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깨닫고 발견하는 인생.
1. 요셉은 드디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힙니다. 형제들은 요셉에게 이미 예전의 형제들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길었던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의 가정 모두를 만지셨습니다. 모두 요셉의 신앙 수준으로 이끌어오셨습니다. 지나온 험악한 세월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2.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는, 자신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넘어서, 자신을 힘들게 하였던 그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지난 세월의 고난과 버려짐은 자신에게 쓴 뿌리와 원한을 남겨두기에 너무나도 충분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요셉이 형제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는, 오히려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 해답을 선명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 속에서 간섭하시고, 이끄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분명하게 보고 느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말속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서 말합니다. 형제들이 자기를 팔아서 애굽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보내셨다는 것입니다(5). 하나님께서 큰 구원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을 두시려고 자기를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말입니다(7). 8절과 9절에서도 요셉이 하는 말의 주어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4. 다만 형제들이 악한 의도로 행하기는 했지만, 형제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을 향하여 원한을 품지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으며,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5. 그러므로 화해는 용서를 통해서 오고,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요셉이 자기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는 것이, 자기 이해, 자기 용납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용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져왔고, 이 용서는 형제들 사이에 놀라운 화해를 가져왔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의 인생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꼬이고 꼬이는 인간관계들에서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익, 자기의 감정, 자기의 기준에서만 판단한다면, 결코 그곳에서는 아무런 화해도 용서도 화합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이런 많은 관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6. 이제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십시오. 오늘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그 일은, 결코 우리를 죽이고자 하시는, 괴롭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기어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때로 인간의 악함을 이용하셔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당신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만지심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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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5장은 유다의 긴 변명과 간청에 대한 요셉의 대답으로 시작합니다. 요셉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주변 사람들을 물리친 후에 방성대곡합니다. 이제 자리에는 요셉과 형제들만 남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형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요셉은 형제들에게 가까이 와서 자신을 보라고 말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애굽에 판 요셉이 맞다고 말합니다. 이제 형들은 충격과 함께 온갖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판 일에 대해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이 5, 7, 8절에 세 번 반복됩니다. 요셉은 “나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의 많은 고난과 억울한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참된 화해가 가능했습니다.
요셉은 앞으로도 큰 기근이 5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가족들로 애굽에 와서 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족들을 봉양하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말을 하고나서 요셉은 베냐민을 안고 울고, 형들과 입을 맞추며 안고 웁니다. 이 일이 애굽에 알려지고 바로도 알게 됩니다. 바로는 크게 기뻐하며, 요셉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초대합니다. 바로가 보낸 수레와 많은 선물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간 형제들은 야곱에 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처음에 너무 놀라서 믿지 못하던 야곱은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요셉이 살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며 내가 죽기 전에 가서 요셉을 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가 신자에게 주는 유익, 위로를 잘 가르쳐 줍니다. 먼저 섭리의 신앙은 요셉의 삶에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렸을 때,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술 관원장이 자기를 잊었을 때, 요셉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이고, 때에 맞춰 요셉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이렇게 우리의 삶의 고난과 문제들이 하나님의 선하고 지혜로운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을 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는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앙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혔을 때, 형들이 나서서 ‘네가 이렇게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다. 비록 우리가 너를 팔았지만 결국 잘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죄를 합리화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서 우리는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위로도 주지 못합니다.
섭리의 신앙이 요셉과 형제들에게 준 유익은 참된 용서와 화해입니다. 요셉은 이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요셉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하고 결국 팔아 넘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통해 형제들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사랑받으시는 영원한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이 원수와 같은 형제들을 용서하고 위로하고 용납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안목을 줍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볼 때, 고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와 같은 사람도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듯 캄캄하고 절망적일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고난과 절망과 비참의 길을 지나가셨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선하신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 안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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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은 지금까지 정을 억제하며 형들을 대하였습니다. 형들이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며 괴로워할 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 울고 나왔습니다. 베냐민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솟아났을 때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한 말을 듣고는 이제 정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게서 물러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당신들의 동생 요셉에요!” 요셉은 자신이 요셉임을 알렸습니다.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큰 소리로 엉엉 울었습니다.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처럼 감격적인 눈물을 흘렸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크게 울었든지 애굽 사람에게까지 들렸습니다. 바로의 궁중에도 들렸습니다. 울음은 진심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울음을 통하여 요셉이 형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간첩으로 몰고 도둑으로 몰았던 것도 요셉이 진정으로 형들을 사랑하여 준 훈련이었습니다. 요셉은 울음을 통하여 내면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눈물, 사랑의 눈물을 흘릴 때 마음이 정화됩니다.
(이성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3,4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형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노예로 판 요셉이 총리가 되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요셉은 형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와서 자신을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형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은 형들이 판 요셉이라고 말합니다. 가까이 와서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판 요셉을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았으므로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형들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죄를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책감에 떠는 형들을 위로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우리를 형제로 영접하여주십니다.
