29) 10위 최동원(15) 세이브 1위 김용수(227) 2위 진필중(191) 3위 임창용(168) 5위 구대성(150) 7위 선동열(132) 삼진 1위 송진우(1847) 2위 이강철(1749) 3위 선동열(1698) 18위 최동원(1019)
▲ 선동열이 남긴 투수부문 대기록들
한경기 최다 투구수 232개 선동열(해태) vs 롯데 87. 5. 16 사직 한시즌 최다 완봉승 8승 선동열(해태) 86년 연속 경기 완봉승 3연승 선동열(해태) 86. 8. 31~9. 11 특정팀 상대 연승 20연승 선동열(해태) vs 롯데 88. 8. 11~95. 9. 26 연속 경기 무패 44경기 선동열(해태) 91. 8. 20~93. 7. 14 (규정 이닝 투구) 연속 경기 세이브포인트 18세이브 선동열(해태) 92. 7. 7(vs 빙그레)~93. 5. 15(vs LG) 최다 타석 무피홈런 1,186타석 선동열(해태) 89. 5. 9~90. 9. 25 최다 투구횟수 무피홈런 319개 선동열(해태) 89. 5. 9~90. 9. 25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 선동열(해태) vs 빙그레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 선동열(해태) vs 빙그레 86. 7. 24 광주 연속이닝 무실점 49 ⅔이닝 선동열(해태) 86. 8. 27~87. 4.
12 특정팀 연속이닝 무실점 42이닝 선동열(해태) vs 삼성 86. 5. 25~88. 4. 2 시즌 최고 방어율(규정투구횟수 이상) 0.78 선동열(해태) 93년 무피안타 무득점(NO HIT NO RUN) 통산 다섯 번째 선동열(해태) vs 삼성 89. 7. 6 광주
▲ 최동원이 남긴 투수부문 대기록들
한시즌 최다 승리 30승 장명부(삼미) 83년 27승 최동원(롯데) 84년 한시즌 최다 탈삼진 223개 최동원(롯데) 84년 한경기 최다 탈삼진(9회까지) 16개 최동원(롯데) vs 삼성 83. 6. 7 사직=선동열(해태) vs OB 92. 4. 11 잠실(9회) 매 이닝 탈삼진 최동원(롯데) 88. 8. 2 vs 삼성
▲ 최동원 VS 선동열
'황금 팔의 맞대결'이란 부제가 붙을 정도로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은 팬들에게 최고의 투수전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결과는 역대 전적 2승1무1패로 선동열의 우세승. 이 중 세번의 선발경기에선 1승1무1패로 무승부였다.
첫번째 선발대결(1986년 4월19일 사직 구장) 선동열은 피안타6개 , 최동원은 피안타5개를 허용하며 둘 다 완투했지만, 경기 막판 최동원이 홈런 한방을 허용하여 선동열이 승리 투수가 된다. 두번째 선발대결(1986년 8월19일 사직 구장) 두 선수 모두 9이닝 완투를 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최동원의 2-0 완봉승 세번째 선발대결(1987년 5월16일 사직구장) 15회 연장까지 가는 4시간 56분이 걸린 이 경기, 두 투수는 끝까지 완투했지만 결과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선발 대결 세 차례 모두가 롯데의 홈 경기장에서 치러졌다는 점, 마지막 대결 당시 최동원의 나이 32세였고 선동열이 27세이었다는 점, 그리고 양 팀 타력의 힘 등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선동열 VS 최동원, 맞대결에 대한 우위를 따지는 자체가 모순이고 크나큰 오류인 것이다. 야구가 투수혼자서 하는 스포츠가 아니란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 COOL 선동열
선동열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던 85년부터 95년까지 11시즌 동안 단 1시즌도 방어율이 2점대로 올라간 적이 없을 만큼 뛰어난 구위를 유지했다. 선동열이 국내 프로야구에 남긴 통산기록은 146승 40패, 132세이브, 승률 0.785, 통산 방어율 1.20, 탈삼진 1698개
통산 최다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3회(1986, 1989, 1990), 골든글러브 6회, 3년 연속 투수 4관왕(1989~1991), 0점대 방어율 3회(0점대 방어율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동열뿐이다) 어깨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1992년,1994년을 제외한 나머지 해의 방어율 부문 1위, 44경기 연속 무패(1991.8.20~1993.7.14) 등 뛰어난 기록을 수립하였다. 데뷔 이후 시즌 20승을 3차례나 이뤘으며 다승왕을 4차례나 차지, 선발투수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선동열은 93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뒤 3년간 구원왕 2차례를 차지했다. 그의 이런 빼어난 활약에 힘입어 해태는 86년부터 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비롯해 91년,93년 우승까지 여섯 차례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선동열은 또 입단계약금으로 1985년 1억3천800만원을 받아 억대 계약금 시대를 열었으며, 지난 96년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했다. 해태 구단의 반대에도 팬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어렵게 일본으로 건너간 선동열은 첫해 생소한 일본 타자들에게 두들겨 맞는 아픔을 겪었으나 이듬해인 97년부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 3년간 일본에서도 최정상급 투수로 우뚝 섰다.
