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1. 야곱은 온 가족과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으로 향니다(1절). 이것은 새로운 모험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이 바로 가나안인데, 그는 이제 애굽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가야 하는지 확신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과 확증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브엘세바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이유였으며, 그 길이 옳다는 것을 그 밤에 야곱에서 나타나셔서 확증해 주십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3절) 말씀하십니다.
2. 브엘세바는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던 장소였고(창 21:33), 이삭이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하여 단을 쌓은 곳입니다(창 26:23~25). 그리고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 가장 아래쪽이며, 애굽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은 거기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거기서 다시 올라오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4).
3.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한 번쯤 신앙의 실패를 경험하였던 곳, 그 애굽을 향해 이제 야곱이 가야합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야곱이 홀로 가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시는 여정입니다! 비록 야곱은 거기서 죽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가족의 수는 70명이었습니다(27). 사도행전에서는 75명이라고 하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요셉에서 낳은 아들과 손자까지 포함하면 75명입니다.
4. 애굽의 고센에 이르러 야곱은 23년 만에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어떻게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모든 희망을 다 잃어버린 뒤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망이 희망이 되게 하시고, 눈물이 기쁨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5. 야곱의 가문은 고센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34절). 이 땅은 애굽의 북부 지역에 있어서, 목축하기도 좋은 곳이며, 무엇보다 애굽 중앙부와는 떨어져 있어서, 애굽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와 종교의 영향을 그래도 덜 받으면서,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민족을 이루기에 참으로 넓은 곳이며, 좋은 장소이며, 세상과도 떨어진 장소를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6. 오늘 46장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객이 되어 4백 년 동안을 그들을 섬기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제 성취되기 시작합니다(창 15:13). 하지만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그리고 야곱도 장차 이루어질 약속의 성취와 완성은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7. 사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고서도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비록 약속의 성취를 목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다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렇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했던 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보지 못하고 주님 앞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죽는 자들은 그 일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줄을 알기에 평안함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것 때문에 조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기를 구하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여전히도 신실하게 일하고 계시는 그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임재의 약속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신실하신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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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과의 갈등이 해결되고 나서는 그 초점이 요셉뿐만 아니라 좀 더 넓게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번성하여 이스라엘 나라가 되어가는 모습,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의 태동 단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심장을 뛰기 시작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이 어떠한지 본문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장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1)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모든 소유를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아마도 야곱은 그동안 살고 있었던 헤브론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략 40킬로 정도 떨어진 브엘세바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경계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지나면 이제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야곱은 그동안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을 만나러 갑니다. 기쁜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야곱은 이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합니다. 지금 모든 소유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 심정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옛적에 에서를 피해서 이 땅을 떠날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외삼촌의 집에서 신데렐라처럼 엄청 고생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땅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마냥 기쁨으로 그에게 달려갈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닙니다. ‘이 땅을 떠나도 괜찮을까?’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야곱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1절에서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 야곱이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섬겼던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한 것, 그리고 예배드리는 장소가 브엘세바라는 것은 야곱의 하나님과 그의 조상의 하나님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을 예배했었고(26:23~25). 브엘세바에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예배했었습니다(21:33).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벗어나기 전,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예배했던 곳에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날 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2) 옛적에 야곱이 에서를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이 벧엘에 있던 그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 브엘세바에서 야곱이 다시 약속의 땅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또다시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아, 야곱아’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3-4)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곱아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까요?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의 자손은 큰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요? “거기서” 애굽에서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는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야곱만 애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족들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내려가십니다. 두려울 것이 있을까요?
셋째, 야곱은 이 땅으로 평안히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서 평안히 죽음을 맞을 것이며,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삶은 해피엔딩을 끝날 것임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훗날 야곱은 이 말씀대로 거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그 끝까지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삶의 아픔들과 어려움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런 힘든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때도 친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삶의 형편을 살피시고 합당하게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 내려가는 일을 승인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시작은 어느 누군가가 살다보니까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그리고 요셉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신 결과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이스라엘 나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보고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의 자손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순서대로 레아의 자녀들과 실바의 자녀들, 그리고 라헬의 자녀들과 빌하의 자녀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외삼촌의 집으로 갈 때만 해도 혼자였는데, 지금은 엄청난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럼 그의 가족이 모두 몇 명일까요?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27)
모두 칠십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 나오는 칠십 명이라는 숫자는 야곱의 모든 가족을 다 말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의 며느리나 손녀들은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저자는 칠십 명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한 모습이 보이는데 가나안 땅에서 죽은 엘과 오난을 대신해서 여자로서는 특별하게 야곱의 딸인 디나와 아셀의 딸인 세라를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칠십 명의 숫자는 야곱과 그의 열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 손자들과 증손자들, 그리고 한 명의 손녀를 포함한 것입니다. 여기에 들지 않은 여자들까지 모두 합하면 실제 가족의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 창세기의 저자는 왜 야곱의 가족을 칠십 명으로 맞추려고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7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70이라는 숫자는 완벽한 수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충만한 숫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숫자라 할 수 있습니다.
