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축첩문제였다. 물론 기독교는 처음부터 축첩제도를 반대했다. 일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첩을 얻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미 첩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자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첩을 보내야만 한다면 첩과 그 자녀들은 장래 어떻게 될 것인가? 그냥 용납한다면 성서의 일부일처제도는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한국 교회의 초대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축첩은 용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여인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첩을 보내야 입교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문제는 첩을 보내지 않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진 대표적인 사례가 김씨의 경우이다. 그는 본부인과 자녀 3명을 서울에 두고 목포에 내려와서 매력적인 젊은 여자와 결혼해 남매를 두었다. 그는 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제는 첩이었다. 그는 첩을 사랑했다. 김씨는 오랜 갈등 끝에 첩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재산과 자녀를 첩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부인을 내려오게 해 같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첩의 가족은 분노하여 김씨를 칼로 위협했다. 그러나 믿음대로 살기로 작정한 김씨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김씨는 비록 첩과 헤어졌지만 첩의 생활비를 모두 책임졌다. 결국 이런 김씨의 태도에 감화를 받아 첩과 그의 어머니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김씨의 첩은 기독교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뒤 김씨는 선교사의 조사로 일했고 1918년에는 순천지방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하였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분명한 결의를 보여야만 신자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