(형들을 위로하는 요셉)
5a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형들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형들이 판 요셉이 애굽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요셉을 팔았으므로 보복 당할 것을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보복할 것을 생각하고 근심하거나 한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들이 회개하자 요셉은 형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베냐민에 대해서 공동책임을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다가 베냐민과 형제들을 대신하여 희생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회개한 이들의 죄악을 이미 다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요셉은 보복하지 않을 테니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보내심)
5b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요셉은 더 나아가서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어떻게 일하셨는가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에 보내서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풍년 동안 곡식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흉년을 맞아 죽게 된 사람들을 살리게 하셨습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도 살렸습니다.
애굽 땅에는 그때까지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오 년 동안 흉년이 들 것입니다. 풍년에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기근으로 인하여 죽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근을 극복하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친히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7,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분명히 형들이 요셉을 팔았습니다.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사람은 형들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이리로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라고 말하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의지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의지입니다. 둘째 사탄의 의지입니다. 셋째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람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가 그의 삶에 작용합니다. 사탄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사탄은 나쁜 놈입니다. 사람들이 사탄의 의지를 벗어날 수 없을 때 그것을 운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운명입니다. 큰 재앙을 만나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사람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를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사단보다 크고 영화로운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알히시는 것을 믿을 때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히 형들이 요셉을 팔았습니다. 이 가운데 사탄이 시기심으로 일하였습니다. 사단은 요셉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단의 의지를 이용하여 그 위에서 요셉을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투수가 공을 못치게 하려고 공을 빨리 던집니다. 그러나 타자는 그것을 이용하여 공을 더 멀리칩니다. 그와 같이 사단의 의지를 이용하여 하나님은 더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일 중에 나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쁜 분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좋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욥의 이야기)
우리는 욥의 재앙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재산을 잃었습니다. 자식이 죽고 병이 났습니다. 이는 누가 한 일입니까? 사탄이 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일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욥은 재앙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찬양을 받을지어다“ 하나님을 믿는 욥은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배봉센타에서 시립대역사를 섬기고 있는 주복음 목자님이 있습니다. 그가 사는 시골집에 점을 잘 치는 분이 놀러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와서 점을 쳤습니다. 그런데 점쟁이는 주복음 목자님은 점괘가 안 나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는 사람은 사탄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점괘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인간과 사탄의 의지를 쓰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애굽에 보낸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인생에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두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아버지 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보고 있습니다.
(구원역사를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요셉을 애굽에 보내셨습니까? 총리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요셉이 한 사람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과 그 후손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기근에서 살리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을 살리셔서 그 후손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애굽의 많은 사람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크신 뜻을 위하여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요셉의 삶에 일하신 하나님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은 이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시련을 극복하였습니다. 그가 노예살이할 때도 좋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가 감옥살이 할 때도 좋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가 좋으신 하나님을 볼 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시련을 참고 견딜 힘이 생겼습니다. 그가 좋으신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는 보디발의 처가 유혹할 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하신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 속에서나 모든 일을 하시는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정경주 사모의 “하나님이 하셨어요” 라는 간증집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KAL기 국제 승무원이었습니다. 승무원 자격은 키가 165센티 이상 대졸자 수영 가능한 자였습니다. 당시에 그녀는 연대 성악과 2학년 재학 중이었습니다. 키는 163센티미터였습니다. 수영은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면접관을 통해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특별점수를 주셔서 여승무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후에 면접관을 만났는데 면접관은 노래를 시키지 않으면 합격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노래를 시켰다고 합니다. 정경주 사모는 이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왜 자격이 안 되는 그를 여승무원으로 뽑으셨을까요? 그가 알레스카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비행기 날개에 불이 나왔습니다. 사모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천국에 가고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와서 무릎을 꿇고 정경주 사모에게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정경주 교수가 예수님 믿은 것을 알고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정교수는 그 사람의 영혼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가 끝날 때 기장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데 불이 꺼졌다고 방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교수를 통하여 비행기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뜻을 위하여 정교수를 여승무원으로 뽑았습니다.
