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자료)
선택의 가능성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를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은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선택의 가능성> 전문/비스와봐 쉼보르스카/『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한다.
화자의 좋아함 속에는 좋아할 수 없는 것까지도 좋아한다는 혼돈의 가치가 있다.
삶의 불규칙성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태어난 그 때, 이미 좋고 나쁨의 가치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를 쓰지 않고 웃음거리’가 되기보다는 ‘시를 쓰고 웃음거리가 되기’를 선택한다. ‘시’쓰는 행위가 ‘神(특정 종교가 아닌 도그마)’의 멸망을 상상하는 역설적 표현이라면 너무 과한가? 선택의 중심, 선택하고도 가장자리가 되는 순간, 그야말로 내팽개쳐진 생명의 비의, 그 모두를 사랑하려는가?
그러나, 그 내면에는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겠다는 선언이 있다. 삶의 기질은 이렇게 하루하루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생명 속에 깃들어있어 ‘운명’처럼 존재를 얽어매는 디엔에이와의 한 판 승부가 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좋다’라는 단순한 형용사 속에는 그냥 그냥의 감정적 색채가 주어지지만 ‘좋아한다’라는 말로 건너가면 그것은 움직임과 고여있음과 그렇지 아니함까지의 다양한 출렁임으로 소조(塑造)된다. 만들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동사적 반항)가 깊이 자리한다. ‘좋아한다’는 ‘선택’이라는 거대한 철학적 열정이 가득하다는 말의 우주로써 우뚝 선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시지프스처럼... ...‘좋아하다’가 되어 내 존재의 선언처럼 ‘그것’에게로 움직인다. 규정할 수 없는 것만이 규정된 폭력을 차단할 것이므로.
오늘은 이렇게 또 하루가 밝았다. 유쾌한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에서 그대는 무엇을 ‘좋아한다’라고 어깨를 기대며 웃을 것인가?
좋아한다 가 끝없이 나를 향하여 웃는다. 그녀가, 그가, 그 돌맹이가, 저 숲으로부터 건너오는 노각나무 흰 꽃잎의 향기 하나가... ...그대는 지금 저 구름의 흰 그늘을 향하여 어떻게 말할 것인가? ‘실이 꿰어진 바늘’로 무엇을 꿰맬 것인가? 엄청난 비밀 하나 초록 떡갈나무 잎으로 소생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