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양의 현대 아동문학 (1) 한국의 현대- 아동문학 최남선의 창가 (5월 28일 교재)|
2. 동양의 현대 아동문학
(1) 한국의 현대 아동문학
최남선(崔南善)
직업 : 시인
출생일 : 1890년 3월 8일
사망일 : 1957년 10월 10일
학력 : 경성학당 - 도쿄 부립중학 - 와세다대학교
출생지: 서울
경력사항
1908년 종합 월간지 [소년] 창간
1914년 종합 월간지 [청춘] 창간
1919년 3·1 운동시 "독립 선언서" 기초, 이후 체포
1922년 동명사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 발행
1924년 "시대일보" 창간, 사장 취임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으로 위원 역임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 고문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
1943년 도쿄에서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 권고 강연
1949년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병으로 보석 출감
1950년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
1957년 뇌일혈로 사망
1958년 우이동에 기념비 건립
1910년 최남선이 설립한 고전 간행기관의 이름은 무엇이죠?
광문회 입니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라고도 한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정치적으로 다난했던 시기에 학자들의 국민계몽을 위한 활동이 컸다. 그들은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국사연구도 민족적인 기개(氣槪)와 자존심을 앙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광문회에서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고전을 간행·보급시키는 한편,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기하며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 : 호는 육당(六堂), 공륙(公六), 대몽최(大夢崔) 등. 서울에서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지리역사과 중퇴. 개화기에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로서 1908년 우리 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함.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창작했으며, 시조부흥운동을 지도하여 최초의 시조 사화집《백팔번뇌》를 출판함. 독립운동가로서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책임으로 34개월 간 투옥되기도 함. 초기에는 전통적인 운율에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신체시를 제작, 계몽의식을 내용으로 담아냈으며, 후기에는 시조에 관심을 보여 시조부흥운동을 위해<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1926)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함. 고전의 정리와 국사(國史)연구에도 몰두하여 《조선역사》와 《고사통》등의 사학서와 다수의 수필을 남기기도 함.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최남선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조그만 산 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육당 최남선, 그의 애국과 변절
텨…띵썩, 텨…띵썩, 텨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태산 갓흔 놉은 뫼, 댑태 갓흔 바위삥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텨…띵썩, 텨…띵썩, 텨 투르릉, 콱. (제1연)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도도한 서세동점, 제국주의 침략의 암운 속에서 새 세기의 새벽을 맞이하는 소년의 두려움 없는 힘찬 기백을 요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본인이 이번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중학교 때 배웠던 이 시가 주었던 강한 감흥 때문이었다. 새로운 세상, 신문물을 무작정 회피하고 숨어버리려 하기보다는 의연하고도 과감하게 수용하기를 주장하는 작가의 선구적 시대의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더욱이 그는 기미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이고 뛰어난 시조시인이자 일제치하의 애국적 지식인으로 각인되어있던 터였다. 과연 그는 그 격변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헤쳐나갔으며 그러는 와중에서 어떠한 또 다른 선구적 업적들을 남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남선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면서 본인은 그가 철저한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아연 질색할 수 밖에 없었다. 이광수, 홍난파, 김활란 등의 친일행위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이 친일파, 그것도 대표적인 지식인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 뿐더러 깊은 배신감 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분명한 그의 친일행적을 대부분의 서적과 관련단체에서 애써 아무것도 아닌 일로 무마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본인의 짧은 조사에 따르더라도 그의 행적은 친일시비 정도가 아니라 매우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양태를 띄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남선은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우선 그의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살펴보고, 그가 어떠한 과정으로 민족해방 지도자에서 반역자의 길로 돌아섰는지, 그리고 오늘날 새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어떠한 의미로 남아있는지 조망해보기로 하겠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그는 1890년 4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고, 1904년에는 황실유학생으로 도일(渡日), 동경(東京) 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이광수 등 의 유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러시아의 문학작품을 탐독하였다. 유학생 회보인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면서 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길에 그는 우리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운동을 목적으로 인쇄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신문관(新文館)』을 설립, 인쇄와 출판을 겸했다. 다음해 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고문헌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11) 최남선은 광문회 활동중 『산경표』를 발견했다.)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913년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면서 유명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公約三章)의 글귀를 지어 일약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이 날리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투옥되었다가 가출옥하게 되었다.22) 그의 수감기간에 대해서 2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으나 그 다음해에 가출옥되었다거나, 2년 10개월간 투옥되었다(친일파 100인 100문), 2년 6개월 동안 수감되었다(친일파 99인)는 등 그 견해가 분분하다.)
