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709-79번지. 주태우 씨 가족이 사는 곳입니다. 주 씨가 이 집을 짓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정착 초기 잇단 실패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귀농인 주태우 씨의 새집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귀농 6년차인 주 씨가 새집을 장만하고 연간 1억7천만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그를 찾아가 귀농스토리를 들어봤습니다.
양송이 버섯으로 지난해 연매출 1억7천만원을 달성한 주태우·권선옥 씨 부부. 이 부부가 농촌진흥청이 뽑은 귀농 성공사례로 선정되기까지 지난 5년간의 삶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초기 정착금으로 마련한 현금 1억8천만원은 잦은 시행착오로 8개월 만에 모두 탕진했고 귀농을 위해 선택한 양송이 재배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정착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주태우씨는 양송이 재배방법을 확실히 배워 지난해 1억7천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정착 초기 집을 구하지 못해 찜질방을 전전해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주 씨 부부가 이론으로 배웠던 양송이 재배는 현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연거푸 실패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처음 귀농을 결정했을 때 부풀었던 전원생활의 꿈은 차츰 현실 앞에서 작아져만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 씨 가족이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마저 경매로 넘어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 씨는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활 터전을 버리고 귀농을 강행한 터라, 이대로 실패하고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성공한 농민을 스승 삼아 재배방법 다시 배워
“처음 보령으로 올 때 희망에 부풀었지만 6개월 만에 희망도 용기도 사라지고 몸무게도 6킬로그램이나 빠졌어요. 일손이 부족해 아이들을 모두 동원했는데도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시골로 무작정 가자고 제안한 저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부인 권선옥 씨)
주 씨 부부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정으로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주씨는 양송이 재배로 성공을 거둔 농민을 찾아 나섰습니다. 자신들의 농사방법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었는지를 찾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주 씨는 초기에 임차를 했던 하우스 재배동을 포기하고 양송이 재배기술을 전수해 줄 스승이 있는 곳 주변에 다시 하우스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승의 하우스에서 양송이 재배방법을 배웠습니다.
주 씨는 채 1평도 되질 않는 하우스 보일러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양송이 버섯을 관리했습니다. 1년이 지난 2008년 드디어 양송이 버섯의 수확량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우스 한 동에서 3백 박스(1박스는 2킬로그램)도 건지지 못했던 초기에 비해 5배 이상 수확량이 늘어 1천5백 박스를 생산하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씨는 “그야말로 고진감래라는 말을 실감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귀농 초기, 잇단 실패로 모아놓은 돈 다 날려
주 씨 가족이 충남 보령에 정착을 한 건 지난 2007년 6월입니다. 주 씨의 고향은 부산입니다. 주 씨는 부산에서 제조업을 했고 부인 권선옥 씨는 인테리어 사업을 했습니다. 주씨는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귀농을 결정할 당시에는 10억원대 이상의 공사를 수주하며 나름 기반을 잡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권선옥 씨는 가정주부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지 10년이 지난 2006년부터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남편에게 “우리 시골에 가서 살자”면서 귀농을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씨는 그럴 때마다 “조금더 지나서 생각해 보자”며 만류했습니다.
주 씨는 주변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농촌 생활보다는 도시에서 친구 또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게 체질에 맞는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귀농을 제안했을 때 쉽게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권선옥 씨는 도시보다 농촌의 생활을 선호했고 끈질기게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주 씨는 부산 토박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남동생 두 명도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가 부산을 떠날 당시 특별한 연고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쩌면 고향을 쉽게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주 씨는 귀농을 위해 우선 농촌진흥청이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인 한국농업대학에 입학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2006년 당시 주 씨는 만 45세가 넘어 입학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부인 권선옥 씨가 한국농업대학에 들어가게 된 건 순전히 주 씨가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주 씨는 아내를 따라 청강을 하며 3개월간 예비 귀농인들과 어울렸습니다.
당시 주 씨 부부가 귀농을 위해 선택한 작물은 양송이 버섯입니다. 양송이 버섯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재배과정도 어려워 25명의 교육생 가운데 이 작물을 선택한 사람은 주 씨 부부가 유일했습니다.
“아무도 양송이로 성공해 보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이 선택이 귀농 초기 우리 가족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잇단 실패로 집과 가게를 처분한 돈을 모두 날렸으니까요.”
<부인 권선옥 씨는 남편 대신 한국농업대학에 들어가 농업기술을 배웠다.>
“귀농과 전원생활 혼동 말고 현실을 봐야 해요”
주 씨는 예비 귀농인들에게 낭만적인 전원생활과 달리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귀농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도전하라고 조언합니다.
“귀농과 전원생활을 혼동하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전원생활은 도시에 사는 분들이 시골에 땅을 사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잠시 쉬는 쉼터로서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귀농은 달라요. 생계가 달려 있는 겁니다. 고된 삶을 극복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세요.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갖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나 홀로 일어서야 합니다.
주 씨는 귀농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부부의 합의가 필요하고 적어도 1년 정도는 예상을 뛰어넘는 고생을 감내할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주 씨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귀농할 경우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그는 바쁜 농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귀농과 관련된 강의 요청이 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갑니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으셨네요
당연한 결과에 성공을 축하합니다.
귀농,,, 정말 힘든가요?
성공 을 축하드리며 많은 조언바람니다,
주사장님같은분이있어 우리농촌이 희망이있읍니다 감사합니다
귀농 꿈이아니고 현실입니다 부단한 노력이있어야지요 주사장님같이 감사합니다
내가아는 사람은 벼 다수확왕이 되어서 전국을다니며 강연하다 농사 망했대요 그런일은 없겠지요
앞에 성공하신 분들의 글을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정보
좋은 결과라서 다행이고요 당연히 그만한 노력의 성과라 생각합니다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