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작년부터 제 개인 블로그에 연재하던 KBO 전설 시리즈의 최동원 선수 편입니다. (1편이었죠 ㅇㅅㅇ//)
그냥 저 혼자 쓰고 소장하려던 글이었는데, 그냥 거사 야구게시판에 한 번 올리고 싶어 올리네요. ^^
![](https://t1.daumcdn.net/cfile/cafe/1142CD134A4E616B24)
Name : 최동원
Birth : 1958年 5月 24日 부산 生
Team : 前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투수, 現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School : 토성중 - 경남고 - 연세대
Debut : 1983년 롯데자이언츠
Award : 1984년 프로야구 최우수 선수상
목차
1. 야구 이전에 최동원이 있었다
2. KBO 이전의 최동원은 어땠나
3. 세계의 주목, 최동원 국제 무대에 선보이다
4. 롯데 에이스 계보의 첫 번째 이름, KBO의 뜨거운 전설이었던 사람
1. 야구 이전에 최동원이 있었다
아직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지 않았던 70년대 후반, 경남고와 연세대엔 최동원이라는 불세출의 투수가 있었다. 그는 후에 '무쇠팔' 이라 불리게 되는 팔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팔이 얼마나 대단한 팔이냐 하면 오른팔 한쪽만 단독으로 보험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 뭐, 팔을 보험에 따로 들고하냐 하겠지만, 그가 그 팔을 보험을 들어야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파트 1 제목으로 쓰인 '야구 이전에 최동원이 있었다' 는 한 칼럼라이터가 자신의 칼럼에 붙인 제목이라고 하는데 매우 마음에 들었다. 고교시절 삼진탑을 쌓으며 모교를 우승시켰던 사람, 그리고 대학 1년차에 이선희와 함께 77' 슈퍼 월드컵 재패를 이루었던 사람, 실업리그 단일시즌 최다승 보유자인 사람, KBO 시즌 탈삼진왕과 MVP를 가진 그 사람을 여기서 추억해보고자 한다.
2. KBO 이전의 최동원은 어땠나
최동원이 데뷔하던 1975년에서 불과 몇 해전인 1971년 '남우식' 이라는 걸출한 투수의 활약으로 한·일 고교 야구 선발전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6전 전승의 기록을 세우고 한국의 고교 야구는 일약 최대의 인기를 끌어모으게 된다. 그리고 그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975년. 어쩌면 몇해 전부터 끌어와 그의 데뷔와 맞추어 절정을 달리던 고교 야구에 대한 관심은 그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을 던지기도 전에 다이나믹한 투구폼으로 볼거리를 선사했던 그는 '삼구 삼진' , '홈런 타자와 초구 직구 승부' , '강철같은 연투능력' 등으로 관중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곤 했는데 그런 그의 고교시절 기록들을 대충 나열해보면 이와 같다.
1975년(경남고 2학년)
화랑대기 이틀간 18이닝 투구 1실점
전국대회 우승, 준우승팀들만 초청해 진행되었던 우수고교리그에서 3관왕이던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 기록
다음날 선린상고전 8회 강우 콜드게임승 이후 연이틀 등판해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1976년(경남고 3학년)
청룡기 대회 '역전의 명수' 랄 불리던 군산상고를 상대로 2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승리. 이 대회에서 그는 42이닝을 투구해 방어율 0.27을 기록.
그가 지금까지도 '선동열' , '박찬호' 와 함께 거론되며 최고투수 위치를 다투는 것은 비단 그의 구위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기록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연투능력. 그에게 어제와 오늘 연달아 등판하는 것은 도전이 아닌 일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성적을 내었다. 투수 분업화가 철저히 진행되는 지금에서는 볼 수 없는 '에이스 선발투수의 완투' 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렇다면 그의 대학시절은 어떨까. 사실 그의 대학리그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후에 기술될 그의 국제무대 성적이 그의 대학시절을 대변해 줄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몇 가지 남아있는 기록이라도 적어본다면,
1978년(연세대 2학년)
대통령기 준결승, 동아대를 상대로 18이닝 무실점 그리고 연이은 성균관대와의 결승전, 9이닝 2실점 우승(이틀간 27이닝 연투)
1978, 1979년(연세대 2, 3학년)
1회, 2회 고교 야구 대제전 경남고OB로 참가, 연속 석권
1980년(연세대 4학년)
5월 10일 백호기, 당시 최강팀이던 상무를 상대로 1 - 0 완봉승 10탈삼진
9월 22일 대학선수권 결승전, 성균관대를 상대로 3 - 0 완봉승 3피안타, 12탈삼진
11월 4일 야구 대제전 결승, 중앙고OB를 상대로 3 - 2 완투승 2실점, 10탈삼진 기록(고교 야구 대제전 -> 야구 대제전)
1981년(실업리그 롯데 소속)
실업리그 전기리그 롯데, 13승 2패로 우승. 이 때, 최동원의 전기리그 기록은 13승 1패였다.
