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앨런 크라이더라는 미국의 메노나이트 계열 교회사가였는데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앨런 크라이더는 고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메노나이트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1974∼2000년까지 영국에서 사역하면서 런던 바이블 칼리지, 맨체스터 대학,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다.
1부. 성장과 인내
1.교회의 희한한 성장
처음 3세기 동안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다. 2세기에 쓰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더욱더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3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많은 사람들, 거의 모든 도시의 대다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50여 년 후에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교회의 범세계적 성장에 관해 진술했다.
초기 기독교는 법률과 사회적 관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장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교회에는, 비록 실제로 처형된 그리스도인의 거의 없었지만, 늘 박해를 통한 죽음의 가능성이 어른거렸음에도 교회들은 성장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에 가담해 그것을 장려하기 시작한 312년 이후에 발생한 교회의 성장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이전에 교회의 성장은 이상했다. 교회의 조직화된 선교 프로그램도 없었고,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선교 전략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호소하지 않았다. 그 시기에는 선교 협회나 선교 단체들도 없었다. 교회들이 그들의 예배를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초기 기독교의 성장의 비밀은 끈기 있는 발효에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끈기 있는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셨다고 확언했다. 독일의 신학자 아돌프 하르낙은 ‘꾸준한 발효 과정’에 비유했다.
‘발효’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물질의 내부에서부터 일정한 숙성기간을 통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떤 접점을 말한다. 발효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고, 조율되지 않았고, 예측되지 않았고,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발효는 자발적이었고, 때때로 취하게 만드는 요소들과 섞여 상승 작용을 했던 평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2.인내의 유익
초기 기독교는 소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라든지 로마 사회에서는 이단식으로 배타를 당하는 그런 상황에서 선교가 아닌 인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내’라는 것은 성품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아주 오랜 과정인 것이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유할까”라면서 하나님 나라를 아주 작은 겨자씨에 비유했고 또 하나는 한 여인이 반죽 속에 넣은 누룩과 같다고 했다. 겨자씨도 땅에 심기우면 보이지 않고, 누룩도 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다. 겨자씨가 당장 땅에 심었다고 다음 날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게 아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이다. 일정 기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내라는 것은 결국은 사람이 성품이 변화될 때까지의 충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시해야 하는 믿음을 인내라는 특별한 덕과 연결시킨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시적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실천하고 행위로 그것을 전해야 하는데, 그 행위를 인내로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유스티누스 : 로마에서의 인내
로마에서 그리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철학자이자 교리문답 교사였던 유스티누스는 150년대에 기독교를 조리 정연하게 옹호하는 《호교론》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수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명령”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스티누스 《호교론》 15장과 16장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산상수훈)을 인용하며, 그 말씀들을 네 범주로 나눈다. 절제(성 윤리),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적을 사랑하고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인내(와 분노로부터의 자유), 참된 것을 말하기(와 맹세하지 않기)
유스티누스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을 사용해 인내의 중요성을 예시하며, 그것이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고 유익을 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인내-삶의 방식
클레멘스는 인내가 신자들을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이끄는 회심이라는 “큰 변화”의 과정에서 신자들에게 찾아온다고 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서로를 지지하는 덕을 지닌 풍부한 생태계의 일부라고 했다. 이 생태계 안에서 인내는 필수적이다. 특히 박해의 시기에 필요한데, 그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행위, 말, 실천에서 밤낮으로 인내와 지구력을 통해 남성성을 드러낸다.”
오리게네스 : 지속적인 인내-기독교 증언의 핵심
오리게네스는 인내의 핵심에는 인내를 구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했다. 주님은 인내의 예시자, 즉 “인내 그 자체”이셨다. 인내를 구현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분의 선교를 완수하기 위해 일하시는 방식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테르툴리아누스 : 인내-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소망의 생활 방식
테르툴리아누스는 204년에 카르타고에서 특정한 덕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쓴 최초의 논문인 “인내에 관하여”를 썼다. 거기에서 인내가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서 그때까지 해 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핵심적 역할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기초를 세운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는 사회적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가난하든 안락한 생활을 하든, 노예든 자유자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는 가장 높은 덕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인간의 조급증이라는 특징을 지녔다고 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조급증이라는 행위를 반복해 나갔다. 인내의 부재는 “아직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님이자 인내의 교사”이신 그분은 “믿음의 은총을 인내”와 결합하심으로 상황을 바꿔 놓으셨다. 예수님에게 인내는 단순히 근본적인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훈련이었다. 그리고 인내의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했다.