70이 사용된 예를 보면 창세기 10장에 노아의 홍수 이후 여러 민족들이 나오는데, 그 수가 모두 70민족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들의 장로들을 언급할 때 70명의 장로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70명의 학자들이 모여서 번역을 했는데, 그래서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을 칠십인 역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사람도 70명입니다.
저자는 의도를 가지고 70명의 숫자를 맞추어서 이스라엘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70명이라고 할 때 많이 나오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과의 차이입니다. 사도행전 7:14을 보면, 스데반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야곱과 온 친족이 75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는 70명인데, 사도행전에는 75명이라고 하니까 그 다섯 명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하는 겁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 75명이라고 언급한 것은 스데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칠십인 역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칠십인 역에는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자손이 75명이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애굽에 살고 있던 요셉의 손자들 다섯 명까지 추가해서 말한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야곱은 많은 자손들을 이끌고 애굽에 내려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칠십 명으로부터 이스라엘은 크게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언급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성장하려면 먹을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성장하려면 다른 위험이나 공격으로부터 안전해야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이 살기에 알맞은 땅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라는데 꼭 필요한 장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살게 될 고센이라는 땅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유다를 미리 보내는데, 앞서 가면서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유다에게 맡긴 것입니다. 무사히 야곱의 가족들은 고센에 도착했고, 요셉도 야곱을 맞으러 고센으로 갑니다. 이렇게 해서 대략 23년 만에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고 울고 있는 요셉에게 야곱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
20년 넘도록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이, 그것도 특별히 더 사랑했던 아들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아들을 만나 품에 안는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안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요셉이 살아있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죽을 수 있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전에 한 얼굴을 보고나서 삶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적이 있었습니다. 언제일까요?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지만 죽지 않고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지금 또 다른 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요셉의 얼굴은 야곱의 삶의 태도를 또 한 번 바꾸게 합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좋구나!’
야곱의 품에서 한참 울고 난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에게 바로를 만났을 때 해야 할 말을 알려줍니다. 자신들의 직업을 목축하는 사람으로 말하라는 것인데,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고센 땅을 허락할 것이고,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고센 땅은 풀이 많았고 물이 풍부했기에 목축하기에 적합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중심지와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특정한 간섭이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제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목축하는 사람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을 애굽 사회와 분리시키는 일을 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인 야망도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애굽에 온 것이지, 직업을 바꾸기 위해 혹은 애굽에서 출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들이 목축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고, 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들과 분리되어서 그들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보호 아래, 애굽 사람들과 구별된 가운데 이스라엘이 나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을 태아로 비유를 했었는데, 애굽은 마치 외부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양분을 공급하는 엄마의 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을 인큐베이터와 같이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로서 모습을 갖추기까지 애굽의 보호 아래에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원대한 계획부터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이 다 이루어가십니다. 야곱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애굽의 고센이라는 땅, 목축하기에 좋지만 목축을 싫어하는 애굽 사람들, 반면 조상 때부터 다 목축을 해왔던 이스라엘 자손들, 때마침 애굽에 찾아온 7년의 풍년과 흉년, 그로 인해 총리가 된 요셉, 그 일이 있기까지 술관원과 떡관원이 요셉과 함께 감옥에 있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했고,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팔았습니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끝도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있기까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이 지금 이렇게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얽혀있고 다양한 사건들을 있었는지 생각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합니다. 미래를 계획하느라 지금 벌어지는 실제적인 일들을 깜박하고, 작고 세세한 일들을 신경 쓰고 챙기느라 큰일을 놓쳐버리고, 계획은 세우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때로 계획을 바꾸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드넓은 우주를 다스리면서 동시에 정말 작고 작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 그 하나까지도 다 아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랍도록 큰 계획을 가지시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는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 모두 주관하고 계시고, 그 뜻대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섬세한 손길을 생각할 때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 앞에 한 없이 작은 나를 발견하고 엎드리게 됩니다.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때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잘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만 같고, 어려운 일만 더 생기는 것 같고, 다른 것으로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지만, 약속을 기다리기보다 그냥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어떤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약속은 성취됩니다.
