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살다가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이 있다. 이제 새로 등단한 인천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점점 이름마저 잊히고 있으니 벌써 그가 떠난 지 8년의 세월이 흐른 까닭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문학을 하던 동료 문인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를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던 그의 모습이 눈물겹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까닭이다.
哭 이 효윤
효윤아, 자네가 정말 갔구나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내가 자네를 다시 볼 수 없는 것 말고
친구들이 자네 없이 술을 먹어야 하는 것 말고
그래 우리가 좀 허전하게 지내야 할 일 말고 그래
아직 어린 자네의 두 아이들도
이제는 영 다시는 자네를 못보는 것 아니냐
다시 한 번 자네와 가고 싶던
강진, 그 월출산 남쪽 자락 시원한 계곡물
그토록 자네가 자랑하던 자네의 고향마을을
나는 또 언제 다시 가보기라도 할 것이냐
누구와 함께 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소주 한잔 다시 기울일 수 있단 말이냐
고향을 지키다가 너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너의 맏형은
효윤이가 없어도 강진에 오면 들르라고 하더구나
저 남쪽의 빼어난 풍광속에 태어나
인천의 한 변두리 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무명의 시인으로 삶을 마칠때까지
자네의 꿈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자네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십여년이 넘게 사귀어 왔으면서도
아니 자네 생애의 마지막 십여 년을 함께 했으면서도
자네의 속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만나면 웃고 떠들고 술 퍼마시기에 바빴지
자네의 시조차 바로 읽지 못하였구나
어쩌면 자네가 행복했을지도 몰라
이 세상에 살면서 운전대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컴퓨터 자판 한번 두들겨 보지 않았지만
분명 자네는 행복했을 거야
세상의 불의에는 꼬장꼬장하게 저항의 날을 세웠지만
그 앙상한 몸뚱어리를 해가지고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지
젊은 나이에 사경을 헤매면서도
누구에게도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으니
연명할 소주 몇 잔이면 족하였으니
자네는 시에 취해 술에 취해 환한 복사꽃에 취해 살다가
그 꽃길 속으로 꿈길을 가듯 잠기어 든 거야
시인의 순수를 지켜주지 못하는 세상
자네의 댓쪽같은 울분은
바로 우리들의 울분이 아니겠는가
가물가물 그리운 자네의 사투리
눈물겨웠던 병고와 가난 이제 다 놓고
훨뤌 주선이 되어 자네는 떠나고
우리는 또 술을 먹고 세미나를 열고
문예지를 발간하고 총회를 하며
-필자의 졸시 '97.5.13
필자는 1991년 <인천예총>지에 '저항 의지와 서정의 언어'라는 제하에 이효윤의 시집 <빈집>을 중심으로 그의 시 세계를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 나는 그의 단정한 시 형식, 패자의식과 피동성,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그의 시를 지적하고 몇 편의 역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에 주목하며 그의 두 번째 시집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기대했던 두 번째 시집을 내지 못하고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남긴 채 1997년 5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시가 문학사의 어느 위치쯤에 놓여야 할 것인가? 혹은 그의 시가 어떤 문학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가를 따져보고 싶은 마음이 현 시점에서는 조금도 없다. 다만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동갑나기 시인에 대한 애석한 마음을 담아보고 싶을 뿐이다.
그는 1949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떤 경로로 상경하였으며 상경해서 어떤 일에 종사해 왔는지 구체적인 내막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1985년 필자가 첫 시집을 내고 그것을 인천의 문협회원들에게 발송했을 때 그도 내 시집을 받아보았고 그것이 첫 인연이 되었고 얼마 후 내가 인천문협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월례회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동갑내기여서 곧 의기투합하였고 그 후 계속해서 교분을 맺어오면서 10여 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고 수없이 술도 함께 마시곤 했다. 나나 이효윤이나 둘 다 두주불사요 청탁불문이니 만나기만 하면 으레 주점행이었다. 여기에 또 술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금은 수원으로 이사한 채성병 시인이 합세하였으니 셋은 그야말로 인천에서 알아주는 3주당이었다.
그렇게 세상 가는 줄 모르고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제 이효윤 시인이 떠나고 말았으니 언제 다시 만나 그 따뜻하고 즐거운 술자리를 가질 수 있겠는가.
1990년 8월쯤으로 기억된다. 이효윤이 고향에 내려갈 일이 있다기에 마침 시간적 여유가 있는 터라 채성병 시인과 함께 셋이서 내려가기로 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나의 중고 프라이드 승용차를 몰고 호남고속도로를 내달려 광주에 도착, 광주시내를 가로질러 다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그의 고향에 도착했다.