정교수는 승무원으로 있으며 여러 사람을 전도합니다. 한번은 한국 동란에 참전하여 눈을 먼 사람이 신문에 난 것을 보고 너무 마음에 아팠습니다. 정교수는 그 분이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교수는 비행기에서 그 분을 우연히 만나서 그를 섬기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정교수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에 가서 기독교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기 직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숙대 이경숙(과거 대통령직 인수 위원장)총장이 전화가 왔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경숙 총장은 새벽기도할 때마다 정경숙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전화했다고 합니다. 숙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정교수를 불렀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교육학과를 나온 정교수가 숙대 영문과 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숙대에 와서 많은 사람을 전도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숙대 교수를 하다가 너무 지쳐서 병이 났습니다. 그는 모든 힘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그는 숙대교수를 사직하고 찬양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병나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서 병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찬양 사집을 내고 찬양 사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로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면서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그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그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적인 눈을 뜨게 하실 뿐 아니라 영적인 눈도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를 통하여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났습니다. 죽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병 소식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병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통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왜 우리나라에 육이오가 일어났습니까? 왜 우리 나라에 IMF의 경제 환난이 왔습니까? 왜 지금 우리 나라의 환율이 요동치고 있습니까? 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왜 한국 땅에 태어났습니까?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하였습니까? 우리가 왜 천안 캠퍼스에 들어왔습니까? 우리가 왜 천안 ubf에 오게 되었습니까? 왜 내가 이 직장에 들어갔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크게 외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영접할 때 우리는 소망이 넘치고 힘이 납니다.
(부모를 초청하는 요셉)
9-13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하여 꿈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방향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치리자로 삼으셨으니 형들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합니다. 아직 오년은 기근이 더 있을 것이니 애굽에 내려와서 고센 땅에 거하라고 합니다. 요셉의 나이는 39살입니다. 그는 흉년 동안 아버지와 형제들의 가족을 봉양하겠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부모님을 오게 하여 효도하고자합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을 온전히 이루고자 합니다.
(형들과 입맞추는 요셉)
14,15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은 같은 어머니의 소생인 아우 베냐민과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형들과도 입맞추며 울었습니다. 요셉이 형들과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요셉이 형들의 죄악을 다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여 주겠다는 말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죄악을 용서한 것을 알고 그제야 말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와 입맞추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2편 17절에는 말씀하십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만약에 요셉이 그들에게 입맞추지 않았다면 그들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당장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도 우리와 입맞추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예수님과 입맞추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악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접해주실 것입니다.
(바로의 초청장)
16-20절을 보십시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바로가 요셉의 형들과 요셉의 아버지 야곱을 초청하는 내용입니다. 바로는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에게 즉시 초청장을 발급하고 비자를 발급하여 주었습니다. 요셉의 가족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겠다는 약속도 해주었습니다. 야곱을 데리고 오도록 바로 궁에서 쓰는 특별수레도 보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바로의 명령대로 수레를 가지고 양식과 옷을 주었습니다.
(다투지말라)
21-2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요셉은 바로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바로의 명대로 특별수레를 야곱에게 보내고 길에서 먹을 양식을 보냅니다. 형들에게 옷한 벌씩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벌을 주었습니다.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물품을 실어서 아버지에게 보낼 선물도 보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내며 형들에게 다투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누가 요셉을 팔아서 이렇게 되었느냐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지 말게 하였습니다. 형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평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형제끼리 화목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형들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에 돌아왔습니다.
(요셉이 보낸 수레)
25-2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와서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만 아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들이 또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고 기운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보낸 바로의 수레를 보고 기운이 났습니다. 그런 특별 수레는 총리가 아니면 보낼 수 없습니다. 수레를 보고 야곱은 과연 요셉이 살아 있고 총리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에게 가서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수레는 복음을 아주 잘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힘이 빠집니다. 진리가 불의에 지배당하는 시대라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셉이 야곱을 타라고 수레를 보내듯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타고 오라고 보낸 수레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하늘나라로 타고 오라고 보낸 수레가 있습니다. 그 수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신 성령님을 인하여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의 수레를 타고 천국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의 수레를 내 팽개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여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의 수레를 잘 의지하고 존중히 여겨서 성령의 수레를 타고 하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수레를 타고)
형들이 죽인 요셉이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회개하자 다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과 입을 맞추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보낸 성령의 수레를 타고 하늘 나라에 갈 준비를 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수레를 타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5장 강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말씀 창세기 45장 1-창세기 45장 28절
요절 창세기 46장 8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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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중요한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대신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인 대인 관계입니다.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인 대물 관계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 세 가지 관계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대인 관계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 대물 관계에서도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 가지 관계가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친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하늘에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열어주셔서 물질의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반면에 가장 회복이 어려운 관계가 인간관계입니다. 깨어진 대인관계의 회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의외로 불신자들은 싸우다가도 갖가지 방법으로 풀기도 하고, 밖에 나가서 한바탕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면서 해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인간관계는 한번 막히면 도무지 풀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더 지나면 관계가 더 악화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은 두 개의 돌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돌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돌비요,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한 돌비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대신관계에 해당하는 계명은 네 개이고, 대인관계에 해당하는 계명은 여섯 개입니다. 비율로만 따져도 대인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인관계의 회복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5장이 감동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원수 되었던 가족이 다시 만나 화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장(章)에서 인간끼리의 화해의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까요?