키프리아누스 : 인내-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
키프리아누스는 “인내의 유익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그는 테르툴리아누스와 함께 인내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공유하는” 덕이다.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시다고 지적한다. 그분은 그들 모두에게 복을 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불어오는 바람과 흐르는 샘물과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삶의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성육신, 세례, 마귀와의 싸움, 발 씻김의 실천, 유다의 입맞춤,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등 예수님의 모든 행위, 즉 그분의 모든 선교 방식은 인내였다고 한다.
락탄티우스 : 인내-최고의 덕 그리고 예배와 선교의 열쇠
락탄티우스는 《거룩한 원리》를 썼는데, 모두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그 책에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면서 기독교를 위한 조직적인 논증을 제시하는데, 인내는 그런 주제 중 하나로 ‘인내’를 150차례 이상 언급한다. 그가 그렇게 자주 언급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찬양하는 다른 덕은 없다. 인내는 “모든 덕 중 가장 크다”. 그것은 “최고의 덕이다” 그리고 “인내보다 더 참된 덕은 없다”라고 했다.
결론 : 인내의 다차원적 유익
․인내는 그 뿌리를 하나님의 성품에 둔다.
․인내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계시되었다.
․인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지 않다.
․인내는 서두르지 않는다.
․인내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인내는 폭력적이지 않다.
․인내는 종교적 자유를 제공한다.
․인내는 소망적이다.
3.밀고 당기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개종에서 ‘밀어냄’과 ‘당김’의 중요한 역학관계가 있었다. 어떤 측면이 종교의 지지자들을 밖으로 밀어내기도 했고, 또 외부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종교 안으로 당기기도 했다. 이교적인 관습과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달랐는지 또 교회가 얼마나 매력적인 모습을 통해서 외부 사람들을 끌어당겼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 아비투스의 현실
‘아비투스(habitus)’는 ‘제2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친숙한 사회 집단의 습속, 습성 따위를 뜻하는 말이다.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하는 단어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규정한 용어이다. 아비투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부르디외는 진정으로 우리를 형성하는 지식은 우리의 지적 지식이라기보다는, 보다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체적 지식”, 즉 우리의 몸이 지니고 있는 “성향들의 체계”다. 이 지식은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훈련된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의 일을 수행하는 방식을 포함해 사회적 관습들에 의해 형성된다.
아비투스는 이야기들에 의해, 즉 우리의 문화를 떠받치는 큰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공동체의 작은 이야기들에 의해 강화된다. 아비투스는 모범을 통해, 즉 우리의 삶에 대해 권위를 지니는 부모와 동료와 롤 모델들을 통해 더 많이 형성된다. 무엇보다도 아비투스는 반복에 의해, 즉 어떤 일들을 거듭해서 행함으로써 습관적이고 반사적이고 우리의 몸에 내재되는 순전한 신체성(physicality)에 의해 형성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회원이 되고자 했던 이들의 아비투스를 다음 두 가지 수단을 통해 변화시키려 했다. 하나는 가르침과 교제를 통해 후보자들의 행위를 다시 형성했던 교리 교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아비투스가 육체적 우아함을 통해 시행되고 표현되었던 공동체의 궁극적인 반형성적 행위인 예배였다.
공적 종교
로마, 69년-카피톨의 재건
공적 종교의 첫 번째 예는 1세기 중반 로마에서 일어났다. 68∼69년에 있었던 내전은 주피터, 유노, 미네르바 같은 로마 신들에게 바쳐진 카피톨리네 언덕에 있는 신전인 카피톨을 폐허로 만들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 신전의 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로마의 공적 종교는 카피톨 신전의 봉헌과 같은 행사의 참가자들에게 ‘소속감’이라는 아비투스를 형성했다. 참가자들은 자기들이 출생을 통해 로마라는 시민 공동체의 회원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경의’라는 아비투스였다. 더 나아가 참가자들이 사회적 질서를 위반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예배를 드릴 경우 신들이 진노할 것을 우려하는 ‘두려움’의 아비투스였다. 로마의 아비투스는 종교가 지속적이기는 하나 주변적인 역할을 했던 온갖 종류의 사회적, 가정적, 경제적 경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카르타고, 203년-원형 경기장의 “게임들”
공적 종교의 두 번째 예는 그로부터 1세기 후에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나온다.