1922년 『신문관(新文館)』을 폐지하고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동지(同誌) 1호∼11호에 「조선민시론(朝鮮民是論)」을, 25년에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하고,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제대에서 심전(心田) 개발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33) 중추원 참의는 조선총독부 최고의 영예직으로 조선사 편수위원으로서의 그의 공로에 대한 일제의 포상이었다.) 1938년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39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 괴뢰국에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43년 이광수 등과 함께 동경으로 건너가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6 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사망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남선은 우리나라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이며 개화기의 대표적인 시조작가이자 근대 사학계의 거성이었다. 그는 많은 잡지를 발간하였고 이를 통해 자주독립과 신교육 등을 주창, 계몽하였고 시문체(時文體)를 사용할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주시경에게 한글 어휘를 수집하게 하였다. 1903년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의 한반도는 토끼모양이다라는 주장에 최남선은 『소년』지 창간호를 통해 한반도는 마치 맹호가 발을 들고 동아대륙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듯 생기있게 할쿼며 달려드는 모양으로 한반도의 진취적이면서도 무한한 팽창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으며 평이한 역사책을 써서 국사의 대중화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로서 신체시의 출발을 이룬 것은 물론 『백팔번뇌(百八煩惱)』라는 시조집으로 우리 시조문학의 중흥을 이루었다. 『심춘순례』, 『금강예찬』 등 국토예찬을 위한 새로운 스타일의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가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옥고를 치루고는 가출옥이라는 의심스러운 절차에 의해 풀려나면서 그는 반역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출옥 후 그가 세운 『동명사(東明社)』라는 출판사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발행되었으며, 독립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치를 주장하면서 일제와 타협을 시작했다. 이어 그는 조선총독부의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되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하였다. 그를 민족의 양심으로 알고 있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이 왜놈에게 붙다니 이럴 수 있는가라며 한결같이 그의 변절을 개탄했다고 한다.
그는 결정적으로 편수위원회 직을 맡으면서부터 노골적인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라! 청년 학도여」44) 1943년 11월 14일부터 20일까지 이광수와 함께 참석한 일본 동경 메이지(明治)대학 반도출신 출정학도 궐기대회에서의 최남선의 연설문이다.)라는 글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무사도를 일본의 무사도에 견주어 세계 무사도의 쌍벽이라 하면서 신라 무사의 무용성을 발휘하여 성전(聖戰)에 나가라고 고무하고 있다.
대동아의 건설, 전인류의 해방주의와 신념과 이상을 살리려는 거룩한 싸움에 나아가는 이 마당이야 이 얼마나 쾌심하이냐. 이로써 작은 한 몸을 가지고 천황폐하의 방패가 되고… 사람으로서 가장 의의있이 죽을 때 그 죽는 장소를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제군! 대동아의 성전은… 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는 또한 귀국하여 그 때의 맹활동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매일신보』에 게제하였다.
우리 일행은 동경을 중심으로 맹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지난 14일과 20일 이틀 동안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학도 궐기 대강연회를 열었는데 그 때의 성황과 학도들의 열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도들은 황국을 위하여, 대동아 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불타는 결의로 충만한 우렁찬 모습들이었다… 나는 원컨대 입영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건전한 신체와 열렬한 순국의 결의로 매진하여 미촵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주기 바라는 바이다.
