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두 아들 축복.
1.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애굽에서 얻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찾아갔습니다(1).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과거 루스(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 영원히 소유할 땅에 대해, 많은 민족을 약속하신 것에 대해 말해줍니다(3,4).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고 하신 이 약속은 사실상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었고(1:27), 아브라함에게도 주신 약속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즉 아담에 하셨던 약속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중단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통해, 지금 야곱을 통해, 이후 약속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야곱이 요셉에게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자기의 삶을 지금까지 지탱하도록 한 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임종에 앞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손자이지만,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합니다(5~6).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고, 요셉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장자의 몫, 곧 두 몫의 분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요셉이 야곱 가문의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4.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장면을, 야곱의 생애에 믿음으로 행한 가장 기억할만한 장면으로 소개합니다(히 11:21). 왜 이 장면이 중요할까요? 야곱의 믿음이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방법과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가 아버지의 오른손의 축복을 받도록 배치하지만, 눈이 어두운 야곱은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교차시켜 안수하고, 장자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합니다. 요셉은 이것이 못마땅해서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만 야곱은 알고 행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육신의 눈은 어둡지만, 영의 눈은 어둡지 않습니다.
6. 젊은 시절 거짓말로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자기의 손자들을 그렇게 거짓으로 축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하면서 하는 고백을 보십시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라고 하는 이 주목할 만한 인생 고백은 야곱의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15~16). 험악한 나그네 세월과 같은 오랜 기간의 인생 여정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성숙해졌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7.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교차된 축복의 손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주 우리의 순서를 뒤바꾸시는지, 우리가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축복하시는지, 우리가 가장 많은 애정을 쏟는 것들을 얼마나 가볍게 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방법과 길이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우리에게 불평과 아쉬움이 아니라, 은혜와 위로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만큼 믿음에서 성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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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요셉의 두 아들에게 언약을 전수합니다.
먼저 1절에 아버지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요셉이 문병 왔다는 사실을 안 야곱은 병상에서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해진 자신의 몸을 일으켜 온 힘을 다해 침상에 앉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봉사의 마지막 기회는 찾아옵니다.
성도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힘을 내어 침상에 앉은 야곱은 자신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하나님께 받은 언약을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임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언약을 전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자신이 한 번도 소유해 본 일이 없는 땅을 조상들로 부터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상속 받았고, 또 후손들에게도 상속해 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재 자기 땅이 아닌 곳에다가 장차 이 땅이 내 소유가 될 것이라고 소망하면서 그곳에다가 말뚝을 박고 줄을 쳐 놓고 이 땅은 아무개가 장차 소유할 땅이라고 써 붙여 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현실의 야곱은 자기가 판 우물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기근 때문에 그 땅에서 쫓겨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부귀영화에 몸 담으려 하지 않고 약속의 땅을, 그것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땅을 소망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고 그 일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진정으로 믿은 것입니다.
야곱에게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업을 소망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꽁꽁 움켜질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목숨조차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장차 주께서 주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 헌신하고 희생하며 살았지 않습니까?
우리 또한 바로 그 증인들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이 야곱의 고백을 통해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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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야곱은 그 언약의 계승자로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삼음으로써 12지파의 일원이 되리라고 선언합니다.
창세기 12: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첫 언약을 맺으실 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심으로 축복권과 저주권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야곱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그의 언약의 계승자였으므로 언약의 계승과 함께 야곱에게는 이 축복권과 저주권이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이러한 축복권과 저주권이 계승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축복하는 것도 신중해야겠지만 특히 저주하는 말에는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되도록 저주의 말보다는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축복의 말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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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8절 이하의 말씀에서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합니다.
자손을 축복하는 일은 야곱의 권한이요,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축복하려는 야곱이 눈이 어두워져서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기에 요셉은 그의 두 아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되 장자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에, 에브라임을 왼쪽에 위치하게 했습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오른쪽 또는 오른손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장자인 므낫세를 오른쪽에 앉힌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의도와는 달리 야곱은 자신의 손을 엇바꾸어 얹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었습니다.
안수는 축복과 치유, 은총과 새 능력을 받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했습니다.
15절에 야곱은 하나님을 부를 때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언약이 계승되어짐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참으로 멋진 기도입니다.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믿는 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자녀들에게도 고백되어지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언약의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전해지게 하여주옵소서.
우리도 자녀들에게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손을 바꾸어 축복하는 것을 본 요셉은 이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17절에 아버지의 손을 바꾸어 놓으려고 합니다.
이에 야곱은 자신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밝히고 아우 에브라임이 장자 므낫세보다 더 큰 족속을 이루게 될 것을 예언하고 그대로 축복합니다.
