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박구서(朴구서)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구서(朴구서)
군번미상
군별육군
소속부대수도사단 제1연대
계급일등병
생일
출생지
전몰일자1950-10-01
공훈사항
박구서 일등병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수도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침투한 북한의 무장공비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연결된 무장폭동이 곳곳에서 발생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박구서 일등병은 신생 조국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박구서 일등병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의정부지구전투에 참여해 용전분투했으며, 북한군이 28일 서울을 점령하자, 박구서 일등병과 연대는 한강방선전투(신길동-동작동)와, 시흥지구전투(7월 3~4일)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지연시켰다. 7월 지연전 기간을 거쳐 8월공세가 시작되자, 그와 장병은 8월 16일 안강 북쪽 기계 일대에 투입되어 적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앞장서서 용전분투해 기계를 탈환했다. 북한군의 9월공세가 시작되자, 박구서 일등병과 장병은 9월 4일 경주북방에 있는 호명리와 곤제봉, 무릉산 일대로 철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박구서 일등병과 수도사단은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했다. 수도사단은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 방향으로 진격했다. 전쟁 초기 기세등등했던 북한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구서 일등병을 비롯한 장병 모두는 용기백배했다. 그들은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했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제3사단에 뒤이어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원산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인 1950년 10월 1일 박구서 일등병은 북진작전 수행 중 양양지구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박구서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16-2-00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光春)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광춘(朴光春)
군번9214002
군별해군
소속부대해병대 제5대대
계급하사
생일
출생지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전몰일자1952-12-13
공훈사항
박광춘 하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5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제1훈련소에 입대해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제1해병연대 제5대대에 배속되어 장단지구전투에 투입되었다.
박광춘 하사가 입대할 당시 전황은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전초진지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수도서울 방위에 역점을 둔 군사작전으로 미 해병이 판문점 동남방 임진강 유역지역을, 제1해병연대는 사천강과 김포반도에 전개하여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박광춘 하사와 제1해병연대는 1952년 3월부터 휴전 시까지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저항선과 김포반도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2년 3월부터 엄청난 인해전술과 포격을 가하여 주저항선을 위협해 오던 중공군은 10월 초부터 추계공세를 시작으로 대공세를 가해왔으나, 박광춘 하사와 연대는 전초진지선을 끝까지 사수하였다. 이러한 전황에서 연대는 주간에 적 포탄으로 인해서, 야간에는 적의 침투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박광춘 하사가 참전한 전선은 10월 31일 중공군 약 2개 연대 병력의 치열한 집중포격으로 전초진지와 주저항선이 피탈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박광춘 하사와 대대 장병들은 적 포격이 집중되는 동안 각 엄체호에서 조용히 기다리다가 그들 포격이 끝나자마자 각자의 진지로 돌아가 일제히 적의 공격 방향에 과감한 역습을 전개하여 끝내 진지를 사수하였다.
박광춘 하사의 제5대대는 이날 전투결과 6명이 전사하고, 5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치열한 전투에서 박광춘 하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안타깝게도 중상을 입은 후, 제36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1951년 12월 13일 끝내 장단지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박광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21-4-112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2-ㅅ-08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光春)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광춘(朴光春)
군번0101732
군별육군
소속부대제7사단 제5연대
계급하사
생일1933-01-27
출생지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전몰일자1950-11-25
공훈사항
박광춘 하사는 1933년 1월 27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0년 8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기초적인 훈련도 수료하지 못한 채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박광춘 하사와 제7사단은 영천 및 신령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전투에 투입되어 치열한 혈전을 반복했다. 8월 초부터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한 북한군은 최초 대구 정면인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과 왜관읍 일대에 주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9월이 되면서 그들은 주공의 공격방향을 대구에서 영천-경주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대구 정면의 제15사단을 영천으로 전환해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박광춘 하사와 제7사단은 9월 6일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던 영천을 9월 8일 탈환하는 데 기여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반격으로 전환했다. 9월 말 38도선을 회복했다. 전쟁은 외형상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북한군의 주력은 퇴로가 차단되면서 붕괴되었다.
박광춘 하사와 제7사단은 10월 9일 유엔군과 함께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한 박광춘 하사와 제7사단은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통일된 조국의 꿈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박광춘 하사와 장병은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 시기에 중공군은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너 북한지역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국군과 유엔군을 기습 공격했다. 항상 앞장서서 전투에 임하던 박광춘 하사는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덕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박광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0-ㅊ-05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光春)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광춘(朴光春)
군번2803704
군별육군
소속부대제2사단 제17연대
계급하사
생일1929-07-11
출생지경기도 여주시
전몰일자1950-11-29
공훈사항
박광춘 하사는 1929년 7월 11일 경기도 여주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 창설 직후인 1948년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된 제17연대에 입대했다. 박광춘 하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전환되면서 서울 용산으로 이동해 서울의 주요시설경계와 후방지역 무장공비소탕작전을 수행했다.
박광춘 하사는 제2사단 제17연대에 소속되었다. 제2사단은 부대가 해체되었다가 1950년 11월 7일 서울에서 창설하였다. 연대는 창설 직후 제1차 중공군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지구 탈환작전을 수행했다.
박광춘 하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에 대항하여 청평일대에서 접전을 이루며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국군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도 못했고 북한군에 대항할 화기조차도 변변하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박광춘 하사 등 장병들은 구국의 일념만으로 전투에 임했으며 무명고지 탈환을 위하여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박광춘 하사의 근무 당시인 1950년의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북한은 불법남침을 감행하여 T-34 전차를 앞세우고 38도선을 넘어 거침없이 남하를 하였고, 이를 저지하고 적의 진출을 지연시키는 위급한 상황에서 연합군은 적의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박광춘 하사가 소속된 제17연대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여 남산, 하왕십리, 망우동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세웠다.