《성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수난》은 두 여자와 기독교 공동체의 다른 회원들이 카르타고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공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여섯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카르타고 서쪽에서 56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투부르보 미누스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회원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세례를 준비하는 새 신자들이었고, 체포되어 그들과 합류했던 그들의 교리문답 교사 사투루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투옥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다 젊었다. 페르페투아는 스물한 살이었다. 펠리시타스를 포함한 그들 중 두 사람은 노예였고, 페르페투아를 제외한 그들 모두는 하층민들이었다. 페르페투아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몇 주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마지막 날의 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형 경기장 안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단호하게 그리고 즐겁게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가 모두 암소에 들이받힌 후 기절했을 때, 페르페투아가 먼저 일어나 펠리시타스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켰다. 그리고 두 여자는 나란히 섰다. 귀족과 노예였던 그 두 사람은 기독교의 수평성을 반사적으로 그리고 매우 가시적으로 표현하면서 나란히 섰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으로, 즉 몸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들의 말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몸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들은 수직성을 적응 옹호하는 사회적, 건축적 배경을 가진 원형 경기장에 있었으나, 그들의 몸은 수평성을 드러냈다. 유전적 가족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고 습관적인 몸짓을 통해 서로가 자신들의 우선적인 가족, 즉 자기들이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가족임을 드러냈다.
그리스도인들의 처형을 경기장의 군중들은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를 쓰고 일어나 특정한 장소에서 그룹을 지어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는 것도 보았다.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 즉 여자와 남자, 노예와 자유인,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들이 “서로 입맞춤으로써 자신들의 순교가 평화의 입맞춤으로 완결되게 했다.
위기에 대응하는 종교
2세기와 3세기에 로마 제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은 아주 큰 위협이었다. 이 시대에 발생한 두 개의 큰 역병은 166∼172년에 발생한 ‘안토니누스 역병’과 251~270년에 발생한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다. 대개 학자들은 전자 역병을 천연두로, 후자 역병을 홍역으로 추정한다. 그 역병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는 논쟁거리다. 어떤 학자들은 안토니누스 역병 때문에 제국 인구의 2퍼센트가 죽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25퍼센트가 죽었다고 주장한다.
역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각기 다른 답을 내놓았다.
이교도-아폴론의 신탁
신탁의 답들은 관습적으로 신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 혹은 사람들이 부정확하게 혹은 기계적으로 행한 제의 행위들, 혹은 그 사회를 오염시키거나 모독하고 있는 무언가를 지적했다.
160년대에 발생한 안토니누스 역병과 관련해 클라로스의 신탁은 정화 의식과 예전을 수행함으로 그 역병에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카르타고-키프리아누스의 설교
키프리아누스 주교가 이끌던 기독교 공동체는 역병에 대해 이교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위기를 다른 신들을 달래기 위한 ‘제례적 행위’가 아닌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실천적 행위’로 대응했다. 이런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를 의식적으로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강화했다.
2부 발효
4.성장의 요원들로서의 그리스도인
‘발효’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물질의 내부에서부터 일정한 숙성기간을 통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떤 접점을 말한다
음식에 관해 글을 쓰는 마이클 폴란은 “발효는 그 자신의 에너지를 안으로부터 발생시킨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살아 있다. 그리고 이 살아 있음의 대부분은 우리가 현미경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규모로 발생한다.”
초기 기독교에도 겉으로는 즉각적으로 효과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서 그들에게 기독교의 폭발력을 가져오게 했던 어떤 추동력이 무엇이냐를 다루고 있다.
이동하는 선교사들 : 이주 선교
초기 기독교는 12사도로부터 시작을 하지만 사도들 이후에 그 발효를 계속해 나간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기독교의 확산을 위한 일차적 책임을 맡았던 이들은 공식적으로 구성된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여행하면서 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업상의 기회나 그들의 직업의 요구를 따라 상인, 장인, 죄수, 노예, 군인으로서 그들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기독교의 셀(cell)을 세웠는데, 한 학자는 이 과정을 ‘이주 선교’라고 불렀다.