그러나 형 므낫세도 동생 못지않은 축복을 받게 함으로써 자신과 형 에서가 서로 반목했던 것과 같은 형제가 서로 질투하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9절 하단부에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는 말씀은 번역상의 문제인데 실제로 여러 민족으로 갈라진다는 뜻이 아니고 그 백성의 수효가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21절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야곱은 요셉에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하실 것임을 이야기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언약이 요셉을 통해 이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편애라기보다는 요셉이 다른 형제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온 가문을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죽음으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삭과 야곱의 족장사는 이제 그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한 알의 밀'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한 인간 야곱이 죽어 가는 대신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가 탄생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같이 믿음의 계승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아 오늘 마음껏 자녀들을 축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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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애굽에서 147세에 세상을 떠나죠. 창세기 47장을 보게 되면은 아들 요셉과 17년을 함께 보냈는데, 이 시간은 가나안에서 아들 요셉과 보낸 시간과도 같습니다.
오늘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자신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문안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3절. 과거 하나님께서 전능한 하나님으로 창세기 38장. 루스 땅에 나타나신 것을 기억하죠. 4절. 그 땅을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할 것이다.
즉, 야곱은 지금 자신의 죽음에 본질적인 관심을 두고 있질 않아요. 오직 눈에 보이진 않지만 애굽에서 번성케 될 자신의 후손들과 약속에만 초점을 두고 있죠.
아시다시피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과 손길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야곱이 마주하고 있는 장면! 이 언약에는 특징이 있어요.
5절. 니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래요! 요셉의 아들들을 자신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어요. 이는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은 고대 근동 지역의 전통이었어요.
예를 들어,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오벳을 입양하죠. 그리고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자기 딸처럼 양육하죠. 즉, 혈통을 넘은 약속으로 하나님의 기업은 상속될 것이다!의 숨은 뜻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13절. 야곱이 오른손과 왼손의 차이를 두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해요. 이 장면의 이해를 위해 먼저 성서가 이야기하는 장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이었죠. 하지만 둘째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받아요. 에서와 야곱도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던 에서는 장자의 복에서 제외됩니다. 이삭은, 에서가 아닌 밧단아람으로 떠나는 야곱을 축복하죠.
또한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난 베레스가 훗날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는 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르우벤이 장자였죠. 하지만 정작 복을 받은 아들은 동생 유다와 요셉이었어요.
마찬가지로, 오늘 요셉의 두 아들 중 야곱이 축복할 때에도 둘째인 에브라임을 축복하죠.
즉 성서의 장자는 특권과 복의 대상이지만 실제적으로 성서의 장자들은 그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장자권은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히려 더 작은 복을 받아요. 더 못한 저주를 받습니다. 한마디로, 출생 순서에 의해 정해진 자가 장자가 아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장자권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는 오직 그분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이 섭리와 약속을 받아들인 사건이 바로 오늘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장면인 것이죠. 장자에게 축복하질 않고 둘째 에브라임에게 손을 어긋나게 축복해요. 이에 히브리서 기자가 11장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했다!라고 말해요~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곱의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바로 얍복 강가에 있었던 사건의 재현입니다. 자신의 방법과 술수로 밀어붙이다가 하나님과 싸움을 벌였던 나루터! 그 사건으로 인해 야곱은 평생에 지팡이를 의지하며 걷게 돼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했다!라는 표현을 야곱이 둘째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했을 때 써버립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야곱이 육신의 눈꺼풀을 벗어버렸다는 것이죠. 혈통과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 칠 않았어요.
오직 언약에 근거한 행위! 야곱의 긴 세월 동안, 오랜 고난과 아픔 그리고 실수를 통해 결국은 언약의 자손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딸 딤나의 성추행 사건 때도 입 다물었던 그가, 이제는 언약에 기대어 자녀들을 대하는 자로 마지막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19절.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후손은 아직 없고, 땅도 분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이미 준 것으로 표현하죠. 즉 이 나라는, 너희들의 계획과 후손들의 능력으로 세워지고 스러지는 것이 아닌, 오직 당신의 언약으로만 세워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보지 못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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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은 애굽에서 얻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연로하여 병든 야곱을 찾아왔다(1).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과거 루스(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 영원히 소유할 땅과 많은 민족을 약속하신 것을 말해준다(3,4).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는 이 약속은 사실상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었고(1:27)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었다. 그리고 야곱의 삶뿐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이루어가심을 보여준다. 야곱이 요셉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 지탱하도록 한 힘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2. 임종에 앞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들로 입적시킨다(5~6).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고, 요셉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 배의 몫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그가 사랑했던 아내였고, 요셉의 어머니였던 라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7). 그녀는 길에서 죽음으로써 레아처럼 가족의 묘에 묻히지는 못했지만, 야곱은 라헬의 장자인 요셉을 두 배로 축복함으로써 그녀를 기념하고 위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3.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장면을 야곱의 생애에 믿음으로 행한 가장 기억할만한 장면으로 소개한다(히 11:21). 왜 이 장면이 중요한가? 야곱의 믿음이 성숙해져서 그가 이제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그 방법에 익숙해져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축복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가 아버지의 오른 손의 축복을 받도록 배치하지만, 눈이 어두운 야곱은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교차시켜 안수하고 장자 므낫세에게 왼 손을 얹어 축복하였다. 요셉은 이것이 못마땅해서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만 야곱은 알고 행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젊은 시절, 거짓말로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을 알고 자기의 손자들을 그렇게 거짓으로 축복할 필요가 없었다. 또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하면서 하는 고백을 보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라고 하는 이 주목할만한 말은 야곱의 믿음을 잘 보여준다(15~16). 인생이라는 오랜 기간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성숙해졌고 마침내 야곱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4.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교차된 축복의 손을 자주 본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주 우리의 순서를 뒤바꾸시는지, 우리가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축복하시는지, 우리가 가장 많은 애정을 쏟는 것들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시는지 모른다. 야곱은 자기가 추구했기 때문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번창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숙해진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의 길과 친숙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며, 확실한 기대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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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21절은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야곱의 믿음의 행위를 말할 때 그의 노년에 있었던 두 가지 일을 언급하는데요, 그 내용이 창세기 47장과 48장에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믿음을 보고 배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에 장사하라고 말하고 그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요셉의 맹세를 들은 후에 야곱은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였습니다”(창 47:31). 히브리서 저자는 야곱이 ‘믿음으로’ 경배하였다고 말하지요. 야곱이 애굽 땅에서 17년을 살며, 하나님께서 복주셔서 번성하게 하셨을 때에도 여전히 약속의 땅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살았던 믿음이 그의 예배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결과입니다.