그는 1945년 3월 7일, 일제 패망 직전에 『매일신보』에 「전력증강 총후 수호의 진로」라는 친일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이 이기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것은 일본 국민의 영혼의 힘이 세계에 절대하기 때문이다. 미촵영의 물량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한도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 만일 이 전쟁에 우리들의 운명이 참패를 당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류의 영원한 비극이요, 벗어날 수 없는 암흑의 운명을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그는 반민특위에 회부되었을 때 쓴 자열서(自列書)에서 자신의 학병 권유행위를 마치 훗날의 조국광복에 대비한 민족 기간요원 양성을 위한 행위였던 것처럼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나 공인으로서는 천황폐하를 위하여 조선의 청년들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자랑스러운 황군으로 나서 죽어주어야 한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학자로서 최남선이 범한 가장 큰 죄과는 그가 단군을 연구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에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1920년대의 단군 연구에 집약되며 그것의 백미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다. 그는 자신의 「불함문화론」이 일본과 조선의 정신상의 장기전에 대비하여 국조신앙을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명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은 일제의 「단군말살론」에 대항하기 위한 논문으로 집필되었다. 「불함문화론」을 탈고한 직후 그는 『동아일보』에 「단군론」을 연재했는데 그것은 일본 학자들의 「단군말살론」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반일여론이 비등하였고 또 그 때문에 최남선이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포섭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썼던 그의 단군연구, 예컨대 그가 변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29세 때의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청춘』14호)」과 비교해 보면 양자간에 현격한 논리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18년에 쓴 그의 상고사 연구 「계고차존」은 한국의 전통적촵고전적인 고대사관을 그대로 수용하여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글이란 느낌을 주고 있으나, 1926년의 「불함문화론」은 단군조선을 출발점으로 하는 조선사라는 일국사적 범주를 넘어서서 아시아 전역 내지 세계사의 광활한 범주로 확대시킴으로써 그것은 이미 조선사가 아닌 아시아문화사로 변질되고 있다. 불함문화권은 조선과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발전하였으며 두 민족이 비록 혈통적으로 같지는 않으나 문화적으로는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한일문화동근론(韓日文化同根論)」은 이미 1930년 라디오 방송원고로 알기 쉽게 풀이되었으니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었다. 1937년 『매일신보』에 게제한「조선문화 당면의 과제」는 그의 「불함문화론」이 어떻게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으로 기울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과 조선은 원래 같은 문화 원천이 2개의 지류로서, 일본의 근본적으로 깊고 깊은 강이 만세에 흘러서 여일(如一)할 조선은 불행하게도 절단되는 운명에 놓여 그 의식도 흐려졌던 것인데, 시운을 만나서 이제야 분류가 재회하여 같은 원류를 가진 파도에서 춤추게 약속받은 것이다.
최남선은 이와 같이 「단군문화론」을 「한일문화동근론」으로 변질시켜 일제에 적극 동조하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헌국회는 정부 조직 구성을 끝낸 뒤 첫 안건으로 헌법 제101조에 의거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 친일파 조사대상 약 7.000명을 선정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는 강제 해산되었다.)에 회부되었을 때 최남선은 이와 같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결백을 주장하는 자열서(自列書)를 쓴 바 있다. 이 자열서는 1949년 2월 그가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쓴 옥중 자백서인데, 그는 해방이 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무고(誣告)하므로 이에 대해 나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썼다고 집필동기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자열서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반성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죄과가 세상에 떠도는 소리처럼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변명하는 해명서였다. 최남선은 자신의 친일을 변절이라 하지 않고 방향전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변명하면서 단지 그것은 학문적 뜻을 이루기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義士)가 되기보다 학자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학자보다 의사가 되라는 일반의 기대를 저버렸다.
어쨌든 그가 자열서에서 스스로 시인한 자신의 죄과는 다음의 다섯 가지 조목이었다.
첫째, 조선총독부의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된 사실(1928년)
둘째,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사실(1938년)
셋째, 만주 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된 사실(1939년)
넷째, 일제말기에 학병권유 연사로 활동한 사실(1943년)
다섯째, 악명 높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부르짖은 사실
그런데 그는 이상의 다섯 가지 죄과 조목에 대해 분명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즉, 나는 분명히 한평생 한 일을 한마음으로 매진하였다고 자신한다고 말하면서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만주괴뢰국 건국대학 교수, 이것 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었으나 나는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유약한 성격 때문에 지난날 일제의 강권에 못 이겨 친일행위를 했던 것처럼 또 한번 조국과 민족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범행을 숨기려 하였던 것일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철두철미한 항일투사를 말해보라면 단재 신채호, 백범 김구, 심산 김창숙 정도를 들 수 있다. 이 중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60년대까지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입에 거의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심산유고(心山遺稿)를 읽어본다면 눈물과 감격을 가눌 수 있는 자가 가히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항일운동을 하면서 적 앞에 추호도 타협하지 않아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다리병신이 되어 평생토록 앉은뱅이로 삶을 보낸 사람이다. 그가 14년 동안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어느날 간수가 최남선의 일선융화론을 읽고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그는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의 미친개 짖듯 한 이 흉서(凶書)를 내가 읽을 것 같으냐, 만륙을 한대도 그 죄는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 책을 구겨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는 광복 후에는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고 국민의 주권과 민주화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으나 집도 없이 여관이나 친지집을 전전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나 최남선에 대해서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비난의 목소리보다는 그의 학문적 업적만을 찬양하는 쪽이 훨씬 우세이다. 대부분의 문학 서적은 최남선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함묵한다. 말기에 친일 시비에 휩쓸려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그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다시 없는 선구자였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언급되어있는 책조차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최남선 선생 기념사업회라든지 육당 시조시 문학상같은 것이 제정되어 있는 형편이다. 다음의 기사를 보자.