월출산 남쪽 자락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 계곡 한편에 그의 고향집은 있었다. 그의 집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보아 그가 항상 자랑하던 그의 윗대 자이당 할아버지가 다산 정약용과 두터운 친분을 가졌었다는 말이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6·25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남아 있는 돌담과 한 채 남아있는 건물에 옛 선비의 체취가 서려있는 듯했다.
품격 높은 옛 선비가 글을 읽고 지었음직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었다. 더욱이 월출산 남쪽 끝자락쯤 울창한 수목과 맑고 찬 계곡물은 속세의 모든 잡념까지 깨끗이 씻어줄 것 같았다. 우리는 집 앞 넓은 공터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텐트를 치고 2박 3일을 내내 술만 마셨다.
계곡엔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중간 중간에 널찍한 평상을 만들어 놓아서 우리는 밤낮 거기에 앉아서 매미소리와 계곡물 소리와 함께 속세를 잊고 사뭇 흥에 겨워 술을 마셨던 것이다. 술잔 속으로 매미가 곤두박질치는 진풍경이 연출되는 것도 예사였으니 참으로 즐겁고 재미있었다.
채성병이 술을 먹다가 평상에서 계곡물로 거꾸로 낙하하여 바위 모서리에 엉덩이 꼬리뼈를 짓찧어 엉덩이가 아프다며 엉거주춤하던 것은 오랫동안 얘깃거리가 되었다. 하루는 이효윤과 함께 다산 초당에 올랐다. 술에 취한 채성병은 길 잃은 어린애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우리는 모른 체하고 열심히 초당에 올랐다. 다산초당 이곳 저것에서 해남쪽을 바라보며 많은 얘기를 나누며 찍었던 시진들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효윤은 무척 건강했었는데….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97년 5월 11일 나는 그의 맏형을 만나 전에 한번 강진 효윤네 고향집에 갔었노라고 하니까 기억이 나는 듯 반가워하며 효윤이가 없더라도 강진에 오면 꼭 들르라고 했다.
그러겠노라고 대답은 했으나 이효윤이 없는 이효윤의 고향집을 이제 어떻게 다시 찾는단 말인가. 이미 주인을 잃어 쓸쓸할 그의 고향, 그 빼어난 풍광, 이효윤이 병석에 있을 때 나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자네의 고향에 다시 한 번 같이 가자고 수없이 되뇌었는데…. 이효윤은 모든 것을 저버리고 훌쩍 떠났다. <계속>
한 무명 시인을 회상하며 - 고 이효윤 시인(2)
연재기사 '詩가 있는 오솔길' 7
최일화(choiihlwha) 기자
2.신선초 비닐 하우스
이효윤은 선량하고 진실된 사람이다. 진실하지 않고 선량하지 않았다면 시를 쓰지도 않고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종종 어떤 사회현상이나 정치적 현상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평을 가하거나 걸직하게 욕설을 내뱉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진실함과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누구를 음해하려고 하는 욕설은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현상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이효윤은 세속생활에선 일면 부족한 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시편들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가난에 대한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 경제를 꾸려나갈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이효윤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집 가까이에 있는 주물공단에 다니던 것을 기억하나 그것도 얼마 안되어 곧 그만두었다.
그 후에는 마을 한편에 있는 한 가건물에서 그의 부인과 함께 피아노 의자를 주문받아 열심히 일하던 모습을 본 일이 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수입을 보장해주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찾아가는 것이 미안했을 정도로 그는 열심히 일했었고 옆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웠을 정도로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잘 될 것 같던 피아노 의자 만들기도 얼마 안가 중단하고 다시 그는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 신선초를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여기저기에서 막대기를 주워다가 기둥을 세우고 각종 보온재료와 비닐을 구입하여 그는 두 동의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엉성하기는 했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겨울철인데도 후끈후끈 열을 내뿜어 어떤 작물이라도 잘 자랄 것 같았다.
하루는 나와 함께 김포로 신선초 농장을 방문하여 자문을 받기도 하고 신선초 모종 매입에 대해서 알아보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지금쯤 신선초가 잘 자라고 있겠지 하고 가보면 그게 아니었다. 모종은 너무 비싸서 신선초 씨앗을 사다가 뿌렸다는데 가뭄에 콩나듯 했다.
결국 신선초 농사는 실패하고 열무씨를 대신 뿌렸는데 그것이 돈이 돌 리 없었다. 다시 해를 넘겨 1996년 봄 그는 아들과 함께 열심히 호박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먼 거리에 있는 부식토를 열심히 운반해서 구덩이를 채우곤 했다.