1. 요셉이 자신을 밝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1-2절)
요셉이 더 이상 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통곡을 하는 데 요셉의 통곡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에서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거나 혹은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 중에 남들 앞에서나 혹은 자기 혼자 있을 때에도 잘 울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울면 마음이 약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분들은 너무 오랫동안 슬픔의 감정이라든지 고통의 감정을 참아 왔기 때문에 만일 이것을 터뜨리면 자기 스스로가 감당을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무 자기를 많이 축복하셨고, 특히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어야 할 때가 되면 더 이상 옛날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터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무려 20년 동안 자신의 감정을 누르면서 오늘까지 견디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요셉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리면서 형들에게 자기가 요셉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노예로 팔리고 난 후 아마 한 번도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마음은 언제나 찬바람이 부는 싸늘한 냉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셔서 높여 주셨고, 특히 형제들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한 것을 보았을 때 자기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왕궁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통곡을 함으로써 그의 마음속의 응어리를 다 토해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리기까지 요셉의 마음의 상처는 결코 치료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셉이 감옥에서 나오고, 또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정치를 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료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의 상처는 전혀 치료되지 않고 있었고, 그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요셉의 마음속에 무려 20년 동안 자리 잡았던 응어리가 터져 나오면서 마음의 상처가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이 그를 완전히 치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이 신앙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자신을 두껍게 싸고 있던 틀을 깨뜨림으로 건강한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요셉처럼 오랜 세월 눌러 놓은 아픔과 슬픈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너무 쉽게 울어 버리면 자신을 주체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몇 겹으로 자신을 싸놓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끝까지 참고 울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분명히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쉽게 울지 못하게 하는 강한 자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울지 않는 그 부분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멀리하게 하며, 그 부분 때문에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빈틈이 많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눈물을 흘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도덕적인 성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분이었고, 자연스러운 분이어서 사람들에게 부담이 없었습니다.
2. 요셉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4절)
정상적인 경우라면 애굽의 총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자기들의 동생이라면 형들은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서로 붙잡고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애굽 총리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20년 전에 자기들이 그를 시기해서 죽이려고 했고, 미워서 노예로 팔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요셉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동생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마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더 소식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죽였다고 생각한 동생이 지금 눈앞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애굽에 팔려 와서 고생을 한 요셉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한데 동생을 팔고 돈까지 받은 형들은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너무 놀라 두려워하면서 뒷걸음질 치는 형들에게 가까이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줌으로 이들을 안심하게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5절)
요셉이 오랫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감옥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생각한 것은, 왜 내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 왔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자기가 왜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와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무서운 7년 흉년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7년 대흉년에서 자기 가족을 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먼저 보내어 그들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를 판 것으로 인해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문제를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비추어 볼 때 형들을 굳이 미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나의 형편을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모든 일을 나와 상대방의 관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 용서되지 않고, 내가 왜 이 사람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나 자신의 문제를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정확하게 인도하셨으며, 얼마나 큰 사랑으로 붙드셔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요셉의 형들을 사용하셨다면 형들의 죄는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악하게 사용된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고 해서 아담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함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고 해서 가롯 유다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롯 유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악한 자들의 죄에 대하여 직접 복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절대로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한 짓을 한 사람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알고 보면 그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6-8절)
요셉은 지금까지 되어 온 일만 말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것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애굽의 통치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가족이 흉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전 가족이 애굽으로 와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그 형들에게 미래의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들을 살리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뜻을 보여 주시면 이미 우리는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멸망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셉은 선발대였습니다. 그는 애굽에 온 후 계속 자기가 여기에 와야 했던 이유를 묵상했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알려줌으로 이 절망스러운 순간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3.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 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9-10절)
유다와 그 형제들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그들이 두려워하던 일들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즉 그들이 걱정하던 베냐민도 데리고 갈 수 있게 되었고, 양식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 전체에 가장 기쁜 소식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으며 앞으로 양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속히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요셉이 살아 있고, 요셉이 애굽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어 있으니까 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오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와 애굽 총리에게 불신을 당해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었지만 이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12-15절)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것이나, 또 베냐민이 요셉을 안고 우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여행길에 먹을 양식을 주고, 또 옷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 쌔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21절)