48장 1절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야곱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서 요셉에게 말합니다.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로 삼아 야곱의 아들이 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마침 요셉이 두 아들을 데려왔기에,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런데 므낫세가 장자이고 에브라임이 차자인데,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어 장자의 복을 줍니다. 요셉이 므낫세가 장자이니 므낫세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해 달라며 손을 바꿔보려 하지만 야곱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므낫세도 한 족속이 될 것이지만, 에브라임이 더 큰 자가 되고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은 것은 요셉에게 유산의 두 몫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2절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다”고 말합니다. 두 몫의 축복은 장자에게 주는 복인데, 요셉에게 그 복을 준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것을 그의 믿음의 행동이라 말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야곱의 믿음은 무엇인가요? 요셉이 두 몫의 복을 받고, 동생인 에브라임이 장자의 복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또렷한 정신으로 확신을 갖고 이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야곱이 믿음으로 이 일을 행했다고 말하지요. 이 상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격과 조건과 다르게 야곱이 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되, 그 복은 사람이 생각하는 자격이나 조건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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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절.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어떤 이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버지가 아프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다. 2 그리고 어떤 이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란 이전에 있어왔던 것들로부터 뒤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요셉에게 말했다”란 탁월한 지각을 의미한다. “보라 네 아버지가 아프다”란 거듭남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왔다”란 교회 속의 의지력과 교회 속의 지력(지성)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란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너에게 오고 있다”란 내적 부분의 현존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란 영적 선을 통하여 있는 새로운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침상에 앉았다”란 영적 선이 자연 평면 쪽으로 돌리어졌다를 의미한다.
3-7절.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4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5 그리고 지금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집트의 땅에서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 그들은 나의 것이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들은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은 너의 것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7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있는데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 그 길에서, 에브랏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베들레헴과 같은 곳,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매장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란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란 신성이 이전의 상태에서 자연 평면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란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란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생기 있어짐을 의미한다.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란 무한하게 증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란 이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지금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이란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이란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거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기 전을 의미한다. “그들은 나의 것이다”란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란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을 의미한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그들은 나의 것이다”이란 그들은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일 것이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이란 그 후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너의 것이다”란 그것들은 내적 부분에 있는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란 그들은 교회 속의 진리들과 선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들의 품질 속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이란 지식들의 상태로부터를 의미한다.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죽었다”란 내면의 진리에 대한 이전의 애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 길에서,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란 중간인 것을 의미한다. “에브랏으로 가는….”이란 이전의 상태 안에 있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서 매장했다” 란 이 상태를 거절함을 의미한다. “베들레헴과 같은 곳”이란 그것의 장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착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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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9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들은 나의 아들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부디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들을 보았다”란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들은 누구이냐?”란 그리고 그들의 근원을 의미하고 그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란 내부로부터의 대답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신 나의 아들들입니다”란 그들은 자연 평면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란 그들은 영적 선에 동의해야함을 의미한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리라”란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을 의미한다.
10-14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고령인 탓에 무거워졌다.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을 포옹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13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14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졌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내밀었다,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무거워졌다”란 그의 희미한 지각을 의미한다. “그의 고령인 탓에”란 표현함의 끝에서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는 볼 수 없었다”란 용의 주도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란 현존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했다”란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을 포옹했다”란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란 내적 부분으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나는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란 그의 사랑이 유입되리라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란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란 영적 선의 부분에 있는 사랑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있는 자연적 평면의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란 그들이 부끄럽게 여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란 (중요성에서) 두 번째 장소(위치)에 있는 지력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란 (중요성에서) 첫 번째 장소(위치)에 의지력의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란 근접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란 그는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였다”란 비록 그것이 두 번째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란 그는 선이 둘째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놓았다”란 그러므로 질서에 따른게 아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란 참으로 선이 앞선 위치에 있어 왔기에를 의미한다.