이효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항상 진지하다. 그 해 봄 그가 열심히 호박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도 그는 어떤 희망에 차 있는 듯 진지하기만 했다. 가을 철 한 통에 5000원 한다는 늙은 호박을 한 1000 통 가량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수확을 보지 못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나는 그의 농사를 바라볼 때마다 안타깝기만 했다. 나는 이러한 그의 농사행위가 경제를 꾸릴 목적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순수한 자연의 품에 안겨 살고 싶은 다분히 시적 발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경제를 위해서라면 월급이 적더라도 공장엘 다니든지 길거리에 좌판이라도 차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렇지만 찾아갈 때마다 들판에 나가 있는 그를 볼 적마다 나 자신도 어떤 위안이랄까, 고향과 농촌에 대한 향수를 느꼈으니 그도 그 보수가 따르지 않는 농사일이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보상행위였을 것이다. 자연에 안겨 살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들길을 걸으며
이 효 윤
낮에는
흙에다 농사를 짓고
밤에는 백지에다 농사를 짓고 싶다
흙에다 짓는 농사는
맥박을 뛰게 하고
백지에다 짓는 농사는 정신을 맑게 한다
흙에다 짓는 농사를
다 함께 나누어 먹는 기쁨
백지에다 지은 농사를
다 함께 나누어 보는 기쁨
흙에다 짓는 농사도 조금 짓고
백지에다 짓는 농사도 조금 짓지만
토실토실하게 여물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일들품으로
흙에다 지은 농사와
백지에다 지은 농사
타작한 열매들을 바라보며 즐거워 하는
내 모습을 보고싶다
그가 농사를 짓는 까닭은 바로 이런 것이다. 소박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한번은 <인천예총>지에 내가 썼던 이효윤의 시세계에 대한 <저항의지와 서정의언어>를 보고는 자기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토로한 일이 있다.
그는 많은 양의 도서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특히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이백이나 두보를 비롯한 중국의 고전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 그의 작품을 중국의 고전이나 노장사상과 연결시켜 읽을 능력이 내겐 없으니 이효윤의 그 토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누군가 다시 한번 이효윤의 시를 그 방면으로 연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3.술과 병고
전술한 바 있지만 그가 호박구덩이를 열심히 파고 아들과 함께 열심히 부식토를 운반하고 있을 때 그는 매우 건강해 보였고 희망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다시 찾아갔을 때 외출하기도 힘든 쇠약한 몸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식사는 거르면서도 술은 거르지 않고 매일 마신다는 것이다. 이웃 수퍼마켓 아줌마도 매일 세 병씩 사간다며 걱정을 했다.
너무도 쇠약해진 그가 걱정이 되어 나는 그에게 바람이나 쐬자고 하며 차에 태워 경서동의 동아매립지 넓은 들판을 달려보기도 하고 그곳 바닷가 작은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는 식사는 거절하고 그 쇠약함 몸으로 소주만 찾는 것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술만 찾는 그의 건강을 나는 크게 염려했고 그의 앞에서 나 혼자 식사하기가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그가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 나는 그와 함께 수원 채성병 시인을 찾아간 일이 있다. 수원엔 또 성범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는데 우리와 동갑나기로 시는 쓰지 않지만 어머니가 우리나라 최고 원로 동양화가로 문단과 화단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친구다.
우리 넷은 2박3일 동안 함께 지냈는데 놀란 것은 그 3일 동안 이효윤 시인이 단 한 끼의 식사도 하지 않던 일이었다. 오로지 술이었다. 저러고도 견딜 수 있는지 나는 몹시 걱정이 되었고 그것이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술을 먹고 안주를 먹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이런 식사 거부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계속되었다.
그의 부인은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죽도 쒀서 떠먹이고 대추음료며 과일이며 준비해 놓고 애를 썼으나 그는 하루종일 소주병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홀짝홀짝 따라 마시는 것이 하루 세 병이라고 했다. 가끔 포도 한 알씩을 집어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 번은 가니까 그의 부인이 죽 위에 갈치찜을 조금씩 얹어서 입에 떠 넘겨주고 있었다. 몇 숟가락 받아먹는 것이었다. 갈치찜은 먹느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저렇게라도 입맛을 되찾으면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갈치 좀 해줘보라며 몇 푼을 건네기도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루하루 술로 연명하는 딱한 사정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녀들에겐 다정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겐 든든한 남편이었다. 돈도 못 벌어오고 매일 술만 마시는 가장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따뜻하게 대했다. 어떻게든 먹여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모습이었다. 냉혹하게 술병을 치울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술병을 빼앗아도 소용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대학교에 다니는 딸과 중학교 3학년이던 아들이 있었는데 둘이 다 착하기만 했다. 항상 저의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고 불평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까? <계속>
한 무명 시인을 회상하며 - 고 이효윤 시인(3)
연재기사 '詩가 있는 오솔길'8
최일화(choiihlwha) 기자
4. 시인의 임종
이효윤은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회복 불능 상태였다. 얼굴은 황달로 단무지 빛깔이었다. 그는 문병 오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얼마 후 이효윤은 절망상태에서 퇴원했고 이내 일어나지 못했다. 어버이날을 하루 넘긴 5월 9일 그는 가난한 그의 지하 연립주택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아내와 두 자녀를 남겨놓고 떠났다. 여러 형제들과 고향친구들과 여러 선후배 문단의 동료들과 오랫동안 어울려 지내던 경서동 사람들과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났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가족들이 모두 외출했을 때 숨을 거두었고 직장에 다녀온 그의 아내가 확인했다고 했다.