실업리그 결승전, 경리단을 상대로 7일간 6경기 전경기 등판, 우승을 이끔. 대회 MVP(이 때의 혹사로 어깨 건초염 발병, 전성기 하락세)
글로써 기술하다보니 오히려 그의 포스가 깍이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그는 당시 아마야구 최강의 포스를 뿜던 투수였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하나도 없음을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3. 세계의 주목, 최동원 국제 무대에 선보이다
그렇다면 그의 국제무대는 어땠을까. 80년대를 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메이저리그에 처음으로 이름 올릴 사람이 LA다저스에 입단해 코리안드림 신화를 써내려갔던 '박찬호' 가 아니라 '최동원' 일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앞으로 열거될 그의 국제대회 성적이 그를 증명해 줄것이다. 간단히 써내려 가보면,
1977년(연세대 1학년)
슈퍼 월드컵 예선, 콜롬비아를 상대로 7 - 0 완봉승, 4피안타
슈퍼 월드컵 결선, 콜롬비아를 상대로 4 - 1 완투승, 1피안타, 16탈삼진
바로 다음날, 컨디션 난조이던 이선희를 대신해 1회부터 구원등판, 10회 1사까지 무실점 투구(당시 최동원이 던지는 동안 0 - 0 의 팽팽한 투수전)
1978년(연세대 2학년)
할렘 국제대회 쿠바전 7회 구원등판, 3이닝 무실점 승리
세계 선수권, 8월 28일 미국전, 1 - 2 완투패, 11탈삼진, 2실점
세계 선수권, 8월 29일 캐나다전, 7 - 4 승, 7회 1사부터 구원 2와 2/3이닝 무실점
세계 선수권, 8월 30일 일본전, 5 - 4 승, 9회부터 구원 1이닝 무실점 마무리
세계 선수권, 9월 1일 새벽 이탈리아전, 3 - 2 승, 4회부터 구원 6이닝 무실점
세계 선수권, 9월 1일 밤 호주전, 7 - 3 승, 4회부터 구원 6이닝 무실점
세계 선수권, 9월 3일 니카라과전 6 - 3 완투승, 16탈삼진, 3실점
(등판 날짜들을 눈여겨 보라. 이 얼마나 처절한 연투의 파이팅인가!)
1980년(연세대 4학년)
7월 14일, 한·미 대학 야구 대회 2차전, 구원 4이닝 무실점(무안타, 무4死구), 구원승
8월 31일 세계 야구 선수권, 콜롬비아를 상대로 6 - 0 완봉승, 16탈삼진
11월 10일, 일본 롯데 오리온즈 초청대회 1차전, 7 - 1 완투승, 12탈삼진, 1실점
1981년(실업리그 롯데 소속)
8월 대륙간컵 세게 대회, 캐나다(개최국)을 상대로 1 - 0 완봉승, 1피안타 11탈삼진(9회 1아웃까지 퍼펙트). : 캐나다가 강팀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모든 대회에서 개최국은 어드벤테이지를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대단한 기록.
그의 전성기는 아쉽게도 81년도가 절정이었다. 그리고 79년, 즉 최동원 선수의 대학 3학년 때의 기록이 적은 것은 당시 사회 이슈화가 되기도 했던 연세대 선후배 폭행사건의 피해자가 최동원 선수였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그 해(79년)은 부상으로 신음하던 시기였다. 당시 그를 폭행한 선배 가해자가 박철순 선수였다고.
그후 82년도 부터의 프로기록은 파트 4에서 기술하도록 하겠다. 이 얼마나 눈물을 자극하는 연투의 향연이란 말인가.
4. 롯데 에이스 계보의 첫 번째 이름, KBO의 뜨거운 전설이었던 사람
말 보다 그림 하나로 정리하고자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42CD134A4E616B25)
프로 데뷔 전부터 이미 이룰 것 다 이룬 선수같았던 최동원 선수의 늦은 프로 데뷔. 비록 81년 혹사로 인해 어깨에 문제가 생기고, 그로 인해 전성기 클라이막스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최동원 선수였지만 역시 그의 포스는 프로에서도 죽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아는 그 사건(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사실상 선수생활이라 볼 수 없었던 막바지 3년(88~90)은 넘어가기로 한다.
