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놀라운 변화 –막걸리를 따르며 : 금주 다섯달만의 변화들(4), 금주일지 160일(2023.2.20.)
나는 술이 맛있다.
종류에 불문하고 맛있다.
장소나 분위기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맛있다.
특히 산에 가서 일정 구간을 걸은 후에 마시는 막걸리 맛은 말이 필요 없다.
말 그대로 꿀맛이다. 그래서 산에 가려고 할 때 준비물 1순위는 항시 막걸리다.
거리가 짧으면 1병 길면 2병이다. 애주가가 아니라면 준비하는 마음의 애정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산행 하루 전날 막걸리를 미리 구입하여 냉장 보관해 두었다가 가방을 쌀 때 한 방울도 새지 않도록 잘 포장한다. 가방에 넣을 때도 기울어지지 않도록 위치를 잘 살핀다. 또 급격하게 온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끔 보냉을 고려하여 가방을 챙긴다. 오로지 산행 중 술맛을 위하여.
오늘은 하하님들과 산행을 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번개 모임으로 진행하는 산행이었는데 나와 강하주 씨를 포함하여 7명이 참여하였다.
오늘 산행을 위하여 어제 저녁에 집 앞 슈퍼에 가서 막걸리를 1병 구입하였다. 금주 시작한 지가 벌써 5개월이 넘었기에 막걸리를 구입한 것도 5개월이 넘었다. 그런데 막걸리를 구입하였다. 이전까지는 나 스스로를 위해 막걸리를 구입했다면 오늘은 나의 번개 산행 제안에 동참해 준 하하님들을 위해 준비하는 막걸리다. 냉장고에 잘 보관했다가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예전에 나 먹기 위해 가방 속에 막걸리를 챙기듯이 정성으로 가방에 넣었다. 이 막걸리를 달게 마실 하하님들을 그리면서.
약속한 시간에 하하님들이 원효사 버스 종점에 모였다. 하하님들답게 시간을 어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시간을 어길 것 같아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정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반가운 인사들을 나누고 곧장 출발하였다. 산행을 모두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장 쉬운 코스를 정하여 걷기로 했다. 원효사에서 출발하여 무등산의 중턱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바람재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바람재는 바람이 세찼다. 그곳에서 준비해 온 떡, 찐 달걀 등 간식을 먹으면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달콤한 휴식과 달달한 얘기들을 주고받는 가운데 바람처럼 지나가는 시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다.
토끼등과 중머리재까지 직행하였다. 오랜만에 중머릿재 벤치에 앉아서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면서 피곤에 지친 다리를 쉬게 하였다. 모처럼 중머리재에 올라 무등산을 둘러보며 새삼스럽게 자연과 사람들에 대하여 소중함, 감사함을 느껴본다. 무등산이 있어 늘상 내 집처럼 스스럼없이 드나들 수 있음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 소중한 무등산에 함께 가자는 문자 한 통에 같이 길을 나서는 하하님들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한량없는 애정을 느끼면서 하산길로 접어든다.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조심조심 내려가길 한참 지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뿔사, 내 가방에 막걸리가 있는데?!‘
내가 금주 중이다 보니 그새 가방에 챙겨 넣은 막걸리를 망각해 버린 것이다.
우선 막걸리한테 미안하다. 수십 년 동안 그토록 곁에서 시중들며 맛있게, 배부르게, 기분 좋게 친구로 동료로 곁에 있었는데 불과 다섯 달만에 이렇게 잊어버릴 수 있다니. 또 동행한 하하님들께 미안했다. 내가 안 먹는다고 아무에게도 술 권할 생각을 안 하다니.
그래서 느티나무집에 이르기 전, 한적하고 양지바른 곳에서 잠시 쉬어가자고 일행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리고 애지중지 챙겨왔던 막걸리를 꺼내었다. 그리고 한 잔씩을 따르며 권하였다. 나처럼 달게 마셔주기를 기대하면서. 내 마음을 아시는지 하하님들이 한 잔씩의 막걸리를 맛나게 마시는 모습이 내가 마시는 것 이상으로 맛났다. 산행 중에 이렇게 내가 마시는 술 대신 술을 따르며 권하는 모습으로 변화한 내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맛있는, 재미있는 변화로 여기며 즐거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하산길은 막걸리 빈 병만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귀가한 후에는 후렴처럼 혼자서 다시 막걸리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마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산행을 마쳤다.
그래, 그새 술 마시는 것을 잊어버리다니. 산행 중에 술 마시는 것을 잊어버리다니. 이는 참 놀라운 변화다. 또 막걸리를 나 마시자고 따르는 데서 다른 분 마시라고 따르는 것 역시 참 놀라운 변화다. 나는 마시지도 않으면서. 또 귀가하여 술을 마시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산행을 마친 것도 참 놀라운 변화다.
이래저래 금주는 내 생활에 참 놀라운 변화들을 가져오고 있는 중이다.
첫댓글
공항가는 버스도 아닌데 내려 택시로 바꿔 가시다니 '시간엄수'를 배워갑니다.
상상불허 애주가님께
막걸리 한 잔을 대접못한 아둔함을
겨우 알아차립니다