우리는 이들이 다시 애굽으로 올 텐데 왜 옷이나 양식 같은 선물이 필요할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들이 가나안에 있는 재산에 애착을 가지고 애굽에 오기를 머뭇거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애굽의 풍성한 것을 나누어 줌으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가지고 있던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과감하게 이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구원의 소식을 듣고 천국의 축복의 이야기를 들어도 막상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미리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보증’ 이라고 불렀습니다(엡 1:14).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변화된 삶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거나 말씀을 들으면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미리 받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믿는 데 따르는 구원의 기쁨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아마 할 수 있는 한 예수를 더디 믿으려고 할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식이 바로의 궁에 전해지자 애굽 사람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16-20절)
애굽 왕궁의 사람들이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셉은 그들의 구원자요, 은인이었습니다. 요셉이 없었더라면 애굽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요셉을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아무리 잘해 주어도 무엇인가 그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을 만나고 통곡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의 문제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인들은 요셉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좋아했고, 요셉에게 기꺼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서 가장 좋은 땅에 살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들에게 엄청난 것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죽어 버렸다면 형들은 영원한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살아 있으므로 그들은 살인자의 죄를 벗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까지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죄의식에 빠져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한평생 그들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동생을 죽인 죄가 벗겨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를 벗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면서 돌아가는 길에 서로 다투지 말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24절)
형들이 어린아이도 아닌데 요셉은 왜 형들에게 길에서 다투지 말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양심의 찔림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이 다 해결된 후에 다시 양심의 고통이 살아나서 자신을 질책하고 서로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이 다 끝났는데 그때부터 새로운 갈등이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형들이 길을 가면서 옛날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입니다. 즉, 한명이 “그때 네가 그렇게 강경하게 나오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요셉을 팔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일은 하나님 앞에서 다 끝난 일이기 때문에 서로 다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다 끝난 부끄러운 일 때문에 다시 침체에 빠지거나 자기 자신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때때로 너무 예민해서 시도 때도 없이 고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용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할 때 별 생각 없이 죄를 많이 짓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보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추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받고 난 후에 옛날의 죄 때문에 침체되고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런 죄책감을 이겨야 합니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고 한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과 같습니다(롬 8:1). 과거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모두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혹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죄를 들추어내어서 정죄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심으로 우리 죄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드디어 자신이 한평생 잊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아들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25-26절)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기색을 했습니다. 여기서 ‘어리둥절했다’는 것은 잠시 정신을 놓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을 듣고 믿을 수가 없어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한 말과 그가 보낸 수레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야곱은 정신을 차린 후에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28절)
야곱이 요셉을 잃은 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데려가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알고 보니까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요셉을 빼앗아 가신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 가셨으며, 그 결과 요셉을 통하여 엄청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야곱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손해 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요셉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손해 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요셉을 돌려주셨을 뿐 아니라 몇 곱절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원망할 것이나 불평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 때문에 직장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재산이나 가족이나 출세의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 가실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 가신 것이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잃어버리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기름을 부으셔서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지만 결코 요셉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요셉을 빌려 가신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돌려주실 때에는 병들고 지친 노예 요셉이 아니라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요셉으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으로 인하여 무엇을 잃을 때에 함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함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야곱처럼 이 기쁜 소식에 기절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것을 무단으로 빌려 가시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내 자녀를, 내 부모를, 내 배우자나, 내 직장을, 내 건강을 잃었다고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서 빌려 가신 것에 기름을 부으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곱절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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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을 품은 요셉 (1-15)
요셉을 잃고 슬퍼했던 아버지에게 같은 고통을 줄 수 없다며, 막내 베냐민 대신에 기꺼이 자신이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애원하는 유다의 진심어린 간청과 아버지가 자신을 잃고 얼마나 슬퍼하셨는지를 알게 되자 요셉은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1). 그는 시종들을 모두 무른 후에 울었는데 바로의 궁정에서도 들릴 정도였습니다(2). 요셉의 울음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그가 형들에게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3)라고 묻는 것으로 보아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폭발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형들이 데려온 베냐민을 보고 얼마나 반가워했습니까!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죽을 줄 알고 슬퍼한 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에 감정이 복받쳐 울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하기 위해 베냐민을 볼모삼아 사건들을 전개시켰고, 형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요셉은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요셉은 놀라서 어찌할 바 모르는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4b-5) ...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분명히 형들이 나를 애굽에 팔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나를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이기에 걱정하지 말고 자책하지 말라고 합니다.