초기 교회들은 그 뿌리를 집(domus)에 두고 있었다. 집은 물리적 공간이자 그곳에서 친족과 친족이 아닌 이들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뜻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집에서 모이는 패턴은 콘스탄티누스가 왕좌에 오른 후로도 백 년 가까이 기독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형태였다. 기독교의 처음 4세기 동안 교회는 주로 가정적인 현상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던 가정집 공간들은 그들의 특징적인 아비투스를 발전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초기 교회의 성장은 “일상적 접촉”을 통해서 일어났다. 접촉은 대부분 사람들이 참여했던 가족과 직업의 초자연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수많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주인들은 종들과 교류했고, 거주자들은 이웃과 만났고, 신자들은 친척들 및 일터의 동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 관계 속에서 “정서적인 유대”가 형성되었다.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매력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수단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품, 태도, 행동이었다.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가 결정적이었다
신앙의 운반자였던 여성들
오랜 세월 동안 초기 교회의 핵심적인 역할은 남자들이었다. 지식인들과 작가들은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을 ‘교부’라고 불렀고, 그들의 저작은 ‘교부학’이라고 불렀다.
초기 기독교에서 여성들이 공식적인 지도자 자리를 차지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따금씩 여집사 노릇을 했다. 하지만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는 여성들이었다. 더 나아가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스타들, 성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에게 영감과 불안을 안겨 주었던 블란디나와 페르페투아 같은 순교자들을 낳았다. 여성들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자로서, 봉사하는 자로서, 겸손한 전도를 실천하는 자로서 왕성한 활동이 있었다.
5.인내의 문화로서의 공동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개별적으로 참을성 있게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인내하는 삶의 아비투스를 대부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배웠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은 그들의 아비투스, 즉 그들의 회심으로부터 유래된 내적 성품을 드러내는 반사적 반응을 구현한다. 그리고 그들의 성품은 그들의 신학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안내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신학은 그들이 일을 끈기 있게 하는 방식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그런 방식들은 독특했고, 인습적 가치들에 도전했고, 삶의 여러 분야에서 가르쳐지고 모델이 되어야 했던 특별한 아비투스로 나타났다.
독특한 공동체
독특한 공동체⑴-사업에서의 인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업상의 거래 과정에서 인내를 드러내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사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인내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의미를 지녔을 것인데, 아마도 채무자들에게 빚의 상환을 독촉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이 판매하고 있는 물건에 관해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때때로 다른 사업가가 자기들을 비윤리적으로 대할 때 그에게 복수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자기가 판매하는 무언가에 분명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독특한 공동체⑵-성적 규율
지역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와 공동생활은 신자들을 형성시켰고 그들에게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한 독특한 습관적 접근법을 제공해 주었다. 그 시대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성적 순결에 헌신했음을 지적했고, 또한 그로 인해 감탄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적 순결이 기독교적 성품을 형성하고 생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아주 중요하다고 믿었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성적 순결이 외부인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독특한 공동체⑶-남자, 여자, 아이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있었을 뿐 아니라, 아이들과 노인들도 있었다.
교회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원하고 적극적으로 끌어 모으는 공동체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들을 유아 때부터 기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비투스와 사고방식을 형성했다.
교회는 여자들 없이는 기능할 수 없었다.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고 자신의 남편에게 영향을 주었던 여자들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효과적인 전도자였다.
3세기에 들어와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어떤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그 공동체를 가부장적인 그리스-로마 사회처럼 만들어 놓았다. 늘 남자 성직자들이 모임을 주관했고, (여자들을 포함해)평신도들이 그들의 영적 은사를 발휘할 기회는 점차 사라졌다. 4세기 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여자들은 남자들의 권위 아래에 있었다.
독특한 공동체⑷-신적 능력의 현시
기독교가 세 번째 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도시의 귀족이자 기사단에 속해 있던 지역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해 부유한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회의 부는 증대되었고 때로는 상당한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다양한 정도의 빈곤에 처한 이들이 많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악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영적,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세력의 체계적인 구조와의 싸움에 휘말려 있었다. 때때로 이런 세력들은 그들을 박해했으며, 그들을 모욕하고, 협박하고, 괴멸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대답하며 강력하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부분적으로 그들이 자기들이 개입한 싸움이 무엇보다도 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차적으로 인간이나 제도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적대적이고 인간의 번영을 방해하는 영적 세력과 싸우고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을 마귀, 즉 굉장하기는 하나 제한된 힘을 진닌 인격화된 영적 세력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마귀의 힘이라고 여기는 것과 마주했을 때 퇴마 기도와 치유를 통해 그런 힘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고, 퇴마를 위한 기도와 치유를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있었다.