박광춘 하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인천상륙작전 등의 전과를 세우며 포천 평강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이때 박광춘 하사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29일 박광춘 하사는 꽃다운 나이에 전장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박광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7-ㅁ-06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光春)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광춘(朴光春)
군번미부여
군별육군
소속부대유격대 구월산부대 제6연대 제4대대
계급유격대원
생일1927-04-22
출생지
전몰일자1951-12-18
공훈사항
박광춘 유격대원은 1927년 4월 22일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자랑스러운 호국용사다. 그는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1951년 8월 4일 황해도 은율군 웅도에서 재편된 유격대 구월산부대 제6연대 제4대대 유격대원이 되었다.
박광춘 유격대원과 같이 서해 도서로 피난 온 청년대원들은 고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를 갈망했지만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간부들이 작전기지사령부 등지에서 각종 화기 사용법과 무전기 조작법, 폭파와 통신, 공수 낙하 등에 관한 기초훈련을 받는 정도였다. 대원들은 간부들에게 간접적으로 배우거나 실전을 통해 하나씩 배워갈 수밖에 없었다.
박광춘 유격대원이 소속된 구월산유격부대의 큰 고통은 무기와 탄약, 식량 등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해군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작전 활동 시에 탄약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늘 부족했다. 그 후 미군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식량과 무기, 군복 등의 보급품 지원이 크게 호전되었다.
박광춘 유격대원과 구월산유격부대 대원들은 1951년 8월 24일 강운리에 주둔 중인 북한군 제23여단 고사포부대를 기습하고, 10월 10일에는 석교리의 경비소대를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1일 야포와 박격포의 집중공격을 받은 피도가 점령당하고, 16일 새벽에는 60여 명의 대원이 주둔한 청양도가 북한군 제23여단의 공격을 받고 실함되었다.
박광춘 유격대원은 12월 18일 적 1개 대대 병력이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며 150여 명의 유격대원이 주둔한 웅도로 쳐들어오자 접전을 벌였다. 약 2시간 동안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불퇴전의 용기로 용전분투하던 박광춘 유격대원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12월 18일 24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웅도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박광춘 유격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06-5-284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광춘)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광춘(朴광춘)
군번15955
군별육군
소속부대제7사단 제9연대
계급중위
생일
출생지
전몰일자1950-06-25
공훈사항
박광춘 중위는 일제 치하에서 출생해 조국이 해방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맞았다. 그때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태릉(현 서울시 노원구)에서 경비대 간부를 양성해오던 경비대사관학교도 육군사관학교로 전환되었다.
박광춘 중위는 1949년 7월 15일 육군사관학교 제9기 장교후보생으로 입교해 1950년 1월 14일 장교로 임관한 후 제7사단 제9연대에 배치되었다. 박광춘 중위가 도착한 제9연대는 제7사단에 소속되어 경기도 포천지역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박광춘 중위는 부임하면서부터 38도선의 방어력 증강을 위해 매진했다. 그 시기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당일 오전 중으로 국군의 38도선 방어진지를 유린했다.
박광춘 중위는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가운데 모처럼의 일요일 휴일을 갖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상소집에 따라 그는 즉각 전투에 투입할 준비를 갖추었다. 육군본부는 수도권 인근의 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쪽의 방어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박광춘 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즉각 방어전투에 투입해 북한군과 맞섰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일부 장병은 대전차특공대를 조직해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박광춘 중위는 전투경험이 부족한 장병을 지휘해 북한군의 전차와 맞섰다. 그는 악조건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박광춘 중위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지휘하며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동안 적의 진출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박광춘 중위는 1950년 6월 25일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포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박광춘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7-3-20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호국전몰용사 박인서(朴麟緒) 상세내용*
책번호66
성명박인서(朴麟緒)
군번5501497
군별육군
소속부대육직 기갑연대
계급일등병
생일1929-04-27
출생지
전몰일자1950-08-16
공훈사항
박광제 일등병은 1929년 4월 27일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7월 22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에 주둔하고 있던 육직 기갑연대에 입대했다. 기갑연대는 육군 직할부대로 장갑차를 장비한 기갑수색대대, 마필로 무장된 기마수색대대, 도보부대인 도보수색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박광제 일등병이 기갑연대에서 전문분야의 숙달을 위해 정진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38도선에 배치된 장병은 용전분투했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국군장병이 보유하고 있던 2.36인치 로켓포로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대부분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박광제 일등병은 육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황급하게 김포반도로 투입되었다. 옹진반도의 제17연대가 6월 25일 아침에 붕괴되면서 김포반도가 아군의 급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육군본부는 황급히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독립기갑연대 등 가용부대를 끌어모아 김포반도에 배치했다.
박광제 일등병이 배치된 김포반도를 공격하는 북한군은 정예의 제6사단이었다. 박광제 일등병이 소속된 기갑연대의 일부 병력으로 그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6월 28일 김포공항이 북한군에게 점령된 후 오류동 부근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영등포 진입을 저지했다.
박광제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는 진지에 의지해 웅크리기보다는 앞장서서 적을 공격하는 용맹한 병사였다. 오류동 일대에서 철수한 박광제 일등병은 지연전을 계속 수행하다가 1950년 8월 16일 경상북도 포항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박광제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2-ㅌ-08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글이름이 박광제로 되어있어 수정요청하려고 국방부에 전화하였으나 통화못함.
~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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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光春)군번0101732, 4.호국전몰용사 박광춘(朴光春)군번280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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