15, 16절.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나를 먹이신 하느님, 16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란 지력 속의 진리와 의지력 속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예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이란 내적 선과 내적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나를 먹이신 하느님”이란 신성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의 선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를 의미한다.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란 계속적으로를 의미한다.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를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이 있는다를 의미한다. “이 소년들을 축복하소서”란 그들이 선과 진리를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일컬어지게 하소서”란 그들 안에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의 품질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란 내적인 선과 진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란 가장 안쪽으로부터 확장됨을 의미한다.
17-2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붙잡았다. 18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장자입니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19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20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해서,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란 그는 진리가 첫 번째의 장소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란 불쾌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란 그의 희미한 지각의 능력 안으로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란 잘못함으로부터 그를 돌아서게 하려고…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 출생입니다”란 선이 우위를 가진다는 것에 관하여 지각할 수 있게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란 그리하여 선이 첫째 장소에 있어야 하리라를 의미한다.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란 동의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란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란 선으로부터의 진리, 즉 천적 (왕국의) 인간도 증가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란 진리로부터의 선은 더 증가함을 받을 것이고, 영적 (왕국의) 인간을 이루리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란 신앙 속의 진리가 세력을 떨치리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했다”란 예언과 영원하게 섭리됨을 의미한다.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란 그 자신인 영적 부분이 지력의 진리 안에 그리고 의지력의 선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란 그는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고 간주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적 (왕국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21, 22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22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 몫은 내가 내 검과 내 활로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란 영적 선이 새로운 삶에 관하여, 그리고 표현함을 끝냄에 관하여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란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란 고대 교회와 태고 교회의 상태에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란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거기서 더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이란 악을 제어하는 승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내 검으로”란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내 활로”란 교리로부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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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보면 충격적인 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손자 두 명을 항렬을 높여서 아들로 양자 삼는 일입니다. 야곱은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지금부터 너희는 손자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조카들이 삼촌들에게 형이라 부르라고 합니다. 이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아버지 항렬에 올라서 열두 지파가 됩니다.
또 하나는 동생과 형을 바꾸는 일입니다. 야곱은 동생인 에브라임이 형이 되고 형인 므낫세가 동생이 되게 합니다. 므낫세는 형으로 태어났지만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형이라고 불러야합니다. 이것도 에브라임이 장자가 되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묘한 일을 통하여 복음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복음 역사에서도 이런 기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 시간 이런 기묘한 복음 역사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임종이 가까이 왔음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에게 갔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자녀들이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축복받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사실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권세적으로 애굽의 총리로서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이 아버지 야곱의 축복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요셉은 무슨 복받기를 원했을까요?
요셉은 야곱에게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믿는 하나님을 두 아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찾아온 것 같이 이전에 야곱도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고자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죽을 날이 가까워오자 이삭은 형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형과 같은 털 사람으로 변장하고 음식을 가지고 가서 형 에서 대신에 복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방향에 순종하여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자신의 목자에게 축복 받는 경우도 나옵니다. 엘리야는 승천을 앞두고 엘리사를 떼어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자신의 목자 엘리야를 따라다닙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영감이 갑절이나 있는 축복받기를 바랐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불말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나 믿음의 선배로부터 축복을 받아야합니다. 그분들이 믿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계승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비에프 선배들에게서 좋은 믿음의 유산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믿음, 평신도를 통한 캠퍼스 개척 제자 양성, 세계선교는 아주 좋은 믿음의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잘 계승해야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축복하다)
2-4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요셉이 아들들과 함께 자기에게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힘을 내어서 일어나 요셉에게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자 형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 칼을 갈았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외삼촌 집으로 보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주시고 많은 자손을 주시고 이 땅을 주시도록 축복하였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서 타향 루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습니다. 야곱은 앞으로 갈 길은 막막하였습니다. 가다가 강도를 만날 지, 짐승을 만날 지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루스에서 나타나 야곱을 축복하여주셨습니다. 그에게 이 땅을 주시며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그가 외갓집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인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도 그가 루스 곧 벧엘에서 예배드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때도 야곱을 보호하시고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99세가 되어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그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어서 잃을 수도 있는 절망적인 때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는 베냐민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전능하신 하나님이 요셉을 만나게 도우시고 베냐민과 시므온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요셉을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만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들 이삭에게 주었고 이삭은 자신이 만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들 야곱에게 주었으며 야곱은 자신이 만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들 요셉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샤다이’입니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샤다이는 대지, 젖가슴, 자궁이라는 어원을 가진 말로서 풍부하게 공급하는 능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전능하듯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능하십니다. 