그를 떠나보내고 나는 한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는 것을 보아왔으면서도, 저러다가는 오래 견디지 못하지 하면서도 막상 떠나보내고 나니 착잡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가난이 그를 죽였다는 생각, 어쩌면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인생을 논하고 시를 얘기하고 술을 나누던 친구, 강직한 목소리로 세상의 부조리를 질타하던 친구. 이제 언제 다시 그런 날들이 오겠는가. 모든 꿈과 소망, 희망과 절망을 저버리고 단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남겨놓은 채 그는 떠나간 것이다.
며칠이 지나 나는 누군가에게 그의 죽음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강진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그곳 모란촌 동인들과 질탕하게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한 노화가의 화실을 방문해서는 그림 한 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그 노 화가가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졸업식을 얼마 안 남겨놓고 있었을 때인데 한 졸업반 여학생이 화실로 찾아왔단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이제 곧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순결은 영원히 잃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순결한 몸매를 선생님의 화폭에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당혹스러워 수차 거절하였는데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옷을 홀딱 벗어던지고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다. 그래 하는 수 없이 그 여학생의 누드화를 그렸는데 그것이 서울의 한 초대작가전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그렇지. 강진은 김영랑의 고향. 그곳 모란촌 동인들이 이효윤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던 것을 기억했다. 아마 이효윤이 상경하기 전에 모란촌 동인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곧 그때 얻어온 동인지 <모란촌>에서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다이얼을 돌렸다. 나는 이효윤의 죽음을 알렸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효윤의 집 전화번호를 물었다. 알려주었다. 그들은 술잔을 돌리며 이효윤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으리라. 나는 또 민족문학작가회의에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곧 메모를 했다.
“작가회의 회원인 인천의 시인 이효윤씨가 지난 5월 9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9년 전남 강진 출생으로 1980년 현대문학(이원섭님 추천)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1990년 <빈집>이 있고 1994년 제 6회 인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나는 이 메모를 곧 전송으로 보냈고 그 다음 날 작가회의에서 전화가 왔다. 이효윤씨에 대한 추모의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작가회의 회보에 실을 모양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인 이효윤의 명복을 빌며
효윤아. 자네가 정말 갔구나. 지난 해 7월부터 근 1년이 다 되도록 바깥출입을 못하고 지내는 동안 우리 인천의 문인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안타까워했는지 네가 아는지 모르겠구나. 문인들 모임의 자리에서나 술자리에 네가 끼어 있으면 생기가 되살아나고 문학의 열기가 한층 고조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승용차가 홍수를 이루는 작금에 승용차는커녕 컴퓨터 자판 한번 두드려 보지 않고 너는 소박한 시정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너는 현대에 살면서도 마음은 늘 고전적 정서 속에 소박하게 살았다. 순수한 옛 인심 속에 욕심 없이 조용하게 살았다. 인천이라고는 하지만 변두리, 농사를 지으며 사는 마을에 소박한 마음으로 살았다. 옛 놓촌의 정서가 아직도 남아있는 곳에서 호박과 고추와 가지를 심으며, 비닐하우스에 신선초를 심으며 외롭게 지냈었다.
너의 농사가 왜 그렇게 시원치 않았는지 너를 찾을 때마다 나는 안타까웠다. 낮에는 밭에 농사를 짓고 밤에는 원고지에 농사를 짓고 싶다던 친구 효윤아. 빨리 회복하여 다시 한 번 너와 함께 네 고향 강진에 가고 싶다고 몇 번이고 말했었는데 너는 그 다짐도 다 저버리고 홀연 떠났구나. 네 고향 강진, 그 월출산 남쪽 계곡의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매미소리를 들으며 소주 한잔 다시 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네 고향에 사시는 네 맏형은 효윤이가 없어도 강진에 오면 꼭 들르라고 하더구나. 네가 남긴 주옥같은 시들은 영롱하게 남아 있는데 이 아름다운 계절 5월에 너는 떠났구나. 너는 인천의 빼어난 서정시인이었다. 절망과 가난 분노까지도 서정시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종종 너를 찾아가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는데….
이제 너는 이승에서의 삶과 문학을 모두 버리고 떠났구나. 너의 청빈과 너의 순수는 우리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너는 떠났어도 네 모습과 네 문학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너의 시 한 편을 다시 읽으며 너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너의 명복을 빈다.