다만 하나님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림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내 현실에 와 닿지 않고, 내 삶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고, 멀리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내 삶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내 삶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다르게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아 야곱아’ 부르셨던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 위로하시며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걸음, 한걸음 그 인도하심에 따라 내 삶을 맡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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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6장 1-27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7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과 그의 가족에게 찾아오셔서 언약을 확인시켜주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8-27절은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가족의 명단을 야곱의 아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시며 한 백성들의 총회가 야곱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35:11).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에게 꿈만 같은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인생이었으나 그의 꿈은 언제나 신기루 같아서 손에 잡힐 듯하면 이내 멀어져 다시 치열하게 그 꿈을 좇아 수고하는 험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자신의 꿈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좇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었기에 허황된 꿈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될 꿈이라고 믿었겠지만, 수십 명에 불과한 야곱의 가정이 어떻게 큰 민족이 되고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은 도무지 야곱의 머릿속에서는 그려지지 않는 꿈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지만,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다(1-7)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라고 표현한 것은 애굽으로의 이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진행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애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이룰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던 곳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에게로 그리고 이제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별히 출애굽기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3:15-16, 6:3)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합니다. 브엘세바는 약속의 땅의 남쪽 경계가 되는 지역으로 브엘세바를 통과하면 이방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바른 선택인지 확신이 없었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습니다.
(2-3)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짙은 두려움의 밤을 보내고 있는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지만 ‘야곱아, 야곱아'라고 이전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신 것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두려워하는 야곱의 연약함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음에도 빈번하게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나'로 돌아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눈 앞의 문제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책망하시기 보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깨닫게하시고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야곱은 그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국빈 대우를 받으며 가족 초청 이민의 개념으로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가족을 이끌고 낯선 땅을 향해 떠나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겪었던 일과 부친인 이삭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반대하셨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애굽에서 야곱의 가정을 큰 민족이 되게하실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생활터전이 있어야했는데 그곳이 바로 애굽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풍족한 식량으로 야곱의 가정을 먹이시고 애굽의 군인들로 하여금 야곱의 가정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실 계획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고대 근동의 종교는 특정 신이 특정 지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 지역에 메여계신 분이 아니라 온 땅의 주인이시기에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함께하시며 친히 돌보시는 분으로 고대 근동 종교의 신들과 차별되셨습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 머물 것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가‘의 질문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전쟁과 기근, 질병과 재해 등의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눈을 들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함께 내려가실 뿐 아니라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내가‘라는 표현이 한 문장에 2번 반복해서 사용되어 애굽으로 이주하는 야곱의 가정과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삶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삶으로 그 과정은 치열하고 외로웠으며 늘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은 ’내가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드리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야곱은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은혜를 깨닫고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당장에 어떤 변화도 없었지만, 야곱의 마음에는 염려와 두려움 대신 확신과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이 땅에서 마지막 호흡을 내쉴 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의 임종을 지킬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과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남은 삶을 함께할 것이라는 기대로 두려움의 밤을 물리치고 샬롬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확신과 기대로 힘있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5-7)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야곱의 가정은 브엘세바라는 약속의 땅 남방 한계선을 과감하게 통과하였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보내준 수레에 가족들을 태우고 가나안에서 얻은 재물을 한가득 실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삶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기근을 피해 먹고 살고자 하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경계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여기까지만‘이라고 생각했던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지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할 때 그 동기가 세속적인 것은 아닌지 살펴 보아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드리는 예배는 야곱으로 살던 내가 죽고 이스라엘로 새롭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삶의 한계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언제나 정복되고 우리의 삶을 제한하는 삶의 경계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 무한히 확장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
(8-15)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의 이름이 야곱의 4명의 아내들을 기준으로 나열됩니다. 8-15절은 레아를 통해 얻은 자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우벤과 그의 아들 4명, 시므온과 그의 아들 6명, 레위와 그의 아들 3명, 유다와 그의 아들 5명과 손자 2명, 잇사갈과 그의 아들 4명, 스불론과 그의 아들 3명까지 총 33명으로 야곱의 딸 디나를 포함하면 모두 34명이 되고 가나안 땅에서 죽은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을 제외하면 32명이 되는 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이 75명이었다고 말함으로써(행 7:14) 창세기 46장의 숫자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 46장에 나타난 야곱 가족의 명단은 의도를 가지고 숫자 70에 맞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6-18)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
16-18절은 레아의 몸종 실바를 통해 얻은 자녀들의 명단입니다. 갓과 그의 아들 7명, 아셀과 그의 아들 4명과 딸 1명, 손자 2명으로 총 16명입니다.
(19-22)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
19-22절은 라헬을 통해 얻은 자녀들의 명단으로 요셉과 그의 아들 2명, 베냐민과 그의 아들 10명으로 총 14명입니다.
(23-25) 단의 아들 후심이요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칠 명이라
23-25절은 라헬의 몸종 빌하를 통해 얻은 자녀들의 명단으로 단과 그의 아들 1명, 납달리와 그의 아들 4명으로 총 7명입니다.