대지가 풀이나 나무에게 전능하여 생명이 자라게 하듯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마스터 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적인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돈이 필요할 때 돈을 주시고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주시며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분이십니다. 가장 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경제 현실은 어렵습니다. 우리의 캠퍼스 제자양성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힘주시고 함께 하실 줄을 믿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야곱은 이곳에서 역사를 바꾸어 놓는 엄청난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합니다. 손자를 아들로 양자 삼겠다는 말입니다. 이를 통하여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열두 지파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손자로서 아들의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를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성서학자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장자의 명분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장자는 차자의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 몫의 축복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장자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유일하게 야곱만이 이 일을 하였습니다. 보통 양자는 자식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열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명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서 열세 명을 아들로 삼았습니다. 욕심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열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을 다시 한 아들을 양자로 삼았을까요? 나중에 하나님은 열두 아들 중에 레위 지파를 하나님만 섬기는 지파로 드려서 구별하십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한 아들을 더 들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런 유사한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하나님은 가룟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열두 제자로 택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 중에 부족한 자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택하여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십니다. 자격 없는 자를 택하여 자격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는 성경과 기독교사에 흐르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열두 사도를 세우신 후에도 몇 명의 사도를 더 세우십니다. 사도행전 13,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일곱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삼십 번 이상 자신을 사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본래 사도의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도로 양자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격 없는 자를 하나님은 사도로 삼으십니다.
이런 ‘양자의 원리’는 성경에 참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면성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핏줄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무 것도 하나님의 자녀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절대적인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격 없는 자를 목자로 삼으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사실 저는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이제사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평신도입니다.(2012년도에 목사 안수 받았습니다) 나는 아무 자격 없는 자인데 목자로 세움받았습니다. 우리 평신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사실은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격 없는 평신도들을 목자로 삼으십니다. 베드로는 사방에 흩어진 평신도들에게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의 혈통에서 태어난 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흩어진 성도들은 제사장의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의 로 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평신도를 목자로 양자 시오.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는 죽었는데 그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야곱은 요셉의 어머니이며 자신의 사랑하는 라헬의 죽음을 회상합니다. 라헬은 죽어서 가나안 땅 에브랏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곳은 다윗의 고향이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입니다. 라헬은 자식이 없이 살아서 슬퍼하였습니다. 언니 레아는 여섯 명의 아들을 낳고 시종들도 다 두 명씩의 아들을 낳았지만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라헬의 믿음을 연단시키신 후에 늦게 요셉을 주셨습니다. 그 후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라헬은 죽으며 베노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자식의 축복을 보지도 못하고 슬프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노니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베냐민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베냐민을 통하여 라헬의 슬픔을 바꾸어 기쁨이 되게 하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사울왕이 태어나고 사도 바울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그녀를 강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요셉 앞에서 라헬을 회상하며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라헬의 슬픔을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베들레헴 사람의 슬픔과 같다고 말합니다. 헤롯왕은 베들레헴에서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아들을 잃은 베들레헴에 부모들은 슬퍼 울었습니다. 마태는 이들의 슬픔이 자식이 없었던 라헬의 슬픔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낳다가 죽은 라헬을 베냐민과 요셉을 통해서 위로 하셨듯이 자식을 잃은 베들레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야곱은 요셉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누구냐고 묻자 요셉은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요셉의 말에는 항상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그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두 아들을 축복해주고자 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애굽의 고난을 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은 형들을 용서하고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에브리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형들을 용서한 요셉을 애굽에서 창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용서해야 창성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야곱에게로 이끄니 야곱은 두 아들과 입맞추고 그들을 안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죽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아들까지 보니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요셉은
13,14절을 보십시오.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요셉은 야곱의 오른 손으로 첫째인 므낫세를 축복하게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출생으로부터 자신을 기르신 하나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 아이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으로 칭하기를 원하며 번성하도록 축복하였습니다. 자신을 기르신 하나님은 목자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건지신 하나님은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에 처음으로 목자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나옵니다. 야곱은 조상이 만난 하나님과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재산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을 물려주어야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물려줄 때 그들은 자립적이 됩니다. 나를 키우신 목자 하나님, 환난에서 건지신 구원자 하나님이 그들도 키우시고 건지실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경외하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요셉은 아버지가 동생인 에브라임을 형인 므낫세보다 앞세워서 축복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오른 손을 므낫세에게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므낫세가 장자이니 오른 손을 므낫세에게 얹으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나도 에브라임이 장자인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므낫세도 축복하지만 아우인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도 참으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역사가 바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 축복을 통하여 에브라임이 형이 되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에브라임에게서 많은 왕들이 나왔습니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열두 아들로 포함시키는 파격적인 일을 하더니 이제는 동생과 형을 바꾸는 일을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역전의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장자가 앞서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경에서도 장자를 축복하고 장자에게 두 배의 유산을 주도록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전통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첫째가 자신의 축복의 가치를 모르고 안일해지거나 세상적이