제13회 육당 시조시 문학상 시상식이 26일 오후3시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인 소원(素園)에서 열렸다. 수상자인 시조시인 이근배(李根培)씨는 신시의 효시이자 시조집 『백팔번뇌』 등을 통해 민족혼을 중흥시킨 거인, 육당의 공적을 기리는 문학상을 받게 돼 감회가 깊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정완영(鄭椀永) 육당 시조시 문학상 위원장은 기념사에서 한국의 바탕문화를 정립하고자 한 육당의 공은 길이 추앙되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 97. 4. 동아일보]
민족혼을 중흥시키고 한국의 바탕문화를 정립하고자 했던 사람은 누구이며 「가라! 청년 학도여」, 「일선융화론」을 쓴 사람은 또 누구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또 다른 신문기사를 살펴보자.
육당 최남선 선생의 직계장손인 피부과전문의 최국주씨가 피부미인이란 책을 펴냈다. 책을 만든 출판사도 1907년 육당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출판사인 동명사라 이래저래 화제. 그는 부친 최한웅씨(전 서울의대 소아과 교수)가 육당 선생에게 물려받은 동명사를 돈 안되는 가업으로 물려받았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해오시던 가업이니 앞으로도 열심히 출판사업을 할 계획입니다. [99. 5. 연합신문]
친일 반역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설립, 민족혼을 말살하는 책을 발간해온 출판사에서 그 직계장손이 책을 펴내는 일이 이래저래 화제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었다.
중촵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의 친일행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중학교에서 그를 우리가 만나야 할 분들의 한 사람으로 선정한 것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그` 학교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최남선에 대한 글이다.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 해방을 거치는 생애를 통해 시인, 역사가, 문화운동가의 다양한 풍모를 보여 준 선각자이다. 대표적인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인, 수필가로서 문화적인 업적, 사상가, 출판인으로서의 공헌, 역사가로서의 노력 등을 간과할 수 없다.
뛰어난 업적를 쌓으면 반역죄를 저질렀건 어쨌건 그런 것쯤은 쉬이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이런 사상을 심어주는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가게 될지, 그 무서운 책임감을 우리나라 교육 정책자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끝까지 지조를 지켜 앉은뱅이의 몸으로 일제와 독재에 대항하다 쓸쓸히 죽어간 심산 김창숙. 철저한 반민친일파로 돌아서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의 청년들을 황군으로 내모는데 앞장섰지만 오히려 현세에 와서 더욱 추앙받고있는 육당 최남선.
선각자였지만 일제에 동조했던 육당 최남선은 만해 한용운에게 있어 이미 죽은 자였다.라고 시인 고은 선생은 말한 바 있다.
지금 우리는 죽어야 할 자는 살리고, 살려야 할 자는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요 참고 자료>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 박기호
친일파 100인 100문 친일의 궤변, 매국의 논리 / 김삼웅 편저
교과서와 친일문학 / 교육출판기획실
친일파 99인(제2권) / 반민족문제연구소
한국학 전자 도서관(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색인) http://korea.yookwang.co.kr
고용호의 역사교실(근대 인물 탐방) http://sobak.kornet.21.net/~sk9505
인터넷 반민특위 겨레의 거울 http://banmin.ifp.or.kr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banmin.or.kr
충북 충일중학교(우리가 만나야 할 분들) http://www.chungil-m.ed.chungbuk.br
마이다스 동아일보 http://www.dongailbo.com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
인터넷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
최남선의 주요 작품들
우리의 運動場
一. 우리로 하야곰 풋ㅅ볼도 탸고
우리로 하야곰 競走도 하야
生하야 나오난 날쎈 긔운을
내ㅅ봅게 하여라 펴게 하여라!