(26-27)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26절은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인원을 정리하며 야곱의 며느리들을 제외하고 66명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가나안 땅에서 죽은 유다의 두 아들과 애굽에 있었던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이 제외되고 야곱의 딸 디나를 포함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27절은 66명에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을 포함해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이 70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12지파의 조상을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하기에 야곱 가족의 명단을 통해 후손들에게 증거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족보가 증명하는 역사성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온전함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은 깨어졌고 더이상 이 땅에서 완벽한 가정은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과 함께하심으로 야곱의 가정은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쳤던 우리 가정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은혜로 충분한 가정으로 회복 되기를 원합니다. 수 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전쟁과 기근, 질병과 재해 등의 어려움은 우리의 삶에 짙은 어둠을 드리우지만 우리가 눈을 들어 가정의 주인 되시며 가정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 온 야곱 가족들(46:28-34)
어제 46:1-27을 통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그의 가족 66명과 함께 애굽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살폈습니다.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야곱은 가족들이 애굽에 다다를 때가 되자, 자신들이 거의 다 왔음을 요셉에게 알리기 위해서 유다를 미리 보냈습니다. ‘미리’의 문자적인 뜻은 ‘얼굴’입니다. 야곱이 한 ‘얼굴’을 전령으로 요셉에게 보내서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알렸다는 의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땅히 장남 르우벤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둘째 시므온도 아니었고, 셋째 레위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가려 뽑아 보낸 사람은 넷째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집안(즉, 이스라엘)의 대표 얼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한 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 10명은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먹고도, 요셉의 옷에 염소 피를 묻히고서 요셉의 피라고 아버지를 속이고서도 22년 동안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38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쌍둥이-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당시가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유다는 그의 바르지 못한 행실로 인해 사회적으로 완전히 생매장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러한 지난날의 잘못된 행실이 그에게 믿음으로 승화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갔다가 다음에 올 때는 막내를 꼭 데려와야 곡식을 살 수 있다는 애굽 총리의 말을 듣고, 다음에 곡식을 사러 갈 때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던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또 베냐민의 자루에서 애굽의 총리가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은잔이 나와서 노예가 될 뻔했을 때 그를 위해서 간구하고, 자신이 대신 노예가 될 터이니 베냐민을 풀어달라고 눈물로 간구했던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유다의 그 간구가 요셉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습니다.
물론 유다의 삶을 보고서, “우리가 삶을 마음대로, 또 엉뚱하게 살아도 나중에는 다 정리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난날 자신의 바르지 못한 삶이 오늘의 바른 자신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요셉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신은 초강대국의 총리이니까 체통을 지켜야 한다며 뻣뻣하게 자기 집으로 오라 하고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총리가 한 가정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와 가족을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22년 만에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을 만난 아버지와 22년 동안 한순간도 잊지 않고 아버지를 그렸던 아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긋맞춰 안다’는 것은 ‘포옹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넘어지다, 눕다, 엎드러지다’의 뜻입니다. 특히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만나서 안고 울었다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넘어지고는, 자신들이 넘어졌는지 알지도 못하고 안고서 울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뒹굴며 ‘한참(for a long time)_얼마 동안의 문자적 의미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이 말은 야곱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야곱에게 자신의 지난 모든 세월이 가치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과 같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역사해 주셨음을 알려주는 증명서와도 같았습니다.
요셉은 울음을 그친 야곱과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1-34)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은 22년 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흥분된 감정에 휩싸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가족들이 머물러야 할 곳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내려오면 자기 상전인 바로왕에게 알현을 시켜야 하는데, 그때 해야 할 말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가족들에게 자기가 먼저 바로왕에게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우리 가족은 목축하는 목자들이기 때문에 양과 소와 같은 짐승들을 끌고 왔다’라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고센 땅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숙한 삶과 성숙한 인격을 가긴 사람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당시 애굽에서도 ‘목축’은 굉장히 천하게 여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34절에는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긴다’라고 합니다. ‘가증히 여기는 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토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도 목축하는 역겨운 것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야곱의 가족들을 따로 살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았던 것입니다.
바로왕 앞에 선 야곱(47:1-12)
마침내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왕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1-2)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바로왕을 알현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일러주었던 말, 즉 자신들은 목자라는 것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모두 바로왕을 만나게 하지 않고 그중에 ‘5명’만 뽑아서 만나게 했습니다. 숫자 ‘5’는 애굽에서 아주 존중된 숫자, 완전수로 여기는 숫자였다고 합니다. 43:34절에 보면, 형제들이 두 번째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이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동생 베냐민에게는 5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최고의 대우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돌아갈 때 요셉은 다른 형들에게는 옷을 1벌씩 주었지만, 베냐민에게는 5벌을 주었습니다.