최동원이라는 선수를 언급할 때 꼭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1984년 한국시리즈 5경기 등판이다. 그 중 4승 1패를 거뒀는데, 삼성 쪽에서도 김일융 선수가 4경기를 책임지며 3승 1패, 분전했으나 결국 유두열의 역전 쓰리런으로 7차전을 가져간 롯데가 4 - 3 으로 84년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선동열 선수를 비판하려는건 아니지만(이 전설시리즈의 2편 유력인물), 84~86년까지 3년간 야구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로, '한 게임을 확실히 이기려면 최동원 보다는 선동열이 낫다. 그러나 한 시즌을 맡기라고 한다면 단연 최동원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 시절 신문기사를 보면, '해태의 괴물투수 선동열' 이라고 선동열 선수를 평하고 있지만, 최동원 선수는 '최동원의 롯데' 라고 표현된다. 한 팀을 책임졌던, 거의 혼자 이끌었다해도 무리는 아닐 최동원 선수. 그의 불타올랐던 5년(83~88)은 가히 메이저리그의 '샌디 쿠팩스' 의 5년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었다. 여담으로 하나 더 언급하자면, 3년간 규정 이닝을 채우며 리그 평균 방어율보다 뛰어났던 선수는 KBO 역사상 43명이며, 그 범위를 200이닝으로 늘리면 13명이 남는다. 그리고 기간을 5년으로 늘린다면 남는 선수는 단 한명 뿐이다. 바로 '최동원'. 비록 현대시절 정민태 선수가 200이닝 이상 5시즌을 던졌지만, 방어율이 좋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이닝이터는 최동원 선수라 하고 싶다. 만약 선동열 선수가 몸관리를 잘하며 롱런한 '로저 클레멘스' 라면 최동원 선수는 '드와이트 구든' 이나 '샌디 쿠팩스' 로 비견될만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동열을 '차가운 전설' 이라 한다면 역시 최동원은 부산 싸나이다운 '뜨거운 전설' 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첫댓글 와 기록보니 정말 ㅎㄷㅇ인데 영상자료는 남아있는게 없나요 한번씩 나오는것도 선동열이랑 맞대결하는 영상만 몇번보고 최동원 대학시절 아니면 세계대회에서 던졌던 영상 어디 없나요? 보고싶네요 정말
감동
1978년 기록 정말 ㅎㄷㄷ 이네요 ㅋㅋㅋ
앞으로도 최동원,선동렬 같은 투수는 안나올 겁니다. 그러나 선동렬은 관리를 잘 해서 오래 선수생활도 했고 감독으로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고 잘 하고 있는데 최동원 롯데의 전설은 건강의 이유도 있지만 너무 전설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언제나 목에 뭔가 걸린 듯 맘이 안좋아요. ㅠㅠ 욕을 들어도 좋으니 롯데감독 하는 것 꼭 한번만 봤음 좋겠네요.ㅠㅠ
최동원을 뺀 롯데는 상상도 못 하죠...그 뒤를 이었던 선수가 미미하지만 윤학길이죠....고무팔 최동원 당연히 롯데서 코치,감독해야 하는데 아버지와 롯데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후문이.........
잘 봤습니다 대단하죠 얼마전 모 언론과 대화중 고향 팀으로 오고싶다는 한적이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었나봐요 오늘 시구 장면 옛 날 모습 그대로 군요 혹시 롯데서 코치 라도 받아들일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침부터 소름이 확 돋네요. 최동원 선수를 기억합니다.
잘 읽었어여..저도 최동원에 빠져서 84년에 고3인데 수업 빠지고 부산 같다와서 담날 셈한테 죽다 살아났던 기억이..ㅋㅋㅋ 최동원 트레이드 후 한동안 롯데 야구 외면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나네요..언젠가 다시 지도자로서라도 돌아와 주시길..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동적입니다.
시구하시던 날,, 많은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쳤죠.. 저 그날 처음으로 꿈에그리던 최동원선수 실제 투구하는 모습 봤습니다.. 진짜 감동이었습니다!! ㅠㅠㅠ
284와 2/3 이닝.....-_-;;;;;;;;;; 정말 운좋게 토욜 경기 보러 갔더니 왠 횡재..최동원 선수가 시구자 와우+_+ 정말 감동이었음..어릴때 가물가물하던 기억뿐이였는데..비록 높게 형성된 공이였지만 그래도 역동적인 폼은 여전하더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