독특한 공동체⑸-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동시대인들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아비투스와 접근법을 드러내 보였던 또 다른 분야였다. 외부인들은 이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가난한 신자들을 부양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적인 강조사항이었다.
독특한 공동체⑹-목숨을 빼앗는 것을 금하는 인내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적 헌신의 기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인내, 복수에 대한 거절, 예수님의 길과 가르침에 대한 이해의 산물이었다.
독특한 공동체⑺-강요하지 않는 인내
초기 기독교 선교에 대한 접근법은 인내였다.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인과 그들의 공동체가 구현했던 특성에 감동되었고, 또한 기독교 사상이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방식을 이해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자기들이 믿음을 갖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믿기 위해 힘에 맞서면서 “참된 자유에 대한 단언”으로서의 기독교에 귀의했다.
최후의 심판-그리스도인들의 경고
3세기 중반 교회들은 여러 도시로 퍼져 나갔고 교회 회원들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그런 성장은 문제를 일으켰다. 교회 안에 “나쁜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한다. 기독교가 성장했던 여러 요인들 중에는 박해가 많이 사라지는 시기였다.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교회 안으로 유능한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고, 또 더 좋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그게 사업적인 부분도 그렇고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부분에서도 혜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 타협하는 그리스도인, 나쁜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섞이게 되었다.
3부. 아비투스 형성하기
6.교리 교육과 세례
1,2부가 겉으로 드러나는 가시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다고 한다면 3부는 본격적으로 아비투스를 형성하게 된 비가시적인 활동들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배, 세례, 성찬, 가르침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실질적으로는 교리적인 이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아주 실질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키프리아누스의 회심에서 나타난 관습들
주후 240년경에 활동했던 북아프리카의 유명한 귀족 키프리아누스가 회심하기 이전에는 아주 화려했던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카타르고 출신이었고, 부유했고, 도시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다 누리고, 늘 화려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서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은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그 화려했던 삶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귀의를 한 것이다.
『사도 전승』-일반적인 모델?
초기교회의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본문 중 하나가 『사도 전승』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것을 3세기 로마 사제/주교였던 히폴리투스의 것으로 여기나, 일부 학자들은 『사도 전승』이 어느 한 저자나 저자 집단의 산물이 아니며 어느 한 지역 교회의 기록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관한 『사도 전승』의 모델
1단계: 전도-“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 후원자 찾기”
3세기 교회는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에서 환영을 받고 거기에 소속된다는 느낌을 갖게 함으로써 성장하려 하지 않았다. 교회는 들어가기 쉽지 않았기에 교회가 성장한 것은 문화적으로 접근이 수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일했고 서로 가까이 살면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료되었고,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주일예배에 데려갈 수 없었다. 주일 예배는 교리 문답을 마치지 못하고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에게는 제한되었다.
비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은 그들의 친구들/후원자들과 함께 교회의 교사들을 만나라 갔다. ‘첫 번째 심사’라고 불리는 이 만남에서 교사들은 성직자나 평신도들이었다.
교사들은 주로 후원자들에게 후보자들에 관해 “증언하라”고 요구했는데, 후보자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습득할 수 있을지를 점검했다.
2단계: 학습과정-“말씀 듣기”
후원자들은 후보자들이 단순히 교사들과 최초의 만남을 주선하는 중개자로서뿐 아니라 보통 3년이나 그 이상 계속되는 학습과정 전체를 통해 세례 준비를 지원했다. 학습과정을 요약하는 표현은 “말씀 듣기”다. 이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세례 준비자들은 아주 많은 말을 듣고 그들의 삶의 변화에 도전했다.
교회는 세례 후보자들에게 그들의 성품을 형성하는 자원을 제공했다
①경계성–경계 지점에서 세례 지원자들은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 속에 잠기는 모험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②교리 교육–교리문답 교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교과 과정에 관해서는 암시만 할 뿐이다.) 교리 교육은 세련된 사상이 아니라 ‘성품’과 ‘덕스러운 삶’을 낳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③실천–후보자들은 구두 교육을 통해, 실제로 일을 해봄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관해 배웠다.