요셉이 형들 중에서 5명을 뽑은 것은 애굽 사람들이 5자를 존중하기 때문에 5명이면 충분히 가족들을 대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5명은 누구였겠습니까? 성경이 그 이름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2절의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에서 ‘중’의 의미가 ‘끝, 가장자리’입니다. 그러니까 1-5째(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가 아니면, 6-10째(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바로왕에게 자기 가족은 밋밋한 사람들이기에, 이 애굽을 결코 넘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우리 가족은 지극히 평범합니다”라는 것을 잘 설명하는 쪽을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형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형들은 자신들이 온 목적을 분명히 밝히는데, 기근 때문에 양들에게 풀을 먹일 곳이 없기 때문에 왔고, 이곳에 뿌리박고 살기 위함이 아니라 ‘거류(居留)_남의 나라 영토에 머물러 삶-임시거주’하기 위해서 왔다고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고센에 살게 해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고센은 애굽의 변방이자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 동편에 있던 지역으로 홍해로 이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라암셋’이라고도 했습니다(11절). ‘고센’은 지방 이름이고, ‘라암셋’은 지역(도시) 이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곳은 기름진 곡식이 나오는 애굽의 좋은 땅이었고, 요셉이 거주했던 곳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센은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이 농사를 지어 먹고살기도 좋았고, 요셉이 거주했던 곳과 가까워서 왕래하기도 좋았고, 애굽의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수 백 년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을 하는 데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살기에 애굽에 이보다 더 좋은 땅은 없었습니다.
요셉은 초강대국의 총리로 있었을지라도 자기 집안 식구들이 언젠가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왕은 요셉의 형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5-6)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바로왕은 고센에 머무르게 해달라는 요셉의 형들의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요셉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7년의 풍년은 물론 7년의 기근 중에서 2년을 잘 이겨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의 가족을 잘 대해주는 것은 요셉의 뛰어난 통치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야곱 가족들의 고센 거주뿐만 아니라 형제 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왕실의 가축을 관리하는 것도 허락했습니다. ‘관리하게 하다’의 문자적인 뜻이 ‘우두머리가 되게 하다’입니다. 혹 형제 중에서 역량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애굽의 관련 부서 공무원이 되게 하는 것도 허락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하면 “형제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안 되지만 ‘축산정책과장’ 정도는 시켜도 좋다”는 의미였습니다.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그 후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왕과 대면하게 하여, 야곱이 바로왕을 위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바로왕은 야곱에게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하자 야곱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우리 말에 자신의 나이를 겸손하게 낮추어서 표현할 때 ‘개나 말의 이빨’이라는 의미로 ‘견마지치(犬馬之齒) 또는 ‘개나 말의 나이’라는 의미로 견마지년(犬馬之年)’이라고 합니다. 지금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나이가 조상들에 비해서는 젊은 130세이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고, 아버지 이삭은 180년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나이로 하면 할아버지보다는 45년을 덜 살았고, 아버지보다는 50년을 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조상들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고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그의 삶을 살펴온 바와 같이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11-12)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요셉이 가족들이 거주할 곳으로 정한 고센(라암셋)은 ‘애굽의 좋은 땅’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장 좋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바로왕에게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험악한 세월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인식하게 해 주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게 해 주었으며, 바로왕을 축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돌아보면, ‘험악한 세월’이라고 여겨지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 험악한 세월이 몇 주간, 몇 개월처럼 짧은 기간이기도 하고, 수년간 또는 수십 년이라는 긴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이든지 간에 그 기간으로 인해서 우리도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우리의 믿음이 이전과 다른 곧은 길을 가게 해 주었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품어줄 줄 아는 넉넉한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어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험악한 세월은 결코 험악한 세월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험악하게 보였던 세월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붙잡게 하여 준 하나님의 은총과도 같습니다.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해 오늘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날로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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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로 불리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가나안 땅, 헤브론을 떠나 브엘세바를 거쳐 애굽의 고센땅으로 이동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중요한 두 번의 이주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간 것이고, 두 번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를 보면, 모두 세 번에 걸친 중요한 이주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3번에 걸친 이주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모두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서 야곱의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때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야곱이 헤브론을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렀습니다. 브엘세바는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습니다. 흔히 가나안 땅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표현합니다. 단이 가나안 땅 북쪽 끝이라면,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맨 남쪽 끝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를 지나면 사막지대가 애굽까지 펼쳐집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립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야곱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까?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은 창세기 37장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이제 애굽으로 떠납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바로 앞에서 130년의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고백했습니다. 130세면 인생의 황혼기입니다. 새로운 변화와 모험을 원하지 않는 때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130년 인생 동안, 가나안 땅을 떠난 기간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얻은 댓가로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살았던 20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110년 동안을 가나안에서 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인생 말년에 110년이나 살았던 삶의 터전을 떠납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이기에 그 땅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일입니다.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왕 바로에게 아내 사래를 빼앗긴 곳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부끄러운 기억의 현장입니다. 