(6-8)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흉년은 앞으로도 5년 동안 계속 될 것인데, 이 기근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고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번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형들을 통해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셔서, 나를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셨다는 놀라운 간증을 합니다. 대단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넘기고, 아버지에게 거짓으로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아버지를 상심하게 했던 형들을 어떻게 이렇듯이 용서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요셉이 복수에 눈이 멀었다면 이스라엘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략한 러시아를 향해 전세계가 비난하고 다양한 제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폭력은 문제 해결에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고, 더 심각한 갈등과 피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나라, 특히 러시아가 폭력을 멈추고, 평화적 대화를 통해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발탁된 것이 30살이었고, 7년의 풍년 후에 온 지면에 흉년이 들었고, 흉년 2년째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온 형들을 만났습니다(6). 17살에 애굽에 팔려왔으니, 그는 약 22년 만에 형들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단박에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22년 만에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마주한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릴 지라도,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요셉은 지금 당시 최대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요셉은 사소한 이유를 대서라도 히브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놓았고, 절도죄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요셉임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떠보았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형들을 단죄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창세기 42장 9절에 의하면, 요셉은 자신 앞에서 엎드려있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어린 시절에 꾼 꿈, 즉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 앞에서 엎드려있는 형들을 보고나서야, 하나님의 자신을 향하신, 이스라엘을 향하신 섭리하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과거 자신이 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다면,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 앞에 엎드린 형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이루기 위해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9-11)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요셉은 앞으로 5년 더 남은 흉년을 대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워두었습니다. 그런데 고센은 살기 좋고 편안한 애굽의 유명 도시가 아니라, 애굽 본토와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가 왜 고센을 이스라엘의 임시 정착지로 택했는지는 46장 또는 47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고센 땅으로 이주하는 결정을 속히 내릴 수 있도록, 형들에게 애굽에서 자신이 어떤 영화를 누리고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아버지에게 잘 전달하라고 합니다(12-13). 말을 마치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안고 울며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누었고, 형들과도 입 맞추고 안고 울면서 형제간의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다”(창 39장)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이 표현이 나타나는 시점은 야곱이 애굽의 보디발 장군 집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입니다. 그는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 믿음의 자녀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한 번도 하나님과 관련된 표현이 나타나지 않다가, 그가 노예로 팔려왔을 때 비로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했음에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형제간에는 당연히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이 17살에 불과한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깊은 구덩이 속에 던져버렸다가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기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들짐승에게 죽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즉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형들에게 오만방자하게 행동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깊은 구덩이 던져버린 사건은 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집에서 아름다운 채색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광야의 흙구덩이 안에서 발가벗겨진 흙투성이의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자각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은 그는 더 이상 오만 방자한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신 이유를 총리가 된지 9년째,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만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이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모든 순간에 걸쳐 역사하셔서 자신을 이 자리에 세우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요셉에게는 더 이상 형제를 향한 원망을 할 수 없었고, 형제를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야곱의 후손인 유다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당연히 우리를 통해 주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뜻을 이루시고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각자 삶의 자리에 보내셨습니다.
이 시간 뒤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 삶의 모든 순간 역사하셨음을 믿으십니까! 힘든 순간, 고통의 순간, 기쁨의 순간, 슬펐던 순간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삶의 자리에서 부모님과 형제, 자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끼는 복된 시간들로 채워가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앞선 본문에서 요셉은 아직 흉년이 오 년이 남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싶다고 하며 형제들에게 아버지 야곱을 모셔 올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에 의해 먼저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밝힙니다. 오늘 말씀은 형제들이 돌아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내용까지를 다룹니다.
애굽땅으로 이주 제안(16-24)
(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와 신하들이 기뻐했다고 전합니다. 참으로 가슴 뭉클한 말씀입니다. 요셉은 애굽 온 땅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잡혀 와 감옥살이하던 어느 외국 청년이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간 순간 얼마나 시기하고 멸시하는 눈초리가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울음소리가 궁중에 들리고,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때 바로뿐 아니라 그의 신하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우리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동등한 사람, 낮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게 좋은 소식이 있을 때 주위 모든 사람이 내 마음과 같이 기뻐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윗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지만 동료나 아랫사람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거나, 동료와 아랫사람에게는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지만 윗사람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요셉은 드물게도 윗사람과 동료 및 아랫사람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지난 세월 동안 자신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도록 보내신 하나님의 소명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흉년으로 죽어가는 모든 이의 육적 생명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형제와 앞으로 이어질 메시아의 계보를 유지하는 영적 생명의 보존자가 되는 역할 역시 자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지점입니다. 우리 역시 어느 자리에 있든지 생명을 증진하고, 생명 살리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죽으려는 자를 살리고, 사람 죽이는 사회를 사람 살리는 사회로 바꾸고, 모든 생명체가 함께 잘 살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로 인도하는 일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돈 많은 그리스도인, 높은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 말 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세상 일에는 능통하지 못해서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힘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쓰며 자기 생명력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나님을 느낍니다. 주위 모든 지역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요셉은 자신이 거하는 곳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사회에서 작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는 자리를 생명의 보금자리로 만들고, 다른 이의 슬픔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다른 이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즐거워한다면 다른 이들도 우리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17-20)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바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명합니다. 양식을 싣고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가족을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애굽의 좋은 땅을 줄 것이고, 애굽 땅의 좋은 것은 다 그들의 것이 되리라고 공언합니다. 이러한 처사를 볼 때 요셉이 당시 바로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요셉의 공헌이 그만큼 크기도 했겠지만, 그 처신이 얼마나 바로에게 인정받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생활과 정신에 모든 것을 맞췄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며 하나님의 꿈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주어진 관계와 일 가운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애굽처럼 이방 나라와 같은 관계와 자리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이나 다니엘을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과 믿음의 선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입증하셨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셉이 그랬듯이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합니다. 또 슬프게도 요셉처럼 이 땅이 말하는 성공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신실함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온 애굽땅의 좋은 것이 우리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천국의 좋은 땅과 기름지고 좋은 것은 분명히 우리의 것이 됩니다.