그중 네 가지에 집중했다
첫 번째 것이 ‘십자가 신호’이다. 십자가를 긋는 것이 마귀에 맞서는 흉배임을 지적한다. 두 번째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기도’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잘 짜여진 시간표를 따라 집에서 기도했다. 네 번째는 ‘성찬 예배’다.
④다양한 기독교 공동체–후보자들은 서로 다른 배경으로부터, 즉 유대적 배경과 이교적 배경 그리고 그리스적 배경과 로마적 배경으로부터 왔다. 또한 남자와 여자 양성 모두로부터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계급으로부터 왔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3단계: 세례를 위한 준비-“복음 듣기”
복음 듣기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세례를 받았거나 세례를 받을 예정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비로소 듣는 것이다.
②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이 낭독되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허락받는 것이다.
③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다.
4단계: 세례-“새 노래를 부름”
세례 전날, 금식한 후보자들은 주교의 지시에 따라 한데 모여 주교의 명령을 따라 기도하고 무릎을 꿇는다. 주교가 퇴마 의식을 행하고, 그들의 얼굴에 숨을 불어놓고 성호를 긋는다. 그 후에 그들은 낭독되는 성경과 권면의 말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다. 일요일 아침 후보자들은 흐르는 물가에 모이고, 후보자들은 물속으로 내려간다. 각 사람이 사탄과의 관계를 끊고 퇴마의 기름 부음을 받고, 그들은 세 가지 신조와 관련된 질문에 답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 차례 세례를 받는다. 그들은 옛 자아에 대해 죽고 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난다. 그들은 감사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새로운 가족과의 사랑스러운 연대를 경험한다. 손을 들어 모든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평화의 입맞춤을 교환한 후 처음으로 성찬에 참여한다.
대부분의 새 신자들에게 세례와 성찬은 교리 교육의 긴 과정이 절정에 이를 때 주어졌다. 종종 몇 년간 지속되는 준비 기간 동안 세례 지원자들은 삶과 신체적 행동을 새롭게 하는 비전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때때로 그들이 불편해하는 행동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비투스를 구현할 수 있을까를 놓고 씨름하면서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를 변화시키는 동안 인내를 배웠다. 교회 지도자들은 후보자들이 준비가 되었다고 여길 경우 그들이 세례를 받도록 허락했다.
7.예배
기독교 공동생활에 지속적으로 힘을 불어넣었던 근원은 교리 교육이 아니라 예배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자신들이 예배를 통해 머리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만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를 통한 그들과 하나님의 만남에는 존재의 습관이고, 반복이고, 반사적인 방식이 된 몸짓과 의식들이 포함되었다.
2세기에 들어와 어떤 기독교 공동체들은 그들의 주된 주례 모임을 토요일 저녁이 아니라 일요일 아침에 갖기 시작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신자들은 어느 장소(종종 집이었다)에 모였다.
그 공동체의 주례 예배는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예언자들의 저작들”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성경읽기와 가르침을 따라 신자들은 삶에 적용했다. 성경읽기와 가르침이 끝나면 온 회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들어 올려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입맞춤 후에 빵과 포도주와 물이 들어와서 성찬에 참여했다.
초기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설교는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했다. 설교는 단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공동체의 삶에 대해서뿐 아니라 교회의 수적 성장에도 기여했다.
유스티누스가 모델로 제시하는 아침 예배에서 설교가 하는 역할은 강력하다. 설교를 하기 전에 성경을 읽는다. 설교는 성경을 사람들의 삶에 적용한다. 사람들은 설교가 자신들의 매일의 삶과 일을 형성하도록 허락한다.
초기 기독교 작가들은 기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설교에보다 기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 명의 초기 작가들(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오리게네스)이 기도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그들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기도의 실효성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었다. 기도하는 자세, 기도하기 위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기도의 올바른 관심사, 기도의 언어, 기도할 때 감정 등의 문제를 다루며 기도의 효험, 능력, 필요성에 관한 신학적 질문들을 다루었다.
초기 기독교는 기도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다루면서 기도의 인내를 교훈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언제나 즉각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쳤다. 기도 응답에도 인내가 필요했고, 그럼에도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했다.