또한 아버지 이삭에게는 창세기 26:2절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경고하신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애굽으로 지금 야곱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옮기려고 했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는 야곱의 가문이 애굽에서 큰 번성을 이룰 것이며, 둘째는 야곱이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두 가지, 즉 크게 번성할 것이며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다는 말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말씀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아무리 잘되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7:14절에 보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메시야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뜻입니다. 그 만큼 중요한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셨으며, 그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27절까지는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명단에는 2명의 여인, 디나와 야곱의 손녀 ‘아셀’의 딸 ‘세라’를 제외한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70명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룹니다. 그리고 수 백년이 흘러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민수기 1:46절에 보면, 출애굽한 20세 이상의 남자만 603,550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20세 미만의 남자를 모두 합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는 200만명이 넘습니다. 야곱을 포함한 70명이 애굽으로 갔는데, 2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며,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하나님의 결코 짧지 않은 능력의 손 안에서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8~34절까지는 야곱과 요셉의 상봉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여년 만에 이산가족처럼 떨어져 살다가 상봉하였으니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났을 때,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아들을 만났을 때, 아버지 야곱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30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지금 죽어도 좋다’ 현재 너무나 행복하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치고 이 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좋다. 교우님들은 이런 고백을 지금까지 살아오시는 동안 몇 번이나 하셨습니까? 어떤 분은 1번, 어떤 분은 2번, 3번.. 아니 그 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그 고백이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한 순간의 감격으로 그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내가 왜 그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을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으로 인한 이와같은 고백은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만, ‘지금 죽어도 좋다’는 이 고백이 단지 한 순간의 감격으로 그치거나 후회로 끝나버리는 허망한 고백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참된 고백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셈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만, 절제와 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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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6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단락인 1~7절은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내려간다는 내용이며, 둘째 단락인 8~27절은 이집트에 내려간 명단입니다. 그리고 28절 이하의 마지막 단락은 야곱과 요셉이 재회하는 장면입니다.
첫째 단락에서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가던 중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1절)
브엘세바는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우물을 파고 정착했던 곳으로 야곱의 어릴 적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험난한 세월은 바로 이 브엘세바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비록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아들 요셉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만 야곱은 하나님께 자신의 여정이 하나님의 뜻인지 먼저 여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이 얼마나 단단해지고 성숙해졌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창세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행보는 개인 차원의 여정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세우실 ‘민족’의 차원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고 신중해진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이렇게 한 민족의 조상으로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3~4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이집트로 내려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야곱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야곱이 왜 그동안 사랑하는 요셉을 잃고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는지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현재 우리가 보내고 있는 고통의 시간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 요셉이 왜 먼저 이집트로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극심한 기근 속에서도 야곱의 가족들을 살려내고자 하셨을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민족의 기틀을 다지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집트일까 하는 점입니다. 야곱의 자손들이 민족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라면 굳이 이집트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통해 야곱의 가족들을 몰아내시듯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게다가 이집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각종 우상들이 창궐해있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러한 곳으로 이끄신 것은 단지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 안정과 풍요만을 안겨주기 위해 그들을 이집트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고, 교육과 문화, 예술, 사회질서와 삶의 수준 등 모든 면에서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요로움의 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집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갖춘 모판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과 분리되어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풍요로움 속에서 자양분을 얻고 그것을 통해 건강해지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심어두신 이유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46장 마지막 단락에서 요셉이 가족들과 해후한 후 가족들에게 당부한 말이 이렇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31~34절)
요셉이 가족들에게 당부한 내용은 파라오에게 자신들은 조상대대로 목축업을 해왔다고 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당부한 것은 세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정치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이미 파라오 다음으로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이 파라오와 이집트에게 결코 위협적인 세력이 될 수 없음을 천명했습니다.
자신들을 목축업자로 소개하는 두 번째 이유는 민족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고센 땅은 이집트의 변방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유목민들을 경계하는 이집트인들의 습성을 알고서 자신의 가족들이 고센땅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집트 안에 있지만 구분된 곳에서 야곱의 자손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지리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죽어 묻혀야 할 땅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머물러야 할 땅은 이집트가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언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집트의 변방인 고센 지역은 이스라엘 민족이 빠져나가기에 가장 유리한 장소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부터 이미 언젠가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단락(8~27절)은 이집트로 내려간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이 사람들의 숫자는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모두 70명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이 숫자가 75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스데반 집사가 자신의 설교에서 이집트로 이주한 사람의 숫자를 75명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아마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에 히브리어 성경보다는 헬라어로 되어 있는 70인역으로 구약을 접했을 것입니다.