될 때입니다.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는 당연히 형이어서 장자의 축복이 그에게로 가야하지만 그는 영적인 가치를 몰랐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고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12아들이 있습니다. 열두 아들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모와 잠을 자서 장자의 축복을 빼았겼습니다. 둘째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도 혈기를 부려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은 아들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옮겨서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축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축복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됩니다. 이는 복음의 특징을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역전의 역사요 뒤바뀌기도 하는 역사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런 역전의 원리가 나타납니다. 태종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입니다. 이들은 차남들이 쟁취하여 얻은 것도 있지만 첫째가 축복을 계승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되었다고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축복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다가 나중에는 빼앗깁니다. 우리는 차자로 태어났다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장자의 축복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아야합니다. 그 주권을 믿고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장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지 않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이방 나라에게서 옮기셨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음 진리를 수호하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첫사랑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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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나중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축복받은 표상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축복할 때에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와 같을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요셉은 야곱을 통하여 두 배의 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자녀들이 삼촌들의 항렬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월반을 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상태를 운명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월반을 해서라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세계선교를 하였을 때 먼저된 베드로보다 세계선교의 주역으로 쓰셨습니다. 천안은 늦게 출발하엿습니다. 다른 유비에프보다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좀 더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안 역사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늦은 나이에 늦게 신앙을 시작하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늦게 신앙을 시작한 이들을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같이 먼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야곱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후손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지만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하여 세겜 땅을 더 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현재 깨어서 믿음의 투쟁을 하는 가운데 요셉과 같이 두 배의 축복을 받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먼저 되었다고 안일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깨어서 영적투쟁을 하는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지속적으로 받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8장 강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야곱
말씀 창세기 48장 1-창세기 48장 33
요절 창세기 48장 5절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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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입양 후 자신의 아들의 대열로 승격시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요셉에게 유언적 당부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 공동체로 삼아 전달 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의 축복하는 과정 중에 오늘의 본문은 야곱이 행했던 독특한 행동과 요셉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갑니다.
예측 밖의 하나님의 은혜(8-19)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이미 5절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로 삼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야곱은 마치 이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년이 된 야곱이 눈이 어두워 자기 손자들을 잘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과거 아버지 이삭이 자신과 형 에서를 구분하지 못한 채 복을 빈 것과 같은 일을 범하지 않기 위한 노파심에서 이 말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10)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9절에서는 각기 다른 세 주체가 등장하는 데 요셉의 두 아들과 요셉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중요한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애굽에서 낳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겠다는 요셉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은 야곱의 눈이 어두운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어두워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일차적으로 ‘무겁다’,‘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로 유추해 볼 때 야곱의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기능이 많이 저하되었다는 의미가 더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한편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본 단락에서 눈‘은 중요한 해석적 도구가 됩니다. 육신의 측면으로 볼 때 야곱의 눈은 어두웠지만, 그의 영적 눈은 밝아 선택과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감탄사 ‘봐라’라는 단어가 11절에 등장 합니다. 이 단어를 넣어 직역을 해보면,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봐라!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정말 기대조차 못한 일이 이루어진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는 사실이 원어 성경에서 ‘보게 하셨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를 통해 좀 더 잘 드러납니다. 즉, 야곱은 스스로 어떤 일도 상상하거나 기대할 수 없었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의 자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를 베푸셨음을 겸허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의 생애 가운데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역사가 있는지 돌이켜 보기를 소원합니다.
(12-14)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2절에서 야곱은 유셉의 두 아들을 안고 있다가 이제는 이들을 축복하기 위해 자신의 무릎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도록 하여습니다. 13절에서 요셉은 고대 근동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오른손을 권위와 탁월한 능력, 은혜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장자 므낫세를 그의 아버지의 오른쪽 손으로 축복받도록 시도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야곱은 팔을 엇바꾸어 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엇바꾸어 얹었더라’라고 해석된 히브리어는 ‘신중하다’,‘지혜롭다’의 뜻을 가진 어원을 가진 단어인데, 이는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얹었다는 행위를 강조할 뿐만이 아니라 야곱이 이와 같은 결정을 하기까지 신중하게 생각하였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야곱의 행동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 장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히 왜 야곱이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여진 야곱의 돌발 행동이 초자연적인 충동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무심코 옳은 일을 한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들은 예측하기 힘든 요소입니다. 따라서 므낫세는 창세기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지나간 장자들의 대열, 즉 가인, 이스마엘, 에서, 르우벤과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직접적으로 창세기 21장 12절에 이삭이 ‘장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에서와 르우벤의 경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장자의 지위를 상실했음을 우리는 지난 창세기의 여정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므낫세는 자기 지위를 잃을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야곱은 에브라임을 높이라는 어떤 계시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야곱은 그런 결정을 하였습니다.