초기교회는 평화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평화의 입맞춤은 토착화의 매력적인 한 예다. 입맞춤에는 경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계급 구조 의식이었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서 석공이 참사회 의원하고 입맞춤을 했다는 것은 로마제국 안에서 기존질서를 타하는 아주 급진적인 퍼포먼스였다. 로마에서 입맞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하는 거였고 아니면 왕이나 귀족들이 아랫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서 입맞춤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거였고, 발에 입맞춤을 하게 하거나 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의 평화의 입맞춤은 수평적 관계이다. 일종의 계급 구조의 타파이고 계급뿐만 아니라 민족이라든지 종교를 넘어서는 행위이다.
8.“디다스칼리아”가 말하는 ‘지혜로운 비둘기’
“사도들의 가르침”의 라틴어 명칭은 “디다스칼리아 아포스톨로룸”(Didascalia apostolorum)으로 불린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병자들의 발을 씻기는 여집사들,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이 싫어서 예배를 빼먹는 부자들, “지혜로운 비둘기처럼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서 교회를 채우기 위해 애쓰는” 평신도들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3세기 시리아의 한 무리 공동체로부터 나온 교회법이다. 거기에 교회 지도자들에게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인내를 제공한다. 공동체의 리더십, 전례적 삶, 사회적·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 등이 나온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만들어 낸 공동체들은 아마도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가까운 이웃으로 살아가던 시리아의 어느 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길을 걸었고, 공동 시장에서 물건을 샀고, 동일한 질병과 역병과 전쟁으로 고통을 당했고, 그런 까닭에 여러 생각과 개념을 공유하며 대화를 나눴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제작 시기를 학자들은 230년대로 잡아 왔다. 그러나 스튜어트사익스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한 번에 쓰인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법처럼 한 세기나 그 이상의 기간-아마도 3세기 초부터 4세기 초 사이에 쓰인 자료들을 편집해 만든 “살아 있는 문헌”이라고 주장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저자들은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성장에 관해 많은 것을 쓰지는 않았다. 그들은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에게 전도를 종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메시자가 퍼져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었고 그들의 소명은 “하나님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평화이다. 평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의 평화의 길이 구원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저자들에 따르면 본질상 교회는 평화의 생태계였다. 교회는 평화를 만드는 예배의 형태로 평화의 인사인 형제와 자매들은 함께 섞여서 입맞춤을 교환했다. 또한 평화를 만드는 전도로 신자들의 소명은 평화를 만들고 거친 외부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 “지혜로운 비둘기”가 되는 방법을 택했다.
4부. 인내의 변형
9.콘스탄티누스의 조급증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후에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콘스탄티누스 때문에 기독교가 그동안 박해 받는 입장에서 콘스탄티누스를 기점으로 해서 박해자가 되는 상황이 되고 혹은 주류가 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기독교인임을 스스로 밝혔고, 임종 직전까지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공식적인 예배에 참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나 성경을 연구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락탄티우스나 기독교인의 자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으려고 했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정말 악하냐, 진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이렇게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일종의 ‘경계선상의 그리스도인’, 애매모호한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그리스도인인데 또 어느 때는 아닌 것도 같다.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 동로마를 통일시킨 대단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따라서 그가 정치적인 노선이 어쩔 수 없이 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등에 업고서 제국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일정 부분, 긍정적인 부분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공동체에 몸담은 사람은 아니었다. 귀족 정치, 궁정, 군대에 의해 형성된, 그 당시 로마 제국 문화 아비투스에 익숙했던 사람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해서 그렇게 형성된 아비투스가 평생에 걸쳐서 살아왔던 로마 제국의 아비투스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한계가 그런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황제였고 제국을 보호해야 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주류가 되면서 소수자들에 대한 대응 방식이 너무 극명하게 바뀌어버리게 되었다. 초기교회가 300년 정도의 형성된 아비투스가 갑자가 주류가 되고 나니까 그동안 몸에 배어왔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전통들이 불과 몇 십 년 만에 사라져버리고 박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복음이 신비에서 방법으로 변형되었다. ‘신비’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 삶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주류가 되어버리면 그런 것들은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확실한 것 보다는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안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가 신비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들이 계속 축소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변화를 제공했다. 인내와 관련된 다섯 가지 변화를 보자.
첫째는 통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선교 사역을 계획하고 그런 사역을 통제하도록 했다. 모든 것을 방법론적으로 생각했다.
