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 문선경
찬 기운이 물러가고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자 집집마다 겨우내 보살피지 못한 화분을 내 놓았다. 개중에는 쓸 만한 화분도 있었고, 살릴 수 있을법한 식물도 간혹 있었지만 경비아저씨의 마음은 이미 처분 쪽으로 기울었다. 경비아저씨는 아파트 화단 저 깊숙한 쪽에다 화분들을 모아 망치로 하나씩 깨뜨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는 화분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는 애초에 가장 역할을 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분이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곧 막이 내리는 연극이었다면 아버지는 자신의 역할을 좀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대본을 외우지도 않은 형편없는 연기로 관객의 야유를 받았을까. 어쩌면 얄궂은 운명이 생활력 없는 무능한 아버지 배역으로 설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의 부탁을 거절치 못하는 성정을 가진 아버지는 가족에게 이미 몇 차례 수난을 겪게 했다. 하지만 마지막 빚보증은 지난 수난과는 규모가 달랐다. 우리 집안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악수를 두신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쓰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마침 단축 수업으로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집에 왔다. 하교 길에 본 세상은 온통 푸르렀고 학교도 일찍 마쳤으니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겠는가. 하지만 현관문이 열려 있는 거실은 이전 세계와 뚜렷한 이질감이 있었다. 전화벨은 울려대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돈부터 해결해 달라 했다. 무모한 아버지는 흔적을 감추었다. 집은 채권자에게 넘어갔고, 지척에 살던 지인들과 친척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리를 피했다. 얼굴을 맞대고 대거리를 하는 것보다 외면하는 것이 더 큰 벌이란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우리와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다.
집을 비워주기로 약속된 날을 얼마 남겨두고 10년을 넘게 키워오던 관음죽에서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현관입구에 당당히 위치한 관음죽은 엄마가 그 어느 식물보다도 공을 들여 키웠던 식물이었다. 수형을 잡거나 분갈이를 할 때도 전문가의 손에 맡겨 한 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신경을 쓴 덕분에 관음죽은 모두들 탐내던 식물이었다.
이사하는 날 아침, 분주한 와중에 엄마는 관음죽 꽃을 알아차렸다. 엄마는 실성한 사람처럼 이미 싸 놓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뒤져 망치를 꺼냈다. 관음죽 화분을 베란다로 질질 끌고 가더니 순간 망치로 육중한 화분을 내리쳤다. 꽃과 불행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듯이 엄마는 화분에게 길게 분풀이를 했다. 아버지의 행방은 그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깨지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버려지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두 가지를 감당해야하는 화분의 모습이 우리의 처지와 같아 보여서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눈으로 깨진 화분 조각들을 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금파리들이 혈관을 따라 흘러가다 온몸을 찔렀다. 구석구석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 눈을 감아도 통증은 둔해지지 않고 더욱 선명해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두덩이 뜨뜻해졌다. 결국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흙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일을 하지만, 흙을 고스란히 담는 것은 화분이다. 흙이 수분을 머금는 것도, 생명을 나누고 돌보는 것도 모두가 화분의 덕이다. 가족을 잘 감싸고 돌봐야하는 아버지라는 화분은 수십 년 전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박살이 나서 사금파리가 되었다.
잘게 조각난 사금파리가 만든 상처는 잊을만하면 벌어졌다. 순간순간 아픔은 원인을 모르는 발작처럼 갑자기 찾아왔다가 절로 가라앉곤 했다. 시간의 경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금파리의 모서리는 여전히 날이 서 있어 상처가 쉬이 아물지 않았다.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얼어붙어버린 흙은 녹을 줄 몰랐고, 맹아든 무엇이든 품을 여유가 없었다. 사금파리를 덮어 줄 넉넉함은 더더욱 없었다. 아무리 덧칠을 해도 얼룩이 자꾸 묻어나는 물감처럼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픔은 여전히 묻어났다.
나와 아버지의 화해 지점은 아버지 망각에서부터 였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게 되었다. 나를 기억해 낼 때도 있고, 몰라 볼때도 있다. 치매가 있기 전에는 아버지와 거의 대화가 없었다. 주로 내가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치매를 앓고 나서부터 아버지는 내가 피할 겨를도 없이 나와 마주하고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그동안 알고 있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의 끝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회한과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의 오회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러운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내 마음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아버지를 이때까지 줄곧, 그리고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당혹스러웠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엉킨 아랫바닥에 사랑이 있을 줄이야. 아버지는 나를 몰라보는 날에도 공손히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미안해했다. 아버지의 치매는 모든 감정을 지우고 미안함만 남긴 것 같았다.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리고 영원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마른 손을 잡았다. 내 두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다가 얼굴을 어루만졌다. 얼굴을 비비고 비볐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따뜻한 흙이 되어 사금파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내 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묻어주고 싶다. 그리고 아버지가 더 이상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