70명이 맞느냐, 75명이 맞느냐 하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70명이라는 적은 숫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그리고 바다의 모래같이 크게 번성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숫자의 적고 많음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야곱의 삶을 통해 우리는 고난이 주는 유익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깊어지게 하며, 인내하게 하고, 그리고 겸손하게 해줍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어줍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고난과 고통의 시간은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가장 가까운 때임을 기억하십시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이 세상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살지만 언제나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하늘의 본향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가 입고 있는 그 어떤 부귀나 영광도 누더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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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과거 서구문화의 중심은 지중해였습니다. 지중해를 차지한 사람들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로마가 당시 그 중심 국가였지요. 그러다가 대서양 시대가 열리면서 지중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대서양 연안의 나라들이 발전하여, 20세기에는 미국이 전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금융 위기를 맞으며 다시 전세계의 중심은 중국으로 옮겨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중국은 많은 물건을 미국에 수출하고 경제적인 부를 이루어 발전했으며, 이제는 스스로 소비할 정도로 경제력이 커졌고, 이에 미국이 무역전쟁을 통해 견제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서 야곱은 전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그동안 아브라함 시대부터 가나안 땅에 부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의 무대가 새로운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땅에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옮김으로 가나안 시대는 끝나고 애굽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1. 야곱에게 임한 하나님의 약속
야곱은 요셉과 바로 왕의 초청을 받고 애굽으로 이사를 가면서 가나안 땅의 경계인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1절)
야곱이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면서 가나안 땅의 경계선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동안 가나안 땅에서 자기를 지켜 주시고 함께하셨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붙들어 왔던 가나안 땅을 이렇게 떠나도 되는가하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신앙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 야곱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나안 땅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땅을 얼마나 중요시했던지 자식들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할 때에도 이삭 대신 그의 종을 보내 리브가를 찾아왔습니다. 또한 부친 이삭에게도 애굽으로의 이주가 금지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 자신은 형 에서를 피해서 가나안 땅을 쉽게 떠났다가 많은 고생을 하고 겨우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은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중요한 약속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에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재확인해주셨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2-4절)
여기서 ‘이상(vision)’은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를 계시하시는 특별한 방법으로써의 꿈을 의미하지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종종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오히려 성경을 통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방법을 즐겨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가나안 시대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의 자녀들을 통해서 애굽 땅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그렇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후에 이제는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또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계시의 무대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무대로 사용하셔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보여 주셨고, 조상들의 믿음의 삶을 통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그 무대를 옮기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이제 더 이상 가나안 땅을 무대로 쓰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 중에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그 놀라운 믿음의 삶을 보고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지는 겨우 유다의 며느리 다말 정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자기 아들들 정도나 구원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들 중 일부이지 이스마엘이나 에서 같은 경우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기대하신 것은 가족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더 이상 야곱의 가족들을 민족과 나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두면 야곱의 가족까지도 이방화 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서 여건을 만들게 하고 야곱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19세기까지 은둔의 나라였고 전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가 20세기에 와서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하나님의 말씀의 무대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한국 교회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세속화된다면 하나님은 그 촛대를 다른 나라로 옮기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리는 다시 별 볼일 없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함으로 이제 가나안 땅은 암흑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후 가나안 땅은 전혀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의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제 철저하게 잊힌 나라가 되었으며,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보여 주게 됩니다. 즉 이제 가나안 땅은 멸망을 위하여 예비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요한계시록을 보면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에는 지금 우리나라같이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는 옛날 교회의 유적지만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요한이 목회할 때 에베소는 당시 터키 지역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에베소는 역사 속에 이름만 남아 있고 형편없는 작은 도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골로새나 라오디게아 같은 곳은 지진으로 폐허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무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주도권을 잃어버리면 역사의 무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꺼져가는 부흥의 불길이 더 뜨겁게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새로운 축복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2.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자손들
“8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 11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13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 16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18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 19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 23단의 아들 후심이요 24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칠 명이라 26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8-27절)
본문은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명단을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계(母系)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 명단과 관련하여 성경의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본문 27절과 출 1:5; 신 10:22은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숫자를 70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행 7:14은 75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가 성경의 모순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행 7:14의 기록은 본문 27절의 70명에 요셉의 손자 5명을 추가시킨 것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본문의 70명의 숫자는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모든 수를 의미하지 않지요. 이는 단지 이스라엘 12지파 연합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대전제하에 이스라엘 각 지파를 창설한 자와 독립적인 부족을 형성한 족장들의 명단만을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에 야곱의 자부(子婦)들과 종들의 숫자까지 포함시키면 훨씬 더 많은 수가 될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보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시므온의 아들 중에서 가나안 여인의 소생 사울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거의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시므온과 유다가 가나안 여자와 혼인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12절에는 유다의 아들들을 설명하면서 다말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 큰아들 베레스의 아들이 둘이나 나옵니다. 베레스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는 분명히 나이가 어렸을 것인데 여기에는 베레스가 아들을 둘이나 낳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21절에는 막내 베냐민의 아들 열 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베냐민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 아이가 열 명이나 될 정도로 나이가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명단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 그 사람들의 이름은 아니고 애굽에 내려온 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을 때의 이스라엘의 식구들의 명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 가족들이 거의 다 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열두 아들이 아니라 열두 가정이었습니다. 아무리 한 가족이며 기근이 심하다 하여도 열두 가정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는 늘 집안에서 가깝게 지내지만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애굽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들이 신앙적으로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명의 형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처음에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다음에는 70명을 선발하셔서 복음을 전하러 보내셨습니다. 야곱도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후에 70명이 되어서 애굽으로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70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서 70명은 야곱에서 시작해서 3대에 이른 총 가족의 수입니다. 히브리인들의 한 가족을 5-6명 정도로 본다면 열둘이 결혼해서 3대에 이르면 대략 70명이 됩니다. 이렇게 70명으로 시작한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이 400년이 지나서 애굽을 떠날 때에는 성인 남자만 60만명으로 규모가 커져서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대략 만 배로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처음 복음을 전하면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믿음의 1세대가 생기고, 그 다음에는 이들에 의해서 말씀을 전해 듣고 교회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대(代)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때부터는 풍성한 추수의 계절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렇게 대를 이어가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이제 이렇게 복음의 확장성이 우리 교회 사역과 아울러 나타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명문 교회를 이룰 것이라 확신합니다.