둘째는 국가의 힘이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힘을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회심시킨다는 최고의 목적을 위해 국가의 힘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국가의 힘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는 종교적 강압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종교 집단을 괴멸시키기 위해 제국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승인했다. 강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넷째는 속도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는 삶에 대해 서두르지 않는 접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대조적으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두르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빠른 속도를 제시했다.
마지막은 회심이다.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흥미로운 ‘이중 회심’이 일어났다. 한편으로 야심을 가진 이들이 교회 회원이 되려는 의도를 갖고 교회에 접근하면서 “회심했다.”
10.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한 조급증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조급증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정당화될 만한 그런 요소들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국의 주교가 되고 나서 그가 당면했던 현실, 여러 외부 세계의 다양한 이슈들, 이런 부분들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든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했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의 인내심이 약화되고 제국적인 어떤 힘을 사용하는 측면들이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래서 정당한 조급증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측면들이 상당히 초기교회와는 결이 달라지는 분수령이었다.
기독교가 주류가 되고 국교가 되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던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도 나름대로 기독교의 리더였지만 그 세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종의 그의 한계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는 ‘최고의 덕’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것은 ‘모호한 덕’이 되었다. 그것은 “의로운 목적을 향하지 않는다면 나쁜 것이 될 수도 있고, 의로운 목적을 향하고 있다면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를 강조하기보다는 사랑을 강조하게 되고 그러면서 제국의 어떤 힘과 통제 이런 부분의 유혹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라든지 도나투스를 따르는 무리들을 대했던 방식을 보면 결국 제국의 통제 방식으로 그들을 대했던 이런 부분들이 결국은 키프리아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가 가졌던 또 그들이 말했던 인내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생기게 되는 측면들이 나타났다.
맺는 말
팬데믹 상황에서 기독교가 주변으로 밀려나는 상황이고, 교회들의 위축이 심상치 않다. 교회들이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가 위축되고 있는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아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교회의 소중한 유산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아울러 우리에게 움켜쥔 손을 펴고 버려야 할 잘못된 유산을 버리라고 통렬하게 조언한다. 이 조언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교회가 축소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돌아보고 돌이켜, 초기 교회가 보여준 ‘처음 행위(아비투스)’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작아지는 것보다는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회복하고 되찾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책 한 권을 같이 읽었다. 음식학자 정혜경 교수의 《발효 음식 인문학》이다.
저자는 ‘발효 음식’은 인류의 음식 중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력적인 음식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며, 특히 우리의 ‘발효 한식’은 최고의 밥상이라고 한다.
‘한국 문화는 발효 문화’라고 할 만큼 우리가 먹는 음식 대부분은 발효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콩을 발효시켜 만드는 장, 배추를 발효시킨 김치, 생선을 발효시켜 만드는 젓갈, 그리고 식초, 식혜, 떡에 이르기까지 모두 발효식이다. 이러한 발효 미생물이 풍부한 한국의 음식은 면역계의 힘을 더해주는 건강식이고, 맛도 최고다. 인간의 미각이 최고로 치는 맛이 바로 발효의 ‘삭은 맛’이라고 한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도 다 나름대로 맛이 있지만, 삭은 맛은 그 깊이가 더한 맛이다.
저자는 또한 다양한 분야가 어우러진 융합 문화가 곧 발효 음식이라는 인문학적 해석을 보여주면서 ‘기다림의 미학’을 말한다. 우리말에는 ‘삭다’, ‘담그다’, ‘뜨다’, ‘익다’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반영하는 동사들이 많다. ‘젓갈이 삭다’, ‘김치가 익다’, ‘메주가 뜨다’처럼, 음식에 따라 발효의 과정을 맛깔나게 표현하였다. 이 모든 것은 ‘기다림’을 의미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더 나은 음식이 되는 시간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시간은,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발효의 시간이다. 성숙의 시간이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집중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기다림도 신앙이다.
잘 기다리면 발효가 되고, 잘못 기다리면 부패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사람이 있고, 발효되는 사람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늙어가는 노인이 있고, 그리스도를 닮아 성화되며 익어가는 어른이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에 기다림에 조급증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변질되는 게 아니라, 인내를 통한 발효가 일어나 성숙한 아비투스가 만들어지는 교회와 개인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