(15-16)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은 이제 두 손자에게 축복하며 선언을 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15절 초반의 부분에서 야곱은 삼대를 포함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첫째, 야곱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섬겼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이 삼대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과 조상들이 그 하나님 앞에서 실행한 순종을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말을 시작합니다. 15절에 ‘기르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목자’라고 표현해도 적절히 본문과 부합됩니다. 즉, 본문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이 섬겼고, 지금까지 야곱을 이끄신 하나님의 모습을 마치 양과 목자의 관계처럼 시각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을 양치는 사람으로 살아온 야곱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언급한 것은 이 비유보다 하나님과 그의 인생을 더욱 잘 묘사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좋은 목자가 되신다고 고백한 야곱의 기도는 그 자체가 가장 진실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16절에서 야곱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말한 ‘모든 환난’이라는 ‘환난’은 어려움이란 뜻만이 아니라 ‘악한 상태’,‘사악’이라고 하는 모든 부정적인 상태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환난’은 ‘모든 사악함’ ‘모든 부족함’이라는 단어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말한 ‘모든 사악함’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질병과 가난과 약함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분으로 확대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여호와의 사자께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호와의 보냄을 받은 자’ 또는 ‘여호와의 전달자’란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천사라고 표현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자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하였던 하나님의 사자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을 때 만난 존재입니다. 창세기 32장 30절에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하나님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가 만난 분이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던 야곱은 자신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과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는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신이 언약의 후계자인 것과 같이 이들도 언약의 후계자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해 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이 줄어드는 이 시대에 야곱의 복을 비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17-18)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요셉이 자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광경을 보고 그의 생각과 다르자 그가 ‘기뻐하지 아니하여’라고 표현한 것을 17절은 기록합니다. 이 표현에 사용된 히브리어는‘근심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야곱이 엇바꾸어 그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눈에 근심이 가득했고, 심히 못마땅한 것으로 17절은 표현합니다. 물론, 요셉의 입장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의 더 큰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묘하신 섭리를 우리의 수준과 시각에서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18절에서 요셉은 아주 강한 어조로 야곱이 하려는 축복에 대해서 금지하며 바꾸려는 개입을 시도합니다.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야곱은 그런 요셉의 반응에 한 마디로 즉각 거절을 합니다.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장자권을 주는 것이 전혀 이상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행동이 즉흥적이거나, 노쇠한 연령 때문에 생기는 착각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지만, 야곱은 본 절에서 자신의 행동이 전혀 이상이 없음을 강력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야곱의 예언은 출애굽 후 첫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다른 지파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짐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복은 북쪽 이스라엘의 중요한 지파가 되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때 야곱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을 이어 받을 하나님의 은혜(20-22)
(20-22)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20절의 의미는 이스라엘에 사는 누구라도 누군가를 위하여 복을 빌고 번성하도록 하고자 한다면,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한 것 같이 하도록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그 후 21절에는 야곱이 본인의 죽음에 대해서 요셉에게 언급했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글 성경에서는 생략된 히브리어 ‘보라’ 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입니다. ‘나는 죽으나’ 앞에 ‘보라’ 라는 히브리어를 넣어 해석해야 왜 야곱이 자신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순차적으로 해석해보면 이와 같습니다. ‘주목하여 보라,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언제나 택한 자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설명하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담대하게 자녀들을 축복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결론적으로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보다 땅을 더 줍니다. 야곱은 세겜을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들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때까지 창세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야곱은 이곳을 쳐서 정복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이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이곳에 돈을 지불하고 땅을 산적은 있었지만, 칼과 활로 빼앗은 적은 없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22절을 해석해 볼 때, 창세기 34장에서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여 시므온과 레위가 행한 만행사건을 언급했다고 해석합니다. 야곱 본인의 행동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칼과 창으로 그 땅을 차지했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다른 의견으로는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일이지만, 원치 않게 싸움에 휘말려서 땅을 빼앗게 되었고 이것은 처음으로 전쟁을 통해 빼앗은 첫 열매이자 전리품이었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에게 주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의견이 맞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야곱은 이 땅을 요셉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기에 앞서 그의 장자권을 상속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야곱은 요셉의 차자인 에브라임을 장자인 므낫세보다 앞세우고 더 많은 복을 빌어 주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로서 그의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장자였던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만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할 때가 돌이켜보면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그 부분까지이지,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도록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없다면,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세월을 허비하며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요셉이 아버지의 손을 밀쳐 주님의 뜻에 따라 흘러갈 복의 흐름을 바꾸기 위하여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아버지의 손을 떼어 자신이 생각한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려했었던 그 무심코 했던 행동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계산과 생각을 잠시 주님께 내려놓고 언제나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눈을 들어 바라보며 따라가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주님의 뜻이 실현 되는 복된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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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임박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신을 애굽 땅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 조상들의 묘지에 묻어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이 있은 후 일어난 일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지인을 통해 아버지 야곱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요셉은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을 찾아갑니다. 참고로 요셉의 아내였던 아스낫은 애굽의 제사장이었던 보디베라의 딸이었습니다(창41:50). 고로 요셉의 두 아들은 혈통적으로 순수 이스라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두 아들을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을 데려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2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아들이 온 것을 알게 된 야곱은 기력을 다하여 침상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말합니다. 본문 3절에서 4절입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죽음을 목전에 앞 둔 야곱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요셉에게 이야기합니다.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하란으로 가던 중 나타나셨던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언급합니다. 1) 자신을 통해 많은 자손이 생기며 2) 그들을 통해 민족이 형성되며 3) 가나안 땅을 영원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야곱은 다시 한 번 요셉에게 이집트에 정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킵니다.