나는 다시 시 한 편을 덧붙였다.
산 길
이 효 윤
이 산길에는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다
풀잎에 가려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나는 대부분의 날들을 혼자 걸었고
내가 보기에도 이 산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길이 아니다
이 산길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소슬바람에 길은 더욱 쓸쓸해보이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잎새들을 바라보며 우는
풀벌레 울음소리에 자꾸만 가던 길을 멈춘다
이런 산길에도 철따라 꽃이 피고 진다
지금 피어있는 저 꽃의 이름은 산국화라 부른다
이 산길에서는 꽃도 새도 하늘도 공통점이 있다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다 슬프다
나는 이 산길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드문드문 나는 간 곳 없고 산길만 걸어간다.
어쩔 수 없이 이 길이 끝날 즈음이면 눈 내리고
나는 다시 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갔지만 산길은 옛 모습대로 남아
훗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이 산길을 내가 걸어간 것이 아니라
어두운 시대가 걸어간 흔적일 뿐이라고
5.마무리 하면서
이효윤은 이효윤의 삶을 살고 갔다. 그는 그의 문학을 하다가 간 것이다. 이효윤이란 시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고 그의 문학이 또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문학이 성공을 거두었건 그렇지 않건 그는 한 권의 시집속에 그의 삶의 진솔한 모습을 내보이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문학이 탁월하여 문학사에 길이 빛난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겠으나 반드시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는 본질적으로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한 사람이 삶을 통해 절실했던 문제들을 시라고 하는 순수한 언어의 그릇에 담아보려고 줄기차게 정진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
공명성에 사로잡힌다거나 상업적 성과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시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돈이야 되던 그렇지 못하던 꾸준하게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삶은 외형적으로는 초라해보일지 몰라도 그 내적인 모습에서는 풍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엔 고향 상실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이 때 고향이라고 함은 인간 본래의 원초적 그리움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시엔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의 질곡상태에서 벗어나 원초적 그리움의 공간 이상향에로의 탈출을 희구하는 소박한 염원이 담겨있는 시가 여러 편 있는데 그것은 <눈 내리는 날>, <계곡에서>, < 훗날에는>, <들길을 걸으며> 같은 작품들이다.
훗날에는
이 효 윤
내 소유는 아니지만
살고 싶으면 언제까지라도
살 수 있는 내 집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즐거운 아침을 맞이해야지
서두르면 안된다
새소리는 들리지 않더라도
온실에 들어가 어제 사온
화분에 물을 주며
즐거운 하루를 시작해야지
- '훗날에는' 1.2 연
눈내리는 날
이 효 윤
함박눈 사록사록 내리는 날 밤만은
홀로 앉아 술을 마시자
담요를 등에 두르고
잠든 아가의 숨결소리처럼
평화롭게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자
눈을 아프게 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눈 속에 묻혀 시야에서 사라지고
즐겁고 아름다운 일들만 생각하듯
한 잔 한 잔 비울 때마다
술향기 내 마음 속 추운 하늘에도
구름으로 몰려와
증오와 분노 슬픔과 온갖 고뇌 위에
소복히 쌓이는 함박눈을 바라보자
눈이 녹으면 눈과 함께 녹아버렸으면 싶은 것들도 살아 나와
다시 우울하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낼지라도
지금은 내 몸 안과 밖이 온통 눈뿐인 세상
마침내는 몸까지 하얘져 버릴 때까지
함박눈 사록사록 내리는 날 밤만은
홀로 앉아 술을 마시자
이렇게 순정한 마음의 시인이 그 훗날을 보지 못하고 가난과 외로움 속에 살다가 떠난 것 같아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이효윤 시인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인생 그의 문학 그리고 그의 가난과 번뇌를 살고 간 것이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이는 조물주 아닌가.