(21-24)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말 그대로 금의환향입니다. 형제들에게 좋은 옷을 주고, 음식뿐 아니라 애굽의 진귀한 온갖 물품을 함께 실려 고향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옷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요셉에게는 더 이상 형들에게 앙금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옛적 형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대상인 옷을 통해 그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철없이 자랑하면서 형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그 물품을 이제는 함께 누리자고 하면서 형제 사이에 있던 모든 응어리가 해결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왜곡된 사랑으로 인해 모든 형제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변 사람들과 갈등이 초래된 결정적인 사건이나 대화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자신이 당한 모든 악을 선으로 갚아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고귀하고 멋진 그리스도인의 형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꼭 들어야 할 말, 내가 꼭 손에 넣어야 할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것이 전제 조건이 되지 않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곱씹고 곱씹는 것이 있습니까? 요셉은 오히려 형제와 자신을 갈라지게 만들었던 옷을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마음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받지 못해 서운한 그 무엇이 있을지라도 그 얽매임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나도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라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주님은 우리의 옛 사람을 벗겨주시고 새 사람으로 입혀 주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새 사람으로 옷 입고 다른 이를 옷 입히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흥미로운 부탁을 합니다. 바로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형제들이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요셉을 유기했던 사실까지 밝혔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50장 17절을 보면 야곱은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그들이 행했던 죄악이 밝혀졌을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는 아마도 고대 근동판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제로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22년 후에 밝혀진 진실. 그날 요셉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정도의 제목이 가능할 듯 싶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요셉은 살아 있었습니다. 모든 정황은 요셉의 사망을 가리켰지만, 증거는 모조리 위조된 것이었고 범인들은 뻔뻔하게도 20년 이상 비밀을 묻은 채로 지근거리에서 아버지를 기만했습니다. 이제 돌아가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려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형들은 야곱에게 또 베냐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느냐를 두고 갑론을박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더 잘했느니 못했느니를 따지다가 다툴 여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한 다툼이 불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모든 일을 인도하셨으니 앞으로 화목하자는 취지입니다. 요셉의 지혜와 마음씀씀이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25절 말씀에서 형들은 야곱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말만 하는 걸로 볼 때 아마도 그 자리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이 가족은 유지됩니다.
야곱의 결정: (25-28)
(25-28)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그들은 야곱에게 가서 요셉이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했습니다. 야곱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소식이기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야곱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로 요셉의 상실을 억지로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총리에 대해 감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애굽 총리였다니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의 말을 의심하던 야곱도 애굽에서 온 진귀한 수레를 보고 그들의 말이 참임을 믿고 기운이 소생하였습니다. 그 수레는 애굽의 의전용 차량이나 전세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그 수레는 형제들이 살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자 이제 야곱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현을 합니다. 족하도다! 야곱의 삶은 이 한마디를 향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할 때에 성경은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합니다.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던 그 야곱이 이제야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 많은 상실과 아픔의 기억으로 점철된 험악한 나그네 세월이 이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족함을 느낄 때 그는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족하다고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귀하기에 자신의 품에 끼고돌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아들을 더 귀한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앗아가셨습니다. 야곱에게서 요셉을 앗아가시고 요셉에게서 가족을 앗아가셨기 때문에 요셉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야곱과 형제들도 진정한 가족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요셉을 야곱에게서 잠시 거두지 않으셨다면 이 형제들은 이스라엘의 기초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왜 내게서 이것을 앗아가십니까? 라고 따지며 괴로워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대상은 건강이 될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도 있고,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대상을 우리에게서 순간 앗아가신 이유는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죽지 않고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거기 못 박히면 내가 죽어 없어질 것 같고, 모든 자유와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내 계획이 어그러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죽으면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진정한 생명을 주셔서 더 깊은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리둥절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생명을 뺏으신 게 아니라, 더 좋게 해 주셨구나,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았구나 하고 말입니다. 지금 고통으로 신음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기쁨으로 어리둥절하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기 소원합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또 야곱이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어령 전 장관이 마지막 남기신 인터뷰에서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선물이었고, 생명을 포함해 자신의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것이 다 선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중에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것을 앗아가고 저것을 앗아가느냐고 묻습니다. 야곱 역시 그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됩니다. 족하도다! 그것이 내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그것을 더욱 좋게 만드셨구나. 족하도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 삶에 족하다고 고백하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 험악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생명 살리는 일에 충성하는 우리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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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오던 요셉은 더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혔습니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에는 그동안의 서러움, 그리움, 감사함, 감격 등 모든 감정이 다 고스란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 울음소리는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형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지, 아니면 지은 죄로 인해 두려워서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놀라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형들에게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는 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형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형들은 자신들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두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애굽에 팔려간 당사자인 요셉임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죄를 추궁하고자 이 일을 얘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5~8절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추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가장 두려워할 자들은 바로 요셉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애굽의 총리자리면 복수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힘을 가진 자리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살아있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이젠 죽었구나!’ 