3. 요셉과 야곱의 상봉(相逢)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28-30절)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는 유다의 대표성을 인정받는 장면입니다. 유다는 2차 곡물 구입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여 베냐민을 동행시킴으로써 애굽으로의 이주를 가져오는 중간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그는 선발대로 요셉에게 먼저 가서 야곱 가족들이 고센에 정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만큼 유다를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심부름을 떠나고 보낸 이후 22년 만에 애굽 땅에서 극적 상봉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산가족 재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은 구약 교회의 기초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을 다시 만난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다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완전히 차지 못한 달처럼 이지러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요셉을 되찾음으로 완전한 이스라엘로 그 모습을 회복하게 됩니다. 야곱이 살아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났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음은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의 가족들을 애굽의 고센 땅에 거주시키기 위해 신중한 조언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31-34절)
애굽은 엄격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애굽에서 가장 귀족에 속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아내로 제사장의 딸을 주었습니다. 제사장의 다음 계급은 관료나 군인이고, 그 아래가 농민이나 상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가장 계급이 낮은 천민들이 목축 업자였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과거의 백정과 같았습니다. 애굽인들은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목축업자들과는 아예 접촉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형제들이 목축업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농사를 전혀 짓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요셉은 기왕이면 애굽의 바로나 신하들 앞에서 자기 가족을 멋있게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애굽의 귀족들이 요셉이 이런 천한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요셉까지 무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딸인 요셉의 아내는 남편을 무시해서 잠자리에서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형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을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절대로 형들이 목축업자라고 말하지 마세요. 할 수 있는 대로 농민이나 상인이라고 하고, 특히 할아버지 이삭이 농사를 크게 지은 것을 내세우고,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물을 파는 전문가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세요. 그리고 소나 양은 그냥 집에서 키우던 것인데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지만 본업은 아니라고 잡아떼세요.”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굳이 자신들이 목축업자라고 말하라고 하면서 고센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은 가족들이 애굽 땅에서 환영을 받고 높은 계급을 받아서 뿌리 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가족들이 애굽에 오자마자 떠날 준비를 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자신들이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가족들이 애굽에서 환영받고 출세를 하면 가나안 땅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가족들이 애굽인들로부터 천민 취급을 당하더라도 애굽을 떠나기 쉬운 고센 땅에 있게 한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감추었더라면 애굽에서 더 크게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애굽인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애굽에 귀화해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는 천한 목축업자들과 함께 애굽을 떠날 것을 더 희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그가 애굽 땅에서 노예로, 죄수로 살면서 그리고 애굽을 호령하는 총리가 되어 통치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자신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사유로 이주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마다 내 욕심, 내 감정, 내 생각 따라 움직이지 마시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시고, 내 교회생활이 유익한가를 고려하시고, 마지막으로 내 가정에 유익한가를 고려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발걸음을 매순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여백을 채우려고 나온 이름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이주하는 야곱의 후손 70명의 이름이 정확히 나온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의 세계에서 중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세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부끄럼 없는 이름이 되도록 믿음으로 갈고 다듬어 갑시다. 하나님이 기뻐하며 후손들이 즐겨 호칭하는 이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과 나를 부르셨고 쓰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영적으로 어두워 하나님이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직업과 방법으로 살기도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요셉이 자신의 가족들을 고센 지방에 두어서 애굽인이 가증하게 여기는 목축을 계속하게 한 것처럼.... 우리는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간다면 시행착오 없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사용해 주소서!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