그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박수를 보내고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과 애정을 본받아 좋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효윤 시인과 함께 했던 날들을 회상하며 또한 그가 남겨준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을 오랫동안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효윤 시인이 떠난 지도 이제 여려 해가 지났다. 남은 가족들이 충격을 딛고 일어나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주 찾아가던 나의 발길도 뚝 끊기고 자주 주고받던 전화도 끊겨 이제 그의 전화번호마저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지난 가을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가 경서동엘 들른 일이 있다. 이효윤이 없는 경서동은 쓸쓸하기만 했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던 가게 앞을 지나 그의 집 앞을 지나 그가 일하던 들녘으로 차를 몰았다. 그가 신선초를 키운다며 지은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찢겨 펄럭이고 있었다. 시인 이효윤이 없는 경서동, 그곳은 이미 아련한 추억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나는 혼자 그의 유택에도 가 보았다. 그의 장례식에 온 사람은 인천 문단에서는 나하고 허문태 시인뿐이었으니 다른 회원들은 아무도 그 장소를 모르리라. 이미 고인이 된 친구, 나는 그의 유택 상석 위에 담배를 한 대 피워 놓았다. 나이 마흔 아홉에 그렇게 서둘러 떠나야 했던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다행이었다. 양지바르고 아늑한 곳에 안식처를 마련한 것이. 거기엔 묘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시인 이효윤의 묘
묘지석 옆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대표작 <다시 휴전선에서>
1994년 제 6회 인천문학상 수상
그 소박하고 순수하던 인천의 서정시인이 젊은 나이로 이렇게 떠났구나. 오다가다 사람들은 그 묘지석을 보겠지. 오랜 세월 그 묘지석은 거기 그렇게 서있을 것이다. <끝>
2.첫 시집 낸 이승희 시인|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약관 이 승희 그의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첫 시집 낸 이 승희 시인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꽃이 피거나/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본성이 아닌 거야/검은 흙 속을/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온 시간들이/단단하게 뭉쳐 있다가/풀리는 일이야//감자꽃이 피는 것은/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땅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생겨나고 있다고/고백하는 것이지"('씨앗론' 중).
이승희(41) 시인의 첫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는 생명을 머금고 있는 돌, 그 생명을 키워내는 흙, 그리고 주어진 땅에서 온힘을 다해 생명을 피워올리는 식물들의 속성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세상의 가장 밑바닥, 가난한 자리에서 "녹색 줄기의 꿈"('감자 2' 중)을 꾼다.
그는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던 것을"('돌멩이를 쥐고' 중)이라거나 "온몸이 다/눈이 되기 위하여/어둔 땅속에서/(중략)/가슴을 짓눌러오는 햇살에 대한 이 그리움"(감자 2' 중)이라는 구절을 통해 못생긴 돌멩이나 감자 속에 깃든 생명의 기운, 인고의 세월, 그리고 불같은 혁명의 정신을 들춰낸다.
"온몸이 뭉툭한 바위가 있다. 수억년 불길에도 살아남았지만 그 불의 내력에 들지 못한 삶은 오로지 깎이고 깨지면서만 살아야 하는 생이 되었다. 날 선 칼에는 미동도 않더니 제 밑을 파고든 여린 풀들에게는 제 몸을 기울여 순순히 자리를 내주는 코 뭉툭한 바위"('바람 불어 아픈 날' 중)에는 민초들의 우직한 생명력이야말로 여전히 삶과 역사의 든든한 중심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래, 나 못생긴 돌멩이 맞아, 맞다고, 납작보리 같은 흉터도 선명하지. 꽃병 둥글게 날아가던 시절, 그 불길 속을 날았지. 그래 난 아직도 날고 있는 중이야, 어쩔건데. 아직 아무것도 맞히지 못했을 뿐이야, 온전히 내 무게를 공중에 버리고 나면 떨어지지도 못하고 사라지겠지만"('그 시절 다 갔어도' 중)이라고 노래한다.
정호승 시인은 "시집 전체에서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모성적 연민의 눈물이 배어나온다"면서 "서정시의 정신과 육체가 홀대받을지도 모르는 이 혼돈의 시대에 현대적 서정시의 길을 활달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믿음직스럽다"고 평했다.
이 시인은 1997년 '시와 사람'에 '집에 오니 집이 없다'를 발표하고,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풀과 함께'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韓流붐이 전혀 시들지 않는 기세를 보여주고있다.영화,드라마,음악에서만 일어나는 붐이였는데 끝내 문학에도 미치는가보다.
지난 2005.12월7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 26면에 <<한류,시집(詩集)에도 오는가>>라는 글이 실렸다.
한국의 최영미시집 <<서른,잔치는 끝났다>>가 일본에서도 출판되여 그것을 계기로 한국의 시독자,시단을 소개하였던것이다.
일본에선 시로 베스트셀러가 된 일아라곤 없어 최고로 십여만부밖에 팔린적이 없으니 백만부베스트셀러의 시집이란 그야말로 놀라울 일이였던것이다.일본에선 초판 700부만으로 접어든 일이지만 시단으로 봐서는 정말 사건이라고 할수 있을정도다.
94년도 한국서 출판되여 인기를 모아 한때는 <<…는 끝났다.>>라는 류행어까지 형성되게 한 시집이 진정 어떤 매력을 가지고있는것인지?
그 원인을 캐보려고 나는 최영미의 94년도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올해 11월에 출판된 <<돼지들에게>>를 읽어보았다.
최영미의 시의 특점은 곧은 관찰과 이화적언어와 시름없는 표현,이 세가지이다.