아딕도 뎨主人 맛나지 못한
태동의 뎌대륙 넓은 벌판에!!
우리로
우리로
우……리……로!!
二. 우리로 하야곰 헤염도 하고
우리로 하야곰 競棹도 하야
書房님 手足과 道令님 몸을
거슬게 하여라 굿게 하여라!
우리의 運動터 되기 바라난
太平의 뎌大洋 크나큰 물에!
우리로
우리로
우……리……로!!
三. ㅅ두러딘 딥신에 발감게 하고
시배랴 탼바람 거슬니면서
다람딜 할이가 그누구러냐?
우리오
우리오
우……리……오!!
이 시는 세계의 활동무대를 운동장에 비유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찬바람 거슬리면서 다름질 할 이가 누구냐 묻는다. 이에 '우리오,/ 우리오,/ 우리오' 라고 대답한다.
벌(蜂)
一.
구딘날마른날 가리디안코
놉흔데나즌데 헤이디안코
머나갓가우나 탸댜다니며
부디련바디련 움딕이난건
어엿ㅅ븐곳모양 貪한이아니오.
馥郁한 香내를 求함아니라
애쓰고힘드려 바라난것은
맛잇난됴흔ㅅ굴 엇으렴이라.
二.
功든것드러나 ㅅ굴을엇으면
우리는됴곰도 關繫안하고
곱다케모아서 사람을듀어
緊하게쓰도록 바랄ㅅ분이니
맛업난것에는 맛나게하고
맛잇난것에는 더잇게하야
아모나됴흔건 ㅅ굴갓다하게
우리가만든걸 稱讚케되다.
三.
사람아사람아 계어른사람
귀숙여우리말 드러를보게
뎌즘게苦楚를 무릅쓰고서
精誠을다하야 功이룬 것이
利되나害되나 생각하건댄
頌榮과 稱譽의 利ㅅ분이로다
草堂의便한댬 貪하얏드면
너갓히無用件 되엿겟구려.
四.
녯사람말삼은 글을것업서
한마디한구절 한ㅅ담이라도
가로대쓴ㅅ부리 단열매맛고
苦로운ㅅ긋헤는 樂온다더니
수고한뒤에는 됴흔깁흠이
오디를말내도 억디로오네
사람과버레가 무엇다르랴
계으름부디런 갑을밧을ㅅ대.
대구, 분절, 음수율을 갖춘 이 정형 동시는 벌을 의인화하여 벌 스스로가 자기 공적을 자찬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벌을 '우리'라 지칭하는 데서 알 수가 있다. 주제는 노력에서 오는 갚음이다. 중신 구절은 '쓴 뿌리 단 열매 맛고 고로운 끝에는 낙 온다더니'의 대목이다.
막은 물
밤이나 낫이나 조리졸졸
한時도 한刻도 쉬지안코
限업난 바다에 가기ㅅ가지
困한줄 모르고 흘러가네
가다가 中路에 사람들이
고이게 한다고 조약돌노
흐르지 못하게 막엇스나
제自由 조곰도 일치안네
돌틈을 ㅅ두러서 나가던지
모레로 심여서 드러가던지
볏발에 ㅅ그러서 피우던지
엇더케 무삼法 써서라도
가온대 ㅅ그님이 連할ㅅ대에
ㅅ당속에 숨은물 合할ㅅ대에
空中에 各방울 엉긜ㅅ대에
내되고 샘되고 비되야서
前갓히 구준히 쉬음업시
그대로 바다로 向해가니
막던이 수고는 헛일되고
흐르난 自由는 傷함업시
永遠히 마음대로 갈곳가네
밤에나 낫에나 쉬지안코
물이 막힌 장애를 뚫고 바다로 향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물은 밤낮 졸졸 소리내며 쉬지 않고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사람이 물을 고이게 한다고 그 흐름을 막는다. 그러나 물은 제 자유를 잃지 않고 흐른다. 그 방법은 돌틈으로 새어나가기, 모래 속으로 스며들기, 햇볕에 증발하기 등이다. 땅 속으로 스며든 물이 합치고, 공중에서 물방울이 엉기어, 내가 되고 샘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흐른다. 이리하여 막던 이의 수고는 헛일되고, 흐르는 자유는 상함이 없이 된다.