그리고 난 후 야곱은 다시 말은 이어갑니다. 5절에서 6절입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내 것, 곧 자신의 아들들로 삼겠다고 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자신의 아들들인 것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자신의 아들들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요셉의 형제들과 동일하게 법적인 권리도 부여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훗날 야곱의 약속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가나안 땅을 동등하게 분배받게 됩니다.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야곱의 시야에 낯선 사람들이 어른거립니다. 8절에서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앞을 잘 볼 수 없었던 야곱은 앞에 있던 손자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아들들임을 설명하자 야곱은 그들을 축복하고 싶다며 앞으로 오게 합니다. 이후 입을 맞추고 끌어안습니다. 아울러 12절에 의하면 야곱이 그들을 자신의 무릎 사이에 서게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행동은 이방인의 피가 섞여있던 손자들을 야곱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일종의 입양의식이었습니다. 이후 요셉이 두 아들을 아버지 야곱의 무릎 사이에서 물러나게 한 후 땅에 엎드려 절하는데 그것은 입양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일종의 예식이었습니다.
13절에서 14절입니다.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이제 요셉은 진정한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정받게 된 두 아들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둘째아들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편에 서게 하고 맏아들 므낫세를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손을 엇갈려 오른 손을 둘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 손을 맏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얹습니다.
참고로 오른 손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권위와 능력, 축복과 은혜’를 상징하는 손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야곱의 오른편에 서게 해서 오른 손으로 축복 받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오히려 손을 엇갈려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합니다. 본문에서 ‘엇바꾸다’라고 쓰인 히브리어 단어 ‘식켈’은 ‘신중하다’, ‘지혜롭다’란 뜻을 지닌 ‘사칼’의 능동형으로 야곱이 팔을 ‘신중하게 얹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곧 야곱이 돌발적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연약해 집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육체는 그 기능을 상실해 갑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야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별력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육신과 육체의 기능 또한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믿음과 하나님께 시선을 잃지 않고 매일을 살아간다면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육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뛰어넘는 영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에 걸 맞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쓰임 받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5절에서 16절입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축복, 곧 두 손자들에 대한 축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야곱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자신을 출생에서부터 길러주신 분이요,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신 분이셨습니다. 비록 꾀와 속임수로 자신이 유리한 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던 야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길러주시고 이끌어 주셨으며 모든 환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체험과 믿음이 야곱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지닌 그였기에 그 하나님을 손자들에게 이야기 하고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간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만난 하나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의 고백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무르다가 ‘나의 하나님’만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생을 개척해 나가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다루어주시며 이끌어주고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를 통해 야곱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이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손자들에게 그 하나님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지식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실 때에 비로소 온전해 집니다. 하나님의 결코 짧지 않으신 손길을 경험함으로 믿음은 더욱 굳건해 지고 단단해집니다. 그 발판위에서 ‘하나님’을 전하며 후손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험악한 세월’이 우리 인생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체험하며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고, 더 나아가 ‘내 자손의 하나님’으로 후손들에게 간증하며 하나님께 자손들을 의탁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제 야곱이 요셉에게 이르는 마지막 말입니다. 2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보라!’라는 의미를 지닌 감탄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주의를 집중하게 위해 야곱이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에 따라 야곱이 한 말을 재해석해 본다면 ‘보아라 요셉아, 나는 곧 죽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야곱을 엄습해 온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자손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반드시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믿었기에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펼쳐지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저희 모두에게 새 날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새로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약해져만 갑니다. 더 나아가 오늘이라는 시간은 오히려 우리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면 결코 짧지 않으신 하나님의 손길에 힘입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동함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에 나를 만나 주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더욱 확고하게 인식하며 후손들에게 그 하나님을 전하며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손들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거룩한 삶을 이어가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새로운 한 날을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시선을 강화시켜주십시오.
그를 통해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동함으로
오늘도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는 은총을 입게 해 주십시오
그런 영적인 체험들이 쌓이매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신뢰의 지경이 넓어지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후손들에게 간증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그 후손들을 축복하는
주님의 도구로 저희를 . 사용하여 주십시오
늘 동행해 주시며 저희를 복의 통로로 사용해 주시는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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