최영미는 극히 랭정한 마음가짐으로 사회를 볼수 있고 자기가 보아온 사회와 사물을 자기의 사상에 의해 이화하여 아무런 구속없이 이화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것이다.
그 무거운 왕관을 쓰고자/장갑을 낀채 악수를 나누고/
이마살을 찌프리며 눈물을 말리고/터져나오는 웃음도 양복주머니에 밀어넣는다.//
그렇게 그들은 평생을 연극배우로 살아간다.(<<권위란2>>)
이는 보이는 그대로를 적고있다.그대로 선거에 나선 정치가들의 모습이다.이렇게 랭정한 관찰은 시인의 모든 시에서 보아낼수 있다.
다음,
잔치가 끝난 뒤에도 설거지중인/내게 죄가 있다면,이 세상을 사랑한 죄밖에……/
한번도 제대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비틀거리며 가는 세기말,제기랄이여.(<<세기말,제기랄>>)
지금은 아니야./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싶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자존심>>)
이는 실로 시름과 근심을 품고서는 표현할수가 없는 어구들이다.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여유를 가진 시인만이 할수 있는 표달언어이다.아주 짧은 시지만 그속에 담긴 내용,유머와 풍자의 풍부함,그리고 심지어 시대까지도 읽혀지는 재치의 산물이 아닐수 없다.
여기서 나는 시의 방법을 생각해본다.
시에도 방법이란것이 있는듯 싶다.우선 소설과는 달리 무엇을 쓰기 위해서 사물을 관찰하고 재료를 수집하고 현지를 답사하고 그 다음에 수집이 된 소재들을 조직하는 번거로움이 없이 필을 드는것이 시다.이를테면 문학창작에서 제일 쉽게 쓰이는 말이 <<글 쓰고싶은 충동>>인데 이는 소설보다 시에 적응되는 말이다.시야에 찍히는 영상,대뇌에 박혀들어오는 충격,치밀으는 감정 등에 못이겨서 시가 만들어진다.그러나 이야기를 순서있게 서술하는 소설과는 달리 자기가 받은 감수를 그대로 서술식으로 표현하면 일상생활의 반복이나 신문지상의 보도와 다를바 없게 되여 시는 그것을 제일 꺼리낀다.그 소중한 감수를 다른 어떤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작업,그리고 애써 승화시킨 이미지를 모조리 남김없이 보여줄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작업.이 모든것이 매개 시인이 머리를 앓는 방법이 아닐가 생각해본다.승화시키는 작업이란 쉬운 말로는 상상력이라고 해왔다.
이 상상력을 이화(異化)라고 이름을 달고있는 사람이 오오에 켄자부로 (<<동시대 의 표현>>)이다. 문학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사르트르랑 여러 사람들이 많이 연구했지만 그것을 리론화한 사람이 아마도 바수라르(Gaston Bachelard)라는 프랑스의 문예리론가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서로 허물없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음의 색갈,글자의 형태따위와 관계없이 전달되여오는 언어 그대로를 듣는 사람이 받아들인다.<<아주 높은 산>>라고 했을때 그저 아주 높은 산일뿐이지 그 언어형태에 대해서는 누구나 개의치 않는다.그러나 문학에서는 그렇지 않다.즉 일상생활에서의 언어란 오로지 뜻을 전달하는 언어로서만 존재하는것이다.그러나 문학은 언어예술인만큼 일상생활언어 그대로가 아니고 언어구사시에 형상을 하냥 념두에 두고있다는 것이다.생활에서 얻은 소재를 그 물질자체처럼 작용할수 있게 꾸며 보여주는것이 문학언어인데 언어가 그 역할을 할수 있게 하는것이 이화작업이라고 오오에는 말한다.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꾸미는 능력인것이 아니라 주어진 이미지를 다시 만드는 이를테면 이미지외곡같은 재생성의 능력이라고 바수라르도 주장하였다.
이점으로 봐선 시창작은 언어생성과정 전반에 걸친 이화작업과정이라고도 할수 있을것 같다.
글이 길어지는것 같아 마무리를 서두르며 아래와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1994년도에 이미 인기를 끈 시인인데 중국조선족문단에선 조용했다는게 참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볼바엔 김지하시인만큼 에누리없이 예리한 시인의 등장이였는데도 말이 다.( 시대와 성질은 판판 다르지만)
오기로 버틴 그때 그 시절,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 / 최영미
詩人文
오기로 버틴 그때 그 시절,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
서른살이었을 때, 나는 내 삶이 벼랑 끝에 와 있다고 느꼈다.
당시 난 대학원에 휴학계를 내고, 어느 자그마한 사회과학 출판사에 어렵게 취직해
막, 일을 배우고 있었다. 입사한 지 석달이 겨우 됐을까 말까.