97년 1승38세이브, 98년 3승29세이브, 99년 1승28세이브 등 3년 연속 30세이브 포인트를 돌파하면서 선동열은 4년간 단 4차례만 패전기록을 남겨 '나고야의 수호신'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9년 11월 15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라이징 패스트볼’의 원조도 국내에서는 선동열이다. 박찬호 하면 떠올리는 '라이징 패스트볼'을 선동열은 이미 그 이전부터 떠오르는 강속구를 던졌던 것이다.
타고난 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부드러운 투구폼 덕분이었다. 선동렬은 공을 던질 때 팔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온다. 상·하체의 밸런스와 투구 시 무게중심의 이동이 이상적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에 공을 완벽하게 낚아채 볼 끝이 떠오르며 살아 있는 느낌을 줬다. 스피드가 150㎞를 넘는 데다 공의 무브먼트 까지 갖췄으니 타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제1의 승부구는 잘 알려진바 대로 140km대의 예리한 슬라이더이다. 슬라이더는 직구와 커브의 중간 형태의 볼로써, 구속은 직구와 비슷하나 타자 앞 좌우로 예리하게 휘는 것이 다소 차이이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그 속도와 예리하게 휘는 각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HOT 최동원
그는 선동열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투수 분야의 거의 모든 기록은 선동열이 가지고 있으니, 단연 1인자는 선동열일 것이다. 하지만 전성기 때 삼진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며, 실제 한시즌 최다탈삼진 기록(223개)을 가지고 있는 최동원이 84년에서 86년까지 3년 동안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를 확실하게 능가할 수 있는 투수는 없다.
최동원은 84년~86년 동안 66승을 올렸으며, 이 3년 동안의 방어율은1.97이다. 또 이 기간 최동원은 776.2이닝 동안 마운드를 지켰다.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5년 연속 200이닝을 던진 투수는 오직 최동원 한 명뿐이다. 8년 동안 통산 103승73패 26세이브 방어율 2.46의 빼어난 성적을 남겼으나, 8년이라는 짧은 경력이 그가 얼마나 빨리 현역을 떠났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84년 85년 연속 20승을 넘어서고, 86년에도 19승을 거두었던 최동원은 요즈음 같으면 한창 던질 나이인 32세의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최동원은 프로야구 사상 가장 심하게 혹사당한 투수 중의 한 명이다. 일례로 84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 강병철은 후반기 50경기에서 무려 31번이나 그를 마운드에 올렸다.
고교, 대학 시절을 논외에 두더라도 만 23세부터 엄청난 수의 투구를 했던 투수가 29세까지 부상 없이 200이닝을 소화했다는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혹사가 최동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시속 150km 이상 스피드의 공이 얼마나 빠른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시절, 최동원은 시속150km대의 직구와 낙차 큰 커브, 체인지 업, 이 3가지 승부구로 20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의 피칭은 역동적이었고, 시원하고 다이나믹 했다. 선동열의 투구가 흔들림 없는'냉철함' 이었다면, 최동원의 투구는 가슴으로 뿌리는 '뜨거움'으로 표현 할 수 있다.
▲ 결론
미국 메이저리그보다 역사가 짧은 한국프로야구이지만 우리에게도 사이영이나. 월터존슨, 현역 로저 클레멘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못지 않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투수 선동열과 최동원이 존재했음을 회고해보고자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메이저리그 그 어떤 팬들도 월터존슨과 사이 영과 비교하지 않듯이 선동열이냐?, 최동원이냐? 굳이 통계적으로 비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위대한 두 투수들과 동시대를 살며 영원 불멸할지도 모르는 기록을 남기며 너무나 뛰어나고 훌륭한 경기를 보여 준 두 투수에게 야구팬으로서 존경의 표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커피한잔 마시는 짧은 여유를 가지고, 수도 없이 보여주는 케이블방송의 재방송을 보는 기분으로 이 글을 읽으며 잠시나마 머릿속에 마운드 위에서 포효하던 두 투수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현재 내가 살고있는 삶이 과연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삶인지도 돌이켜보면서...
※이 글의 일부는 'http://cgi.chol.com/~alavu2/ez2000/ezboard.cgi?db=main(선동열 팬페이지)'를 참조 인용하여 한눈에 알기 쉽도록 작성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첫댓글 조금 지난 얘기지만 한번 올려봅니다...^^;
누가 우위에 있다가 말 못하겠죠..둘다 위대한 투수라고 밖에는 말 못하겠네요
전 또 전SK 위대한 선수 예긴줄 알고....ㅋㅋ 들어왔음..^^
제가 그말할려고햇는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