들구경
ㅅ곳피엿다 닙피엿다 압산뒷들에
나무가지 가지마다 철자랑이라
열매맷고 씨품겨서 직분다하리
그의活動 하난모양 눈이ㅅ듸우네
아아우리 少年들아 가서親하라
그는우리 益友로다 보ㅅ들지로다
비가온다 바람분다 이즘저즘에
나무닙새 닙새ㅅ가지 試驗中이라
팔내밀고 발버틔어 勝捷엇으랴
그 勞苦 하난모양 마음늣기네
아아우리 少年들아 가서섬기라
그는우리 賢師로다 배흘지로다
자연을 인격화하여 그는 우리 益友,그는 우리 賢師라 칭하였다. 드리 유익한 벗인 것은 그의 활동이 눈에 띄기 때문이며, 들이 현명한 스승이라 함은 비바람과의 싸움에서 이겼기(勝捷) 때문이라 노래하였다.
들의 직분을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 맺고 씨를 품는 것이라 하였다. 들의 승리는 비와 바람이 잎새에 주는 시험을 팔과 다리로 버티어서 거둔 것이라 노래하였다. 이처럼 자연이 위대하므로 소년들아, 자연과 친하라, 자연을 섬겨라, 자연을 본받고, 자연에서 배워라는 타이름을 결구로 하였다.
남잡이가 저잡이
구차코어진형이 아우잇스되
형세는부자언만 마음이도척
지내다못하야서 아우에게로
도와달라갓다가 괄시만담ㅅ북
긔막혀오난길에 발에걸니어
보자한아집으니 금덩어리라
뉘것인지모르되 일흔사람야
오즉애쓰랴하고 기다리더니
과연한늙은이가 밧비걸어와
허둥허둥무엇을 찻는ㅅ골이라
자세히무러보니 분명금임자
「내가주엇소」하고 내어노흐매
「이런고마울대가 어딧소」하고
반을ㅅ데여주면서 샤례하거늘
「가난하긴하오만 턱업난재물
바들가보오」하고 도로내노니
늙은이가어젠지 허허우스며
「세상에도어진이 이제보겟소
바르고도올코도 ㅅ개ㅅ긋하시오
하도긔특하시니 할말삼잇소
그래집안가난은 다름아니라
집에가난이귀신 둔ㅅ가닭이니
돌아가이리이리 방법을쓰면
고대큰수가터져 가리다」하네
깃븜을못닉이어 밧비돌아와
우당우당짐싸고 집을버리고
나는영영간다고 나서노라니
이상타어대선지 저우름소리
「놀라서네가도시 무어냐」하니
당신ㅅ다라다니난 가난이오니
「부대가치가야지 하오」함으로
「그러튼가그러면 이병에들게
다려다주고말고 그럼세」하매
고지듯고속으로 얼는들거늘
단단히막에하야 ㅅ당에파뭇고
부즈런히구러서 부자되니라
아우가형의잘된 소문을듯고
시샘을못닉여서 차져와보고
부자되던래력을 캐어무르니
어진형이니르네 실상으로다
듯기를다하고서 올커니하고
가난이무든대로 곳장다라와
파내어서니르되 「우리언니가
넉넉하게지내니 가보라」하매
그귀신하난말이 「나난실여요
당신가치다정한 이를버리고
그러케인정업시 구난이게를
무엇하라두번식 가겟소」하며
인하야그아우를 뒤ㅅ다라와서
삽시간에재물들 업새게하야
가난이빌어방이 만들어노코
ㅅ긋ㅅ긋내ㅅ더러지지 안햇다더라
남을물에너려면 저부터드니
저를앗기면엇지 남을다칠가
남잡이가저잡이 되난보람을
적은이이약이가 밝히보이네
<남잡이가 저잡이>의 스토리에는 흥부전과는 반대로 형이 선하고 동생이 악하다. 동생을 비유해서 "形勢는 부자언만 마음이 盜 이라" 했다. 도척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악인으로 우리 속담에서 구도쇠의 대명사로 자주 쓰여 왔다.
六堂의 童話謠는 1930년에 와서 童話詩라는 이름이 된다. 1933년 尹石重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는 동화시였다. 다시 金泰午의 동화시 <孤兒의 昇天>, 朴泳鍾의 <바보 이반의 노래>(1949)등을 거쳐, 1960년대에 와서 李錫鉉에 의해 '동화시'라는 장르가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