며칠 간의 휴가가 끝날 즈음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니, 이제 나올 필요가 없단다.
그 사이에 사장이 바뀌며 내가 '짤렸다'는 말이었다.
'내가 짤렸다'는 게 실감이 나기도 전에, 난 그무렵 몇달째 사귀던 남자에게서
일방적으로 '짤리고' 만다.
실직한 지 한 두어 달 쯤 지나서였다.
며칠 째 연락이 없던 그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짧게 용건만 말하는 그에게
나 또한 짧게 "알았다"고 말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참담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 집안 사정이 엉망이었다.
세 자매의 장녀로서 서른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놀고 먹는 나는 기울어가는 우리 집의 혹이며 미운 오리 새끼였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내가 채워야 할 하루의 시간들이 먼지처럼
빼곡이 밀려와 방 한 구석에 쌓였다. 답답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 한 두 사람과 이따금씩 전화통화를 하는 게
세상과 나를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바깥으로 직접 뚫린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어두침침하던 방에서
나는 낮을 밤처럼, 밤을 낮처럼 살았다.
담배 연기만 자욱하던 방에 감금된 채 하루하루를 죽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 방문을 활짝 열어 젖히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그 때까지도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뭉기적대던 딸년의 발치를 발로 툭툭 치시며 말씀하셨다.
"네 인생은 실패다. 나이 서른에 네가 남자가 있냐 애가 있냐. 돈이 있냐 명예가 있냐.
넌 이제까지 뭐하고 살았니?"
실...패. 당신께서 불쑥 던진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그 날부터 난 서른살을 앓았다.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다가도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무겁게 추락했다.
그동안 말만 듣던 디스코텍에 가서 혼자 미친 듯이 춤을 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난 냉정하게 내 인생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 지, 그래서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 지......
나는 나의 무게를, 내 삶의 무게를 세상의 저울에 달아 계량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숨막히는 이 집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야 했다.
더 이상 돈 못 벌어온다고 어머니에게 구박당하고,
동생들에게 멸시당하며 눈칫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른살이었을 때, 나는 신림동의 어느 고시원에 있었다.
고시공부를 하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 달리 있을 데가 없어서였다.
그 당시 고시원은 서른이 다 된 여자에게 가장 싸고 안전한 숙소였다.
한 달에 20만원으로 하루 세끼 먹여주고 재워주고 독방에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도 있는,
그 곳은 내게 천국이었다.
친구에게서 빌린 돈으로 다섯달치 방세를 선불하고 나니 수중엔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지독한 독감에 걸렸는데 쌍화탕 하나 사먹을 돈이 없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을 끌고 헌책방에 가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팔아 천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었을 때의 쓰라린 감격이란......
그러나 나는 그 시간들을, 이십에서 삼십에 이르는 그 가파른 세월을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해 가을에서 겨울까지,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 나는 쓰라린 청춘을 회상하며 최초의
시들을 뱉어냈다. 그 핏덩이같은,
상처받은 짐승의 비명같은 시들이 모여 어찌어찌 하여 등단을 하고
시집을 펴내게 되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나는 오랜 실업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시인이 되었다.
그 제목과 달리, 내겐 진짜 잔치가 시작된 셈이다.
남이 차려준 밥상이 아니라 내가 손수 재료를 선택하고 요리한 진정한 밥상.
서른은 내게 그런 나이였다.
올해로 내 나이 서른 아홉. 마흔을 코 앞에 둔 지금,
가끔씩 난 내가 아직도 서른살이라고 느낀다.
서른살처럼 옷을 입고 서른살처럼 비틀거리고 서른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흔한, 그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질길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오로지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건너가야 했던
서른살의 강
그 강물의 도도한 물살에 맞서 시퍼런 오기로 버텼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밤 사무치게 그립다
끝으로 최영미의 시 한수 증송한다.
옛날 시인
그는 걷는다.타락한 도시의 시궁창에 코를 박고
달콤한 향수에 숨은 지독한 사연들과
방금 구워진 소문들을 염탐하고
백화점 스카이라운지에 웅크린 귄채와 일요일의 경멸,
성공하지 못한 계산과 자포자기의 살의(殺意)를 목격하는
그는 세간의 불행과 고통의 친구이며
망설이는 자들의 이웃이며
어쩔수 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후원자.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며 항구마다 애인을 만들고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 나가 삼십 분짜리 행복을 축복하며
잠 못이루는 밤이면 연인의 품에서 잠들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벌써 고독이 그리워
창문을 열어제낀다
시멘트벽에 흩어지는 빛과 바람을 모아
가난한 언어의 그물을 짠다
운이 좋아그가 성공하면
푸른 창공을 가르는 한줄기 영롱한 구름처럼
노래가 솟아오른다.
지상의 어느 보석도 그 앞에선 시들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