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정체를 밝히면 형들은 분명히 이 일로 큰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 안심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는 말로 안심을 시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과 일일이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요셉은 과거 형들의 잘못을 용서했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일후에 형들은 드디어 요셉의 본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이 “그제서야 형들이 요셉과 말을 시작했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중요한 한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은 바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애굽의 총리자리에 서게 해 주신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뒤이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는데, 7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물론 결과가 좋다고 형들의 죄가 합리화될 수는 없겠지만, 요셉의 말의 핵심은 형들의 그 죄를 포함한 그 어떤 악도 하나님의 섭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비록 형들의 악한 목적과 부당한 행동을 통해 인생의 절박한 위기를 경험했지만, 어느 때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믿어왔다는 것을 본인의 지나온 삶과 또 고백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요셉은 아무리 이해 못할 극한 어려움에 부닥쳐도 요셉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가실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인생을 결코 무관심속에 방치하지 않으시고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짧지 않은 손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을 것을 같은 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요셉이 걸어왔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부당함이 인생을 덮는 것 같고,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벽이 되어 인생을 막막함으로 끌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힘겨운 상황을 마주하며 마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멈춘 것 같고, 내 인생을 수수방관하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낄 때도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무관심 속에 관망만 하시는 결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을 통해 역사의 그림을 그려가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섭리 가운데 역사의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럼에도 부당함 속에서도 인생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계시고 또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셈하시고 상주시는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의와 절제의 삶을 구현해가고 또 눈물 속에서도 뿌려야 할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 요셉의 고백처럼 ‘이 자리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자리’라는 것을 선명히 보고 고백할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리가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내진 자리임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하루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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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히는 요셉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은 더 이상 혈육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면서 동생 베냐민을 비롯한 형제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혔습니다. 2절입니다.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얼마나 크게 울었던지 요셉의 울음소리가 이집트 왕 바로의 궁에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2절을 개역성경은 요셉이 ‘방성대곡'했다고 번역하고, 공동번역은 요셉의 울음소리가 ’이집트 모든 사람에게 들렸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쌓였던 요셉의 그리움, 슬픔, 한이 봇물 터지듯 터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의지를 따라 행동합니다. 의지는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고 이끕니다. 그러므로 선한 의지, 깨끗한 의지를 세우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의지를 넘어 행동을 유발시키고, 지배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情)’입니다. 사전적 설명으로는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고, 한자어 뜻으로는 ‘마음의 작용’인 ‘정’입니다. 사람은 종종 ‘정’의 지배를 받고 ‘정’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람간의 ‘정’, 기르는 애완견이나 짐승에 대한 ‘정’은 사람이 ‘정’의 지배를 받고 ‘정’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입니다. ‘정’은 지정의가 있는 사람의 본능적 일면입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깨끗한 의지를 세우고 훈련하는 것과 동시에 ‘정’ 또한 식지 않도록 마음을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이 식으면 인생이 너무 메말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식어지지 않고, 인색해지거나 조건적이 되거나 사무적이 되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으로 자신을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힌 요셉은 먼저 아버지 야곱 이스라엘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을 속히 이집트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흉년이 오년이나 더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정’을 가장 많이 느끼고 마음을 쓰는 상대는 역시 자식입니다. 마음과 애정과 관심을 쏟는 대상으로 자식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없습니다. 부부도 나중입니다. 그러기에 자식을 앞세운다는 것은 쉽게 가시지 않는 큰 슬픔이며, 아픔입니다. 그럼에도 살면서 문득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말없이 향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과 마음입니다. 혹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거나, 자신이 지금 부모로 살고 있다고 해도 부모님에 대한 생각과 마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우리를 낳아주셨고, 우리 영혼 속에 그 분들의 손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정’을 가진 사람이 향하는 마음의 깊은 자리는 부모님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분들에게서 나왔고, 그 분의 젖을 빨고 자랐고, 그 분들의 손에서 길리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식, 남편, 아내에 대한 애정과 애틋함이 있지만, 사람은 그것을 넘어 자기를 있게 하고, 길러주신 부모에 대한 마음과 그리움을 품고 삽니다. 이것이 부모라는 자리가 지니고 있는 비밀이며, 무게이며, 부모에 대한 사람의 의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궁극적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향해야 하는 절대적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그리움, 우리의 슬픔, 우리의 눈물, 우리의 상처, 우리의 희망, 우리의 소망 등등 우리의 마음을 보듬어 주시고, 들어주시고, 받아주시고, 이루어주시는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말씀 속에서 이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는 요셉의 질문에 놀라고 당황한 형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실은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4절에서 8절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공황 상태에 빠진 형들을 안심시키며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분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곳으로 나를 보내셨다”고 말했습니다. 살면서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간의 식어진 ‘정’을 회복시키시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하시고, 서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며, 주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생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